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하기 좋은 봄이다. 뿌연 미세먼지 때문에 집 밖으로 나서기가 망설여지지만 찰나의 봄을 이대로 놓칠 수는 없다. 그래서 준비했다. 숲의 숨소리가 오롯이 담긴 길을 걸으며 일상의 묵은 때를 벗겨내고 마음도 정화시킬 수 있는 ‘피톤치드 여행’. 힘 많이 들이지 않고 청량한 공기를 담뿍 들이마실 수 있는 숲길 네 곳을 소개한다.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천년의 숲’으로 선정된 장성 축령산 편백숲
오감을 깨우는 치유의 숲, 장성 축령산 편백숲
장성 축령산 편백숲은 국내 최대 편백나무 조림지다. 춘원 임종국 선생(1915~1987)이 1956년부터 1976년까지 물지게를 이고 산을 오가며 숲을 조성했다. 봄물이 한창 오른 4월, 27만 그루의 편백나무가 짙은 향을 풍기며 상춘객을 유혹한다. 피톤치드의 왕으로 알려진 편백나무가 겹겹이 진을 치고 있으니 미세먼지 대피소로 이만한 곳도 없겠다.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88%를 차지하는 숲에는 산소숲길, 숲내음숲길, 맨발숲길, 물소리숲길, 건강숲길, 하늘숲길 등 총 10.8km 길이의 6개 치유숲길이 흩어져 있다.
편백숲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
편백숲을 걷는 상춘객
이중 살갗으로 느껴지는 피톤치드를 가장 만끽하기 좋은 구간은 산소숲길이다. 1.9km 길을 한 바퀴 돌고 숲내음숲길 일부 구간과 맨발숲길을 차례로 지나 산림치유센터로 내려가는 코스를 추천한다. 깊은 숲과 흙길, 툇마루 산책길, 임도가 적절히 섞여 있어 지루할 틈이 없고 설렁설렁 걸어도 3시간이면 충분하다.
산소숲길과 가장 가까운 진입로는 모암주차장이다. 주차장에서 산소숲길까지 이르는 동안 키 큰 편백나무가 쉼 없이 인사를 건넨다. 만남의광장 갈림길에서 15분쯤 발품을 팔면 산소숲길 이정표가 가리키는 샛길이 보인다. 샛길로 들어서는 순간 진한 편백 향이 온몸을 휘감는다. 편백나무 아래 너른 평상이 놓인 치유필드는 산소숲길의 하이라이트 구간이다. 걷는 데 집중하기보다 숲이 뿜어내는 청량한 날숨에 몸을 내맡기고 잠시 누웠다 가기 좋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울울한 숲이 인상적인 산소숲길
명상쉼터가 있는 치유필드 <사진제공:국립장성숲체원>
산소숲길을 빠져나오면 고 임종국 선생이 묻힌 느티나무, 편안한 덱(deck)과 푹신한 편백칩이 깔린 숲내음숲길, 황톳길인 맨발숲길이 이어진다. 길이 순하고 임도를 중심으로 곳곳에 샛길이 있어 지도에 의존하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걸어도 좋다. 산림치유센터는 꼭 들르자. 편백나무 족욕기가 마련되어 있어 발의 피로를 말끔히 풀 수 있다.
울창한 편백숲을 올려다보며 걸을 수 있는 숲내음숲길 툇마루 산책길 구간
희귀 야생화와 잣나무 숲이 손짓하는 길, 봉화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경북 봉화 춘양면의 첩첩산중에 자리한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아시아 최대 규모로 조성된 수목원이다. 전시원만 해도 무려 27개로 백두대간에 서식하는 식물과 나무 2002종 386만 본이 보전되어 있다. 수목원 내 호랑이숲에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인 백두산호랑이 세 마리가 산다. 광활한 수목원을 효율적으로 둘러보려면 10~15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무료 트램을 타고 주요 코스를 관통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보다 이왕 미세먼지를 피해 달려온 길, 수목원에 조성된 숲길을 자박자박 걸어보자. 숲에 들어서는 순간 분꽃나무에서 날아드는 진한 향이 코를 자극하고 봄 야생화와 고산식물이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축구장 7배 크기의 호랑이숲 <사진제공:국립백두대간수목원>
트램을 타고 정해진 구간을 이동할 수 있다. <사진제공:국립백두대간수목원>
진입 광장부터 약숲, 고산습원을 거쳐 호랑이숲까지 약 2km의 숲길에서는 잣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를 듬뿍 들이마실 수 있다. 진입광장 숲길은 생강나무, 물박달나무, 물푸레나무 등이 우거진 황톳길이다. 여유롭게 걷다 약숲으로 들어서면 울창한 잣나무 숲을 만난다. 잣나무 숲을 걷는 동안 동의나물, 붓꽃, 물봉선 등 철마다 꽃을 피우는 수생식물을 볼 수 있다. 개천을 따라 졸졸졸 물소리마저 정겹다.
잣나무가 우거진 약숲 <사진제공:국립백두대간수목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 서식 중인 백두산호랑이 <사진제공:국립백두대간수목원>
고산습원은 300m의 짧은 길이지만 습지와 연못, 메타세쿼이아, 자작나무 숲길이 번갈아 가며 다양한 풍경을 보여준다. 작은 시내를 건너면 줄딸기꽃, 다래꽃이 소박하게 핀 호랑이숲길로 이어지고 곧 호랑이숲에서 어슬렁거리는 백두산호랑이를 만날 수 있다.
내려오는 길에는 암석원으로 방향을 잡아보자. 수목한계선 주변에 서식하는 고산식물이 오종종히 모여 있다. 암석원 전망대에서 수목원을 둘러싼 산자락 풍경을 바라보며 한숨 돌린 뒤 낙엽송 숲길인 에코로드를 지나 만병초원까지 내려오면 20~30분 정도 소요된다.
고산식물을 만날 수 있는 암석원 <사진제공:국립백두대간수목원>
만병초원에는 울창한 숲길을 따라 홍만병초 등 45분류군의 만병초가 전시되어 있다. <사진제공:국립백두대간수목원>
마실 가듯 숲에 안겨 걷는 길, 영주 국립산림치유원
소백산 옥녀봉 일대에 조성된 국립산림치유원 ‘다스림’에는 15분 거리의 짧은 숲길부터 3시간 30분에 이르는 코스까지 총 7개 치유의 숲길이 감싸고 있다. 이 중 영주 주치마을과 연결된 마실치유숲길(5.9km)은 다스림의 산림치유 프로그램 중 ‘숲 테라피’를 진행하는 곳이기도 하다.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자유롭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다스림에서 진행 중인 산림치유 프로그램 <사진제공:국립산림치유원>
출발점은 명상센터 근처 ‘데크로드’로 잡길 권한다. 마실치유숲길 전체 구간 중 2.3km의 ‘데크로드’는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잣나무 숲을 공중 부양하듯 걷는 길이다. 휠체어나 유모차도 다닐 수 있을 만큼 길이 완만해 숲속을 마실 가듯 편하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풀, 꽃, 나무를 가까이서 느끼며 숲에 푹 빠져 삼림욕을 즐겨보자. 걷는 데 쓰는 에너지보다 숲에서 얻는 에너지가 더 클 것이다.
울창한 잣나무 숲속 ‘데크로드’ <사진제공:국립산림치유원>
전망대에서 바라본 소백산 능선 <사진제공:국립산림치유원>
마실치유숲길 ‘데크로드’의 백미는 다채로운 풍경을 품고 있는 쉼터다. 각 쉼터에는 공간 활용법이 적혀 있다. 쉬는 것조차 열심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소중한 쉼표를 안겨준다. 숲속의 햇볕을 쬐며 행복호르몬인 세로토닌을 활성화시키는 해든솔쉼터, 숲에 이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풍욕을 즐기는 숲바람쉼터 등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가장 너른 쉼터인 푸르뫼쉼터 전망대에 서면 순하게 펼쳐진 소백산 능선이 멀리서 눈을 맞춘다. 순환형 숲길이라 ‘데크로드’만 걷다 빠져나와도 좋고 전체 길을 다 걸어도 2시간이면 충분하다.
가능하다면 주치마을 숙소에 머물며 산림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해보자. 숲치유, 수(水)치유 등이 포함된 프로그램은 예약제로 운영되며 1박 2일 3끼의 건강식을 제공한다.
주치마을 전경 <사진제공:국립산림치유원>
산림치유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족욕을 즐기고 있다. <사진제공:국립산림치유원>
싱그러운 봄기운이 충만한 담양 죽녹원VS메타세쿼이아길
담양의 봄은 대나무숲길이 이어진 죽녹원과 초록빛 메타세쿼이아길로 유난히 푸르다. 대나무 향이 피어오르는 2.4km의 죽녹원 산책길은 사시사철 죽림욕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대숲에서 죽림욕을 즐기는 동안 청량한 공기로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심신이 안정됨을 느낄 수 있다. 운수대통길, 추억의 샛길, 사색의 길, 철학자의 길, 죽마고우길 등 8가지 주제로 나뉜 죽녹원 8길은 발길 닿는 대로 걷기 좋다.
대숲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사진제공:담양군청>
죽녹원에는 8가지 테마의 산책길이 이어져 있다. <사진제공:담양군청>
솨솨… 대나무 숲에 이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고 곳곳에 놓인 벤치와 정자에 앉아 대나무가 방출하는 음이온을 온몸으로 느껴보자. 바깥 온도보다 4~7℃ 정도 낮은 대숲은 일반 숲보다 음이온 발생량이 10배 정도 많다. 빽빽하게 들어찬 대나무 숲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한결 맑아지는 느낌이다. 죽녹원 속 미술관인 이이남아트센터, 담양의 정자와 원림을 재현한 공간인 시가문화촌이 지척이니 함께 둘러봐도 좋다.
이색적인 미디어아트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이이남아트센터 <사진제공:담양군청>
사계절 다채로운 풍경을 선사하는 메타세쿼이아길은 연둣빛 잎이 풍성하게 돋아나는 봄이면 더욱 싱그러운 기운을 내뿜는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찬찬히 걷기만 해도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20m 넘게 자란 거목이 일렬로 줄지어 곧게 뻗은 풍경은 카메라를 어디에 갖다 대도 그림이다.
푸른 기운으로 생기 넘치는 메타세쿼이아길 <사진제공:담양군청>
이른 아침 햇살이 깃들 무렵이면 더욱 극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2km의 짧은 길이 아쉽다면 길 옆 오두막에 누워 바람결에 사각거리는 나뭇잎 소리에 귀 기울이거나 책 한 권 끼고 무위도식을 즐겨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