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나는 아직 런던에 가보지 않았기에 ‘엘긴의 대리석’은 사진으로만 보았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대영제국의 부질없는 영광을
자랑하는 것 말고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의 그리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전시실은 그들이 저질렀던 약탈행위를 증언하는 ‘외국 문화재 포로 수용소’에 지나지 않는다. 귀중한 인류의 문화유산이 파괴되는 것을 막으려고
그랬다는 엘긴의 말이 진심이었다면, 그리스가 문화재를 관리할 능력이 없어서 반환하지 않겠다던 영국 정부의
주장이 진심이었다면, 지금이라도 그것을 돌려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54)
B.C. 5세기 아테네 시민들은 불타버린 도시를 재건했고 인류 역사에
없었던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수립했으며 문화, 철학, 과학과
공연예술을 꽃피웠다. 중국에서 제자백가의 사상이 들꽃처럼 피어났던 바로 그 시기에 논리학과 수사학을
가르치는 소피스트 집단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가 나타나 인간의 본성고가 삶의 의미, 자연과 우주의 생성 원리를 탐구한 것이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역사서를 집필했고, 극작가들은 빼어난 작품을
썼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에 그들은 아테네에서 피레우스까지 성벽을 쌓았다. 성벽은 두려움의 건축적 표현이다. 아테네 시민들은 자신들이 이룬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성벽을 쌓았다. 오늘의
화려한 성공이 내일의 몰락을 가져올 비극의 씨앗을 배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그런 방식으로 드러낸 것이다.
(71)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폴리스의 영광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 천착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이성에서 도덕법을 끌어내려 했다. 출신 배경이 어떠하든 만인이 똑같이 자유를
누릴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남자 시민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를 인격적 이념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대의 인기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이라는 연극에서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교활한 개자식’이라고 비난했다.
(74)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잠재력과 한계를 모두 확인해 주었다.
아테네의 품에서 태어났으나 시대의 경계 너머로 나아갔던 그는 민주주의라는 옷을 입은 다수의 폭정에 목숨을 빼앗겼다. 그런데도 민주주의는 문명의 대세가 되었고 소크라테스도 인류의 스승으로 인정받는다. 역사의 역설이다.
(94)
로마에 가서 이탈리아를 보았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큰 착각이다. 이탈리아는
엄청난 다양성을 지닌 나라여서 어떤 도시도 혼자서는 이탈리아를 대표하지 못한다. 알프스에서 지중해 한가운데로
장화처럼 뻗어 나온 이탈리아반도는 면적의 75%가 비탈진 산과 언덕이다. 한반도의 백두대간처럼 이탈리아반도에는 아펜니노산맥이라는 등뼈가 있으며, 한반도의 1.5배인 30만 제곱킬로미터의 국토에 6천만 명이 산다.
(142)
바티칸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곳이다. 로마에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교황이
다스리는 별도의 도시국가인데, 이 특이한 국가의 영토는 겨우 0.44제곱
킬로미터이고, 1천 명이 겨우 넘는 시민권자의 직업은 성직자, 직원, 근위병이 전부다. 바티칸이라는 지명은 가톨릭 교황청보다 먼저 생겼다. 현재 바티칸의 영토는 바티칸 언덕에서 베드로 광장까지다. 이 구역은 9세기 중반 교황 레오 4세가 사라센족의 공격을 막으려고 강둑을 따라
성벽을 쌓아 올리면서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이탈리아왕국은 1871년
교황청의 주권을 전면 부정하고 바티칸을 로마에 통합했지만, 1929년 모솔리니가 라테라노에서 조약을
체결해 현재의 바티칸 지역을 교황청의 영토로 인정했다.
(165)
로마는 전성기를 다 보내고 은퇴한 사업가를 닮았다. 대단히 현명하거나
학식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뛰어난 수완으로 돈과 명성을 얻었고, 나름 인생의 맛과 멋도 알았던 그는
빛바랜 명품 정장을 입고 다닌다. 누구 앞에서든 비굴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돈지갑이 얄팍해도 기죽지 않는다. 인생은 더없이 짧으며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때 거두었던 세속적 성공에 대한 긍지를 버리지는 않는다. 로마는 그런 도시인 것 같았다.
(210)
무스타파 케말은 단순한 군사 영웅이 아니었다. 우리의 역사 인물과
비교하자면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그리고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 등을 모두 뒤섞어 놓은 듯한 사람이었다. 전쟁 영웅, 민족주의 혁명가, 대통령, 계몽
군주, 공화주의자인 동시에 독재자였다. 그는 이슬람 문화와
터키 민족주의에 자신의 철학과 정치사상을 접목함으로써 터키공화국을 ‘창조’했다.
(286)
‘태양왕’이라는 별명은
어릴 때부터 발레를 했던 그가 태양신 아폴로 역으로 공연에 출현한 일과 관련이 있다. 그는 1715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어린 증손자에게 후회가 담긴 유언을 남겼다. “전쟁을
피하고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치를 해라.” 루이 14세의
자녀와 손자들이 대부분 천연두와 홍역을 비롯한 전염병으로 일찍 죽었기 때문에 왕위가 증손자에게 바로 내려간 것이다. 프랑스 국민들은 70년 넘게 재위했던 왕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296)
‘과시적 소비’의 전형이었던
베르사유 궁전과 부르봉 왕가의 생활방식은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던 유럽 군주정 국가의 유한계급에게 널리 퍼져나갔다. 유럽의 왕과 귀족들은 저마다 베르사유를 본뜬 짝퉁 궁전을 지었으며, 부르봉
왕가의 의상을 흉내 내고 프랑스말을 배웠다. 이슬람 세계의 맹주였던 오스만제국 황제가 보스포루스 해협에
짝퉁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러나 파리의 패션산업이 그것 때문에
흥했던 것은 아니다. 대혁명으로 문명사의 새 시대를 연 프랑스 사람들이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존종하는
정치제도와 사회풍토를 형성하고 역사가 남긴 문화자산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면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에펠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