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진의 추억
우리가 어릴 때는 의사가 왕진가는 모습을 더러 볼 수 있었다.
도시에서 떼돈 벌고 있던 유명의사들은 왕진을 안했을 걸로 생각된다.
같은 도시라도 변두리에서 자그만 간판 걸고 하는 의사,
나이가 환갑 정도로 보이는 늙은 의사...
일제시대 유물로 보이는 투박하고 색갈이 바랜 소가죽 가방을 가진 의사,
왕진가는 걸음이 간호원보다 한참 느려 간호원이 잠시 딴 생각하다가는 의사를 앞지른다.
동네 사람들은 그 의사가 현대의학을 공부한 사람인지 한의사인지 구별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고...
보통사람들은 모르기도 하거니와 그런 것 까지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겠지만,
대개 그런 의사들은 일제시대 때 "의학전문학교" 출신이거나,
특히 이북의 "평양의전" 혹은 "평양의대" 출신으로,
난리통에 학적부가 사라지거나 확인을 할 수 없어,
이승만 시대에 어떤 절차를 밟아서 의사자격을 받았던 사람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사실, 의사가 왕진을 가서 환자에게 썩 효과좋은 치료를 해주긴 어렵다.
간단한 대증요법, 식사를 못하니까 수액제 주사, 심하게 아픈 사람에게 진통제 처방을 해주는 정도이다.
그렇지만 거동이 어려운 환자나, 갑자기 너무 심하게 괴로워서 병원으로 가기 힘들어하는 환자를 의사가 찾아가서 써비스를 해주는 일을, 사람들은 아주 고맙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때 그시절 실제로 왕진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그 왕진에 대해 크게 좋게 기억하지 않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직접 경험은 없지만 그 시대에 대한 추측으로,
상당히 비싼 왕진료에 대해 겉으로는 못나타내는 적개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까?
내가 처음 왕진을 다니기 시작했고 가장 많이 왕진을 다녔던 때는 군의관 시절이었다.
첫 해 의무중대장을 할 때에는 중대장으로서의 역할이 반이었기 때문에 자주 나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부임 초기에 그 시골동네에서 한 끝발하는 집의 맏며느리의 초산을 왕진가서 조산원 노릇을 한 것이 소문이 났음인지,
산부인과 왕진을 꽤 다녔었고, 1년 동안에 애기도 넷이나 받았었다.
군의관 2,3년차 때 내가 하숙을 하던 전방기지촌에는 군인가족들도 많았고, 무의촌이라 음식점, 술집, 여관, 다방 등을 운영하는 사람들이랑 거기 일하던 종업원들(주로 술집색시들)이 많이 살았다.
그 기지촌 주위에는 육군보병 7사단, 15사단, 27사단의 예하부대들이 많이 있었고, 부대들마다 군의관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보병부대 군의관들은 바깥출입이 나 만큼 자유롭지 못했고,
또 그 군의관들은 의대를 갖나온 초보들이었는데 비해,
나는 인턴을 마치고 갔으므로 약간은 경험이 더 있었고,
내가 소속된 포병부대는 1군 직할부대라 그 동네에서는 헌병대나 보안대의 간섭을 거의 받지않았고,
나의 전임 군의관들이 그 기지촌의 주치의 비슷한 전통을 쌓아놓았었으므로,
일주일 중 반 이상은 자전거에 군대왕진가방을 싣고 기지촌을 돌아다니며 군인가족과 대민진료를 하는 게 일과의 반이었다.
덕분에 그 기지촌의 유명인사가 되어, 특히 술집색시들의 인기를 많이 누렸었다.
레지던트 2년차 때 무의촌 근무를 할 때에는,
비록 작은 섬이었지만, 멀리 떨어진 농가 까지는 걸어서 한시간 걸리는 곳도 있었고,
하필이면 제일 먼 집의, 곧 장가갈 날자를 받아놓은 젊은 총각이, 농기계에 큰발가락을 찧어 분쇄골절상을 입는 바람에, 보름 정도 매일 왕진치료를 하기도 했었다.
80년대 중반 서울 압구정동에서 개업하고 있을 때는 TV에 걸핏하면 의사가 왕진하는 장면이 나왔었다.
당시에도 그런식의 왕진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사라져가는 때 였는데…
거기 서울의 소문난 부자동네에서 왕진을 꽤나 다녔었다.
왕진료를 얼마나 받아야 할 지 몰라, 내 딴에는 상당히 큰 돈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동료들로부터는 "자선사업하고 다니냐?" 라는 핀잔을 받았었고,
친해져서 가끔 나에게 "개업술"의 충고도 아끼지 않던 단골환자분들로부터는, "선생님은 여-엉 상술이 없어요. 빨리 돈벌어서 더 크게 개업하셔야지, 그렇게 받아서 어떻게 돈벌려고 그러세요?"라는 훈수를 듣기도 했다.
그때 막상 왕진을 가보면, 전화로 간곡히 요청하던 내용과는 전혀 달리,
얼마던지 병원으로 올 수 있는 부잣집 마누라나 영감님이,
"돈의 유세", "허영심", "돈 많은 사람은 작은 불편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심사"로 의사를 집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단 한번,
단골 환자의 고딩 딸아이가 다급하게 전화를 했다.
직감이 있어, 가까운 거리였지만, 승용차를 앰뷸란스 마냥 온갖 불 다 켜고 경적 요란히 울리며 압구정 대로를 신호등이고 나발이고 무시하고 그 집으로 직행했다.
그러나 도착했을 때는 환자는 이미 사망한지 오분은 지난 것으로 보였다.
임파암으로 대학병원을 다니며 가끔 나에게서 대증요법을 받던 분으로, 비교적 괜찮은 상태를 유지하던 분이었었는데...
원 병이 암이었고, 가족들도 마음을 정하고 있어서 소생술은 하지 않았다. 해봐야 별 소용도 없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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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진에 대한 규정
그 즈음 심평원(=의료기관의 의료보험금청구를 심사평가하는 곳)에서 왕진에 대해 요상한 규정을 포고한 걸 보았다.
(아래 심평원의 포고 내용)
첫댓글 올려 주는 글 재미있게 잘 보고 있다,수필집을 내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