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116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회색의 계절’]
회색의 계절
옷장 속에서
삼 년 전 입던 반팔 티셔츠를 꺼내 걸쳤다
아직도 어깨 부근에 희미한 자욱하나 남아있다
어느 시인의 핏자국이다
문화는 없고 문명만이 번질한 오거리를 지났다
새들이 대오를 지어 날아가고 있다
어디로 날아가는 걸까
아직도 원형을 고집하는 핸들을
정지선 앞에서 우측으로 꺾었다
작은 골목길은 텅 비어 있다
콘크리트 담장 밑에서 멈추었다가
얼른 나무 밑으로 갔다
국세청에서 보건복지부로 옮긴 느낌이다
차에서 내려 적막한 골목을 뛰어갔다
허공을 다시 보았다
새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참았던 오줌이 미치도록 마려웠다
그는 왜 내 어깨에 코피를 쏟았는가
삼 년이 지났어도 그의 시는 실종상태다
문득 그가
날아간 새떼의 우두머리처럼 여겨졌다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회색의 계절」은 한 개인의 소소한 일상적 행위와 시대적·사회적 적막감, 그리고 사라진 존재(시인)에 대한 부채감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현대시입니다.
1. ‘삼 년 전의 핏자국’과 부채감의 기억
시의 출발점은 옷장에서 꺼낸 ‘삼 년 전 반팔 티셔츠’입니다. 어깨 부근에 남아 있는 희미한 자욱은 과거 어느 시인이 쏟은 ‘코피(핏자국)’로 드러납니다. 핏자국은 생명력의 손실이자 고통의 흔적이며, 이를 옷에 묻힌 채 3년을 보냈다는 사실은 화자가 그 기억과 상처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왜 내 어깨에 코피를 쏟았는가"라는 질문은 미안함, 아쉬움, 그리고 갚지 못한 정신적 부채감을 투영합니다.
2. 문명의 가식과 시인의 실종
"문화는 없고 문명만이 번질한 오거리"라는 구절은 작품의 중요한 사회적 배경을 형성합니다. 외형적·물질적 발전(문명)만 화려할 뿐, 정신적 가치나 예술적 온기(문화)는 상실된 냉소적인 현대 사회를 비판합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그의 시는 실종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순수한 시적 열정이나 가치를 추구하던 존재가 문명의 겉치레 속에서 소외되고 잊혀 간 현실을 대변합니다.
3. '회색'의 공간감과 생리적 몰아침
골목길, 콘크리트 담장, 그리고 정지선 등 시 전반을 채우는 이미지들은 제목과 같이 삭막하고 희뿌연 '회색'의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국세청에서 보건복지부로 옮긴 느낌" : 징세와 규제의 중압감을 주는 ‘국세청’(콘크리트 담장)에서 비교적 구원과 돌봄을 상징하는 ‘보건복지부’(나무 밑)로 이동하는 감각을 유머러스하면서도 감각적으로 비유했습니다.
⚫"참았던 오줌이 미치도록 마려웠다" : 관념적인 추상성이나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생리적 욕구라는 지극히 날것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개입시킴으로써 삶의 실제적 무게와 화자의 불안한 심리를 극대화합니다.
4. 새떼와 방향성의 상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떼는 방향을 알 수 없는 삶의 정처 없음을 보여줍니다. 화자는 보이지 않게 된 새떼의 '우두머리'에 실종된 시인을 빗대어 봅니다. 시인은 문명에 휩쓸리지 않고 어디론가 대오를 이끌고 사라져 버린 선구자이자, 회색빛 세상에서 상처 입고 이탈한 외로운 존재로 승화됩니다.
「회색의 계절」은 삭막하고 번지르르한 현대 문명 속에서 실종되어 가는 시적 가치와 타인의 상처를 어깨에 짊어진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쓸쓸한 초상을 감각적이고 위트 있는 언어로 잘 담아낸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