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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91차 산행] ♣ 백두대간 삼척 덕항산 ❊ (2)
2018년 8월 19일 (일요일)
* [산행 코스] ▶ 제천→ (38번국도)→ 태백시→ 35번국도→ 삼수령→ 하사미교→ 성공회 예수원→ 새매기골→ 구부시령→ 덕항산(1,071m)→ 장암밭목 쉼터(점심식사)→ 환선봉(지각산)→ 자암재→ (급경사의 내리막길)→ 환선굴→ 주차장(오후 5시, 상경)→ 서울(오후 9시)
* [오늘의 산행 들머리] — 태백시 하사미동 - ‘외나무골’에 들다
오전 11시 25분, 35번 국도 <하사미교> 다리에서 산행을 시작했다.(해발 680m) 하늘은 맑고 햇살이 뜨겁지만 그렇게 심한 더위는 아니었다. 강원도 깊은 오지의 서늘한 기운이 볼에 와 닿는다.
산행들머리 <하사미교> - 나무테크 다리 위에서
골지천의 다리를 건너니 너른 배추밭이 펼쳐져 있다. 가을의 김장배추로 출하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쯤 한참 속이 차 들어가야 할 배추들이 긴 폭염과 가뭄을 견디지 못해 맥없이 시들어버리고 바닥에 녹아버렸다. 가뭄과 무자비한 폭염이 고랭지 채소밭을 초토화시켰다. 일부 밭은 이미 배추를 갈아엎었다. 혹독한 여름이 남긴 안타까운 풍경이다. 그러나 산록의 비탈진 밭에 가꾸는 양배추는 싱싱한 기운이 뽐내고 있었다.
폭염과 가뭄으로 녹아내린 배추밭
마을을 지나 임도의 산길로 들어선다. 길목에 장대한 낙엽송이 시립해 있고, 길옆의 계곡에는 깊은 산속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청랑하다. 외나무골이다. 차 한 대가 다닐 정도의 도로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좌우의 숲은 거의 원시림에 가까워 싱그럽다.
이 외나무골에는 성공회 대천덕 신부가 건립한 <예수원>이 있다. 그는 이곳 강원도 태백시의 깊은 산골에 들어와 수도원을 짓고 자신의 뜻을 따르는 신자들과 함께 평소에 주창한 말씀을 실천한 분이다. 길목에 그를 기리는 비석들이 있고 조금 올라가면 <예수원> 있다.
* [길목에 서 있는 세 기(基)의 비석] — ‘대천덕 신부’와 <예수원> 이야기
오전 11시 39분, 길목에 세워 놓은 세 기(基)의 비석을 만났다. 왼쪽은 <고 대천덕 신부추모비>이고 가운데는 대천덕 신부가 생전에 주창한 ‘토지는 사유화할 수 없다’는 성서의 말씀으로 그의 유언을 정리해 놓은 비석이고 또 하나는 자연석 빗돌에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성경 레위기(25장 23절)의 말씀을 큰 글씨로 새겨 놓았다.
가운데 비석에 이렇게 새겨놓았다. “대천덕 신부님, 한국교회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 “지붕 위에 올라가 외치시오.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이렇게 그는 성경에 나온 토지법을 필생의 업으로 외치고 실천한 분이다. 수고(受苦)를 통해 얻은 수입은 그 사람의 소유가 되어 자유롭게 창조적으로 사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여, 아무에게도 종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하지만 토지(土地)에서 생기는 가치는 사회로 환원하여 고용을 최대화하고 지역사회를 개발시키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오늘날 성공회대학의 학풍의 근원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대천덕 신부, 그는 누구인가. 한국명 대천덕 신부(1918~2002)는 본명은 ‘루번 아처 토레이3세(Rev. Reuben Archer Torrey Ⅲ)’로 성공회(聖公會) 사제이다. 대천덕 신부(토레이 3세)는 1918년 중국 산둥성 지난(濟南)에서 중국 장로교 선교사였던 아버지 토레이2세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중국 산동성에서 보냈으며, 고등학교는 평양에 있는 외국인학교를 다녔다. 매우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성령세례를 강조하는 오순절운동의 전통에 익숙했지만, 동시에 중국의 어려운 현실을 보고 ‘노동운동’에 뛰어들기도 하였다. 그 뒤 그는 뜻이 맞지 않은 장로교를 떠나 ‘성공회’에서 사제(司祭)로 안수 받았고 1949년부터 1957년까지 미국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에서 목회를 했다.
1957년 한국성공회 데일리(John Daly) 주교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 선교사로 내한하였고, 성공회대학교 전신인 성미가엘신학원을 재건립해서 원장을 맡았다. 그러던 중 영국 캔터베리에 있는 성어거스틴대학을 방문해 머물다가 그곳 수도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진정한 교육은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이를 실현해 보려고 했지만 그의 생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오순절 성령운동도 거부되었다.
1965년 토레이3세 신부는 성미카엘신학원 원장을 사임하고,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수도원’을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강원도 태백시의 깊은 산골에 성공회 수도원인 <예수원>을 설립하여 빈부의 격차가 없는 평등사회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는 강원도 산골짜기에 땅을 마련하고,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수도원 공동체를 만들었다. <예수원>은 가족단위로 참여하여 기도하고, 노동하며 신앙생활을 체험하는 공동체이다. 이곳에서는 기독교의 오랜 수도원 전통을 따라 매일 세 차례 기도하며, 동시에 오순절운동의 전통을 따라 방언과 치유의 사역을 하기도 한다. 또한 <예수원>은 지원자를 받아서 기도와 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영성생활을 위한 수련제도를 갖추었다.
예수원
토레이 3세와 <예수원>은 한국 교회와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토레이 신부의 성령운동은 한국 교회의 주류 부흥운동과는 달리 축복을 강조하지 않으며 오히려 노동을 통한 영성의 증진에 관심을 갖고 있다. 또한 토레이 3세는 구약성서의 희년제도에 근거한 토지제도를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부동산 투기가 성행하는 한국 사회에 예언자적인 경종을 주기도 했다. <예수원>은 보수주의적인 신앙과 진보적인 경제관을 바탕으로 한국 교회의 갱신을 추구하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연탄길>이 있다.
대천덕 신부는 2002년 노환으로 별세하였으며, 이후 현재까지 그의 아들 벤 토레이(Ben Torrey, 대영복) 신부가 여기 <예수원>의 원장으로 있다. 현재인(Jane Grey Torrey) 사모는 2012년에 별세했다. 아들 벤 토레이 신부는 기존의 사역과 더불어 통일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서 삼수령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삼수령운동이란 예수원이 있는 산골짜기에서 동해, 남해, 서해로 흐르는 강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하며, 여기에 제4의 강, 곧 그리스도 생명의 강을 북한으로 흘러 보내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통일준비 운동이다.
* [외나무골, 원시림의 숲길] — 기구한 여인의 사연이 있는 구부시령(九夫侍嶺)
<예수원> 앞을 지나 오르막길을 치고 오른다. 얼마가지 않아 임도가 끝나고 본격적인 원시림의 산길로 접어들었다. 새매기골이다. 깊고 산(山) 무성한 수림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고즈넉한 산길이다. 숲속의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산속의 외길은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대원들이 숲속의 외길을 따라 열(列)을 지어 산을 오른다. 오늘 산길에는 우리 이외에는 다른 사람들이 전혀 없으므로 오붓하고 정겨운 산행이다.
12시 15분, 오늘 산행의 첫 번째 길목인 구부시령(960m)에 도착했다. 구부시령(九夫侍嶺)은 우리가 올라온 태백시 하사미의 외마무골에서 도계읍 한내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 고개의 동쪽 한내리 땅에 기구한 팔자를 지닌 한 여인(女人)이 살고 있었는데, 서방만 얻으면 죽고 또 얻으면 죽고 죽어 무려 아홉 서방을 모셨다고 한다. 이 고개는 아홉 남편을 모시고 산 여인이 올라와 돌을 올려 무더기를 쌓으며 깊이 탄식을 한 곳이라는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참으로 기막힌 사연이 아닐 수 없다. 이곳에서 우리 대원들은 걸음을 멈추고 땀을 식혔다. 물을 마시며 간식을 나누었다.
* [백두대간의 능선] — 구부시봉(九夫侍峰)에서 덕항산으로 이어지는 산길
이제 산(山)은 경사진 오르막길이다. 계곡을 벗어난 산록에는 활엽수가 숲을 이루어 서늘한 기운이 감싸온다. 산은 토산(土山)이어서 걷기에도 아주 쾌적했다. 그렇게 열을 지어 오르막을 치고 올랐다. 12시 25분, 구부시령의 산봉에 도착했다. 구부시봉(九夫侍峰)이다. 이제 남쪽의 삼수령(13.3km)에서 북쪽의 덕항산(1.2km)-자암재(3.6km)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능선(稜線) 길에 도착한 것이다. 이정표가 산길을 밝혀준다.
백두대간의 능선 <구부시봉>
이제 백두대간의 능선(稜線)을 타고 가는 산행이 시작되었다. 길은 완만하게 오르내림으로 이어진 비교적 평탄한 산길이었다.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지나가는 이 길목은 동쪽은 삼척시 신기면이요 서쪽을 태백시 하사미동이다. 이렇게 백두대간은 동서를 가름하고 동해와 내륙을 나누는 경계를 이룬다. 12시 30분, 댓재(12.5km)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를 만났다. 여기서 능선을 따라 그대로 직진을 하면 동해로 떨어지는 지맥이니 우리가 갈 길이 아니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왼쪽의 내리막길이 백두대간 길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 [안부(鞍部), 새매기고개] — 오늘의 산행 포인트 ‘덕항산(1,071m)’ 정상
12시 34분 안부의 잡초밭에 내려섰다. 바로 새매기고개(980m)이다. 풀밭 한 가운데 이정표와 백두대간에 대한 간략한 해설판을 설치해 놓았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 발원한 큰 산줄기로서 강이나 하천 등의 물줄기에 의해 한번도 잘리지 않은 한반도의 큰 산줄기를 말한다’
다시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여전히 산은 짙푸른 수림(樹林)을 이루어 쾌적한 느낌을 준다. 얼마간의 오르막을 지나고 나니 평탄한 산길이 이어진다. 그러나 길의 오른쪽(동해쪽)으로 안전자일이 설치되어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 아래는 천 길 벼랑의 깎아지른 직벽이었다. 환선골 계곡이 절벽이다. 얼마 가지 않아서 이정표와 안내판, 그리고 덕항산 지도판이 서 있는 지점에 도착했다. 바로 오늘 산행의 중심 포인트인 덕항산 정상(1,071m)이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오후 12시 48분이었다. 후미에서 오는 대원까지 모두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의 이정표를 중심으로, 개인별 그룹별로 인증샷을 눌렀다. 그렇게 정상에서 한참을 머물면서 휴식도 취했다.
* [사거리 길목, 안부의 쉼터] — 마음을 나누는 점심식사
오후 1시 얼마간의 내리막길을 걸어, 안부의 사거리 <쉼터>에 도착했다. 정상에서 0.4km 내려온 지점이다. 이정표에는 ‘쉼터’로 표시되어 있는데, 도상에는 ‘장암밭목’(1,025m)으로 기재되어 있는 곳이다. 여기는 우리가 진행하는 백두대간 능선의 안부이지만, 서쪽으로 가면 태백시 하사미동 외나무골 <예수원>으로 내려가는 길이요, 동쪽으로 내려가면 삼척시 대이리 환선골 <골말>로 내려간다.
나뭇잎 사이로 아득하게 내려다 보이는 환선골
이곳은 비교적 너른 평지여서 대원들이 점심식사를 했다. 각자가 준비해온 도시락을 내어놓고 음식을 나누었다. 모두 시장기를 많이 느끼고 있던 터라 아주 맛있게 먹었다. 오늘도 숙이 님이 배차적(배추전)을 부쳐왔다. 그것도 적지 않은 양이었다. 모든 대원들이 나누어 먹었다. 살짝 익혀진 배추전을 양념간장에 살짝 찍어먹으면 사각사각 씹히는 맛이 아주 그만이다. 입안에 산뜻한 미감이 가득해진다. 그리고 담백하고 고소한 뒷맛이 일품이다. 거기에다 베토벤 대장이 따르는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은 산행의 피로감과 더위를 한꺼번에 날려버린다. 그렇게 모두 환담을 나누며 즐거운 식사를 했다.
* [식사 후의 산행, 백두대간 능선 길] — 천 길 낭떠러지 위를 지나는
오후 1시 38분, 식사를 마치고 산행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장병국 고문을 비롯한 네 명의 대원이 환선굴을 탐방하기 위해 장암목을 경유하는 골말로 내려갔다. 나머지 16명의 대원들은, 이정표 옆에 도열하여 추억의 사진을 찍고, 그대로 대간의 능선을 치고 나아갔다. 산의 능선 길은 완만하게 올라가고 완만하게 내려가는 쾌적한 흙길이다. 그런데 산길의 오른쪽은 환선골 계곡으로, 능선 바로 옆에는 천 길 벼랑의 깎아지른 절벽이다.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대이리 주차장이 아득하게 내려다 보인다. 우리가 내려가야 할 환선골 계곡이다. 해발 1,000고지 이상의 산봉을 오르내리는 백두대간의 길은 계속 이어진다. 산은 온통 울창한 수림이 숲을 이루고 있다. 길목의 간간이 장대한 참나무가 길목을 지킨다. 싱그러운 풀밭 속에 가끔 청초한 풀꽃이 미소를 지으며 하늘거린다. 그러나 능선의 산길은 참으로 아찔하다. 길의 오른쪽이 천 길 낭떠러지이기 때문이다. 고정된 안전자일이 설치되어 있지만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면 그냥 오금이 저리다.
* [오늘 산행의 두 번째 포인트] — 환선봉(1,079m) 정상을 지나다
오후 2시 12분, 환성봉(1,079m)에 이르렀다. 도상에도 그렇게 표시되어 있지만 원래 ‘지각봉’인데 표지석에는 ‘幻仙峰’으로 새겨 놓았다. 우리의 지평 기획위원이, ‘산봉 아래에 유명한 환선굴(幻仙窟)이 있으므로 그렇게 개칭한 것’이라고 말했다. 거기에서 모든 대원들이 모여 잠시 휴식을 취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다시 아래로 내려간다. 안부의 길목을 지나 다시 오르막길, 가파르게 이어진다. 1,067고지를 지나 비교적 완만한 산길이다. 얼마를 갔을까. 저 동해 쪽에서 짙은 운무가 산곡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한다. 날이 저무는 것과 같은 어둑한 분위기다. 얼마 있지 않아 환선골의 골짜기가 자욱한 운무에 가렸다. 차가운 냉기가 온몸에 엄습했다. 대간 길의 하산 포인트는 ‘자암재’, 아직도 1.4km를 남겨두고 있다. 운무가 밀려오고 음산한 기운이 발걸음을 재촉하게 한다. 장대하게 하늘을 찌르는 낙엽송 군락지를 지났다. 그리고 안부 — 하늘이 확 트인 쑥대밭을 통과했다. 다시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 [오늘 산행의 세 번째 포인트, 자암재] — 환선골로 내려가는 하산 지점
오후 2시 49분, 오늘의 하산 포인트인 ‘자암재(920m)’에 도착했다. 환성봉에서 1.5km 치고온 지점이다. 여기서 능선 길로 나아가면 백두대간 큰재(3.4km)를 경유하여 두타산으로 간다. 우리는 이곳에서 환선굴 방향으로 하산(下山)을 하게 된다. 능선 길을 걸어올 때 확인한 것이만 백두대간의 동쪽 사면은 가파른 벼랑이다. 그러므로 내려가는 길은 무지막지하게 아래로 쏟아지는 험로이다. 가파른 산길은 몸을 가누기 힘들 지경이었다. 길은 끊임없이 지그재그로 이어진다. 무릎에 상당히 부담이 가는 산길이다. 보통 산행의 경우에도 스틱이 유용하지만 이런 경사면에서는 스틱이 아주 긴요하다. 스틱을 사용하면 무릎의 부담을 줄일 뿐만 아니라 몸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왔다. 지평위원이, 철봉으로 가드레일을 설치해 놓은 암봉으로 안내한다. 제1전망대이다. 산곡에는 짙은 안개가 스멀거리고 올라온다. 우리들이 산행을 했던 대간의 능선 길을 올려다본다. 참으로 아득한 고도로 뻗어가는 산줄기, 그 아래 직벽의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망대 바위 끝에까지 나아가서 주변을 조망했다.
* [가파른 내리막길과 전망바위] — 장엄하게 펼쳐지는 산세
다시 아래로 쏟아지는 길, 여전히 가파른 경사면에 지그재그길이 이어진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나온 길과는 다르게 여기저기 돌조각이 길에 깔린 너덜지대가 이어진다. 경사면도 그렇지만 발을 떼어놓기가 아주 불편한 산길이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왔다. 제2전망대에 도착했다. 가파른 절벽의 암봉을 올라가면 환선골의 기암과 수림, 그리고 장엄하게 펼쳐지는 산세가 가히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산곡의 한 가운데 날카롭게 솟은 고고한 암봉이 시선을 끈다. ‘촛대바위’이다.
* [하늘로 올라가는 철계단] — 하늘로 올라가는 통천문
다시 가파른 경사면을 내려오니 하늘오 올라가는 철계단이 앞을 가로막는다. 환선굴로 내려가기 위해 앞에 있는 거대한 바위봉을 통과해야 한다. 하산 길에 복병처럼 만난 가파르고 긴 철계단, 그것도 아득하게 올려다 보이는 강팍한 계단이었다. 가파른 산길을 내려온 무거운 다리가 다시 뭉치기 시작했다. 모든 대원들이 스스로 속도를 조절하면서 하늘로 오른다. 수십 미터의 계단을 오르니 산봉의 한 가운데 뻥 뚫린 ‘자연동굴로’가 나타났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널려있는 동굴을 치고 올라 통과했다. 서늘한 바람이 지나간다. 동굴을 통과하는 바람이다. 동굴을 지난 전망대에 올라서니 전망대, 거대한 산줄기에 바위절벽과 암봉이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의 풍경에 젖는다.
* [환선굴(幻仙窟) 입구를 지나며] — 모노레일 전동차로 올라가는 환선굴
다시 아래로 쏟아지는 산길을 내려왔다. 대원들이 쉬지 않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놓는다. 한참을 내려와서 긴 철계단을 타고 내려온다. 수평의 철계단도 지났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오니 <환선굴>로 들어가는 입구의 공간에 이르렀다. 시간적으로 환산굴 탐방을 할 여유가 없으므로 그냥 통과했다. 환선굴 탐방은 산행을 하지 않은 산우들이 관람을 했을 것이다. 필자는 근 20년 전에 절묘하게 아름다운 환선굴을 탐방한 적이 있다. 조금 내려오니 환선굴에서 발원한 물이 폭포를 이루어 시원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진다.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그리고 이어지는 왕복을 구분지어 놓은 계단 길, 환선굴 관람객을 위한 널찍한 길이다. 계단 아래 약수터가 있어 시원한 천연수 한 바가지로 산행의 피로를 씻는다. 환선굴 탐방은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어 힘들이지 않고 관람을 할 수가 있다. 포장된 도로를 따라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4시 30분, 모든 대원들이 대이리 주차장에 하산을 완료했다.
환선골의 무릉천 ▶ 이 물이 흘러 청옥산 용추계곡의 물과 합류하여 오십천을 이루어 동해로 흘러든다
* [에필로그] — 거대한 백두대간의 산체가 내 몸에 실려 있다!!
산 높고 골 깊은 강원도 내륙의 오지(奧地), 영서의 태백시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덕항산-환선봉-자암재까지 종주하고, 자암재에서 동해의 삼척시 환선굴 방향으로 하산을 했다. 능선의 길은 고도가 높았지만 완만하게 오르내리는 산길이어서 비교적 쾌적한 산행을 했다. 그러나 자암재에서 내려오는 길은 매우 가파르고 팍팍하고 위험한 길목이었다. 몸이 무겁고 발걸음이 더디고, 발목과 무릎이 콱콱 결리는 고행이었다. 허벅지와 종아리의 근육이 경직되고 아팠다. 그러나 장대한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거대한 덕항산을 넘어오는 여정은 실로 뿌듯한 보람이었다. 힘든 노정을 지나며 흘리는 땀, 그것이 살맛을 느끼게 한다. 장엄한 산줄기에서, 싱그러운 나무들이 품어내는 생명의 기운이 몸으로 스며든다. 산을 넘으면 거대한 산체가 내 몸에 실려, 내 스스로 산이 되어 넉넉한 생명력으로 충만하다. 상경 길, 달리는 차 안에서 본 노을 낀 저녁하늘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리움의 깊이만큼 아득한 하늘, 홍조를 머금은 구름자락이 마음에 젖어든다. 마음은 늘 크고 높은 하늘 같고, 몸은 늘 청산의 푸른 기운으로 살아있기를 바라며 — 오늘 동행한 모든 대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