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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중앙일보 정치에디터가 지난 6일 30면에 ‘만 5세 입학과 아륀지’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중앙일보는 이 칼럼에서 “만 5세 입학 등 최근 장관들이 야기하는 일련의 논란을 보면서 14년 전 ‘아륀지’ 발언 파문이 오러랩된다”고 했다.
‘아륀지’ 발언의 출발점은 이명박 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이경숙 당시 숙명여대 총장이었다. 이경숙 위원장은 2008년 1월30일 서울 삼청동 인수위에서 열린 ‘영어공교육 완성 프로젝트 실천방안 공청회’에서 그 유명한 ‘아륀지’ 발언을 한다. 그는 이날 공청회에서 원어민 발음대로 ‘프렌들리’는 ‘후렌들리’로, ‘오렌지’는 ‘오륀지’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외래어 표기법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위원장이 쏘아 올린 ‘영어 몰입교육’은 당시 야당은 물론 보수언론조차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중앙일보는 2008년 4월2일 별지 2면에 “외국어는 현지 발음을 그대로 적어야 한다(는 주장은) 외국에서 영어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라고 비판했다. 듣는 사람마다 다르고 말하는 사람마다 다른 외국어는 통일해서 표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런 혼란을 막으려고 외래어 표기법으로 외국어 표기를 통일한다.
2008년 논란 당시 중앙일보는 이 단어를 ‘오륀지’라고 표기했지만, 14년이 지난 이번엔 ‘아륀지’라고 다르게 표기했다. 이처럼 언어는 시간과 공간,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2008년 당시에도 신문사마다 이 위원장 발음을 ‘오륀지’(중앙일보), ‘어륀지’(매일경제), ‘오뤤지’(조선일보)로 서로 다르게 표기했다. 같은 사람이 하는 말조차 서로 달리 받아 쓰는 혼란을 막으려고 만든 게 외래어 표기법이다. MB 인수위는 이런 단순한 사실조차 모른 채 ‘영어 몰입교육’으로 폭주했다.
거의 모든 언론의 우려에도 2008년 MB 인수위는 “당장 쓸 수 있는 영어교사 찾아라”(중앙 1월28일자 6면 머리기사), “2011년 초등교 영어로 영어 수업”(중앙 1월30일자 6면), “영어 실력이 곧 국가경쟁력”(경향 1월31일자 4면)이라는 막말을 내뱉으며 영어 만능주의로 내달렸다.
정권 주변에선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인도에서 교사를 데려오자’거나 ‘영어 잘하는 학부모를 활용하자’거나 ‘영어 능력이 뛰어난 대학생을 영어 인턴교사로 활용해 교원임용 때 가산점을 주자’는 등 온갖 ‘지랄이 풍년’이었다. 심지어 군대 안 가려고 한국 국적을 포기한 이중국적자를 ‘영어 공익요원’으로 학교에 보내 병역을 대신하게 하는 방안도 나왔다.
MB 정부의 섣부른 영어 몰입 정책은 영어회화전문강사라는 이상한 제도로 자리 잡았다. 영어회화전문강사는 공교육 안에서 학생들에게 수업하는 사람인데도, 그 지위는 형편없다. 1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기간제 노동자이면서, 정규직 고용의제를 피하려고 4년이 지나면 새로 시험을 쳐야 하는 불안정한 노동을 이어 간다. 교사는커녕 무기계약직도 아닌 학교 안 이방인이 돼 버렸다.
급하게 제도를 도입하다 보니 정작 영어를 가르칠 사람은 배려하지 않는 결과가 이런 해괴망측한 노동을 만들었다.
14년 전 선무당이 사람 잡은 ‘영어 몰입교육’이 사교육 시장 확대라는 엉뚱한 결과로 이어졌듯이 이번 ‘5세 입학’ 파동은 취학 전 사교육 시장과 유보 통합이란 오래된 정책 과제로 불똥이 튀었다. 그나마 이번엔 장관 사퇴로 마무리돼, 제도의 피해자를 양산하지 않아 다행이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