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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과 서정으로 줍는 삶의 이삭에 대한 소고
-목성균의 수필집 《명태에 관한 추억》을 중심으로
1. 들어가기
인간의 내면을 다뤄온 문학은 삶과 영혼을 살찌운다. 이는 수필이 자기 관조와 자기 고백에 있음을 입증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 편의 수필을 통하여 그 작가의 인생관과 철학을 읽게 된다. 한상렬이 평저, 《존재 사태, 그 사유의 악보》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초상”이 된다. 여기 휼륭한 초상화는 우리들에게 의미심장한 하나의 표상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지멜Simmel Georg은 “타인에 대한 해석, 타인의 내적 본질을 분석하는 것을 억제하기란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러므로 의미 있는 초상화를 볼 때마다 우리는 그 표정 뒤에 어떤 속내가 숨어 있는지 알고 싶은 독심술과도 같은 유혹에 속절없이 빠지게 된다.
수필문학이 자기 얼굴 그리기라는 언술의 배면에는 장르의 성격상 작가의 개성이 진솔하게 노출된다는 데에 있다. 여기서 작가의 인격의 문제가 대두된다. “문文은 인人이다.”라는 말이 있듯 그래서 문장은 곧 인격의 표현이요, 고매한 인격에서 깊은 글이 나오게 마련이다. 결국 글은 혼魂의 울림이요, 영靈의 외침이 된다.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훌륭한 작품 속에는 그 작품을 창조해 낸 저자著者의 남다른 의식이 담겨 있다. 그리하여 오래도록 독자에게 사랑을 받는 명작 속에는 적어도 그 저자의 생애가 농축되어 독자를 흡인함으로써 감동과 정서적 미감에 함몰하게 한다. 또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저자의 삶을 지각하게 하는 각성과 삶의 길을 제시하기도 한다. 때문에 예술 작품은 정서적 미감과 교훈이라는 두개의 축을 적절히 교합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삶과 존재의 문제를 다루는 수필문학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목성균의 수필은 바로 작가 자신의 초상肖像이자 저자의 남다른 의식이 담겨 있다. 그래 그의 수필을 일별하면 행간에 담긴 화자의 고매한 인격에서 오는 글의 깊이에 빠지게 한다. 아울러 인생의 해석과 생명의 이해를 위한 정서와 사상이 하나로 용해되어 있음을 보게 한다. 이는 좀처럼 보기 힘든 수필 읽기의 희열과 감동일 것이다. 애석한 일은 그런 그가 바람같이 수필문단에 나타났다 바람같이 사라졌다는 점에 있다. 작가 목성균은 과연 어떤 작가인가? 이에 대한 추적은 그의 작품세계에 탐닉하기 위한 기본적인 인자因子일 것이다.
수필가 목성균은 추억의 이쪽과 저쪽을 오가며 글을 써온 작가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7년 어느 수필문학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한 승용차 안에서였다. 평자의 문단 입문도 40대 초반이니 이른 편은 아니었다. 그는 57세의 늦은 나이로(1995) 월간『수필문학』에 <속리산에서>가 천료薦了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초회 작품은 <불영사에서>라는 기행수필이었다. 필자와 그와는 한동네 주민이었다. 평소 동네 놀이터에서 가끔 그와 마주치곤 했다. 그때마다 그는 손자랑 함께 보내곤 했다. 흰 운동화를 신고 머릿결이 유난히 까만 예닐곱 살 정도의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놀이터를 거닐던 그의 자상한 모습이 좀체 잊히지 않는다. 훗날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희권이 외손자였다. 한 작가의 인간적 면모를 보게 하는 장면이다.
안타깝게도 그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2004년 목성균 작가는 지병으로 타계했다. 문단 등단 10년 만이니 요절이라면 요절이었다. 그가 타계하기 일 년 전쯤이다. 수필집 한권을 그로부터 선물로 받았다. 바로 《명태에 관한 추억》이라는 수필집이었다. 예쁜 글씨로 사인해 준 내 이름 석 자에서 그의 냄새가 났다. 아직도 내겐 그에 대한 추억이 남아 있다. 그의 작품에 대한 탐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에 대한 추억이 더 있다. 차분하게 대화하는 그의 언어스타일도 그 중 하나다. 톤으로 미뤄봐 그의 성품은 아마도 매우 섬세하였을 것이다. 작품 속에 배어있는 그의 사람 냄새다. 잠들기 어려워지는 늦밤이면 그의 수필집《명태에 관한 추억》을 뒤적였다. 고인에 대한 인연의 끈을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그런 그의 작품에선 독자들로 하여금 혼탁해진 마음을 잠시나마 헹구게 하는 힘이 내재돼 있다. 그의 수필은 구성이 탄탄하고 문장이 간결하며, 함축미와 시적 언어구사력이 매우 뛰어나다. 사소한 사물에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예리한 관찰력과 풍부한 경험에서 오는 특유의 시각은 수준 높은 작품을 꾸리기에 충분한 조건일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그의 수필은 지성과 서정을 아우르고 있다. 삶의 일상에서 줍는 파편화된 미적정서가 수필문학이란 용기를 만나 통섭通灄의 세계를 이룬다. 이는 지식의 대통합이다. 에드워드 윌슨Edwaed Wilson의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다른 것과의 조화를 이루며 통합되어 있으며,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채 분리하면 그들만의 존재의 이유가 손상될 수밖에 없다.”는 통섭적 이론은 그의 수필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아직도 전통주의에 탐닉해 있는 수필문단에 던지는 메시지일 게 분명하다. 그래 그의 수필에선 새로운 시선, 낯익은 장면이 낯설게 느껴진다. 사물에 대한 통찰과 해석과 의미화일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수필은 첫째, 정서적 미감의 수필적 형상화가 되어 있으며, 둘째로 삶의 거울로서의 자연이 주는 서정성을 음미하게 한다. 이를 단서로 《명태에 관한 추억》이 보여주는 세계의 진실을 탐색하기 위해 이 논의는 출발한다.
2. 펼치기
1-1. 정서적 미감의 수필적 형상화
목성균의 수필은 소박하면서도 서정과 지성의 결합되어 있다. 그의 작품 중, <앞자리>와 <살포>는 해석과 형상화의 측면에서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앞자리>는 ‘희생’이라는 주제어로 <살포>는 ‘노농의 권위’라는 의미화를 통해 형상화한 작품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농부가 늙어서 드는 농사 연장에 살포라는 것이 있었다. 물꼬를 보는데 쓰는 연장인데, 긴 자루 끝에 손바닥 크기의 납작하게 날이 선 네모진 삽이 달렸다. 언뜻 보면 창과 같다. 실제로 장비처럼 전의가 충천해서 고샅을 내닫는 늙은 농부를 보면 살포를 내지를 창처럼 꼬나들었다.
물싸움을 하러 가는 것이다. 그러나 저 살포로 일내지 하는 걱정은 기우다. 살포는 노농勞農의 원로적 품위 유지용이지 결코 흉기는 아니다. (중략)
살포는 연장이라기보다는 가세의 영역을 지키는 한 집안 대주의 의지를 고양하는 물건이다. 연장의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삽이 월등 낫지만 그건 젊은이들의 연장이다. 삽이 실권이라면 살포는 권위다.
-목성균의 <살포>에서
그의 작품을 평하는 자리에서 한상렬은 “여기서 화자는 농기구의 하나인 ‘살포’의 의미를 물을 대고 막는 기구로서의 의미보다는 노농의 ‘품위 유지용’ 또는 ‘노농의 권위’로 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한상렬의 《수필문학 강독 제3권》에서) 여기서 중요한 단서는 살포의 실용성을 정신적 차원으로 해석하고 있다. 만일 이 작품에서 살포의 용도만을 말했다면, 이 글은 설명문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해석은 이렇게 어떤 구체적 사물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체험도 그 해석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수필의 눈’이요, ‘작가의 시선’일 것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미시적 안목, 때로는 망원경적 안목도 필요할 일이다. 여기서 대상에 대한 ‘낯설게 하기’는 주효奏效 것이다. ‘앞자리’의 의미화든, ‘살포’의 의미화든 문제는 작가 정신에 있을 것이다. 목성균의 수필은 이런 작가 정신을 엿보게 한다. 수필의 감동은 이쯤에서 일 것이다.
일상적인 소회지만 그의 글에선 짙은 지난날의 향수가 묻어있어 독자를 아련한 추억 속으로 몰아넣는다. 수필 <고개>의 경우가 그렇다.
지름티 고개는 이제 구름이나 넘어가는 본래의 산등성이로 돌아갔지만 , 한으로 삭은 어머니의 가슴에는 부부사이를 이쪽과 저쪽으로 가르는 분수령으로 엄연히 자리잡고 있다.
쥐눈이콩 만한 신랑이 가마의 휘장을 들추더니 머리를 들이밀고 가마멀미가 얼마나 심하냐고 걱정을 하더라니까 글쎄.
신부는 열일곱, 신랑은 열다섯이었다. 가마 틈새로 바라보이는 답답한 산골 풍경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데 어린 신랑이 윗손上客의 눈을 피해서 신부의 가마 휘장을 들추고 은밀하게 산행 길의 노고를 치하하더라는 것이었다.
“거짓말이 아녀, 내가 그때 싹수를 알아봤어.”
베 매는 길쌈 마당의 동네 여인네들을 박장대소케 한 신행 날 고개에서 있었던 일이 어머니의 한이다.
-<고개>중에서
조혼의 사회풍조 속에서 근본적으로 모순이던 모델은 고부지간의 갈등과 그 속에서 제물祭物시 된 신랑신부의 애환이다. 며느리가 미우면 그를 독방에서 자게하고, 신랑을 시어머니가 끼고 도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고도 아이를 못 낳는다고 구박하고 괄시했다. 그 시대 10쌍의 부부 중 신부가 신랑보다 연상인 경우가 더 많았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일손을 늘리고, 대를 잇게 하고, 그리고 신랑에게 봉양 잘하라는 속심에서 그리했다.
‘지름티’ 마루에서 신랑 신부가 서로 사랑을 확인하는 모습은 독자의 마음을 일순 훈훈하게 해준다. “거짓말이 아녀, 내가 그때 싹수를 알아봤어.” 간결한 대화와 정겨운 사투리가 인상적이다. 혼례일 초례상 너머로 신부의 얼굴을 처음 볼 수 있었던 구식 결혼식이고 보면, 신부의 얼굴을 미리 본다는 것도 행운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목성균 수필의 정서적 미감이 반짝인다. 이런 언어 기의가 그의 수필에서 문학수필로서의 형상화에 기여하고 있다. 흑백 영화를 보듯 이 수필은 문장의 간결성, 그리고 압축미에 사랑의 미학이 한껏 드러난다. 이뿐이 아니다.
“그게 지금까지 남아있어?” 내가 반색을 하자 아내가 감회 깊은 어조로 말했다.
“잘 간수를 해서 그렇지.” 그리고 “이제 버릴까요?” 하고 나를 의미심중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그건 분명히 누비처네에 대한 나의 애착심을 알고 하는 소리다. “나둬,” 그러자 아내가 눈을 흘겼다. “별수 없으면서-” 하는 눈짓이다. 그것은 삶의 흔적에 대한 애착심은 자기도 별수 없으면서 뭘 그리 체를 하느냐는 뜻이다.
-<누비처네> 중에서
어머니의 등은 참으로 위대하다. 박사도 키우고, 장관도 키우고, 대통령도 키운다. ‘처네’ 하나로 5남매도 키우고, 10남매도 키우지 않았던가. 아기를 등에 업고 둘러메는 보자기가 처네이다. 이렇게 작가 목성균은 처네에 대하여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 ‘누비처네’에 대한 애착은 아내 못지않다. 이젠 쓸모없이 되어버린 요람이던 처네, 기운 다한 늙은이가 되어 장롱 속에서 쉬고 있는 처네, 그 처네에 대한 고마움을 사실 우리는 잊은 지 오래다. 작가는 한낱 ‘처네’를 두고 이렇듯 깊은 통찰과 혜안으로 한편의 수필을 빚고 있다. 그의 수필의 해석과 형상화는 바로 ‘누비처네’를 단순 육아양육의 도구로만 보지 않다는 데에 있다. 젊은 날, 두 내외의 행복한 결혼 생활의 증표요, 존재의 의미화일 것이다. 목성균의 수필은 이렇게 ‘무의미에 의미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문학적 형상화를 위한 정련精練된 수필쓰기일 것이다.
목성균의 수필을 마주하노라면, 어머니의 품속 같은 온기가 스며들어 저절로 가슴이 따뜻해진다. 삶에 부대끼고 그 상처로 하여 심신이 아플 때는 그의 작품 속에 풍덩 빠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알베레스의 언명과 같이 지성을 바탕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일 것이다. <부엌 궁둥이에 등을 기대고>에서는 하찮은 물상에의 정서적 관념을 넘나드는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식구들이 퇴함하듯 들로 나가고 나면 해님은 부엌궁둥이로 돌아가서 신랑새댁 궁둥이 탐닉하듯 온종일 바람벽에 머물렀다
-<부엌 궁둥이에 등을 기대고> 중에서
“신랑새댁 궁둥이 탐닉하듯 온종일 바람벽에 머물렀다.”에 이르면 놀라운 관능미를 보게 한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따뜻해진 은밀한 공간을 부부의 사랑에 빗대어 성적 암시마저 풍기고 있다. 작품 속의 성적 암시는 독자로 하여금 지루함을 달래주는 묘약일 것이다.
수필은 나의 삶의 길이요, 진리요, 빛이며 동시에 생명에의 등불이 된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정신적 즐거움과 삶에 감동을 주며 인간을 깨우치는 인간학이어야 할 것이다. 목성균의 수필의 자리는 이렇게 정서적 미감과 예술적 형상화로 직핍되어 있으며, 삶의 관조가 그의 수필을 건강하게 하고 있다. 윤재천이 그의 《수필문학의 이해》에서 “수필의 생명은 인생의 무게를 담은 중후함에 있을 것이다.”라고 갈파했듯, 목성균의 수필은 삶의 진정성이 정서적 미감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1-2. 삶의 거울, 자연이 주는 서정성
목성균은 자연 앞에 옷깃을 여밀 줄 아는 작가다. 모든 생물체는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다. 풀벌레의 울음소리, 불어오는 바람소리, 사운대는 억새풀 소리에서도 삶의 진리와 지혜를 듣고자 했다. 그는 사람답게 사는 이치와 도리를 자연을 통하여 깨우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자연관은 프랑스의 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사물의 의미 전달이 아니라 의미화”라는 정의를 충실히 지키고 있다. 수필 <다랑논>에서 느낀 작가의 감정이 그러하다.
“수필은 내 삶의 표현방식이며 존재의 의미다. 수필쓰기를 통해서 나는 나를 들여다보고 사람과 사물과 세계를 바라본다. 사람살이에 있기 마련인 슬픔을 걸러서 글 속에 용해시킨다.”라고 수필가 허창옥은 술회한 바 있다. 이를 두고 신재기는 그의 저서 《수필과 사이버리즘》에서 작가의 삶이 수필과 하나요, 영혼의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 했다. 목성균의 수필 쓰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 그의 수필을 읽노라면 ‘삶의 거울이자, 자연이 주는 서정’에 함몰하게 한다. 목성균의 수필이 시사하는 삶의 희열이요, 메시지일 것이다.
아무도 없는 다랑논에서 나는 늘 인기척을 느꼈다. 배코 친 머리처럼 깨끗한 논둑, 피나 잡풀 하나 없이 오로지 벼 포기만 서 있는 논배미의 정갈함에서 방금까지 사람이 있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논둑이 수북하게 풀섶에 덮여있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미발진(여물지 않은) 벼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노랗게 조락凋落하는 해도 있었지만 그 때도 논둑은 깨끗이 벌초가 되어있었고 논배미 안에는 잡풀 하나 없이 벼 포기만 오롯이 서 있었다. 아쉬움 같이 푸른 기가 아련한 연노랑색의 여린 벼포기가 고개를 못 숙이고 있는 것을 보면 농부가 아닌 어린 나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깨끗이 깎아놓은 논둑을 보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농부의 마음이 엿보여서 다랑논배미 어딘가 농부가 저무는 것도 모르고 아직 엎드려서 일에 골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랑논>에서
작품 <다랑논>은 현상학을 미학으로 승화시킨 로먼 잉가르덴의 존재론적 시도를 엿볼 수 있다. 황량한 가을 들녘의 다랑논을 소재로 개성적 문장을 창조하고 있다. 목성균은 ‘다랑논’의 현상을 깊이 직시하면서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농부의 성실함 속에서 삶의 이치와 자연이 안겨주는 경이로움을 미적 감수성으로 여과해 비단 같은 작품을 빚어내고 있다. 그의 사물에 대한 감각과 변용, 그리고 서정성과 소재의 의미화란 기법의 탁월성 때문일 것이다. 수필 <사기등잔>을 보자.
시골집을 개축할 때, 헛간 에서 사기 등잔을 하나 발견했다. 컴컴한 헛간 구석의 허섭스레기를 치우자 그 속에서 받침대 위에 오롯이 앉아 있는 하얀 사기 등잔이 나타났다.
등잔은 금방이라도 발간 불꽃을 피울 수 있는 조신한 모습이었다. ‘당신들이 나를 잊어버렸어도 나는 당신들을 잊어 본적이 없어,’ 하는듯한 섭섭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기 등잔>중에서
서정과 서사의 결합 그리고 서정과 지성의 융합을 그의 수필에서 읽게 한다. 과학문명에 밀려 한 때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추어 주던 ‘사기등잔’을 뇌리에서 잊고 지낸 것에 대한 죄스러운 고백의 역설적인 묘사가 흥미롭다. “당신들이 나를 잊어버렸어도 나는 당신들을 잊어 본적이 없어” 그렇다. 인간이 역사를 외면하고 거부하고 지낼망정 역사는 인간을 저버리지 않았다. 옛 것에 대한 소홀함에 일침을 가하는 작가의 언술에 설득력이 배어 있다.
과거의 삶은 한마디로 고단했다. 그러나 매우 순박했고, 인간다운 성정과 따뜻한 정이 넘치는 세상이 사회를 지배했다. 작가 목성균은 이러한 사회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의 <사기 등잔>은 인력거에 독자를 태우고 추억이 주렁주렁 달린 여행을 떠나도록 유도한다. 과거로의 회귀는 추억이 잔재할 때만이 가능하다. 유기농의 밑거름은 썩은 푸성귀다. 그것을 짐 져 옮겨보지 못한 농부는 농부가 아니다. 게다가 작품 <만돌이, 부등가리 하나 주게>는 운문적 표현을 결합하여 흡사 이효석의《메밀꽃 필무렵》을 읽는 듯하다.
강만돌 어른네 따비밭의 서슥 더미를 헐어서 한 짐씩 짊어놓고 앉아서 내려다보던 푸른 달빛이 어린 골짜기, 풀어널은 명주자치처럼 달빛에 하얗게 바랜 냇물이며, 순산한 산모가 조용히 숨을 고르며 누워 있는 모습 같은 다랑논들의 평온한 휴면休眠이며 저녁 설거지가 끝난 부뚜막에 엎어놓은 크고 작은 바가지들처럼 유순한 곡선을 서로서로 기대고 있는 초가집들, 모두가 내 몸뚱이 같이 편하고 애착이 가는 고향의 모습이다.
-<만돌이, 부등가리 하나 주게> 중에서
농밀한 문장이다. 묘사적이기에 이 작품은 부담 없이 읽힌다. 수필문학을 ‘비문학’ 운운했던 비판은 수필문장이 지나친 설명이나 서사일변도에 있었음을 상기할 때, 목성균의 수필작품이야말로 이를 불식시킨 문장이 아닐까 싶다. ‘서슥’, 이나 ‘부등가리’와 같은 어휘들이 지닌 말맛에 현대인은 거리를 두고 있다. 어디 어휘뿐이랴. 문명의 발달은 편리란 이기를 가져다 준 대신 추억과 낭만은 모조리 거두어가지 않았던가.
목성균의 수필집은 한 마디로 그의 인생의 집적集積일 것이다. 그가 생애에 꿈꾸었던 무지개를 문학이란 용기를 통해 찾았으니 다행한 일이지 싶다. 문학이란 이렇게 존재사태의 구체화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구체화란 작가마다 다를 수가 있다. 작가마다 빈 곳을 제 나름의 색깔에 따라 달리 표현하게 된다. 즉 저마다 자신의 개성적 색깔로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색이든 상관이 없다. 또한 문학이나 예술작품은 시대마다 다르게 구체화되기 마련이다. 만일 이 경우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작품은 죽은 도식적 구조물이 된다. 문학작품은 목성균의 수필에서 보듯, 상이한 구체화 속에서 ‘삶’을 영위하게 된다. 좋은 수필은 삶의 거울이 되며, 자연이 주는 서정성은 인간심성을 맑게 하는 인자因子가 될 것이다. 이유식이 평론 <수필의 벽과 그 극복의 길>에서 “수필가에겐 상상력, 연상력, 직감력, 분석력, 추리력, 창조력 등”이 요구된다고 하였듯, 목성균의 수필은 이에 걸맞는 작가였다 하겠다.
3. 나가기-목성균 수필의 자리
넬슨 만델라는 “대 자연 아래 모두 형제이며 평등하다.”고 했다. 그러나 자연만큼 위대한 스승은 없다. 문명이 발달하고 삶이 윤택해졌어도 인간은 자연을 외면하고는 살 수가 없다. 작가 목성균의 수필집《명태에 관한 추억》은 그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명태는 달리 망태・찐태・먹태・추태 등 그 이름만도 13개나 된다. 그의 수필은 “케케묵거나 속된 것이 오히려 멋있다고 본다.” 는 뜻의 영문 단어 캠프camp와 다르지 않다.
수필이 일상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미적형상화가 관건일 것이다. 권대근의 말과 같이 “예술로서의 수필을 쓰려면, 먼저 경계를 넘어서는 데서 생성된다는 것을 인식해야한다.”고 했다. 목성균의 수필에선 “요강, 아이스케키, 눈깔사탕, 구리무, 멍석, 외나무다리, 참빗, 흙….” 등, 순수우리말이 무시로 등장한다. 이런 언어적 감각이 그의 수필을 미적수필이게 한다. 소박하지만 이런 경향성이 독자와의 만남을 용이하게 한다. 작품이 주는 감동은 이런 소소함에서 기인한다.
수필문학은 이런 작가 자신의 영혼과의 만남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수필이 이런 영혼과의 만남을 불꽃으로 피워 올릴 수 있겠는가? 그래 단순한 영혼 외에 그 어떤 분석이나 통찰도 진실로 그의 영혼과 속삭인 뒤에 영감에 찬 것이 아니라면, 독자들에게 감동과 충격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적 자아의 고독한 영혼 깊숙이 자리한 자기 심령과의 속삭임으로 길어 올린 영감에 찬 내밀한 글을 대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한 작가의 깊은 사상과 만나게 될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목성균의 수필은 오롯이 자신을 지키려는 영혼과 교직된 심적 나상과 만나게 한다. 그래 그의 수필을 감상하노라면, 미적 희열감에 사로잡히게 하며, 고독한 실존의 자각에 이르게 한다. 그는 곤고한 수필적 삶의 체험에서 존재 해명에 시선을 두고 있으며, 삶의 진정성을 찾기에 분주한 작가였다고 하겠다.
존재의 해명과 더불어 포스넷이 주창한 “문학이란 산문이건 운문이건 반성보다는 상상의 결과”라는 말이 퍽 어울리는 수필집《명태에 관한 추억》을 선물하고 우리 곁을 훌훌 떠난 작가 목성균의 작품들이 나날이 새롭다. 추억은 아름다우나 간직할 때 존재하는 법을 그는 일깨워주고 가지 않았나 싶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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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렬, 《수필문학 강독》전3권, 도서출판 서해, 2010.
2000년을 여는 젊은 작가 포럼, 《21세기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