琺寶壇經 27 <眞假 진가>진가
大師先天二年八月三日 滅度 七月八日 喚門人告別 大師先天元年 於新州國恩寺造塔 至先天二年七月告別 大師言 汝衆 近前 吾至八月欲離世間 汝等 有疑早問 爲汝破疑 當令迷者盡 使汝安樂 吾若去後 無人敎汝 法海等衆僧 聞已 涕淚悲泣 唯有神會 不動亦不悲泣 六祖言 神會小僧 却得善不善等 毁譽不動 餘者 不得 數年 山中 更修何道 汝今悲泣 更有阿誰 憂吾不知去處在 若不知去處 終不別汝 汝等悲泣 卽不知吾去處 若知去處 卽不悲泣 性體 無生無滅 無去無來 汝等 盡坐 吾與汝一偈 眞假動靜偈 汝等 盡誦取 見此偈意 汝與吾同 依此修行 不失宗旨 僧衆禮拜 請大師留偈 敬心受持 偈曰
一切無有眞 不以見於眞
若見於眞者 是見 盡非眞
若能自有眞 離假卽心眞
自心 不離假 無眞 何處眞
有情 卽解動 無情 卽不動
若修不動行 同無情不動
若見眞不動 動上 有不動
不動 是不動 無情無佛種
能善分別相 第一義不動
若悟作此見 則是眞如用
報諸學道者 努力須用意
莫於大乘門 却執生死智
前頭人相應 卽共論佛語
若實不相應 合掌令歡喜
此敎 本無諍 無諍 失道意
執迷諍法門 自性 入生死
대사선천이년팔월삼일 멸도 칠월팔일 환문인고별 대사선천원년 어신주국은사조탑 지선천이년칠월고별 대사언 여중 근전 오지팔월욕리세간 여등 유의조문 위여파의 당령미자진 사여안락 오약거후 무인교여 법해등중승 문이 체루비읍 유유신회 부동역불비읍 육조언 신회소승 각득선불선등 훼예부동 여자 부득 수년 산중 갱수하도 여금비읍 갱유아수 우오부지거처재 약부지거처 종불별여 여등비읍 즉부지오거처 약지거처 즉불비읍 성체 무생무멸 무거무래 여등 진좌 오여여일게 진가동정게 여등 진송취 견차게의 여여오동 의차수행 불실종지 승중예배 청대사유게 경심수지 게왈
일제무유진 불이견어진
약견어진자 시견 진비진
약능자유진 리가즉심진
자심 불리가 무진 하처진
유정 즉해동 무정 즉부동
약수부동행 동무정부동
약견진부동 동상 유부동
부동 시부동 무정무불종
능선분별상 제일의부동
약오작차견 즉시진여용
보제학도자 노력수용의
막어대승문 각집생사지
전두인상응 즉공론불어
약실불상응 합장령환희
차교 본무쟁 무쟁 실도의
집미쟁법문 자성 입생사
대사께서는 선천 2년 8월 3일에 돌아가셨다. 7월 8일에 문인들을 불러 고별하시고, 선천 원년에 신주 국은사에 탑을 만들고 선천 2년 7월에 이르러 작별을 고하셨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나는 팔월이 되면 세상을 떠나고자 하니 너희들은 의심이 있거든 빨리 물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의심을 부수어 마땅히 미혹을 다 없애어 너희들로 하여금 안락하게 하리라. 내가 떠난 뒤에는 너희들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으리라."
법해를 비롯한 여러 스님들이 듣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으나, 오직 신회만이 꼼짝하지 아니하고 울지도 않으니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린 신회는 도리어 좋고 나쁜 것에 대하여 평등함을 얻어 헐뜯고 칭찬함에 움직이지 않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구나.
그렇다면 여러 해 동안 산중에서 무슨 도를 닦았느냐? 너희가 지금 슬피 우는 것은 또 누구를 위함인가? 나의 가는 곳을 너희가 몰라서 근심하는 것인가? 만약 내가 가는 곳을 모른들 마침내 너희에게 고별하지 않겠느냐? (만약 내가 가는 곳을 모른다면 너희들과 이별을 못 하지 않겠느냐?)
너희들이 슬피 우는 것은 곧 나의 가는 곳을 몰라서이다. 만약 가는 곳을 안다면 곧 슬피 울지 않으리라.
자성의 본체는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느니라.
너희들은 다 앉거라. 내 너희들에게 한 게송을 주노니, '진가동정게(진가동정게)'이다. 너희들이 다 외어 이 게송의 뜻을 알면 너희는 나와 더불어 같을 것이다. 이것에 의지하여 수행해서 종지를 잃지 말라."
스님들이 예배하고 대사께 게송 남기시기를 청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아 가졌다.
게송에 말씀하셨다.
모든 것에 진실이 없나니 진실을 보려고 하지 말라.
만약 진실을 본다 해도 그 보는 것은 다 진실이 아니다.
만약 능히 자기에게 진실이 있다면 거짓을 떠나는 것이 곧 마음의 진실이다.
자기의 마음이 거짓을 여의지 않아 진실이 없거니, 어느 곳에 진실이 있겠는가?
유정은 곧 움직일 줄을 알고(유정은 동의 풀림이요) 무정은 움직이지 않나니
만약 움직이지 않는 행을 닦는다면 무정의 움직이지 않음과 같다(부동의 행을 닦는다면 무정부동과 같다. 완전한 부동의 경지는 정의 기미조차 없다).
만약 참으로 움직이지 않음을 본다면
움직임 위에 움직이지 않음이 있나니(동 위에 부동이 있다. 비록 구르는 마음이라 하더라도 그 위에는 조용한 부동의 경지가 있다)
움직이지 않음이 움직이지 않음이면 뜻도 없고 부처의 씨앗도 없도다(완전한 부동의 경지는 정도 없고 자각의 씨앗도 없다. 자아 개념과 인식을 초월한 절대고적의 경지이다).
능히 모양을 잘 분별하되 첫째 뜻은 움직이지 않는다.
만약 깨쳐서 이 견해를 지으면 이것이 곧 진여의 씀이니라(진과 가, 동과 부동, 정과 비정, 자각과 타각 등의 상대적 비교 경지를 초월한 절대적 경지).
모든 도를 배우는 이에게 말하노니 모름지기 힘써 뜻을 써서
대승의 문에서 도리어 생사의 지혜에 집착하지 말라.
앞의 사람이 서로 응하면 곧 함께 부처님 말씀을 의논하려니와
만약 실제로 서로 응하지 않으면 합장하여 환희케 하라.
이 가르침은 본래 다툼이 없음이라 다투지 않으면 (어찌) 도의 뜻을 잃으리오(다투면 도의 뜻을 잃는다. 그러므로 다투지 말라).
미혹함에 집착하여 법문을 다투면 자성이 생사에 들어가느니라.
♤ 송계 소주
임종게의 개념어들은 진과 가, 유정과 무정, 해동과 부동이다. 법문이 반어법과 비유법이다. 비유의 굽이를 두세 바퀴 빙 둘러서 가지만 직설의 요점은 '부동의 진심', 흔들리지 않는 자기의 참 마음을 간직하란 것이다.
동과 정은 상대적이다. 여기서 혜능은 '정'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부동'이라 한다. 이 부동은 완전한 정적이 아니라 동이 멈춘 상태이다. 멈춘 동은 언젠가 다시 움직여 동이 된다. 인간의 마음과 삶도 동과 부동의 연속이다. 동만 계속되는 것도 아니요 부동만 계속되는 것도 아니다. 동만 계속되면 결국엔 과하여 지치거나 이탈한다. 마찬가지로 부동만 계속되어서는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생도 그렇고 도도 그렇듯이 동과 부동이 갈마드는 상태의 연속이다. 그 연속이 완전히 멈추면 곧 죽음이다.
혜능의 도가 어찌 죽음, 즉 부동만을 위한 것이겠는가. 어리석은 사람들이 오직 동만을 위하고 추구하기 때문에 그 과욕으로 인해서 피해를 입거나 화를 당함을 경계하기 위하여 동과 부동의 갈마듬을 설하고 있음이다.
소위 도통, 도를 통하면 부동정적 열반의 경지에 든다고 한다. 물론 이 열반이 죽음의 고요한 정적의 상태를 말함은 아니지만, 자칫 도통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무념무상의 부동의 경지를 현실과 현상으로부터의 완전한 이탈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해탈 열반은 죽음의 정적이 아니라 초월의 경지를 말한다. 그래서 불타는 득도한 연후에 일신의 평안과 정적을 탐하지 않고 팔십 평생을 설법과 중생 구제에 노력했다. 불타는 동과 부동을 적절하게 갈마들이며 살았다.
혜능은 사후에 제자들이 자기의 법을 놓고 쟁론을 벌이다가 여러 지파로 분열할 것을 크게 염려했다. 그것은 자기가 젊은 시절부터 신수 문하 승려들과 경쟁을 벌이면서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성현이든 그의 사후엔 분열, 분파가 필연이다. 대대로 제자가 한 명 뿐이라면 분파될 일이 없지만 이 임종게에 불려가서 들은 우수제자가 십 명이다. 그들이 각각 어느 한 지역을 분점해서 자기의 법을 세워나갈 것이기 때문에 백년 후에는 십여 문중이 확연히 분립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스승 혜능의 법문 해석에 서로 이견이 발생하여 갑론을박 쟁론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혜능이 임종게에서 마지막으로 강조하여 당부했지만, 생각과 관점이 다른 제자들은 종지를 다른 방법으로 펼치려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