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만추(晩秋): 영화 <만추>를 보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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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1월이 되었다. 간 밤에 비가 내렸는지, 길바닥이 촉촉이 젖어있고 떨어진 낙엽들이 길바닥 여기저기에 붙어있다. 가을비 내린 뒤의 스산한 거리 풍경 — 전생인 듯, 내생인 듯 언젠가 많이 본 듯한, 낯익은 정경이다. 물론 눈물을 떨어뜨릴 일은 아니다. 심지어 살짝 눈물을 보일 일도 아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것도 물론 없다. 그리움이니 뭐니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 그러나, 빗물을 머금은 낙엽처럼 그 정취에 깊이 젖어 들되, 그저 그러고 말 뿐, 무심하게 깊어가는 가을을 나는 어쩌지 못한다.
그 사람들은 나와 달랐던 것 같다. 늦가을이란 무엇인가? 될 듯 될 듯하다가 안되는 것? 이루어질 듯 이루어질 듯하다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것? 조만간 기온은 급히 내려갈 것이고 바람은 더 매서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냥 그렇게 끝나는 줄로 알고 있던 중에 뭔가가 뒤늦게 찾아왔지만, 너무 늦게 찾아온 탓인지 역시 그냥 그렇게 끝나버리는 것?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어느 날 위의 질문을 제기한 후, 위의 대답들과 유사한 대답을 찾아내었던 것 같다.
이 영화를 제일 먼저 만든 사람은 이만희감독이라고 한다. 60년대 초의 그 영화에는 문정숙과 신성일이 나왔다. 그 후 80년대 초에 김수용감독이 김혜자와 정동환을 캐스팅하여 새로 찍었다고 하며, 최근에 김용태감독이 탕웨이와 현빈을 내세워 그야말로 현대 감각으로 찍은 것도 있다. 탕웨이-현빈 버전은 언젠가 본 적이 있는데,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이외에는, 그리고 물론 어쩐지 현대적인 느낌이 난다는 점 이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다. 김혜자-정동환 버전은 비교적 분명하게 기억난다. 지난 주에 보았기 때문이다.
다들 아는 대로, <만추>는 교도소에 갇혀있는 수감자와 연하의 남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짧은 연애에 관한 이야기다. 여자는 장기 수감자인데, 집안일로 휴가를 얻어 교도소 바깥으로 나왔다가 남자를 만나게 된다. 알고 보았더니 남자도 범법자로, 경찰을 피해 다니는 신세였다. 두 사람은 기차에서 서로 마주 보는 좌석에 앉게 되었다. 물론 순전한 우연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우연과 남자 쪽의 적극적인 대쉬로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워지고 정사를 나누기까지 한다. 계절은 만추이다. 마른 나무등걸 같던 여자의 마음에 봄바람이 분 듯 물이 오르고, 여자는 몇 년만에 처음으로 립스틱을 칠해 본다. 남자는 여자에게서, 어린 시절에 자기를 돌보아주던 누이를 본 듯하다. 그의 험한 마음은 순수한 마음으로 바뀌어 여자에게 사랑과 동정을 느끼는 것 같다.
물론 남자는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말해놓고 여자를 떠나며, 여자는 남자를 믿고 기다리지만 남자는 약속 시간이 다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남자는 돌아오기 싫어진 것인가? 그렇지 않다. 불가피한 사정이 생긴 것이다. 김혜자-정동환 버전에서는 남자가 자기 몫을 받으러 동료들에게 갔다가 그 중 한 명을 칼로 찌르게 된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여자는 실망하고 낙담한 채 입소 시간에 맞추기 위하여 교도소로 떠난다. 남자의 사정을 아는 관객들도 여자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안타까운 심정이 된다. 그러나 일종의 반전이라고 할까? 여자가 교도소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남자가 헐레벌떡 달려온다.
두 사람은 짧은 시간 동안 극적인 상봉의 기쁨을 나누며 재회를 약속한다. 그녀의 수감 기간이 그렇게까지 많이 남아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여자와 관객들은 다시 희망을 가진다. 드디어 출소일이 되었다. 그러나 그 날 교도소 문앞에서 기다리기로 약속한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반전이라고 할까? 그 때도 계절은 만추다. 여자가 스산한 가을 길을 혼자서 걸어가는 모습이 한참 나오며 영화는 그것으로 끝난다.
이것이 만추다.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물론, 될 듯 될 듯하다가 안되는 것, 뭔가가 뒤늦게 찾아왔지만, 역시 너무 늦게 찾아온 듯, 그냥 그렇게 끝나버리는 것이다. 맞다. 그것이 만추, 늦가을이다. 그러나 아직 ‘이것’을 다 말하지 못한 느낌이 든다. ‘이것’은 결국 쇠락이라거나 포기, 불성(不成)이라는 말로 나타낼 수도 있을텐데, 쇠락 등등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사랑은 어째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일까? 구체적으로 말해서 여자의 출소일에 남자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만추의 감성을 충분히 설명하자면, 이와 같은 질문에 대답하여 쇠락의 이유를 밝혀야 한다.
관객들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역시 피치 못할 사정? 남자가 돌아오지 못한 것은 예컨대 과거의 동료들에게 보복을 당했다거나 경찰에 체포되었다거나 하는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일까? 이렇게 생각하는 관객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슬픔이나 아쉬움, 안타까움 등의 감정을 느끼고, 세상 일이라는 것이 사람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 모양인 것 같아라고 속으로 생각하거나, 아 늦가을이로군 하고 속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늦가을과는 같지 않다. (계속)
첫댓글 삼례에 기거하면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싶다했던 영태교수님의 첫글이 소개 되어 기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