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1기
북한의 기습남침(1950. 6. 25)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38선 일대는 장마철로 접어드는
소나기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농번기 휴가자와 주말 외출 외박자가 빠져나가고
24일 저녁 장교구락부 개관 파티 참석차 장교들이 자리를 비운
兵舍는 그야말로 편안함, 그 자체였다.
첫닭이 울기도 전인 새벽 4시,고요하던 38선은
웅진반도 17연대에 대한 포화로 시작되어 전전선에 걸쳐
북한군 포 600문, 박격포 1000문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
마치 불꽃놀이하듯 부채꼴 탄막을 형성하며
천지를 뒤엎고 흔들어 놓았다.
이어서 잠시 빗소리 외엔 쥐죽은 듯한 침묵이 흐르더니
곧이어
소름끼치는 탱크 무한괘도 굉음과 7.62밀리 기관총 폭음이
온 누리를 뒤엎었다.
북한이 기습남침을 감행한 것이다.
선전포고도 없이...
이때까지 간간히 무력충돌은 있었지만
이런 전면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해방 후, 소련은 북한에 지속적으로 군수물자를 지원한 까닭에
북한은 아주 막강한 군사력을 가졌다.
바로 탱크와 따발총으로 무장한 훈련된 군대였다.
반면 우리의 군대는 보잘 것 없었다.
대한민국 군대는 침략에 대해
<명목상 저항>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미국의 정책이었기 때문에서
탱크나 비행기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포탄
개성 동북쪽 성균관에 자리잡고 있던 한국 12연대 소속
미국 군사 고문단 사무실에는 5명의 고문관이 있었지만
이날 아침에는 서울 축하연 때문에
다리고(Joseph R. Darrigo) 대위 뿐이었다.
새벽 5시경, 대위는 포탄 파편과 총탄 세례를 받고 선잠을 깼다.
그는 군화도 신지 못한 채 밖으로 뛰어나와 Jeep에 올랐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개성시내 쪽으로 차를 몰았다.
거리에는 포탄 소리에 뛰쳐나온 아녀자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
한국군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중심가에 이르렀을 때 소총 소리에 급 브레이크를 밟았다.
개성역 쪽을 바라보니 천여명의 북한군이 열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전쟁이 터졌다는 것을 직감하고 다리고는
차를 급히 돌려 남쪽으로 질주했다.
남한을 향해 76mm 곡사포로 사격을 하는 북한군 포병(1950.
6.25)
전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 상황을 보면,
그 때 우리 군대는 거의 반수가 휴가를 가 있었다.
농번기 농촌에 일손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랬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 당시 우리 군대는
제대로 인원수도 채워지지 않았고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인 무장상태가
뉴욕 경찰 100명 보다 못하는 평을 들을 정도로
빈약하기 짝이 없는 집단이었다.
주한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라는 탱크부대 준장은
전쟁 발발 몇주 전 퇴임하는 자리에서
"한국지형에 탱크가 적합치 않다"라든가
또 퇴임하는 자리에서"한국군은 아시아에서 최강"
이라는 헛소리를 하던 자였고
국방부나 육군본부 데스크를 장악하고 있던 요원들은
일선 현장상황이나 동원계획 또는 일선 현장에 대하여는
눈이 어둡고
수시로 "요정출입금지", 연료절약대책" 등에 대한
심의에만 열중하는 보고서 귀신들 뿐이었다.
따라서 무지막지한 탱크 돌진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고,
오로지 몸으로 부딪히는 작전 밖에 없었다.
폭약을 등에 지고 탱크 밑으로 굴러들어가 폭사하기도 하고
탱크 위로 기어올라 갈고리로 뚜껑을 열어 수류탄을 넣기도 했지만
그것은 몇몇사람이었을 뿐
대부분 병사들은 겁먹은 말처럼 우왕좌왕 날뛰며 달아났다.
하여튼 몇 사람이 죽음을 각오하고 방어했지만
T-34 탱크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북한군은 먼저 옹진반도를 점령했고
이어서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를 점령했다.
서울 점령이 코앞에 닥친 것이다.
UN, 북한에 대해 결의(1950. 6. 28) 북한군의 남침기습을 알리는 뉴스는
전파를 타고 전세계에 알려졌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지 5년도 안돼 전쟁이 일어나자
전세계는 경악하였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바로 열렸고,
여기에서 북한군은 즉각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군대를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 가맹국에 대해 UN의 활동을 돕고
아울러 북한에 대한 원조를 하지 말도록 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한편 북한은 UN 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계속 남진하였으며
서울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참전 결의 장면(1950. 6.28)
UN은 철수안을 무시한 북한으로부터
한반도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한다는 새로운 결의안을 채택했고
또한 트루먼 대통령은 즉시
일본 도쿄의 미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군, 공군 지원을 명령했다.
서울 함락(1950. 6. 28)
1950년 6월 27일 해질 무렵,
서울 미아리 방어선에 북한군이
T-34 전차 10대를 앞세우고 쳐들어왔다.
우리는 역시 이것을 육탄으로 막았지만
결국 방어선이 무너졌다.
북한군은 이제 서울로 진입할 일만 남았다.
이때가 28일 새벽 1시였다.
헌데 새벽 2시 28쯤,
비가 내리면서 어둠이 가득한 한강에서
두 번의 폭발음이 들렸다.
그 섬광은 다리 위의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바로 한강철교를 폭파한 것이다.
결국 수백명의 피난민이 한강을 건너다가 사망했고,
후퇴하던 부대도 건너가지 못하고 말았다.
서울시가지에 집입하는 북한군 탱크부대(1950.
6.28)
우리 군대는 한강의 다리를 폭파함으로써
북한의 진격을 한강에서 저지하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이 폭파로 인하여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대부분의 서울 시민이 서울에 갇혔다.
새벽 5시, 전쟁이 일어난 지 4일만에
서울은 북한군에게 점령을 당했고,
11시 30분에는 북한군의 서울 점령을 선언했다.
그리고 우리 군대는 뿔뿔히 흩어져서
군대로서의 의미조차 갖지 못했다.
지도를 보면 많은 땅을 빼앗긴 것은 아니지만
500년 가까이 우리의 중심지였던
서울을 빼앗겼다는 것만으로
전쟁은 끝났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서울에서의 3일간(1950. 6.
29 - 7. 2)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
3일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예상 밖으로 한국군이 춘천과 홍천 등 동부전선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잘 막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군대의 최초의 승리지요!
어쨌건 이런 이유로 3일간 북한군의 남하가 늦어지자
우리군은 전열을 다시 가다듬었다.
맥아더 장군도 한강변 전선을 시찰하면서
차기 작전(인천상륙)을 구상했다.
이때, 맥아더가 육군참모총장인 채병덕에게
2만 5천명으로 줄어든 병력에 대한 수습책을 묻자
그는 2백만 남한청년을 소집하여 적을 격퇴하겠노라고
터무니없는 큰소릴쳤다 한다.
맥아더는 그 앞에서는 아무런 논평없이 칭찬을 했지만
바로 직후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국에는 새 참모총장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48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새 참모총장으로 정일권이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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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을 시찰중인 맥아더
장군
1950년 6월 30일, 북한군은 3일간의 정적을 깨고
다시 진격을 시작했다.
한편 29일 한국을 방문하고 전선을 시찰했던
맥아더 장군은 미국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했고,
7월 1일 부산에 첫 지상군인 스미스부대가 도착한 것이다.
당시 미군은 북한군이 자신들을 보기만 해도
도망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스미스부대는 오산전투에서
540명 부대원중 150명이 전사 또는 행불되었고,
72명은 포로가 되었다.
미군과 북한군의 최초 전투이니 상세히 더듬어 보자.
스미스(Charles Bradford Smith)중령은 6.30 저녁 9시에
연대장 스티븐즈 대령의 호출을 받고 九州 CP로 나가
즉시 부대원을 인솔하여 120km 떨어진 岩付 공군기지로 가서
사단장의 지시를 받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스미스는 24사단 21연대 1대대장이었다.
◁ 미24사단마크
대대라고 해야 수준 미달의 2개 소총중대(B,C)와
취사병.행정병 위주의 본부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장비로는 75밀리 무반동총 4정과 4.2인치 박격포 4문,
바주카포 6정과 60밀리 박격포 4문 뿐이고
개인장비로는 120발의 M-1 실탄과 이틀 분의 C레이션이 전부였다.
부대원은 75명 만이 실전경험이 있고 거의 대부분 20대 안팍의
겁많은 애송이들이었다.
그러나 스미스특공대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한국에 파병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사단(24)에 뒤이어 제 1기갑사단과 제 25사단이
올 때 까지 북한군의 남하를 막아내는 것이었다.
이들은 6대의 C-54수송기에 분승하여
7.1 11:00경에 부산에 도착했다.
미군 전투부대가 최초로 한국땅을 밟았던 것이다.
대전행 열차를 타기 위해
100대 가량의 차량으로 부산역에 도착했을 때
수천명의 환송객이 나와 깃발과 손을 흔들어댔고
심지어 악단까지 동원되어 있었다.
일요일 아침, 피로에 지친 스미스 특공대원들은
무거운 더블백 하나씩을 매고 대전역에 내렸다.
대전역/우측에 그들이 부산에서 타고온 열차가 보인다.
1950년 7월 2일, 대전에 진입하는 스미스부대 선발대.
스미스 중령은 전황시찰단장 처치 장군을 만나
가능한 한 북쪽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지형정찰을 나가
수원쪽으로 경사진 오산 죽미령을 매복장소로 택했다.
기차편으로 스미스를 뒤따라 오던 지쳐빠진 특공대는
7.4 오산에서 내려 한국군 트럭으로 갈아타고 북상했다.
다행스러운 일은 105밀리 곡사포 등으로 무장한
사단소속 제 52야포대대 108명이 배속되었다는 것이다.
7. 5 오전 3시 부대는 목적지에 도착하여 사람 손 모양을 고려.
총좌의 위치를 정했다.
포대배치는 1문은 4백미터 후방, 그리고 4문은 1km 뒤로 했다.
오산전투에 투입되기 위해 행군중인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원 (1950.7.4)
배치가 끝나갈 무렵 운명의 7.5(수) 날이 밝아왔다.
진흙투성이 참호속과 나무 뒤에 웅크리고 앉아
C레이션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적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폭우가 쏟아졌다.
7시 쯤 멀리 수원쪽 도로에서 희미하지만
탱크로 식별되는 물체가 나타났다.
30분도 체 안되어 전방관측병으로부터
8대의 탱크 행렬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숨을 죽이고 사정거리까지 오도록 기다리다가
발포명령을 내렸다.
정확히 8시 16분이었다.
처음 몇발은 빗나갔지만 다음은 명중했다.
하지만 탱크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철커덕거리며 도로를 따라 내려왔다.
오히려 대포와 기관총으로 불을 뿜으며 다가왔다.
스미스 특공대가 배치한 총좌를 무시하고
10시15분에 40대의 T34탱크가 보병진지를 통과했다.
이어서 북한군 제 4사단 16, 18연대 약 4천명이
스미스 특공대를 덮쳤다.
두 시간 뒤, 많은 사상자와 함께
통신설비도, 수송수단도, 탄약도 다 동이 난 상태에서
더이상 버티는 것은 부하들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스미스 중령은 철수를 결심했다.
7.5 밤늦게 스미스는 86명의 생존자를 이끌고 연대본부에 도착했다.
UN 참전국들의 국기 사열 (1950. 7.
7)
1950년 7월 7일,영국과 프랑스의 제의로
UN은 최초로 군사령부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UN 회원국들의 군사적 원조도
미국 지휘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결의안도 채택되었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UN 군이다.
UN 기를 수여받는 맥아더 장군 (1950.
7.7)
이에 따라,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4일 그는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도 넘겨받게 된다.
총 16개국이 한국에 대해 전투 부대의 파병을,
5개국이 의료 혹은 시설 지원을 하겠다는 뜻을
유엔에 통보하였고
유엔군은 한국전이 점차 확전됨에 따라
지상군 1개 군, 2개 군단, 9개 사단, 3개 여단
그리고 8개 보병대대와 그 지원부대들을 파병하였으며
총 병력은 34만 1000여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해군은 2개 기동함대,
공군은 3개 군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대전전투에서 처음으로 3.5인치 로켓포를 사용하여 적전차를
파괴시키는 장면(1950. 7. 20)
UN군도 지원을 시작했지만 전세는 불리했다.
미군은 죽미령, 천안, 금강 방어선에서 계속
북한군에게 패해 후퇴를 계속하였고,
대전에서 북한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이런 격렬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대전마저 북한군에게 내어주고
제24사단장 딘소장이 포로로 잡히면서 말았다.(8.25).
대전에 진입하는 북한군(1950. 7.20)
딘소장이 북한군 포로가 되는 장면(북한 중앙TV)
낙동강 방어선(1950. 7. 25 - 9.
15)
금강전선과 대전이 점령당한 후
병력이 거의 없었던 전라도 지방도
쉽게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대구에 있던 수도도 부산으로 급히 이전하였으며
이젠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부산을 중심으로 아주 작은 땅을
최후의 결전장으로 사투를 벌여야 했다.
제8군사령관 워커장군은 미국 장병들에게
"더 이상의 후퇴는 있을 수 없으며
이제는 더 물러설 수 있는 곳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고 연설했다.
낙동강 유역의 피난민들이 안전한 미군지역 으로 건너기 위해 대기하는 모습
(1950.8)
정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1950년 여름, 불볕더위 아래서
한치의 땅을 두고 뺏고 빼앗기는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모자라는 병력을 채우기 위해
어린 학생들까지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낙동강 물은 병사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고
곳곳에서 총포소리와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는
비참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공군의 지원이 없었다면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어떤 때는 백대 가까운 비행기가 날아와
낙동강에 폭탄을 쏟아 부었고
이로 인해 북한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북한군의 공격은 크게 둔화되었다.
낙동강 전선이 점점 좁아질 때는
미군은 일본으로 철수하려는 계획을 세울 만큼
급박한 상황이 있었지만
9월부터 상황이 호전되어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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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때, 3개월된 핏덩이 계집애가 하나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