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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다워(54) -인류의 대축제, 남아공 월드컵(5)
1. 축구란 무엇인가(5)
2002 한일 월드컵 때 아들에게 편지글을 쓰며 온 국민과 함께 흥분과 감동 속에 월드컵을 지켜보았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는 고등학교 3학년 조카에게 편지글을 쓰며 16강 탈락의 아쉬움과 기라성 같은 월드스타들의 걸출한 기량, 승패에 일희일비하는 월드컵 강국들의 환호와 탄식을 함께 지켜보았다. 이번 남아공 월드컵은 편지글 대신 관전기를 쓰면서 대한민국의 16강 진출에 환호하고 8강 탈락을 아쉬워하며 인류의 대축제가 펼쳐지는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 감동과 관심을 이어갈 수 있을까? 마침 월드컵의 지난 25년을 돌아보는 글이 있기에 이를 살펴본다.
월드컵아 고마워
1985년, 내가 반짝반짝 빛나는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자대에 배치 받았을 때 오랫동안 나를 기다렸던 일등병 고참이 내게 처음 한 말은 이랬다. "월드컵이 아직도 일 년이나 남았다. 도대체 뭘 하며 그때까지 견뎌야 하냐?" 고참들의 수발을 들면서도 우리는 86년 월드컵까지 견뎠고, 고참들이 줄줄이 제대한 막사에서 그와 나는 14 인치 TV의 실내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리며 86 년 월드컵을 보았다. 은하수 가득한 별 밤처럼 가물거리던, 질 낮은 화면 속에서도 마라도나의 드리블은 유성처럼 선명했다.
1990년, 나는 어느 직장의 신입사원이었다. 새벽에 월드컵 중계를 보고 출근하던 버스 속에는 나처럼 눈이 벌건 직장인들이 많았다. 유럽과의 격차는 컸다. 조조의 백만 대군에 맞선 장판교의 장비처럼 혼자서 온몸으로 골문 앞을 지키던 홍명보라는 젊은 신인 선수가 있었다. 부장은 나보고 홍명보같이 회사를 온몸으로 지키는 선수가 되라 했다.
1994년, 나는 연출부의 막내로 <장미빛 인생>이라는 영화의 촬영 현장에 있었다. 뒤늦게 들어간 영화 현장은 무척 더웠고, 방만한 생활로 약해진 몸은 현장의 강도 높은 육체노동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과연 앞으로 영화를 계속할 수 있을지를 매일매일 고민할 때, 40 도를 웃도는 더위 속에서 최강팀 독일의 골문에 두 골이나 넣는 우리 선수들을 보았다.
1998년, 멕시코와의 경기 중 하석주가 넣은 프리킥 골을 보고 내가 지른 함성에 다섯 살 된 아이가 놀라서 울었다. 몇 분 뒤 하석주를 퇴장시킨 주심을 향해 내가 뱉은 육두문자는 오랫동안 아이의 언어생활에 안 좋은 흔적으로 남았다. 네덜란드와의 경기는 참담했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는 '한국인의 유전자에는 축구는 없다'라는 다소 과격한 이론들이 난무했다.
2002년, 내 나라에서 월드컵이 열렸는데 나는 미국에 있었다. 미국 사람들은 아무도 월드컵에 관심 없었다. 심야에 한국 경기를 보다가 하프 타임 때 담배를 피우러 아파트 마당에 나갔더니 아래층 미국노인도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이가 쿵쿵거린다고 불평을 많이 해서 몇 번 말다툼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나를 보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코리아, 굿"이라고 말했다. 세르비아 출신이라고 했다. 그 뒤부터는 아이가 쿵쿵거려도 별 말이 없었다.
2006년, 새내기 신임 교수로 학교에서 학생들과 토고라는 생소한 나라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했다. 영세 중립국 스위스의 사람들이 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처럼 착하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축구 중계 때 박지성 선수의 모습이 화면에 나오면 붙는 자막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감동적이었다. 프랑스 전 후 친구들과 우리 인생에 벼락같이 나타난 축복, 박지성 선수가 앞으로 몇 번의 월드컵을 우리와 함께 할 것인지 따져봤다. 적어도 두 번은 더, 우리의 운이 좋다면 세 번까지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리고 다시 2010년의 디지털 월드컵이 진행되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끊임없이 관전평이 올라오고, 다음 경기의 선발 라인업을 놓고 치열한 격론이 벌어진다. 피에르 레비의 집단지성 이론이 타당하다면 다음 월드컵에서는 국가 대표 선발을 놓고 인터넷을 통한 국민투표가 이루어질지 모른다. 그리스전 후 친구들과 앞으로 우리 인생에 몇 번의 월드컵이 남았는지를 따져 보았다. 7번, 8번, 최근에 담배를 끊은 친구는 호기롭게 10번을 외쳤다. 분명한 것은 4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뜨거운 열정만으로도 월드컵은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승리의 벅찬 감동 뿐만 아니라 좌절의 뼈아픔도 월드컵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열정인 것이다.(2010. 6. 22 인터넷한국일보 육상효 인하대 교수의 글)
2. 파란 끝에 4강에 오른 네덜란드와 천추의 한을 남긴 기안의 실축
7월 2일, 오후에 노인건강타운의 공연장에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관람하였다. 1965년 작의 명화는 여러 차례 TV에서 방영된 바 있어서 익숙한 화면인데도 세 시간의 상영시간이 지루하지 않을 만큼 다시 보아도 경쾌하고 아름다운 영화다. 화면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내 조국에 축복을’ 염원하는 노래의 가사가 마음에 스며들기도. 월드컵의 전사들도 사랑하는 조국에 축복이 임하기를 기원하면서 최선을 다하리라.
저녁 11시에 네덜란드와 브라질의 8강전이 포트엘리자베스 넬슨 만델라 베이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네덜란드는 월드컵 우승 길목에서 두 차례나 브라질에 발목이 잡혀 분루를 삼켰으나 어두운 역사는 반복되지 않았다. 네덜란드는 월드컵 8강전에서 다시 만난 브라질을 꺾고 4강에 진출했다.
네덜란드는 전반 10분경에 브라질의 호비뉴에게 선제골을 내줬으나 후반에 상대 자책골과 스네이더르의 역전골을 묶어 짜릿한 역전 승리를 거뒀다. 전반전에는 브라질의 짜임새 있는 공격이 네덜란드를 압도하여 역시 우승후보라는 찬사를 받았으나 후반전은 네덜란드의 분위기였다. 게다가 브라질은 후반 28분 자책골을 내준 멜루의 반칙 퇴장으로 더 힘겨운 겨기를 펼쳐야 했다. 네덜란드는 신바람을 타고 준결승에 진출했고 강력한 우승후보 브라질의 질주는 8강에서 멈췄다. 이번 대회 최대의 파란을 일으킨 이 경기에서 네덜란드에는 축복이 임하였고 브라질에는 재앙이 덮쳤다고 할까?
이어 다음날 새벽에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우루과이와 가나의 8강전에서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는 정규시간과 연장전을 1-1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가나를 4-2로 꺾고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이후 40년 만에 월드컵 본선 4강에 이름을 올렸다. 아울러 지난 1930우루과이월드컵과 1950브라질월드컵에 이어 통산 세 번째로 월드컵 정상에 재도전할 기회를 잡았다.
이날 경기는 시종 일관 양 팀의 치열한 공방전 속에 진행됐다. 그 중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1-1 상황이던 연장 후반 종료 직전, 가나가 얻어낸 페널티킥 찬스였다. 하지만 가나는 웃지 못했다. 키커로 나선 기안의 슈팅이 크로스바를 맞춰 득점에 실패한 까닭이다. 이로써 아프리카 팀 축구 역사상 월드컵 첫 4강의 꿈 또한 물거품이 됐다.
기안은 이번 대회서 가나의 8강행을 이끈 일등공신이었으나 우루과이 전 페널티킥 실축으로 천추의 한을 남기며 자신과 조국을 비탄에 빠뜨렸다. 아프리카와 가나가 4강에 올라갈 절호의 기회를 놓진 것이기에 실축의 그림자는 더욱 어두웠다. 반대로 수아레스는 골대 안으로 들어가는 볼을 손으로 막아내는 핸드볼 파울로 퇴장을 당했으나 이는 우루과이를 벼랑 끝에서 건져내는 천금의 반칙이 되었다. 자신의 퇴장과 팀의 승리를 맞바꾼 셈이다.
3. 아르헨티나를 완파한 독일과 파라과이를 잡은 스페인
7월 3일, 오후에 인천 영종대교에서 고속버스가 고장 난 승용차를 들이받고 가드레일을 넘어 10m아래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24명의 승객 중 12명이 사망하고 12명이 중경상을 입는 비통한 일이 일어났다. 모든 사고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하는 것이지만 해외여행의 부푼 기대를 안고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에 날벼락을 맞은 참사가 너무나 안타깝다. 우리 모두 불의의 사고가능성이 있는 교통수단을 필수로 이용하고 있으니 안전에 더욱 유의하여야 하리라.
저녁 11시에 케이프타운 그린 포인트에서 열린 월드컵 8강전에서 전차군단 독일이 경기시작 3분 만에 터진 토마스 뮐러의 선제골과 후반에 터진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2골, 아르네 프리드리히의 추가골에 힘입어 아르헨티나를 4-0으로 물리치고 3회 연속 월드컵 4강행 티켓을 따냈다. 클로제는 월드컵 통산 13, 14호 골을 한꺼번에 쏘며 호나우두(브라질)의 15골에 한 발짝 다가섰다. 반면 20년 만에 월드컵 4강 진출을 노렸던 아르헨티나는 지난 2006년 독일 월드컵에 이어 또 다시 독일에 8강에서 발목을 잡히며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계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 리오넬 메시는 이번 월드컵에서 단 한 골도 넣지 못했고 팀의 탈락도 막지 못했다.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낸 메르켈 독일총리가 골을 넣을 때마다 환호하는 장면과 침통한 표정으로 믿기지 않은 패배를 받아들이는 마라도나의 모습에서 승자와 패자가 극명하게 비교된다. 8강까지 욱일승천의 기세로 치고 올라오던 남미세가 맥없이 무너지고 숨을 죽이던 유럽세가 포효하는 장면과 함께.
이어서 다음날 새벽에 '요하네스버그 엘리스파크에서 열린 스페인과 파라과이와의 8강전에서는 무적함대 스페인이 다비드 비야의 결승골에 힘입어 남미의 돌풍 파라과이에 1-0으로 승리했다. 이로써 스페인은 네덜란드, 우루과이, 독일에 이어 마지막 남은 4강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1950년 월드컵 이후 60년 만에 준결승 진출이다. 비야는 5골로 월드컵 득점 선두에 올랐다 스페인은 이날 승리로 남미 팀 상대 무패 행진도 이어갔다. 스페인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서 브라질에 0-1로 패한 뒤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지난 조별리그에서도 칠레를 제압했다. 스페인은 앞서 아르헨티나를 격파한 독일과 결승 진출을 놓고 다투게 됐다. 반면 짠물수비를 앞세워 월드컵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파라과이는 스페인전에서 먼저 페널티 킥을 얻는 등 좋은 기회가 있었으나 이를 살리지 못하고 경기 막판에 비아에게 결승골을 내주는 등 끝내 스페인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여 4강 진출의 꿈을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다.
이로써 4강에는 남미의 우루과이, 유럽의 네덜란드, 독일, 스페인이 진출하여 8강까지 다수를 차지하던 남미를 제치고 유럽 팀들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진을 친 아르헨티나, 브라질, 포르투갈 등이 탈락하고 조직력이 탄탄한 유럽 팀들이 정상에 가까이 오른 점을 지켜보며 축구에서는 출중한 한 두 사람의 힘이 아니라 11명이 한데 뭉쳐진 팀워크가 중요한 것임을 일깨게 된다. 어려움을 딛고 4강에 오른 팀들이여,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
4. 읽을거리
1)서로 통하는 축구·음식·명상
# 풍경 1 : 1970년대 영화배우였던 문숙씨를 만났습니다. 그는 요가와 명상, 건강식을 하는 수행자가 돼 있더군요. 인터뷰(본지 6월 24일자 27면) 도중 그가 말했습니다. “음식을 먹는 건 결국 다른 생명체의 기운을 먹는 거다.” 그래서 슬펐다고 합니다. 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육식이 아니라 채식을 하더라도 마찬가지죠. 풀도 생명이고, 나무도 생명입니다. 풀도 얼굴이 있고, 나무도 숨결이 있죠. 결국 살기 위해서 잡아먹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팠습니다.”
그래서 절망스러웠다고 합니다. 나의 생각과 상관없이 세상은 이미 약육강식의 생존논리로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명상을 하면서 보는 눈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누가 누구를 먹는 게 아니더군요. 누가 누구에게 먹히는 게 아니었어요. 세상은 먹고 먹히는 과정을 통해 하나가 될 뿐이었죠. 나와 상대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공존하는 것이더군요. 그걸 통해 내가 그가 되고, 그가 내가 될 뿐이죠.”
그 말끝에 문숙 씨는 티베트의 ‘조장’(鳥葬·사람이 죽으면 새의 먹이로 주는 장례법) 풍습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곳 사람은 죽고 나서 몸을 독수리의 먹이로 줍니다. 자신과 독수리가 하나가 되는 거죠. 그렇게 자연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건 참 페어(Fair·공평)한 거예요.”
# 풍경 2 :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 한창입니다. 최강의 팀들이 일찌감치 좌초하기도 하고, 약체로 알려졌던 팀들이 선전하기도 하죠. 사람들은 그걸 두고 ‘이변’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변이 없습니다. ‘이치’만 있을 뿐이죠. ‘
축구는 11명이 뛰죠. 그러나 슛을 날릴 때는 딱 한 명이 쏩니다. 그런데 그 슛을 유심히 들여다보세요. 슛마다 무게가 다릅니다. 어떤 슛의 무게는 1인분, 어떤 슛은 2·3인분, 또 어떤 슛의 무게는 11인분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어떤 선수는 혼자서 뛰고, 어떤 선수는 열이 하나처럼 뛰기 때문입니다. ‘현문우답’은 그걸 두고 ‘불이(不二)의 조직력’이라고 불러봅니다.
결국 에너지의 덧셈입니다. 축구장은 일종의 거미줄이죠. 그 줄 위에서 선수들의 몸과 몸이 통하고, 마음과 마음이 통할 때 에너지의 덧셈도 ‘찰칵찰칵’ 이뤄지죠. 그렇게 에너지가 더해진 슛의 위력은 파괴적이죠. 반면 덧셈이 빠진 슛은 힘이 없죠. 프랑스팀을 보세요. 선수들 각자의 개인기는 뛰어났지만 팀 내 불화로 인해 에너지의 덧셈을 이뤄내진 못했죠. 결국 조별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당연한 얘기라고요? 맞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죠. 음식을 얘기하고, 축구를 얘기할 때 너무나 당연한 얘기죠. 그러나 지지고 볶는 우리의 일상을 얘기할 때는 다릅니다. 누구도 그걸 “당연한 얘기”라고 말하지 않죠. 왜냐고요? 가정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우리는 ‘덧셈의 공식’을 망각하기 때문이죠. 나의 에너지와 상대의 에너지, 그 사이에 ‘+’가 끼어들 수 있음을 까맣게 잊어 먹고 말죠. 그래서 단독 드리블을 고집합니다. 이쪽 골문에서 하프 라인을 지나 저쪽 골문까지 혼자서 허덕대며 공을 몰죠. 그리고 투덜거리죠. 힘들다고, 외롭다고, 두렵다고 말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 안에 거(居)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이 말에는 덧셈의 공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단초가 숨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겁을 먹죠. 상대가 내 안에 거할 때 나의 에너지가 줄어들까, 내가 상대 안에 거할 때 나의 에너지가 훼손될까 두려움에 떨죠. 그러나 ‘거함의 순간’은 나를 허물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티베트의 조장(鳥葬)도 마찬가지죠. 나를 허물 때 그게 비로소 ‘자연을 향한 거함의 순간’이 되는 겁니다. 그게 없다면 그저 ‘독수리에게 먹히는 흉한 풍경’에 그치고 마는 거죠.
축구도, 음식도, 명상도 마찬가지죠. 나의 집착을 허물면 허물수록 에너지가 불어납니다. 한 방의 슛에 11명의 에너지가 담기는 거죠. 그걸 누가 막겠어요?(중앙일보 2010. 7. 1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2) 소리 없는 고문… 승부차기는 '공포 차기'
동전 던지기에서 이미 승패가 갈렸는지도 모른다. 30일 새벽 남아공월드컵 일본과 파라과이의 16강전. 전·후반 90분, 연장 전·후반 30분의 소모전을 모두 치른 두 팀 주장은 운명의 승부차기에 앞서 동전 던지기를 했다. 어느 팀이 먼저 찰 것인지 순서를 가리는 절차였다. 동전 던지기에서 이겨 선택권을 얻은 파라과이는 주저 없이 먼저 차는 쪽을 택했다.
'승부차기는 먼저 차는 쪽이 유리하다'는 속설(俗說)은 축구선수들 사이에선 정설(定說)로 받아들여진다. 승부차기는 축구 기술을 겨루는 대결이 아니라 심리전(心理戰)이고, 먼저 차는 선수보다 나중에 차는 선수의 심적 압박감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월드컵에서 행해진 최근 6차례 승부차기는 선축(先蹴) 팀이 모두 승리했다. 선축 팀 키커의 승부차기 성공 확률은 89.3%나 됐지만 나중에 차는 팀의 성공률은 52.2%로 절반을 겨우 넘겼다.
승부차기는 '압박감'과 '더 큰 압박감'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차는 팀의 키커는 슛하기 전 '성공이냐, 실패냐'만 고민하면 된다. 그러나 상대팀 결과를 확인하고서 승부차기에 나서는 키커는 '넣으면 본전, 못 넣으면 역적'이라는 압박감이 가중되면서 마음이 흔들린다. 팀에서 가장 페널티킥이 안정적인 선수가 1번 키커로 나서는 것도 승부차기 승리를 위해선 불안감을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자기 팀의 앞선 선수가 실수할 경우 '나까지 실패하면 승부를 돌이킬 수 없다'는 불안감이 더욱 커지는 것이 승부차기의 심리이기도 하다. 스위스는 2006년 독일월드컵 우크라이나와의 16강전에서 1·2·3번 키커가 모두 승부차기에 실패하기도 했다.
월드컵에서 치러진 최근 6번의 승부차기에선 모두 먼저 차는 팀이 승리를 거뒀다. 이는 상대팀이 골을 넣었는지 못 넣었는지를 확인하고 승부차기에 나서는 키커들이 심리적으로 더 큰 압박감을 느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30일 열린 파라과이와 일본의 16강전에서도 선축(先蹴) 팀인 파라과이가 8강 행(行) 티켓을 거머쥐었다.
승부차기는 스타플레이어의 '무덤'으로 불리기도 한다. 유명 선수는 승부차기를 통해 얻는 보상보다 실패 때 잃는 것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실축 때문에 그동안 쌓아온 모든 공(功)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을 더 크게 느끼는 것이다. 1994년 미국월드컵 때 이탈리아의 축구 스타 로베르토 바조는 팀을 결승으로 이끈 1등 공신이었지만 결승전의 승부차기 실축으로 자국 팬들로부터 살해 위협까지 받아야 했다.
노르웨이의 스포츠 심리학자 가이르 요르데 박사는 "스타급 선수의 승부차기 성공률은 60% 정도이지만 무명 급은 75%이다. 무명 시절 성공률이 90%에 이르던 선수들도 스타가 되고 나서는 승부차기 성공률이 크게 줄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승부차기는 심적 부담감을 다스리는 기술의 대결이며, 슈팅 성공 여부는 공을 차기 전에 이미 결정된다"고 말했다.
승부차기 때는 키커와 골키퍼의 심리적 대결도 치열하다. 11m 앞에서 골키퍼와 일대일 대결을 벌이는 승부차기는 물리학적으로만 보면 '성공할 수밖에 없는 킥'이다. 킥 스피드와 골키퍼의 반응시간 등을 따져보면 전체 골대 면적(높이 2.4m×너비 7.3m)의 약 63%가 절대 골인 구역이다. 그러나 '무조건 넣어야 하는' 키커와 '운이 좋으면 막을 수도 있다'는 골키퍼의 심리 상태 차이가 승부차기를 골키퍼에게 유리한 승부로 만든다. 국가대표 이운재는 예전에 승부차기에 유독 강한 비결을 묻자 "골키퍼는 기회가 5번이지만 키커는 한 번뿐"이라고 설명했다. 승부차기 5번 중에서 한 번만 막아도 '영웅'이 되는 골키퍼가 느끼는 부담감이 훨씬 적다는 뜻이다.
' 실패할 수 없는 킥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 승부가 세계 최고 무대인 월드컵, 게다가 조별리그도 아닌 토너먼트 승부에서 펼쳐진다면 어떨까.
이를 인간의 근원적 불안인 '타나토스(Thanatos·죽음에 대한 본능)'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장 크게 느낀다. 승부차기에 나서는 키커들은 '승부차기는 골키퍼보다는 키커에게 훨씬 유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더 큰 공포를 느낄지도 모른다.(조선일보 2010. 7. 1 한덕현·중앙대 의대 교수의 글)
3) 우리는 행복하였다 -한국갤럽 조사결과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 출전한 한국 축구대표팀 선수 중 국민이 뽑은 최우수선수는 박지성(29.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이 전국의 만 19세 이상 남녀 51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70.4%가 박지성을 월드컵에 출전한 한국 선수 가운데 가장 훌륭했던 선수로 꼽았다. 이청용(22.볼턴)은 3.13%의 지지를 받아 2위에 올랐고, 박주영(25.AS모나코)과 이정수(30.가시마), 이영표(33.알 힐랄)는 각각 19.6%, 13.4%, 12.9%를 기록하며 뒤를 이었다.
국민 대다수는 한국이 사상 처음으로 원정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한 사실이 기대에 맞는다고 보고 있었다. 기대 이상의 성적'이라고 답한 이들이 59.5%로 가장 많았고 `기대했던 성적'이라는 응답자는 27.4%였으며 `기대 이하의 성적'은 8.5%에 머물렀다.
우루과이와 16강전을 실시간으로 관전했느냐는 설문에서는 무려 87.7%가 생중계를 봤다고 응답해 관심이 폭발적이었다는 사실이 재확인됐다. 한국이 우루과이보다 실력이 나았다는 응답자는 53%로 나타났고 비슷했다는 이들은 23%, 우루과이가 나았다는 이들은 22.5%를 차지했다.
허정무 대표 팀 감독에 대한 평가는 월드컵 본선이 시작되기 전보다 더 긍정적으로 변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허 감독이 얼마나 역할을 잘 수행했느냐는 설문에 응답자의 48.8%는 `어느 정도 잘했다'를 꼽았고 `매우 잘했다'고 답한 이들도 48.4%에 달해 87%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지난달 허 감독에 대해 시행된 같은 내용의 설문에서는 응답자의 65.7%가 긍정적 평가를 한 바 있어 지지도가 22.3% 포인트 높아진 셈이다.
국민이 남아공 월드컵 기간에 느낀 행복도는 2006년 독일 월드컵 기간보다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남아공월드컵이 있어 생활이 더 즐거웠는지 묻는 말에 `더 즐거워졌다'는 응답이 83.5%로 대다수를 이뤘고 `그렇지 않다'는 9.9%에 그쳤다. 독일월드컵 이후 같은 조사에서는 77.9%가 월드컵이 있어 행복했다고 응답한 바 있다.
연령별로는 30대에서 더 즐거웠다는 응답이 89.1%로 가장 높았고 19∼29세에서 78.6%로 가장 낮았다.
조사는 지난달 29일 하루 동안 시도별 인구수에 비례해 표본을 무작위로 추출해 전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신뢰수준 95%에 표본오차는 ±4.3% 포인트다. (연합뉴스 2010. 7. 1)
4) 피비린내 나는 가사들… 독립전쟁·혁명의 산물
한국전은 물론 다른 팀 경기까지 TV 중계를 본 축구팬들에게 경기 말고도 관심을 끈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경기 시작 전 양 팀 국가가 울려 퍼질 때 TV 화면에 소개된 번역본 가사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해 '길이 보전하세'로 끝나는 서정적인 한국 애국가와 달리 다른 국가는 '피비린내 나는' 가사를 갖고 있다. 남미 소국 우루과이부터 유럽의 맹주 프랑스까지 이들 나라 국가는 한국으로 치면 1980년대 운동가나 노동가에 버금갈 만큼 호전적이다. 왜?
우선 한국의 8강행을 좌절시킨 우루과이. 국가 제목은 '달라, 조국 아니면 죽음을'이다. 1845년 7월 FA피구에로아가 작사, F J 데발리가 작곡하고 3년 뒤 국가로 채택된 노래다. 가사는 이렇다.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자유가 아니면 영광스러운 희생을 하리라! 우리의 영혼이 쥐여 잡은 맹세일지니, 우리는 깨닫기 위해 용감하게 완수했도다!' 이 비장한 노래의 주제는 '자유'와 '죽음'이다.
우루과이는 남미에서 두 번째로 작은 나라다. 인구는 350만 명 정도다. 원래 '시스플라틴아 도 술'이라는 이름의 브라질 남부 주(州)였다. 1825년부터 3년간 전쟁을 벌여 독립을 얻어냈다. 그 독립을 기리는 노래가 국가로 채택됐다.
흥미로운 건 우루과이 국가 작사·작곡가가 파라과이 국가도 만들었다는 점이다. 제목은 '파라과이, 공화국 아니면 죽음을'이며 후렴구도 우루과이와 비슷하다. '파라과이인에게 공화국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우리의 영혼은 자유를 주었도다. 화합과 평등이 다스리는 곳에서 압제자와 노예는 존재하지 않으리.' 파라과이는 300년 가까이 스페인 식민 통치에 시달리다 1811년 독립했다.
아르헨티나도 마찬가지다. 아르헨티나 국가 '조국 행진곡'은 V L 플라네스가 작사, B 파레라가 작곡했다. 이 노래는 5월혁명 3년 뒤인 1813년에 국가로 지정됐다. 스페인 이주자들이 늘어나자 아르헨티나는 1900년 노랫말을 좀 더 부드럽게 수정했다. '죽지 마라! 신성한 외침을 들어라. 자유여, 자유여, 자유여! 쇠사슬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어라. 우수한 평등함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라. 남부 지역이여, 단결하라. 우리는 아르헨티나인으로 충성하리!'
남미 국가들만이 아니다. 피 냄새 하면 프랑스 국가도 만만찮다. 프랑스 국가 '마르세유의 노래'는 루제 드 릴이 프랑스혁명을 기념해 1792년 만들었는데, 왕조 부활 이후 금지곡이 됐다가 1879년에 다시 국가로 채택됐다. 가사 속에 포탄이 난무하고 야수 같은 병사들이 포효하며 아들딸을 학살한다는 장면이 등장한다. '무기를 잡아라 시민들아, 전투 대형을 갖추어라, 진격하자, 진격하자! 더러운 피가 우리의 밭고랑에 흐르게 하자.'
그렇다면 16~17세기 식민 통치로 위세를 떨친 스페인 국가는 얼마나 거칠까? 의외로 스페인 국가는 가사가 없다. 1770년 카를로스 3세는 군악곡 편곡집의 '척탄병 행진곡'을 '왕의 행진'이라고 개명해 국가로 제정했다. 스페인은 1930년대 혹독한 경제 공황을 겪으면서 잠시 진취적인 가사를 넣은 '리에고의 노래'를 국가로 불렀다가 1947년 왕정복고로 다시 '왕의 행진'을 채택했다.
혁명이 아니라 대놓고 왕과 권력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국가도 물론 있다. 영국과 일본이 대표적이다. 잉글랜드 왕국의 가사는 '신이시여, 우리들의 자비로우신 여왕 폐하를 지켜주시고'로 시작된다. 이들은 노래를 부를 현재 시점에 맞춰 재위하는 왕실 지도자의 성별에 따라 '여왕' 또는 '왕'으로 바꾸어 부른다.
이번 TV 중계에서 일본 국가 '기미가요'는 가사를 자막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천황과 제국주의가 영원하라는 노골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천황의 세상이 천 대로 팔천 대로 작은 조약돌이 큰 바위가 되어서 이끼가 낄 때까지.' 기미가요는 일본의 2차 세계대전 패망 후 폐지됐다가 1999년 공식 부활했다.
첫댓글 무척 많은새로운 지식을 얻었습니다. 축구와 월드컵이 전세계를, 전인류의 눈을 향해 말해주고 있는 교훈과 흥미로운 열전이 매우 감동적이기도 합니다. 32개 출전국에서 16강, 8강, 4강 다음에 결승전에 이르는 세기의 대본 없는 축제이자 인류 최대의 경기인 월드컵 마지막 우승팀이 결정 되기까지 마음 졸이며 지켜보는 것/ 과연 이것이 우리에게 행복이 될까요? 범인인 제가 새삼스럽지만 한가지 얻은 원리 있다면, "경기자는 반드시 규칙을 지켜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글을 올려 주시느라 항상 수고하시는 "인생은 아름다워"의 필자님께 응원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