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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걸 丁傑
정연 丁淵
정흥록 丁弘祿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최고의 전사
명종 11년(1556년) 2월 27일 사간원에서 전라 우수사의 만행을 간하는 보고가 올라왔다.
“전라우도 수사 최호(崔豪)는 왜적이 몰래 초도(草島)에 정박하였을 때 적의 선봉을 보고는 지레 겁을 먹고 후퇴하여 피하고 진격하지 않았고, 남도포 만호(南桃浦萬戶) 정걸이 홀로 진격하여 힘껏 싸워서 전선(全船)의 왜적을 전부 잡았습니다. 그런데 최호가 공을 자기에게 돌려서 가선대부(嘉善大夫)에까지 올랐으므로 남방 사람들이 지금도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
정걸이 왕조실록에 실질적으로 등장하여 조정의 주목을 받은 첫 순간이다. 정걸은 이 때 죽음을 겁내지 않고 적진에 홀로 뛰어들어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나이 42세였다.
그는 1544년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 봉사, 선전관, 서북면 병마만호를 지낸 뒤 을묘왜변 때 달량성(達梁城)에서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남도포(南桃浦) 만호가 되었으니 오로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전형적인 무장이었다.
그는 이순신을 만나기 전에는 부안현감을 거쳐, 종성부사로 있으면서 여진 정벌과 국경 수비에 공을 세웠고 경상우도와 전라좌우도 수군절도사, 전라도 병마절도사 등의 요직을 거침으로써 전술 전략의 최고 전문가로 자리매김 했다. 그리고 1591년 이미 그의 나이가 일흔일곱에 이르자 현직을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에 전라좌수영 경장(조방장)으로 임명 받았다.
일흔이면 중앙정부에선 임금이 칠순이 된 조정 대신에게 궤장(지팡이와 의자)를 내리는 전통이 있었는데 정걸은 아무런 대접도 없이 백전노장으로 전장에서 적과 맞부딪쳐야 한 것이다.
이순신의 참모이자 스승이 되다.
그가 어떤 장수 보다 돋보이는 장면은 조선 수군의 핵심 판옥선을 건조하고 대포를 실어 실전에 활용할 수 있도록 연습시킨 점이다. 정걸은 당시 판옥선 11척과 정병 1,000명 이상의 실전 가능한 병력을 키워내 이순신을 도와주었다. 그가 있었기에 전라좌수영은 실전에 투입돼 승전을 거둘 수 있었고 이순신도 이름을 빛낼 수 있었다.
임진란이 일어나고 충청도, 전라도의 수비가 긴박해지면서 이순신은 여러 참모와 부장들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한 때였다. 이미 팔순에 가까운 노장 정걸은 사실 이순신 보다. 20년 앞서 수군절도사를 여러 번 했으며 육전과 수전에 달통한 최고의 전술가였다. 그러나 명분을 중시하던 당시로서는 자신보다 후배의 지휘를 받으려 들지 않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그럼에도 정걸 장군은 이순신의 전술적 스승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나라를 지켜냈다. 물론 자신 보다 무려 31세나 연배인 정걸을 불러내 함께 첨전 토록 한 이순신의 용병술도 대단한 것이었다. 백전노장과 해전경험 전무한 이순신의 만남. 그 실험적인 결과는 놀라운 대승으로 나타났다.
그는 1592년 5월 7일, 이순신 함대의 첫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전공을 세웠고 7월의 한산도 대첩에 이어, 9월 1일의 부산포해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그와 함께 전투를 치룬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정걸은 80세의 나이에도 나라 일에 힘을 바치려고 아직도 한산도의 진중에 머물렀다.”면서 “그에게 은사가 내려진다면 군사들의 마음이 필시 감동 할 것이다.”라고 치하했다. 당시 왜군들은 정걸 장군이 전선의 갑판을 궁(弓)자형으로 만들고 철로 만든 불화살과 큰 대포 등을 만들어 공격하자 장군의 이름만 들어도 놀라 도망갔다고 전해진다.
권율을 도와 행주대첩 승리에 기여하다.
정걸은 이후 조정의 공훈을 탐하지 않고 또다시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1593년 2월 행주전투에 뛰어든다. 그는 평양에서 퇴각한 왜군 3만여 명의 병력과 권율 장군이 이끄는 1만여 명의 병력이 서로 밀고 밀리면서 혈전 속에 들어가 있었을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록은 이렇게 그 당시를 기록했다.
“그 날 묘시부터 신시에 이르기 까지 싸우느라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가는데 마침 충청수사 정걸이 화살을 운반해 와 위급함을 구해주었다.”
그가 배를 몰고 달려가 화살을 공급해 주지 않았다면 권율은 패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걸 장군은 1595년에 모든 관직에서 퇴임하고 2년 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다음 해 2월 이순신도 노량해전에서 순국하니 조선은 명장 두 사람이 나란히 세상을 등지는 큰 손실을 입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걸의 아들 정연과 손자 정흥록도 정유재란 때 목숨을 잃어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3대가 순절하는 투혼으로 조정과 백성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이름은 지금까지 길이 전해오나 그를 도운 정걸의 이름은 거의 잊혔고 그를 기리는 이들도 없으니 애석한 일이 아닌가.
역사는 재해석 되어야 한다. 정걸 장군의 이름도 재평가 되어야 한다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고흥은 옛 지명이 흥양으로 사면이 거의 바다를 끼고 있어, 전라도좌수영 5관 5포 중에 1관(고흥) 4포(사도진, 여도진, 발포진, 녹도진)를 차지하고 있는 군사요충지였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전란이 일어나기 1년(1591) 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주로 고흥지역에 있는 1관 4포를 순회하며, 군비확충 및 판옥선을 개조해서 거북선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1관 4포의 전력은 판옥선 11척과 발포진에 거북선 1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수군 병력은 1100∼1400여 명으로 임진전란이 발발하자 옥포해전, 사천포해전, 한산도대첩, 부산포해전 등에 참전하여 왜선 330여 척을 격파한 공훈이 이순신 장군에게 모두 돌아가고 있지만 실제로 아군 사상자 211명 중 131명이 고흥출신 수군들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이순신 장군과 함께 활약했던 丁傑 장군은 그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史家들은 철저히 외면하거나 은폐 축소시켜 왔고, 더 나아가 중학교 국정 국어교과서나 '해군군사연구실'에 발간한 "임란수군활동연구론"에 정걸 장군 이름을 鄭傑로 잘못 기재하는 등 임진 전란사를 왜곡시킨 부분들이 발견되고 있다.
정걸 장군은 1514년에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후동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30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부안현감, 전라좌·우수군사와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전라좌수영 경장(조방장)으로 임명받아 이순신, 나대용 등과 함께 거북선을 만든다.
* 정걸 장군의 약력
1514년(중종5)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출생 1544년(중종39) 무과급제
1553년(명종8) 서북병마만호(평북 의주) 1555년(명종10) 남도포수군만호(전남진도)
1556년(명종11) 부안현감 1561년(명종13) 온성도호부사
1568년(선조1) 종성부사 1572년(선조5) 경상우도수군절도사
1577년(선조10) 전라좌도수군절도사 1578년(선조12) 경상우도수군절도사
1581년(선조14) 절충장군 1582년(선조15) 장흥부사
1583년(선조16) 전라도병마절도사 1584년(선조17) 창원부사
1587년(선조20)전라우도수군절도사 1592년(선조25)전라좌수영경장(임란 발발)
1592년(선조25) 충청도수군절도사 1593년(선조26) 전라도방어사
1597년(선조30) 83세 일기로 순절
1592년 4월 14일 왜군에 의해 釜山鎭이 맥없이 무너지면서 경상도우수사였던 원균 장군이 이순신 장군에게 전라도수군을 급히 경상도로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쉽게 결정을 내릴 사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녹도만호 鄭運과 지도만호 송희립이 나서서 말하기를 "적을 토벌하는 데는 전라도와 경상도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야 이곳도 보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전라좌수영을 텅 비워두고 출전하게 된다.
5월 7일 정오부터 시작된 옥포해전은 흥양현감 배흥립, 녹도만호 정운, 사도첨사 김완, 여도권관 김인영, 발포만호 황정록 장군 등 1관 4포 장수들과 수군들이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모두 참전하게 되는데, 이 때 정걸 장군은 경장(조방장, 조전장)의 임무를 부여받고 이순신 장군에게 많이 협력한 사실들이 '호남절의록'에 보면 "새벽 전투에서 정걸 장군이 또 와서 협력하고 싸워서 적을 막고 호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걸 장군이 사천포해전은 참전하지 않고 본영(전라좌수영)을 지켰다는 내용이 '이충무공전서'에 보면 "이순신의 군관 전만호와 윤사공을 유진장으로 정해두고, 조방장 정걸은 좌도(전라)의 각 진과 포구를 지휘할 사람이 없으므로 흥향현(고흥군)에 머물러서 사변에 대비하여 호응하도록 하고서 5월 29일 홀로 전선 23척을 거느리고 우후 이몽귀와 함께 한 걸음 앞서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7월 8일 한산도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은 견내량에 머물러 있는 왜선 73척을 한산도로 유인하여 학익진 전법을 써서 왜선 59척을 격파하는 등 대승을 거둔다. 이 때 정걸 장군에 대해 '충무공전서'는 "정걸은 왜적과 싸우다가 포탄을 맞아 전상을 당했다"라고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다.
9월 2일 부산포해전은 왜선 500여 척과 맞서 싸워 100여 척을 격파하여 해상을 완전장악하고 왜군 보급로를 차단시켜 왜군들에게 큰 타격을 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부산포해전에 참전한 정걸 장군에 대해 '이충무공전서'에는 "남쪽 해안의 세 수군절도사(이순신, 이억기, 원균), 조방장 정걸 등은 연합작전을 펴서, 왜적을 모두 물리치고 적의 북진을 완전히 차단한 전과를 올렸으나 이 작전에서 정걸 장군의 말을 듣지 않은 鄭運이 전사한 손실을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녹도만호였던 정운 장군 전사에 대해 "우리 함대가 부산으로 진군했는데 특히 녹도만호 정운과 조방장 정걸의 군사가 먼저 도착했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자 정걸은 정운에게 날도 저물고 적의 기세가 등등하니 후퇴했다가 내일 다시 공격하는 것이 옳다고 했는데도 정운은 크게 노하며 적과 더불어 같이 살 생각이 없다고 하면서 그대로 적진 속으로 뛰쳐 들어가 싸우다가 왜적의 총탄에 가슴을 맞고 죽었다"고 기록했다.
배로 화살 날라 행주대첩 승리에 공헌
정걸 장군은 옥포해전, 한산대첩, 부산포해전 등에서 대승을 거둔 견인차 역할을 하고도 일체의 공훈을 탐하지 않고 또다시 충청수군절도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이 때(1593년 2월경) 행주산성에서는 평양에서 퇴각한 왜군 3만여 명의 병력과 권율 장군이 이끄는 1만여 명의 병력이 서로 밀고 밀리면서 대혈전을 벌인다.
행주대첩에서 결정적 승리를 이끌어 낸 정걸 장군에 대해 '조선실록'에는 "그 날 묘시에서부터 신시에 이르기까지 싸우느라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가는데 마침 충청수사 정걸이 화살을 운반해 와 위급함을 구해주었다"고 했고 '연려실기술'에는 "전투 중에 화살이 다 되어 진중이 위기인데 정걸이 배 두 척에다가 화살을 실어와서 같이 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행주대첩에서 승리한 정걸 장군은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권율 장군, 김천일 장군과 함께 왜적을 섬멸하러 나섰지만, 오히려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방해가 된 사실들이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관군이 기내(서울, 경기도)에 나누어 웅거하면서 권율의 군사를 위시하여 수시로 적을 공격하니 왜적이 멀리 나가 땔감을 구할 수 없었다. 창의사 김천일, 전라수사 이빈, 충청수사 정걸이 수군을 이끌고 한강어구에 진격하여 하삼도의 관군과 의병이 왜적의 진로를 차단함으로서 적의 기세가 점점 꺾였다. 그런데 명나라 군사가 이미 멀리 물러가서 대대적으로 진공할 수 없었으am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한스럽게 여겼다."
이렇게 힘겨운 싸움 끝에 1593년 4월 20일 서울을 탈환한 정걸 장군은 한강으로 도망가는 왜적을 끝까지 쫓아가 섬멸하자 이에 겁먹은 왜적은 화의편지를 보낸다.
'임진전란사'에는 "왜장 소서행장은 화의를 위해서 현소를 시켜 김지귀, 김선경 등을 용산에서 만나보도록 하였다. 그래서 한강에서 만나 본 이들은 아무런 책임이 있는 인물이 아니므로 소서행장의 뜻만 전달하고, 2통의 서신 중에서 1통은 조선 예조 윤근수에게 보내는 것이었고 다른 1통은 충청수사인 정걸이 거느리고 있던 조선수군에게 보내온 것이었다. 이 때 도체찰사 유성룡은 동파에 있었는데 정걸로부터 이 서신을 받아보고서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 것을 곧 부총병 사대수에게 보내고 말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소서행장이 정걸 장군에게 보낸 화의 편지가 유성룡에 의해 조정에 전달하지 않고 오히려 명나라 군대에게 정보를 유출함으로서 조정이 명나라 군대의 수중에 들어가게 만들고 왜적들이 쉽게 도망가도록 퇴로를 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충청수군 이끌어 한산도에서 이순신 도와
5월 초순 서울에서 퇴각하는 왜적들이 남해안쪽으로 집결하자 이순신 장군은 정걸 장군의 도움을 요청하는 긴급한 장계를 두 차례 올린다. 5월 10일에 보낸 장계 내용은 "삼가 아뢰옵니다. 도망가는 적을 섬멸해야 하는 이 때 병력이 극히 외롭고 약함은 참으로 딱하고 걱정되는 바이기도 하며, 또한 적의 도망해 돌아감이 더딜지 빠를지 예측하기도 어렵사오니 엎디어 청하건데 충청도 해군이 밤낮을 가리지 말고 뒤따라와서 힘을 합해 적을 무찔러 하늘에 닿는 치욕을 씻게 하소서"라고 쓰여 있다.
6월 1일 한산도에 도착한 정걸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합세하여 한산도를 지키자 왜적들은 이에 놀라 창원에서 함안을 거쳐 성영으로 퇴각을 한다. 이를 지켜본 이순신 장군은 장계를 올리기를 "前수사 정걸은 80세의 나이에도 나라 일에 힘을 바치려고 아직도 한산도의 진중에 머물렀다고 들었다. 이 분에게 은사가 내려진다면 군사들의 마음이 필시 감동할 것이다"라고 높이 치하했다.
12월경 전라방어사로 부임한 정걸 장군은 남서해안을 오가며 왜적토벌에 나섰는데 '호남절의록'에 보면 "정걸 장군은 전선의 갑판을 弓자형으로 만들고 철로 만든 불화살과 큰대포 등을 만들어 적을 공격하고 쳐부수니 적들은 장군의 이름만 들어도 서로 놀래 도망갔다. 선무원종공신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정걸 장군은 1595년에 모든 관직에서 퇴임하자 선조 임금은 정걸 장군과 말년까지 함께 지낼 선비 6명을 하사하고 7인정을 세운다.
83세로 순절... 기념비조차 남아 있지 않아
포두면 길두리에 세워진 7인정은 조선 말까지 있다가 없어졌으며, 정걸 장군은 귀향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여름 향년 83세 일기로 순절하였다. 그의 아들 정연은 영광군수를 지내다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흥에서 의병을 모아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전투에서 1598년에 순절하였고, 그의 손자 정홍록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흥덕전투에 참전했다가 1599년에 순절하여 3년 동안 3대가 순절하고 마지막 남은 증손자 정엽이 성장하여 독자집안 손을 400여 년간 이어내려 오고 있다.
[출처] 이순신의 스승 정걸장군|작성자 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