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토산(兎山)은 황해도 금천군(金川郡)과 신계군(新係郡)에 걸쳐 있었던 옛 지명이다. 백제와 고구려에 속해있던 때는 오사함달현(烏斯含達縣) 또는 월성현(月城縣)으로 불렸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 경덕왕이 토산(兎山)으로 고쳤다.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장단현(長湍縣)에 속하였다가, 1062년(문종 16) 개성(開城)의 직할이 되고, 예종 때 감무(監務)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 현감(縣監)을 두어 황해도에 이속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토산군(兎山郡)으로 승격하였으며,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일부는 신계군(新溪郡)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금천군(金川郡)에 편입되었다. 1952년에 금천군의 일부 지역을 독립시켜 토산군을 신설하였다.
성씨의 역사
신라종성(新羅宗姓)인 월성김씨는 관향지(貫鄕地)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한 계통은 경순왕의 셋째 아들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鐘)의 16세손 김남길(金南吉)의 아들 형제 중 장자인 김이진(金以珍)을 일세조로 하고 있다. 그는 누대로 월성에 세거하던 사족(士族)의 후예로 벼슬을 지내며 명문으로서의 기틀을 굳건히 다져왔다.
다른 한 계통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15세손 김광우(金光佑)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덕천군수(德川郡守)로 나가 있으면서 직간(直諫)을 하다가 평안도(平安道) 성천(成川)으로 유배(流配)되어 그곳에서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김광우를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조상의 연고지인 월성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문헌(文獻)에 전(傳)하는 바에 의하면 평안도(平安道) 성천군(成川郡) 통선(通仙)에 세거(世居)하던 토산김씨(兎山金氏)의 후손들이 월성김씨로 개관(改貫)하였다고 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고려 충렬왕 때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낸 김부윤(金富允)이 토산김씨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월성김씨무진보(月城金氏戊辰譜)》에 의하면 중시조 김광우는 문장과 학행(學行)으로 당대에 명성을 떨쳤다.
주요 세거지
경상북도 영일군 구룡포읍 일원
경상북도 영일군 동해면 신정동, 상정동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 흥곡동, 지행면 신계리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 양평동, 황강동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면 탑정동, 성법동
평안남도 성천군 통선면 남원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토산김씨는 47가구 총 168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