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의 성은 고씨(高氏)이오, 본(本)은 장택(長澤)이며, 이름은 판례(判禮)니 이조 고종 경진년(1880) 3월 26일 축시에 전라도(全羅道) 담양군(潭陽郡) 무면(武面) 성도리(成道里)에서 탄생(誕生)하시니 부친의 이름은 덕삼(德三)이오, 모친은 박씨(朴氏)이다.
박부인이 기묘년(1879) 5월부터 어느 절에서 기도할 때 하룻밤 꿈에 높은 산에 올라 굉장한 집에 들어가니 한 선관(仙官)이 붉은 책과 누른 책 각 한권씩을 주거늘 박부인이 받아 가지고 놀라 깨었더니 이로부터 잉태하여 딸을 낳았다. 고부인이 태어난지 여섯달만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고 아홉 살에 모친을 따라서 정읍군(井邑郡) 입암면(笠岩面) 대흥리(大興里)에 이사하고 이로부터 이모부 차치구 좇아 동학을 믿었다.(증산교사 220~221쪽)
고부인은 대흥리 신씨(申氏)의 집으로 출가하여 태종이라는 딸을 두었는데 스물아홉에 상부하여 호로 되었다.(범증산교사 24쪽)
고부인이 상제님을 처음 대하게 된 것은 정미년(1907)이며 고부인의 나이 28세때이다. 상제께서 차경석에게 수부(首婦)를 들여세우라고 명하심에 이에 차경석이 자신의 이종매(姨從妹)인 고부인을 수부로 천거한데서 비롯한다. 이와 관련된 전경구절은 다음과 같다.
교운1-26절▷ 상제께서 정미년에 태인 고현리 행단에 이르러 차 경석에게
「夫主將之法 務攬英雄之心 賞祿有功
부주장지법 무람영웅지심 상록유공
通志於衆 與衆同好靡不成 與衆同惡靡不傾
통지어중 여중동호미불성 여중동악미불경
治國安家得人也 亡國敗家失人也
치국안가득인야 망국패가실인야
含氣之類 咸願得其志
함기지류 함원득기지」
란 글 한 절을 외워주시고 잘 지키기를 바라시면서 수부(首婦)가 들어서야 하느니라고 이르시니라. 경석이 상제를 모시고 돌아와서 그 이종매(姨從妹) 고부인(高夫人)을 천거하니 이날이 동짓달 초사흘날이니라.
상제께서는 정미년 동짓날 초이튿날 순창 농바우로부터 태인(泰仁) 행단(杏壇)에 이르사 차경석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일은 수부(首婦)가 들어야 되는 일이니 네가 일을 하려거든 수부를 들여세우라’하시므로 차경석이 상제를 모시고 돌아와서 그의 이종 누님되는 고부인을 천거하였던 것이다.(대순전경 3장 30절 참조)
여기서 수부(首婦)란 보통 사람들의 안목으로 볼 때는 인신(人身)으로 오신 상제님의 부인을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으나 상제님의 다른 말씀들을 참고해 보면 일반적인 부인의 의미보다는 역시 종도의 한사람으로 천지공사에 참여하여 하나의 공사를 이루기 위해 쓰였던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즉『대순전경』3장 30절에서 ‘내 일은 수부(首婦)가 들어야 되는 일이니라’고 하였으며 또 4장 13절에 ‘공사(公事)에는 수부가 있어야 하느니라’고 하였으니 이 때의 ‘내 일’이라는 것과 ‘공사’라는 것은 곧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수부란 어느 특정인물의 자질보다는 공사의 체계상 그 속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典經』에 나타나 있는 다음구절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내용으로 설명될 수 있다.
행록5-31절▷ 상제께서 二十三일 오전에 여러 종도들에게 가라사대「이제 때가 바쁘니라. 너희들 가운데 임술생(壬戌生)으로서 누이나 딸이 있거든 수부(首婦)로 내세우라.」형렬이「수부로서 저의 딸을 세우겠나이다」고 아뢰이니 말씀하시기를「세수 시키고 빤 옷으로 갈아입혀서 데려오라」하시니라. 형렬이 명하신 대로 하여 딸을 상제 앞에 데려오니라. 상제께서 종도들로 하여금 약장을 방 한가운데 옮겨 놓게 하시고 그의 딸에게 약장을 세번 돌고 그 옆에 서게 하고 경석에게「대시 태조 출세 제왕 장상 방백 수령 창생점고 후비소(大時太祖出世帝王將相 方伯守令蒼生點考后妃所)」를 쓰라 이르시니라. 경석이 받아 쓸제 비(妃)를 비(妣)로 잘못 쓴지라. 상제께서 그 쓴 종이를 불사르고 다시 쓰게 하여 그것을 약장에 붙이게 하고「이것이 예식이니 너희들이 증인이니라」고 말씀을 끝내고 그의 딸을 돌려보내시니라. 상제께서 경석에게 그 글을 거둬 불사르게 하셨도다.
윗 글에서 보면 수부는 고부인 외에 또한 김형렬 종도의 딸이 등장한다. 만일 수부가 어느 특정 인물에만 국한되는 것이라면 고부인을 맞아 드린 이후에 굳이 다른 사람을 들여서 다시 수부로 내세울 필요가 없었을텐데 그렇지 않고 상제님 화천하시기 전날 종도들이 보는 앞에서 예식까지 올린 것은 수부가 어느 특정 인물에 한해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이루기 위한 전체 체계속에 반드시 들어가야만 하는 상징적 의미만을 내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증산교사』에 나와 있는 다음의 내용은 상제께서 수부를 책정한 경위와 관련하여 위의 내용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원래 천사(天師, 상제님을 일컬음)께서 어렸을 때에 부친이 구혼하실새 간선(揀選)이 과도하여 자주 퇴혼하심으로 마침내 혼로가 막히게 된지라 부친이 간선을 너무 심하게 하였음을 깨달으시고 이 뒤로는 자부의 현불초(賢不肖)는 운명에 맡기고 어데서든지 청혼만 있으면 즉시 허혼(許婚)하리라고 뜻을 정하였더니 마침 정문(鄭門:정씨문중)에서 청혼이 있거늘 즉시 허혼하고 자부를 맞아오니 그 의용과 재덕이 너무 뜻에 맞지 아니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성질이 온순치 못하여 구고(舅姑)의 뜻을 자주 거슬리므로 가정이 매양 화평하지 못하였다.
천사께서는 천지공사에 현철한 수부가 필요하게 되나 정부인(鄭夫人)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겠으므로 달리 적당한 수부를 구하셨던 것이다. 김형렬은 둘째 딸을 수부로 들여세우기로 하여 천사께 시봉하게 하였으나 형렬의 성질이 우유부단하여 누차 엄명하심에도 불구하고 외간의 비방을 꺼려하여 정식행례(正式行禮)를 회피함으로 후사를 감당치 못할 줄 알으시고 다시 경석에게 말씀하사 고부인을 맞이하셨던 것이다.
천사께서 공사를 마치신 뒤에 비로소 천명을 받들어 정부인과 이연(離緣:인연을 끊는다)하심을 성명하심과 동시에 김부인을 수부로 정식책립하셨는데 화천하신 뒤에 김부인이 부명(父命)에 의하여 개가하였다가 상부하고 병들어 친가로 돌아와서 누워 앓다가 고부인이 경석을 명하여 야강기물을 옮겨갈 때에 사망함에 경석이 치료비로 회사하였던 돈 이십원으로 치상하게 되었으니 천사께서 형렬에게 『약장은 곧 안장농(安葬籠)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응험되었고 경석이 아내 비(妃)자를 죽은 어미 비(妣)자로 그릇쓴 것이 우연한 실수가 아니라 오는 일에 대한 예감제시였었던 것이니 고부인은 족도리와 원삼으로 약장 짐을 세우고 원평을 떠나 대흥리로 돌아온 것이 마치 어느 신부가 농바리를 앞세우고 신행(新行)길을 찾아가는 것과 같았으니 천사께서 고부인에게『약장은 네 농바리가 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응험되었고 고부인은 대흥리로 돌아온 뒤에 약장을 침실에 봉안하고 매양 그 앞에서 치성을 올렸으니 『신주독(神主櫝)』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응험된 것이며 또 고부인은 김부인이 사망한 뒤를 이어서 수부의 위(位)에 정식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38~39쪽)
따라서 이후 수부로서 고부인과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공사는 곧 상제님이 수부(首婦)의 의미를 지니고 이와 짝하여 천지공사의 대업을 이루는 수부(首婦)의 도수(度數)가 있을 것을 뜻한다 하겠다.
고부인이 상제와 함께 있을 때 겪은 일화에 대해서는 『전경(典經)』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행록4-53절▷ 상제께서 태인 새울에 계셨도다. 어느날 상제께서 박 공우를 경석에게 보내여 그를 오게 하시니 경석이 와서 뵙느니라. 상제께서 그에게 돈을 주시며「돌아가서 쌀을 팔아놓아라」명하시니라. 그는 그 돈을 사사로이 써 버렸도다. 그 뒤에 상제께서 댁으로 돌아가셔서 부인에게「쌀을 많이 팔았느냐」고 물으시니 부인은 모르는 일이라고 여쭈니라. 상제께서 경석을 불러 물으시니 경석은 그 돈을 부인에게 드리지 않았음을 고백하였도다. 이후로부터 상제께서 모든 일을 경석에게 부탁하지 아니하고 바로 고부인과 의논하여 일을 처리하셨도다.
권지2-34절▷ 차 경석이 어느 때 정읍 고부인이 안질로 고생하고 자기 아들 희남(熙南)이 앓아 누운 것을 상제께 알리려 동곡에 아우 윤경을 보내니 마을 입구에 김 자현․김 광찬 등 십여명이 상제로부터 차 윤경이 대흥리에서 나를 찾아오리라는 말씀을 듣고 마중을 나와 그를 맞았도다.
행록4-22절▷ 훗날에 윤경이 상제를 찾아 뵈옵고 고부인(高夫人)과 희남(熙南)의 병세를 알리니라. 소식을 듣고 상제께서「내일 살포정에 가서 나를 기다리라」고 이르셨도다. 윤경은 이튿날 살포정으로 갔으나 상제를 뵈옵지 못하여 바로 태인 소퇴원 주막으로 가니라. 주막 주인이 윤경의 물음에「선생님께서 윤경을 새울로 보내라」고 전하니 그는 새울로 떠나가니라. 그는 도중에서 일병 수백명을 만나 검문을 받았으나 가환으로 의사를 모시러 가는 길이라고 알리니 저희들이 모두 물러가는도다. 윤경이 새울에 가서 상제께 배알하니 저희들이 모두 물러가는도다. 윤경이「집에서 일찍 떠났음으로 잘 모르나이다.」고 아뢰인즉 상제께서「네가 무엇하러 왔느냐」고 꾸짖으시니 윤경은 몸 둘 바를 모르더라. 이날 밤에 상제께서 윤경으로 하여금 밤이 새도록 문밖을 돌게 하셨도다. 윤경이 졸음을 달래면서 돌고 있는 중에 첫 닭이 울더니 상제께서 문밖으로 나오셔서「네가 졸리지 않느냐」고 물으시기에 윤경이「졸리지 아니하나이다.」고 여쭈니「그럼 나와 함께 백암리(白岩里)로 가자」하시고 길을 떠나시니라. 김 자현도 따라 백암리 김 경학의 집에 이르러 조반을 먹고 다시 정읍으로 갔도다. 상제께서 일행을 앞세우기도 하고 뒤에 따르게도 하시면서 얼마동안 가시다가「일본 사람을 보는 것이 좋지 않다」하시고 정읍 노송정(老松亭)에 이르셨을 때「좀 지체하였다가 가는 것이 가하다」하시고 반시간쯤 이곳으로 오다가 이곳에서 다시 다른 곳으로 수십명의 일본 기병이 이곳에 달려왔다가 딴 곳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라. 상제께서 대흥리에 이르셔서 고부인과 희남의 병을 돌보시니라. 그들은 병에서 건강한 몸을 되찾았도다.
제생41절▷ 어느날 고부인의 모친이 단독을 앓는다는 기별을 듣고 근친하려고 하니 상제께서 좀 기다려서 함께 가자고 하시기에 마음 속으로 기뻐하여 기다리니라. 그러던 중에 모친이 아랫방에 들어오니라. 상제께서「왕대뿌리에 왕대 나고 시누대 뿌리에 시누대 나나니 딸이 잘 되도록 축수하라」고 부탁하시니 이로부터 단독이 곧 나았도다.
행록 4장 53절에서는 상제께서 차경석에게 시키신 일을 차경석이 그대로 이행하지 못함을 알고 모든 일을 차경석에게 부탁하지 아니하였으며 바로 고부인과 의논하여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권지 2장 34절과 행록 4장 22절은 고부인이 안질로 고생하였던 적이 있었는데 이를 차경석의 동생 차윤경이 상제께 말씀드려 병을 치료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증산교사』226쪽을 참조하면 이때는 무신년(1908) 동짓달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생 41절의 내용을 보면 고부인의 모친이 단독을 앓는다는 기별을 듣고 고부인이 근친하려고 하자 상제께서 고부인과 같이 가자고 하시면서 기다리라고 하셨다. 이때 얼마 안되어 고부인의 모친이 들어오게 되자 상제께서 ‘왕대뿌리에 왕대 나고 시누대 뿌리에 시누대 나나니 딸이 잘 되도록 축수(祝手)하라’고 부탁하시니 그 모친의 병이 곧 낫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상제께서는 앞으로 있을 미래 일에 대해서 고부인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의 말씀을 하셨다. 그 주요한 내용을 『典經』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행록4-23절▷ 상제께서 무신년 어느날 고부인에게「내가 떠날지라도 그대는 변함이 없겠느냐」고 말씀하시니 부인이 대하여 「어찌 변함이 있겠나이까」고 대답하였도다.
행록4-24절▷ 이 대답을 듣고 상제께서 글 한수를 지으셨도다.
「無語別時情若月 有期來處信通潮
무어별시정약월 유기래처신통조」
행록4-25절▷ 그리고 고부인에게 다시 가라사대「내가 없으면 여덟가지 병으로 어떻게 고통하리오. 그중에 단독이 크리니 이제 그 독기를 제거하리라」하시고 부인의 손등에 침을 바르셨도다.
행록4-26절▷ 다시「크나큰 살림을 어찌 홀로 맡아서 처리하리오」라고 말씀을 하시니 고부인은 상제께서 멀리 외방으로 출행하시려는 것으로 알았도다.
예시70절▷ 상제께서 구릿골 약방에서
「약장은 약장농이고 신주(神主)독이니라. 여기에 배접한 종이를 뜯을 날이 속히 이르러야 하리라.」
고 말씀하시고 그후 대흥리에서 고부인에게「약장은 네 농바리가 되리라」고 이르셨도다.
이상의 내용은 상제께서 고부인에게 일러주신 말씀이다. 이것은 물론 상제 화천후에 고부인이 겪게 되는 사건하고도 연관성이 있다고 보여지나 그보다는 천지공사를 수종하는 종도로서 고부인 개인의 인물적 차원에서만 머물 수 없는 전체 공사의 체계속에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 참여한 주요공사 내용
다음은 고부인이 참여한 주요공사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무당공사
고부인이 상제님의 공사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것은 대표적으로 무당공사를 들 수 있다.
공사3-33절▷ 상제께서 하루는 무당도수라 하시며 고부인(高夫人)에게 춤을 추게 하시고 친히 장고를 치시며「이것이 천지(天地) 굿이니라」하시고「너는 천하 일등 무당이요 나는 천하 일등 재인이라 이당 저당 다 버리고 무당의 집에서 빌어야 살리라」고 하셨도다.
윗 글의 내용은 상제께서 고부인으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시고 상제께서 친히 장고를 치시며 ‘천지 굿’이라 이름한 뒤에 고부인으로 하여금 ‘천하일등무당’으로 비유하고 상제님 스스로를 ‘천하일등재인(才人)’으로 비유하시면서 앞으로 ‘무당’의 집에서 빌어야 살 수 있을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 상제 화천 후의 행적 및 교단 창설
기유년(1909) 6월 24일 상제께서 화천하시자 차경석외 종도들은 이 사실을 고부인에게 숨기고 상제께서 청국공사(淸國公事)를 보러 남경에 가셨다고 하였다. 하루는 차경석이 김형렬과 더불어 부안 변산을 다녀와서 사랑에서 서로 의논하는 말소리가 들리거늘 부인이 조용히 들으니 곧 다른 선생을 구하러 갔다가 헛걸음하고 온 이야기라 다녀온 일을 후회하고는 종도 안내성(安乃成)의 집에 수련방을 차리고 내성과 중선과 더불어 태을주를 읽는지라 부인이 종도들의 이런 태도를 보고 크게 이상히 여기게 되었다.(증산교사 227~228쪽 참조)
이 뒤로 고부인이 태을주를 읽더니 매양 취정(聚精)된 뒤에 혹 상여가 들어와 보이기도 하고 혹 들것도 보이며 혹 상제의 손이 머리위로부터 내려와서 이마를 어루만져 보이기도 하며 저녁이면 혹 상제께서 평시와 같이 의관을 갖추어 들어오시기도 하였다.(증산교사 228쪽)
경술년(1910) 9월초 어느날 저녁에 부인이 주문을 읽더니 광명속에 문득 대흥리로부터 구릿골까지 가는 길이 나타나며 구릿골 뒷산에 초빈(草殯)이 보이고 초빈아래 모습에 시추물 묻은 것까지 보이므로 크게 의혹하더니 그 이튿날 저녁에 문득 상제께서 들어오사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었는데 어찌 나의 묻힌 곳을 찾아보지 않느냐’ 하시거늘 부인이 아뢰기를 ‘어찌 상서롭지 못한 말씀으로 희롱하시나이까’말씀하시기를 ‘내가 참으로 죽었노라’하시고 손으로 부인의 등을 어루만지시고 팔을 잡으시며 이별가 한 곡조를 크게 부르신 뒤에 일어나서 문 밖으로 나가며 문득 보이지 않았다.
고부인이 할일없이 고민으로 밤을 세우고 이튿날 새벽에 분 한갑과 독약 한봉과 일전에 상제께서 주신 흰 바둑알 한개와 진주 한개와 총전(總錢) 7푼과 작은 백로지 쪽 마른 것을 담은 엽낭(葉囊)을 가지고 새벽 빛을 타서 아무도 알지 못하게 사립문을 나서니 적막한 천지에 방향을 알 수 없었으나 오직 전날 밤 광명속에 나타났던 큰 길로 초빈 쪽을 바라고 가니 걸음이 빨라져서 80리를 한나절에 당도하였다.(증산교사 229~230 참조)
원평에 이르러 윤칠에게 명하여 약간의 주과포를 준비하여 들리고 길을 버리고 밭두둑과 논두둑으로 걸어서 솔개봉밑 장탯날에 올라 초빈앞에 당도하여 윤칠에게 ‘나래를 헤치라’고 명하니 옆에 따라왔던 경석이 말하기를‘남의 초빈을 헤치다가 초빈 임자가 바라보고 달려와서 힐난하면 어찌 하렵니까 바라건대 속히 돌아가사이다’하며 굳이 간하되 부인이 들은 채도 아니하고 몸소 헤치기 시작하거늘 경석이 할 수 없이 윤칠을 명하여 초빈을 헤치고 널천개를 떼니 상제의 용모는 아직 상하지 아니하였다. 부인이 가지고 왔던 진주를 입술안에 넣고 한삼을 가슴에 덮고 그 위에 옥황상제(玉皇上帝)라 쓴 백로지 쪽을 덮고 천개를 다시 덮은 뒤에 준비하여 온 주과포로 전을 올리고 초빈을 다시 봉하였다.(증산교사 231쪽)
이때 김형렬이 바라보고 종도 10여인과 함께 나와서 부인을 맞아 들어갔다. 부인이 형렬의 집에서 이틀동안 쉬고 경석 윤칠과 함께 고부 와룡 신경수의 집에 이르니 마침 시아버지가 오셨거늘 이로 인하여 수일동안 머무르시다가 대흥리로 돌아왔다.(범증산교사 29쪽)
신해년(1911) 9월 중순에 대흥리로 돌아와 경석에게 열아흐렛날 상제의 탄신기념(誕辰記念) 치성을 올릴 것을 명하니 경석이 제수를 갖추어 열아흐렛날 새벽에 치성을 올렸다.(증산교사 232쪽)
스무날 아침에 부인이 마당에서 거닐다가 갑자기 혼도하여 너댓시간을 쓰러져 있었는데 갑자기 깨어나서는 문득 상제의 목소리와 같은 음석을 내고 신통한 모습을 내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고부인은 경석에게 명하여 종도 김형렬의 집에 보관중이던 ‘약장’을 찾아오게 하였으며 이를 신주독으로 모시게 되었다.(증산교사 204, 234~235쪽 참조)
원래 상제께서 부인더러 ‘약장은 네 농바리가 되리라’하시고 또 ‘신주독이니라’하셨는데 그 말씀이 응험된 것으로 본다. 이에 부인이 각 종도들을 소집하여 교단 창립을 선언하고 여러 종도들에게 명하여 포교에 종사케 하고 신경원과 김병욱에게 명하여 태인장에서 큰 소한마리를 사다가 기르면서 신정(神政)을 행하였다.(증산교사 236~237쪽)
상제님을 직접 수종하였던 각 종도들은 원래 상제를 모셔 좋은 세상을 만나서 영화와 복록을 누리려는 희망으로 상제를 따르다가 뜻밖에 상제께서 화천하시므로 모두 크게 실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신해년(1911) 9월부터 부인이 신도로써 포정소(布政所)문을 열음에 모두 다시 발심하여 대흥리로 모여와서 부인을 중심으로 교단을 창립한 뒤에 각기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포교에 힘쓰니 이로부터 교세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그 뒤 3년동안에 전라남북도, 충청남도, 경상남도와 서남해중(西南海中) 모든 섬 일대에는 거의 태을주 소리가 이어지게 되었다. 갑인년(1914) 순천 장기동의 의연(義捐)으로 교실을 지어 비로소 본소의 면목을 세우니 이에 교세가 날로 흥왕하게 되었다.(증산교사 238쪽)
고부인이 신해년(1911) 9월에 종도들을 소집하여 교단을 창설할 때 뚜렷한 교명을 제신한 바 없지만 그 교도들이 태을주를 읽는 교단이라는 뜻에서 세간에서 태을교라 부르게 되었다. 후일에는 여기서 갈라져 나간 교단이나 이와 관련없이 다른 종도들과 그 문인들이 세운 교단까지도 모두 태을교라고 불러서 그 당시의 신문이나 책자에 그렇게 일컬어왔다.(범증산교사 33쪽) 이를『범증산교사』에는 ‘원태을교(原太乙敎)’로 명칭하고 있다.
원태을교는 종도들을 소집하여 교단을 창립한 것이 고부인이었고 찾아오는 교도들의 숭앙대상이었으며 교단을 주재한 것도 고부인이었다. 이 때 차경석은 대흥리 자기의 집이 본소(本所)로 지정되었고 교단의 안팎일을 총괄하여 차츰 상당한 인권을 쥐게 되었으나 교단의 주인공은 고부인이었고 차경석은 어디까지나 고부인을 보좌하는 지위에 머물 수 밖에 없었던 시대를 말한다. 원태을교시대의 특징을 위와 같이 보면 원태을교의 존립기간은 고부인이 교단 창설을 선언한 신해년(1911) 9월부터 차경석이 통교권(統敎權)을 장악하여 병진년(1916) 동지에 24방주를 임명하고 고부인이 거처하는 방에는 예문(禮文)이라 하여 주렴을 씌우고 누구를 막론하고 경석의 승낙없이는 예문의 출입을 금한 때까지 5년여간이었다.(범증산교사 33~34쪽)
그런데 교단 안에서는 교명을 정식으로 정해서 발표한 일이 없지만 교인의 수효가 늘어나면서 상제님의 교리가 선도(仙道)에 가깝다하여 선도교(仙道敎)라고 선전하였다. 원태을교시대부터 선전되어오던 선도교라는 교명은 고부인이 무오년(1918) 9월 19일 대흥리를 떠나 김제군 백산면 송삼리 천종서의 집으로 옮겨간 후 조종골에 새로운 교단이 세워지면서 이 교단이 선도교의 정통이라는 선전을 하게 되어 이러한 선전이 은연중에 교명이 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종골 교단의 간부의 한 사람이었던 고민환은 선정원경(仙政圓經)이라는 책자를 써서 고부인이 세운 교단의 교사(敎史)와 교리를 밝히고 있고, 이정립은 신축년(1961) 9월 동도교 및 증산계분파도(甑山系分派圖)에서 고부인이 세운 교단을 선도교라고 하였다.(범증산교사 35쪽) 이에 근거해서 범증산교사에서는 고부인이 창립한 원태을교와 조종골 교단을 합해서 선도교(仙道敎)라고 부르고 있다.
교단의 기초가 확실히 서게 되고 교세가 날마다 불어나는 것을 본 차경석은 가만히 교권을 움켜쥐려는 계획을 세워 종도들과 교도들 사이에 이간을 붙여 연원의 의를 끊게 하고 다음에는 부인의 법소(法所)에 주렴을 걸어놓고 겉으로는 부인을 높이는체 하며 실상은 부인과 참배하는 교도들 사이에 간격을 멀게 하니 이에 종도들은 경석의 야심을 간파하고 모두 분개하여 더러는 교문을 하직하고 물러가서 지방신도들과 연락하여 따로 문호를 세우기도 하고 더러는 경석을 따돌리고 부인의 법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운동을 하기도 하였다.(증산교사 238~239쪽 참조)
1916년에 차경석은 24방주제를 만들어 교권을 집중한 뒤에 신도들이 부인에게 참배하는 길을 막아버리고 정사년(1917) 10월에 유람의 길을 떠났다. 경석이 떠난 뒤에 부인은 1년동안 신도들을 만나지 못하고 한가한 세월을 보내다가 무오년(1918) 9월 19일에 대흥리를 떠나 김제군 백산면 송삼리 천종서의 집으로 옮겨갔다. 10월 중순에는 강사성, 강원섭이 와서 부인을 모시고 조종골 강응칠의 집으로 가서 머무르게 하였다.(증산교사 240쪽)
강응칠 강사성 강운서 강원섭 양문경 김재윤 김봉우 백용기 천종서 박종화 서문백 이용기 등 열두사람이 법소를 짓기로 의논하고 각기 성의껏 연조하여 자금 7백원을 모아 동짓달 16일 건축을 시작하여 1919년 7월 18일 낙성하고 부인을 모시니 이로부터 부인은 신도 두어사람과 더불어 조용한 초당에 한가히 있으며 소작답 스물너마지기를 붙여 농사나 감독하고 한달에 한번씩 치성을 올릴 뿐이더니 1919년 8월에 옥구 근처에 괴질이 크게 유행하여 인명이 많이 죽는 것을 보고 부인을 찾아와서 의지하는 신도가 점차 많아졌다.(증산교사 241~242쪽 참조)
무진년(1928) 정월 초사흗날 치성 끝에 부인이 혼도하였다가 서너시간 후에 일어나서 아무 말도 없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키며 휘두르거늘 고민환과 박종오 등은 뜻을 알지 못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문득 ‘상제의 영정(影幀)을 그리라’ 성화같이 재촉하는지라 이에 김제군 백구면 가전리 김옥현을 불러 영정을 그리니 옥현이 필법이 졸렬(拙劣)하여 잘그려지지 못한지라 부인이 말하기를 ‘아직 그대로 봉안하고 뒤에 다시 그림이 무방(無妨)하리라’하므로 그대로 봉안하였다가 3월 초하룻날 정읍군 용북면 장군리 화사(畵師) 채용신(蔡龍臣)을 청하여 다시 그릴새 스무나흗날까지 세 번만에 부인이 방불(彷佛)하다고 감정하여 스무엿샛날 부인의 생신치성에 봉안식을 거행하였다.(증산교사 261~262쪽 참조) 이 후 이 그림은 증산종단 최초의 상제님 영정이 되었다.
이 해 5월에 간부들을 불러 모은 뒤에 7항목의 계잠을 반포하고 간부조직을 변경하였다.
신미년(1931) 7월 그믐께 동화교(東華敎) 통정(統正) 이상호(李祥昊)와 간부 조학구가 고찬홍과 함께 와서 부인에게 용호동으로 법소를 옮겨 통합교단을 창설할 것을 제안하니 이에 부인이 승낙하였다.(범증산교사 44~45쪽 참조)
부인이 조종골 본소건물은 강응칠에게 넘겨주고 모든 일을 정리한 뒤에 신미년(1931) 동짓달 열사흗날 고찬홍 이근목 강재숙 전준엽 박종오 등 십여인을 데리고 상제의 영정을 모시고 용화동으로 이사하여 보름날 새벽에 동화교 개교(開敎) 3주년 기념치성에 참배하였다.
치성 끝에 조종골 교단과 동화교를 합하여 통합교단을 조직하였다. 임신년(1932) 3월에 부인이 교도들을 데리고 용화동으로 와서 신축한 집에 거주하면서 동화교의 교무를 주재하였다.(범증산교사 46~47쪽)
계유년(1933) 11월 6일 고부인은 용호동으로부터 전라북도 임피군 오성산 수양소로 옮기어 은거휴양하니 한가한 구름만 산빛에 파란 곡절이 많던 세살림의 경로가 추억에 남을 뿐이오 담박한 생애와 그윽한 흥취는 고요한 세월에 잔생(殘生)의 쾌락을 누리게 된지라 고민환 박종오가 시봉하여 안팎일을 보살피고 익산 완주 임피 옥구 등지 교도들이 종종와서 문후(問候)를 올릴 뿐이었다.(증산교사 288쪽)
을해년(1935) 10월 5일 새벽 두시에 고부인이 사망하니 이 때에 곁에 있었던 사람은 고민환과 박종오와 식모 이길수였다. 날이 밝음에 수의를 수습하니 이미 꺼내어 횃대에 걸어 놓은 것을 보았다.(증산교사 294쪽 참조)
분파도는 사실을 적은 것이고...상제님의 말씀을 비추어 본다면 상제님의 종도는 상제님의 말씀을 알리는 일 밖에 못하죠...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크게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이져.... 나를 모르는 자가 나를 헐뜯는 다는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님깨서 말하는 과거행적..... 딱 맞아 떨어지는 말씀이네여....
상제께서는 나의 말은 늘지도 줄지도 않는 여합부절이니라.... 상제께서는 법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셨져... 기국에 맞추어 주리라.... 상제님의 덕화를 펴는데 가만히 앉아서 집안살림이나 하고 해서 천하사를 도모할 수 있으리라 봅니까? 가당치도 않죠... 한사람이라도 살려 상제님이 이 땅에 오시고 상제님의 덕화
원,말씀이 중구남방이라 뭔 말씀인지...화천 전의 상제님 유언이라 하는것은 대순진리회의 전경(典經)에 있는 글만을 믿고 있는것이고 대순진리회 신도분들만 독선적으로 믿고 있는것을 여타 증산계열 도반님들 보고 믿으란 말인가요? 나를 모르는자라...그 "나"는(조철제:조정산), 증산교사(이정립 저)에 도적으로 기록 돼
있는데,도적 얘기만 나올때는 증산교사(이정립 저)를 부정하고,증산교사(이정립 저)의 다른 내용은 왜 고수부님 관계에 인용을 잘 하나요? 이건 정당하지 못하지요.이렇게 하는것이 상제님 가르침대로 하는건가요? 님이 주장하며 남의 종교판에 와서 시비거는것도 신은 아실껍니다.도인 많이하세요 우물안에
하시면 안됩니다. 아무리 저에게 뭐라 하셔도 근거에 입각해서 잘못된 글에 대해서는 바로잡는 글을 계속적으로 올릴겁니다. 대순진리회 외의 도반님들 이해를 도울 일이 있다면...전경(典經)만을 위주로 하시며 "증산교사(甑山敎史이정립 저))" 마져도 반신반의(半信半疑) 하시고 계신 님하고는 대화가 이번이 마지막이요.
첫댓글 증산교사(이정립 저)를 인정하시고 인용 하셨으므로, 증산교의 모든것을 부정하시려는 의도로만 아전인수격으로 오용(惡用)하려 하지마시고 증산교사(甑山敎史:이정립 저)에 나오는 조철제(趙喆濟:조정산)씨 과거행적의 불명예스런 "상제님 유품(遺品)과 성골(聖骨:상제님의 시신屍身)도적질" 과정의 내용도 이곳에 써 보시
분파도는 사실을 적은 것이고...상제님의 말씀을 비추어 본다면 상제님의 종도는 상제님의 말씀을 알리는 일 밖에 못하죠...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크게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이져.... 나를 모르는 자가 나를 헐뜯는 다는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님깨서 말하는 과거행적..... 딱 맞아 떨어지는 말씀이네여....
도둑질이라..... 상제께서는 화천전에 유언을 아신다면.... 그 유언의 의미를 아신다면.... 그런 말 못하죠.
도인이 어떻게 그런 비방의 글을 상제님을 따르는 도인은 그러질 않습니다. 비방은 비방일 뿐.... 진실이 들어나면 밝혀질 일.....
상제께서는 나의 말은 늘지도 줄지도 않는 여합부절이니라.... 상제께서는 법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셨져... 기국에 맞추어 주리라.... 상제님의 덕화를 펴는데 가만히 앉아서 집안살림이나 하고 해서 천하사를 도모할 수 있으리라 봅니까? 가당치도 않죠... 한사람이라도 살려 상제님이 이 땅에 오시고 상제님의 덕화
를 입히어 한 사람이라도 건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여야 올바르게 신앙하는 것 아닙니까... 말뿐인 것은 어느 누구에게라도 도움이 안되죠.... 실지 공부 모르고서 어찌 알까?
님께서 말한 것이 사실이라도... 님의 글의 진위 여부.... 인간이 어찌 알까? 그 글 속의 진위를 어찌 알까..... 상제님의 일은 인간은 모르는 일이져....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이행하는 도인이 알뿐....
세상에 도를 행한다고 하면서 남을 비방하고 헐뜯는 이가 있는 반면에 남이 무어라 하든지 그러니깐 구중곤륜산 심신황하수의 삶을 사는 도인이 있져...상제님의 가르침 대로 말입니다. 님의 글은 상제님의 가르침대로는 아닌것 같네여....
원,말씀이 중구남방이라 뭔 말씀인지...화천 전의 상제님 유언이라 하는것은 대순진리회의 전경(典經)에 있는 글만을 믿고 있는것이고 대순진리회 신도분들만 독선적으로 믿고 있는것을 여타 증산계열 도반님들 보고 믿으란 말인가요? 나를 모르는자라...그 "나"는(조철제:조정산), 증산교사(이정립 저)에 도적으로 기록 돼
있는데,도적 얘기만 나올때는 증산교사(이정립 저)를 부정하고,증산교사(이정립 저)의 다른 내용은 왜 고수부님 관계에 인용을 잘 하나요? 이건 정당하지 못하지요.이렇게 하는것이 상제님 가르침대로 하는건가요? 님이 주장하며 남의 종교판에 와서 시비거는것도 신은 아실껍니다.도인 많이하세요 우물안에
개구리 식으로... 갑론을박 하여 시비나 걸지 마시고, 도인이 되실려면 일신수습(一身收拾)부터 하시는것이 훨씬 났지요. 제가 얘기의 상대로 님을 상대하고 싶지않소.욕을 하시던가 폄하 하시던가 생각대로 하소. 누울자리를 봐야 눕는법이요. 제가 대순진리회 내막 들춰내니까 얹짢지요? 그러시다면 타종교에 갑론을박
하시면 안됩니다. 아무리 저에게 뭐라 하셔도 근거에 입각해서 잘못된 글에 대해서는 바로잡는 글을 계속적으로 올릴겁니다. 대순진리회 외의 도반님들 이해를 도울 일이 있다면...전경(典經)만을 위주로 하시며 "증산교사(甑山敎史이정립 저))" 마져도 반신반의(半信半疑) 하시고 계신 님하고는 대화가 이번이 마지막이요.
증산계열 도반으로서 전경을 믿을분은 대순진리회분들 외에 아무도 없다는것을 아셔야 합니다. 님은 대순진리회 안티에 가입하셔서 투쟁 하셔야 적임일것 같군요. 저는여기 소속이 아니지만 신성한 증산교 카페는 투쟁하고 시비거는곳이 아니니 다른곳을 알아 보심이 나을것 같읍니다.스스로의 얼굴에 침 뱉기는 말아야지요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것이 있다면 누가 뭐라해도 상제님의 말씀에 비롯하였다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에 근거하였으니...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