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초에 지어진 고래등 기와집, 우당고택<愚堂古宅,
선병국가옥(宣炳國家屋)> - 국가민속문화재 134호
▲ 우당고택 사주문(四柱門, 정문)과 돌담길 |
화개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우당고택 주차장이다. 주차장 한쪽에는 문화유산해설사가 머
무는 조그만 집이 있는데, 거기서 안내 자료를 쥐어들고 바로 남쪽에 자리한 우당고택으로 이
동했다.
고택에 이르니 제일 먼저 북쪽 대문인 사주문이 마중을 한다. 이곳에는 대문이 남북으로 2개
가
있는데, 바깥에서 들어올 때는 무조건 사주문을 거쳐야 된다. 명문 부잣집의 대문답게 문
의 덩치도 크고 품격도 제법 깃들여져 있으며, 이미 세상에 공개된 집이라 낮에는 대문이 늘
열려있어 나들이객과 답사객, 사진꾼, 이곳에서 공부하는 고시생과 그들을 보러온 가족 등등
사람들이 마를 날이 거의 없다.
대문 옆에는 황토와 돌, 기와로 지어진 돌담이 고색의 내음을 물씬 풍기며, 조촐하게 돌담길
을 이룬다. 서쪽 돌담길로 가면 효열각과 고택의 남문인 솟을대문으로 이어지며, 대문을 들어
서면
고래등 기와집으로 유명한 우당고택 내부가 장대하게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우당고택의 역사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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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당고택 서쪽 돌담길 |
▲ 정면에서 바라본 북쪽 대문(사주문) |
속리산(俗離山)에서 발원한 삼가천(三街川)이 금강으로 흘러가면서 개안리에 조그만 삼각주(
三角洲) 섬을 빚어놓았는데, 바로 그 섬에 20세기 초기 대표적인 근대 한옥으로 손꼽히는 우
당고택(선병국가옥)이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이곳은 보은 땅의 거의 유일한 자연산 섬으로 이 부근은 조선 때 나라에서 운영하던 마장(馬
場)이 있었다. 그래서 마장 안쪽 동네라 하여 '장안','장내'라 불렸으며, 지금도 그 지명은
유효하다.
우당고택을 지은 이는 보성선씨 집안인 우당 선영홍(愚堂 宣永鴻, 1861~1924)과 그의 큰아들
인 남헌 선정훈(南軒 宣政薰)이다. 이들은 원래 전남 고흥(高興) 출신으로 고흥 지역의 제일
가는 부자였다. 풍요로운
재산만큼이나 인심도 후하여 소작농에게 토지를 골고루 나눠주고 적
은 소작료를 받았으며, 어려운
사람들의 세금을 대신 처리해주는 등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인
심을 베풀었다.
선영홍은 아들이 4명 있었는데, 모두 끝이 훈(薰)자 돌림이다. (정훈, 남훈, 준훈, 동훈) 그
는
아들과 손자, 자손의 번창을 위해 천하에 제일가는 명당으로 터전을 옮기고자 이름난 지관
을 섭외하여 명당 자리를 물색했다. 그는 섬에 집을 지어야만 집안이 흥한다는 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그에 걸맞는
자리를 찾은 끝에 서울 여의도와 충남 천안, 보은 개안리가 후보 장소로
꼽혔고, 지관인 심씨의
추천과 속리산과 가까운 개안리의 지형에 단단히 반해 1903년 이곳에
터를
닦았다.
이곳 지형은 삼가천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지는 육지 속의 섬으로 그 모습이 마치
연꽃이 물에 뜬 형상이라 하여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불린다. 이런 자리는 꽤 좋은 명
당으로 꼽힌다.
1919년 아들 선정훈과 함께 그 섬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자신과 후손들이 길이길이 살 명당
자리라 천하에서 제일 이상적인 집을 짓기로 했는데, 선정훈이 공사를 주도했으며, 그 시절
잘나가던 목공과 기술자를 비롯해 일꾼들까지 후하게 대접했다. 공사 자재에도 돈을 아끼지
않아
질이 좋은 목재와 재료를 사용했으며, 이때 도편수로 참여한 사람이 궁궐 목수로 이름난
'방대문'이었다.
섬의 지형이 모래로 되어있어 따로 배수시설은 닦지 않았으며, 왜식과 서양식이 섞인 개량형
한옥이 한참 주류를 이루던 때라 너무 전통식에 얽매이지 않고 그 시류에 흔쾌히 동참했다.
이렇게 큰
정성을 들여 5년 만인 1924년 집이 완성되니 집의 전체 면적은 3,900평. 집 크기는
99칸을 자랑했으며, 사랑채와 안채, 사당 3구역으로 구성되어 각각 담장을 둘렀다. 특이한 것
은 사랑채와
안채가 '工'구조로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옛날 집에서는 극히 꺼리던 형태
였다. (부수는
것을 뜻한다고 함)
그럼에도 집의 중요한 공간을 '工' 구조로 한 것은 집터가 길하지 않아서 흉택의 평면인 '工'
구조를 택하면 70~80년 이후부터 길하게 된다는 지관의 해석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즉
후손
대에 반전을 노린 것이다.
선정훈은 아버지와 별도로 대동상사(大東商社)를 운영했는데, 고흥의 토산물인 우뭇가사리를
왜열도와 중원대륙에 수출해 큰 돈을 벌었다. 그의 곳간만해도 무려 33칸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재산의
정도를 알만하다.
그들은 오늘날 이 땅에 썩어빠진 위정자와 상류층과 달리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
던 인물이다. 선영홍은 고흥에 대흥사(大興司)란 서숙(書塾)을 세워 인재를 양성했으며, 보은
에도 집 남쪽에 관선정이란 33칸짜리 서당을 세워 한학(漢學)을 교육시키고 우수한 학자를
초
빙해 수백 명의 후학을 길렀다. 또한 보은향교 명륜당(明倫堂)에 서숙을
지어주기도 했으며,
지역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덕행을 베풀었다.
6.25시절 폭격으로 대문 좌우 바깥행랑채와 주변 부속 건물이 파괴되어 사라졌다. 허나 그 외
에
건물은 별탈 없이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그 덕에 20세기 초에 지어진 전통 개량한옥
으로 학술
가치가 대단히 높다. 또한 6.25 때
군부대가 집 동쪽에 주둔을 했는데, 시간이 지
나면서 아예 그곳에 눌러앉았고, 동쪽 토지 2만 평은 그렇게 군부대 땅이 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집을 끼고 흐르는 하천 동쪽 물길을 막아 농토를 개간했으나 1980년
과
1998년 집중호우로 집이 물에 잠겨 돌각담들이 여럿 무너졌고, 집을 지키고자 안산(安山)
의 역할로 심은 소나무 숲까지 쑥대밭이 되는 피해를 입었다. 하여 현재 집 주인인 선민혁이
지역
사람들의 동의를 구해 하천을 현재 모습으로 복원했다. 그 이후로 더 이상 수해를 입지
않았으며, 소나무 숲도 다시 복원해 옛날의 운치를 되찾았다.
선정훈은 집만 물려주면 된다면서 많은 돈을 썼으나 워낙 돈이 많아 결국 아들에게 많이 상속
되었다. (아 부러워라ㅠㅠ) 현재는 선병국의 아들인 선민혁이 집을 지키고 있으며,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선병국가옥'이었으나 근래에 선정훈의 호를 따서 우당고택으로 이름을 갈았다.
1990년대에 안채에 있는 곳간채를 손질하여 고시원을 열었는데, 최소의 비용만 받고 고시생들
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교육에 아낌없이 돈을 던진 할아버지(선정훈)와 증조부(선
영홍)의
유지를 잇기 위함이다. 또한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문의 별미인 씨간장이 있
는데, 무려
350년 이상 되었다고 전하며, 간장 보존을 위해 특별히 따로 보관하고 있다.
그 씨간장에 매년 새로 담구는 햇간장을 부어 보존하고 있는데, '대한민국 명품 로하스 식품
전'에 출품, 1리터가 500만 원에
팔리면서 유명세를 탔다. 그래서 우당고택(선병국가옥)이 천
하에 크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현재 김정옥 종부(宗婦)가 '선씨 종가 아당골'이란 이름으
로
간장을 판매하고 있으며, 집 안팎에 700여 개의 장독을 두어 씨간장을 숙성/보관하고 있다.
이렇게
전통 한옥과 간장으로 이곳이 크게 떠오르자 보은군에게 2007년에 고택 북쪽에 주차장
을 닦고 대문 앞 소나무숲 주변에 잔디를 입히며 의자와 이정표를 지어주었다. 이곳이 보은의
새로운 꿀로
부상하자 그 꿀에 서둘러 그럴싸하게 단지를 입힌 것이다.
현재 고택 내부는 사랑채와 사주문에서 솟을대문으로 이어지는 통로만 개방되고 있으며, 안채
와
사당, 그밖에 건물은 개방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개방 공간은 변경될 수 있음~~) 고택
바깥에 있는 효열각과 비석, 복원된 관선정은 관람이 가능하며, 안채 곳간채에는 고시생들이
머물고 있는데, 이곳을 거쳐간 고시생이 1,000여명,
사법고시 합격자만 50명을 넘는다고 한다.
시내와 멀리 떨어진 외지이고 적막한 곳이라 고시생의
인기가 대단했으나 최근 관광객의 발길
이 증가하면서 고시생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
▲ 행랑채 북쪽에 자리한 장독대의 물결 |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사당을 품은 담장이 있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고택 내부로 인
도하는 너른 길이 나오는데, 그 왼쪽에 낮게 돌담을 두르고 키 작은 나무와 조촐한 텃밭, 씨
간장을 품은 장독대들의 공간이
있어 정겨운 분위기를 우려낸다. 그 장독대 너머로 행랑채와
안채가 있다. |
▲ 사주문에서 안채, 사랑채로 인도하는 너른 길
집 내부에 이렇게 넓은 길이 있다니? 집이 정말 넓기는 넓다. 조선과 왜정 때
지어진 어지간한 큰 기와집을 능가하는 규모로 완전 조그만 궁궐 같다.
▲ 사당(祠堂) |
양반가는 보통 집 내부에 가묘(家廟)라 불리는 사당을 갖추고 있는데, 이곳 역시 예외는 아니
다.
이곳 사당은 3칸 규모의 사당과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재실<齋室, 제수(祭需)채라고도 함>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당과 재실이 복도채로 연결되어 완전 한 몸처럼 되어 있어
자연히 'ㄱ'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제수채와 복도채를 둔 사당은 거의 흔치 않은 케이스로 복도 폭은 1.1m이며, 사당
각
칸 앞에는 시멘트몰탈로 이루어진 디딤돌이 있는데, 이는 건립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사당을
오래도록 보존하고자 그 시절 새로운 건축 재료가 시도되었다.
사당 주위는 돌담으로 꽁꽁 둘렀으며, 사당으로 인도하는 솟을삼문은 굳게 잠겨져 있는데, 선
씨 집안의 선조를 봉안한 공간이라 일반에는 공개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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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당의 솟을삼문(三門) |
▲ 'ㄷ'자로 이루어진 행랑채 |
▲ 안채 북쪽 |
사당 남쪽에는 안채와 행랑채가 있다. 돌담으로 주변을 빙 둘러 눈으로 하얗게 바래진 지붕과
집 윗도리만 보일 따름인데, 이곳은 선씨 일가의 생활 공간으로 내부 관람은 통제되어 있다.
그러니 그들의 사생활과 재산 보호를 위해서라도 억지로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안채는 사랑채 동쪽에 자리하여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사랑채와 모습과 구조, 규모가 똑같
다. 그러니 괜히 안채를 기웃거려 안좋은 소리 듣지 말고 그냥 사랑채를 보면 된다. 집 모습
은 '工' 구조로 이 땅의 한옥 안채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안채를 받치고 있는 기
단(基壇)은 사랑채보다 1단 낮은 2단짜리 석축으로 가운데 4칸짜리 대청을 끼고 왼쪽이 안방,
오른쪽이 건너방이다. 건물 중앙에 마루가 있고, 무려 9개의 온돌방을
갖추고 있으며, 부엌은
큰살림에 걸맞게 상당히 크고 위에 다락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앞뒤에
달린 툇마루가 복도
역할을 하여 모든 방과 부엌으로 이동할 수 있다.
안채 옆에는 'ㄷ'모양의 중행랑채를 두어 안채를 가리고 있는데, 그 사이로 조그만 안마당을
만들었고, 행랑채 남쪽 끝에 안대문을 두었다. 안대문 밖에는 담이 가로질러 있어서 바깥 대
문에서 안채로 가려면 'ㄹ'자로 꺾어 들어가야 했다.
행랑채 옆에는 쌀과 재물을 보관하던 곳간채가 있는데, 1칸 또는 1칸 반, 2칸 간격으로 있었
다. 허나
세월이 흐르면서 더 이상 쌀과 재물을 보관할 필요가 없게 되자 이들을 손질하여 고
시생들의 숙식 공간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곳이 세상에 널리 알려짐에 따라 관광/답사 수요가
늘면서 고시생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도 속세의
때를 크게 탄 모양이다. |
▲ 반쯤 열린 사랑채 중문
▲ 우당고택의 백미, 사랑채 |
안채 서쪽에는 고택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사랑채가 있다. 안채와 같은 '工' 구조로 주위를
돌담으로 둘렀는데, 동쪽과 남쪽, 북쪽에 바깥과 사랑채를 이어주는 문을 냈으며, 남쪽에는
넓게
뜨락을 닦았다. 그리고 서쪽과 서남쪽, 동쪽, 북쪽 공터에는 소나무와 갖은 화초를 심어
사랑채
주변을 아름답게 꾸몄다.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2고주 5량가로 3단으로 싹둑 다듬
어진 석축 위에 큼직한 집을 세우고 8각으로 다듬은 화강암 주춧돌로 둥근 바깥 기둥을 받쳐
들고
있다. 집 구조는 안채와 같으며 가운데에 대청마루를 두고 그 좌우로 온돌방 8개, 창고,
부엌을
두었는데, 앞뒤로 툇마루(퇴칸마루)를 두어 일종의 통로를 두었다. 툇마루에는 난간을
둘렀는데,
난간의 모양이 섬세하며, 대청에는 사분합문(四分閤門)을 설치했다. 처마는 부연이
없는 홑처마로 서까래가 길다. 그리고 합작지붕의 박공면과 마루 밑은 붉은 벽돌로 쌓았는데,
이들은 나중에 손을 댄 것이다.
이곳은 일반에 공개된 공간으로 찻집과 전통체험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평일이라 사람이 없
다보니 거의 닫혀있다. (주말에는 북적댄다고 함) 그래서 굳이 내부에는 들어가지 않고 소심
하게
바깥만 둘러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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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치 있게 자라난 사랑채 소나무 |
▲ 이제 무늬만 남은 사랑채 서쪽 우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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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 동쪽 부분 |
▲ 사랑채 뒷쪽(북쪽) |
▲ 사랑채 정면에 걸린 '위선최락(僞善最樂)' 현판의 위엄 |
사랑채 정면에는 파란 글씨로 쓰여진 '위선최락' 현판이 걸려있다. 글씨가 마치 살아서 율동
을
부리듯 필체의 힘이 대단한데 '위선최락'이란 '선을 베푸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란 뜻
으로
선영홍/선정훈 부자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 좌우명을 말로만 끝내지 않고 평생 실천하고 살았다. 지역 사람들과 전통 유학을
배우고 지키려는 인재들을 위해 많은 재산을 내던진 것이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송덕비와 시
혜비(施惠碑)까지 세워 그들을 기리겠는가?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위인이자 성인군자라 할만
하다.
이런 상류층이 많아야 이 땅도 정말 희망이 있을 것인데 이 땅의 상류층과 권력층들은 어찌된
것이 하나같이 치졸하고 욕심들이 과한지 모르겠다. (특히 친일매국노의 후손들과 친일 패거
리들, 20세기 중/후반 독재정권 패거리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없는 사람들을 등쳐먹고,
백성
들 등골 빼먹고, 공기업과 도시, 나라까지 말아먹는 걸 예사로 여기니 말이다.
허나 그 치졸한 작자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선정훈 부자가 '위선최락'을 실천하고자 많
은
돈을 썼다. 그렇다면 그들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받기만 했을까? 전혀 그
렇지가 않다. 소작농은 소작농대로, 선정훈이 세운 대동상사 사람들은 역시 그들대로 열심히
살며
그를 도왔고, 지역 사람들도 그들 일가에게 호의적이었다. 또한 그들의 지원을 받아 공
부한 인재들은 사회 곳곳에 진출했으니 그들로 인해 선정훈 일가의 이름은 더욱 크게 빛을 발
하는
것이다. 그러니 크게 보면 서로
상부상조하며 살아간 것이다. 선정훈 부자도 그들의 도
움을 크게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 계속 집안이
번영을 하고 있고, 그들의 덕을 받은 사람들도
무탈하게 지내고 있다. 반면 이 땅 대부분의 상류/권력층들은 거의 일방적으로 뜯어먹기만 하
지 상부상조할 줄을
모른다. 그러니 대다수의 백성들은 빈곤해지고, 상류/권력층의 배때기는
더욱 짙어만 간다. 그들에게 있어 '위선최락'은 '그게 뭐임? 먹는 거임? 그런 건 빨갱이들이
나 하는 거야!!' 하며 현판을 깨부실 것이다.
사랑채에는 '위선최락' 현판 외에도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도 있었다. 이것은 해남 대흥
사(大興寺)에 있던 추사 김정희의 무량수각 현판을 6.25 이후에 모각한 것으로 사랑채에 당당
히 걸려있었다. 허나 우당고택이 천하에 크게 존재감을 드러낸 이후, 찾는 이가 부쩍 늘었고
그
속에 불온한 무리까지 섞여서 들어오면서 2008년 2월 13일과 14일 사이 도난을 당하고 말
았다.
아직까지 현판의 행방은 오리무중이고, 그의 빈자리는 여전하다. |
▲ 솟을대문에서 바라본 사랑채 외곽 (담장과 중문, 사랑채)
사랑채 너머로 이곳의 든든한 후광이자 주산(主山)인 옥녀봉(玉女峯)이 바라보인다.
▲ 가옥의 남쪽 대문인 솟을대문
사대부 기와집 대문의 품격이 느껴진다. 대문 바깥에는 너른 공터와 텃밭이
있으며,
서남쪽 소나무 숲에는 효열각과 3기의 비석이 서 있다. 대문
주변에는
바깥행랑채와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으나 6.25 전쟁 때
파괴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대문과 돌담만 남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