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시카고>는 1926년.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쿡 카운티의 공판에서 영감을 얻은 시카고 트리뷴지의 법정기자 모린 달라스 왓킨스가 쓴 <시카고>가 초고인데 그 뒤 <작고 용감한 아가씨>, <시카고>, <록시 하트>로 리메이크되다가 75년에 밥 포시에 의해 뮤지컬 <시카고>로 제작되어 원작대로 날카로운 풍자와 위트를 지녀 언론과 사회의 속성에 대한 예지적인 시선으로 시대를 초월하는 명작이 되었다. 거기에다가 밥 포시의 안무는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관능미와 어두운 뒷골목의 분위기를 함께 완성시켜 뮤지컬 <시카고>가 다시 한번 유혹과 살인이라는 테마의 대중적 인기를 확인시켜 주면서 성공으로 이어졌다. 다시 말하자면 영화 <시카고>의 기원은 1926년의 연극 <작고 용감한 아가씨>이고 그 뒤로 무성영화 <시카고>, 42년 진저 로저스의 <록시 하트> 그리고 75년 거장 밥 포시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시카고>로 연결된다. 그러니까 영화 <시카고>는 밥 포시의 뮤지컬을 다시 리메이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평범한 가정주부 록시 하트의 이야기는 언뜻 마릴린 몬로의 인생을 연상시키고 그래서인지 영화 속의 르네 젤위거는 머리모양에서 시작하여 여러 면에서 마릴린 몬로의 이미지를 모방하고 있는 듯 하다.
1920년대 시카고. 브로드웨이 최고의 스타인 벨마(캐서린 제타 죤스)와 평범한 가정주부 록시(르네 젤위거)는 감옥에서 만난다. 벨마는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 동생을 죽이고, 록시는 자기를 스타로 만들어주겠다고 속이고 자기를 범한 사기꾼을 죽인 죄로 감옥에 온 것이다. 이 두 여주인공에 또 한명의 남 주인공이 가담하니 그는 언론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언제나 재판을 승리로 이끄는 가증스러운 변호사 빌리(리챠드 기어)이다. 동경하던 우상 벨마를 감옥에서 마주친 록시는, 그녀의 오만한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가까이 다가갈 기회만을 엿보고, 벨마는 언제나 승소하는 최고의 변호사 빌리 플린을 선임해 화려한 무대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 하지만, 거액의 수임료에 매수된 빌리가 록시의 변호를 맡게 되면서 록시의 인생은 벨마의 의도와는 달리 일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벨마에 대한 관심이 식은 자리에 죄없는 착한 배우지망생으로 포장된 록시는, 언론의 관심으로 순식간에 톱스타로 떠오른다.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벨마는 공판일 마저 록시에게 빼앗기게 되고 록시에게 멸시마저 당하는데 교활한 벨마가 역전을 위해 역습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 시도마저 빌리의 사전 계획이었던 것으로 결국 록시의 재판은 패배 없는 빌리의 의도대로 승소한다. 그러나 불륜과 살인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시카고에서 이 두 여인은 세인들의 관심에서 사라지고 전락하지만 인생의 일대 반전을 위해 다시 만난 벨마와 록시, 이 여인의 재기담은 눈물겹기만 하다.
영화 <시카고>는 인체의 매력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몽환적이고 관능적인 밥 포시의 뮤지컬의 매력을 제대로 재현해 내고 있다. 그중에서도 록시와 기자들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빌리의 모습을 그린 'We both reach for the gun'과 영화의 마지막 록시와 벨마가 함께하는 'I Move On'은 영화의 메시지를 적절히 전달하면서 뮤지컬의 흥겨움도 완벽하게 살린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하겠다. 이제 겨우 30대인 신예 롭 마샬이 자신의 데뷔작에서 밥 포시의 스타일의 뮤지컬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것은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영화의 가장 큰 재미는 역시 배우들의 호연이다. <제리 맥과이어>와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지극히 평범한 인물을 연기해 와 뮤지컬과는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르네 젤위거의 끼는 대단하다. 아닌 얼굴과 몸매로 예상외의 춤과 노래를 선사한다. 역시 영화는 연출가의 실력에서 모든 것이 창조되는가 싶다. 그러나 영화는 르네 젤위거 만으로는 안 될 것같이 보인다. 캐서린 제타 죤스의 카리스마가 그 뒷배경으로 두텁게 깔려있다. 그 큰 몸매로 과시하는 춤은 대단히 강하고 대단히 관능적이기만 하다. 여기에 리차드 기어가 가장 속물적인 캐릭터 변호사 빌리 역을 맡아 <커튼 클럽> 이후 오랜만에 뮤지컬 연기를 선보이고 있고 존 C.라일리(록시의 남편)와 퀸 라티파(교도소장)의 조연 연기도 탄탄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이들을 훌륭히 뒷받침을 해내고 있다.
이 영화는 2003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뮤지컬 코미디 부문 작품상과 여우주연상(르네 젤위거), 남우주연상(리차드 기어) 등 주요 3개 부문 석권과 함께 2003년 아카데미 13개 부문 노미네이트를 비롯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및 6개 부문 수상의 영광을 안은 <시카고>는 해외 언론의 수많은 찬사와 관객들의 환호 속에 완성도와 대중성을 한 번에 거머쥔, 2003년 최고의 영화로 손꼽히고 있다.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최장기 공연 기록을 수립하며, 80여 년간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밥 포시의 동명의 뮤지컬을 원작으로 다시 태어난 영화 <시카고>는 1920년대 시카고를 무대로 스캔들을 이용해 스타덤에 올라선 두 명의 프리마돈나와 그들의 운명을 손에 쥔 최고의 변호사의 달콤한 음모와 치명적인 유혹으로 채색된 뛰어난 뮤지컬 드라마다.
연출과 안무를 맡았던 <캬바레>로 토니상을 거머쥔 롭 마샬 감독은 밥 포시의 원작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 나름대로 독창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여기에 드라마의 흐름을 훼손하지 않고, 뮤지컬 씬을 절묘하게 배합한 빌 콘돈의 시나리오, 포시와 함께 작업한 전설적인 작곡, 작사 콤비 존 칸더와 프레드 엡 등 최고의 스탭이 만나 만든 영화 <시카고>의 성공은 벌써 예견된 것이었다. 영화 <시카고>가 우수하다는 것은 뮤지컬의 단순한 베낌이 아니라 기존의 뮤지컬 영화가 배우들 자기들끼리의 춤과 노래와 대사에만 주력했던 것과는 달리 모든 장면들을 공연식으로 꾸며 관객이 쳐다보며 같이 호흡하고 관람하는 방식으로 꾸몄다는 것이 특이하다. 롭 마샬 감독은 뮤지컬의 기본 속성인 환타지를 강조하면서도 배우들끼리 서로 노래를 주고받는 전형적 양식을 탈피하고, 관객과 마주하며 노래 부르는 무대 양식을 영화 속에서 시도하였다.
황금만능이었던 1920년대 시카고. 인기 절정의 정상의 톱스타와 스타가 되기를 꿈꾸는 주인공이 서로 미디어 파워를 이용해 대중들의 사랑을 차지하려는 모습을 위트 있게 풍자한 욕망과 질투, 사랑과 배신의 이 드라마는 그 내용이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대를 관통하는 공통된 주제를 원작의 원형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흥미진진한 드라마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착안된 현실과 판타지가 교차하는 스토리 구성은 출연진 모두가 직접 부르고 추는 화려한 춤과 노래와 최고의 앙상블을 이뤄 관객으로 하여금 저절로 이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들게 만든다. 특히, 정열적인 탱고 선율에 맞춰 펼쳐지는 여죄수들의 화려한 군무(群舞)는 차디찬 감옥이 무대라 신선하기만 하고, 공방이 한창인 법정은 화려한 탭 댄스 리듬을 따라 긴박감을 더해간다. 또한, 언론을 통해 대중의 눈과 귀를 속이려는 기자 회견장의 인형극 장면은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몽환적인 묘미를 선사한다.
1920년대를 무대로 한 뮤지컬 영화답게 귀에 익은 감미로운 재즈 선율을 기본으로 탱고에서 랩까지 다양한 장르의 리듬에 실린 배우들의 생생한 노래는 가슴이 벅찰 정도로 매혹적이다. 무대에서 관중을 압도하며 춤추고 노래하는 캐서린 제타 존스, 그 모습을 취한 듯 바라보고 서 있는 르네 젤위거. 그녀는 어느 사이엔가 무대에 선 스타가 되어 노래를 불러대고 두 스타의 목소리가 오버 랩 되면서 흐르는 재즈의 명곡 All That Jazz는 강렬하기 그지 없다. 절정은 두 히로인 르네 젤위거와 캐서린 제타 존스가 한 무대에서 공연하는 엔딩 씬에 흐르는 I Move On은 절정에 달한 두 배우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도 전혀 다른 매력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존 칸더와 프레드 엡의 작곡, 작사는 예전 밥 포시의 뮤지컬 <시카고> 그대로이며 적절히 단조도 실려 비장감과 외로움도 표현하면서 관객들의 뇌리에 깊이 파고드는 명곡이다.
밥 포시는 자신의 대표작 <시카고>의 영화화를 추구하다가 실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뒤 미라맥스가 <시카고> 판권을 얻지만 영화화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이전의 대부분의 뮤지컬은 주인공들이 서로 노래와 대사를 주고 받는데 비해, <시카고>에서는 관객들을 향해 부르는 노래가 대부분이어서 영화화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뮤지컬 공연에서는 관객의 반응과 호응이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관객의 반응은 별 문제가 되지 않기에, 뮤지컬 음악을 주인공 록시 하트의 상상 속의 표현으로 전환하면 굳이 두 주인공이 노래를 주고받을 필요도, 관객을 고려할 필요도 없어지게 된다는 롭 마샬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작하게 된 것이다. 즉 두가지의 세계, 즉 가혹한 현실의 도시 시카고와 현실 세계에 대한 록시 하트의 환상이 담긴 이른바 환상의 도시 시카고가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는 얘기였다.
빌 콘돈의 각본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섬세하게 신경을 쓴듯하다. 공격적인 형사의 강렬한 플래쉬 불빛이 무대 위의 조명으로 자연스레 바뀐다. 기자회견장에서 고함지르는 기자들은 춤추는 소녀가 되고, 죄수 록시 하트는 무대의 주인공이 된다. 위험한 도박이 될 수도 있었던 이런 설정은 롭 마샬의 초보자답지 않은 능숙한 연출 덕에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야망에 가득 차있고 자아도취적인 록시에게 연민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롭 마셜과 빌 콘돈이라는 극장의 공연 전문가와 극장에 대해서 잘 아는 실력있는 글쟁이가 만나서 완성한 환상과 현실의 묘한 경계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