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종식 閔宗植 (1861 ~ 1917)은 1861년 3월 4일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1882년 별시 문과 병과 급제 후 예문관 검열 등을 거쳐 고종을 곁에서 모시는 도승지를 맡았다. 1895년 을미사변 후 관직을 버리고 충청도 정산[현재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으로 내려가 은둔했다. 1905년 을사늑약 강제 후 상경해 상소를 올리려고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충청남도 정산으로 돌아왔다.
「슬프다. 저 일본이 병자년(1876) 통상 이후로 갑신년(1884) 10월의 변이 있었고, 갑오년(1894) 6월의 변이 있었고, 을미년(1895) 8월에 이르러 우리 국모(國母)를 시해하였다. 이어서 을사년(1905) 10월에는 우리 정부 대신과 결탁하여 우리 군부(君父)를 협박하고, 5조약을 늑성하여 우리 국권을 점탈(占奪)하였으며, 우리 생령(生靈)을 노예로 하였다. 이에 통분하고 격동한 바 스스로 참을 수가 없어서 일본인을 토벌하여 멸망시키고, 저 5적(賊)을 섬멸하고, 우리 국권을 회복하고, 우리 생령을 구원하며, 종묘와 사직을 존안(尊安)하고 군신상하가 함께 태평을 누릴 계획으로 병오년(1906) 봄에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 일으킬 것을 제창하였다.」
판서의 아들, 참판까지 지냈으나, 을미사변 이후 관직 떠나 항일 운동에 나서
서천읍 공격 점령하고 남포군 제압, 마침내 홍주성을 장악
장악한 홍주성에 입성한 의병들은 모두 1200여명. 다시 뺏으려는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 벌여
일본군들, 야밤에 홍주 성내에 돌입. 민간인들 수 백 명 닥치는 대로 살륙
민종식선생, 일본 경찰 취조에도 당당한 태도. 교수형 받았으나 융희황제 즉위 특사로 석방
낙향 후 의병 봉기를 계획하던 중 1906년 2월 하순 안병찬(安炳瓚), 이용규 등의 요청으로 홍주의병 대장 자리에 올랐다. 가산을 팔아 군자금 2천 원을 마련해 군수품으로 제공하고 의진의 근거지를 정산군 천장리로 삼아 부대 편성을 마쳤다. 1906년 3월 15일 광수장터[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에서 봉기를 시작해 홍주성 공격을 명령했으나 3월 17일 관군의 기습 공격으로 합천 전투에서 패배했다. 5월 9일 홍산군 지티에서 의진을 다시 일으켜 5월 13일부터 5일 간 서천, 비인, 남포 일대에서 전투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사기가 오른 홍주의병을 이끌고 5월 19일 홍주성 공격을 개시했다. 1천여 명의 의병은 홍주의 삼신당리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기고 구식 화포 2문을 선두에 내세워 홍주성을 포위 공격했다. 홍주성 점령 후 총기와 탄약, 우편국의 금품을 확보하고 새로운 조직을 편제하는 한편, 을사오적과 이토 히로부미 처단의 당위성과 의병봉기 이유 등을 밝힌 상주문을 고종에게 올리게 했다.
그러나 5월 31일 일본군 보병 제60연대 대대장 다나카[田中] 소좌가 이끄는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소대, 그리고 전주수비대 1개 소대의 공격으로 홍주성이 함락되었다. 홍주성 전투 패퇴 후 간신히 성을 빠져나와 은신처를 옮겨가며 재기를 계획하다가 1906년 11월 20일 체포되었다. 공주부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12월 7일과 25일에 모두 4차례의 심문을 받았다. 1907년 7월 3일 “정사(政事)를 변경하기 위하여 난(亂)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가 다음날 종신유배형으로 감형된 후 진도 유배형에 처했다. 진도에서 유배 생활을 한지 5개월 뒤인 1907년 12월 순종이 즉위하면서 특사로 석방되었다. 1917년 6월 26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