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고 둥글고 길고 짧음은 누구의 도이랴 / 도문 스님
약인욕료지 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 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 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이 게송은 화엄경의 제1 게송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관하라.
모든 것 오직 마음이 지어냄이로다’라는 뜻입니다.
신라시대의 불교를 5교 구산 선문이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독창적 화엄 초조가 계시고 전통적 화엄 초조가 계십니다.
신라 원효 대사께서는 스승 없이 깨달음을 얻으셨기 때문에 독창적 화엄초조 이십니다.
스승의 계보를 이어 오신 의상 대사께서는 전통적 화엄의 종주로서
신라 문무대왕 18년에 범어사를 화엄 10찰 중 한 절로 창건하셨습니다.
범어사에서는 지장 100일 기도를 올리면서 재일마다 제방의 스님들을 초청해 법문을 듣습니다.
저도 오늘 음력 28일인 노사나재일에 법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범어사에 오면 동산 스님과 용성 스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화엄 10찰 중 한 곳인 범어사에서 법문을 하게 된 만큼,
두 분의 선사, 동산 스님과 동산 스님의 은사이신 용성 스님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곳 범어사는 동산 스님이 24세 때 금정산 범어사에서 용성 스님을 은사로 출가 득도 하신 곳입니다.
그 뒤에 범어사 금정선원에서 정진하시다가,
문득 불어온 서풍에 대나무가 산란하게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몰록 깨달으셨습니다.
동산 스님은 120근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을 밝히신 것입니다.
이 경지를 은사이신 용성 스님께 말씀 드리고 거량을 해서 인가를 받았습니다.
용성 스님은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에 건백서를 내서
‘승려는 청정한 계율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장해 한국 불교 정화의 창시조가 되셨습니다.
그 법을 이어서 동산 스님께서는 한국 정화불교의 초조가 되셨습니다.
얼마 전, 이곳 범어사에서는 여러 훌륭한 스님들이 의논해
동산 스님의 정화 사상을 구술하는 논문 발표의 장을 마련했습니다.
참으로 감사드릴 일입니다.
용성 스님은 최초 한글 역경가
동산 스님께서 용성 스님으로부터 부촉을 받은 이후,
어느 날 대중 앞에서 하신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스님께서는 주장자를 들고 탁 치시고는 “이 주장자를 주장자라고 하면,
주장자 하나를 더하는 소식이요,
주장자가 아니라고 하면 머리를 들고 살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계시다가 다시 말씀하시기를,
“이 소식은 환하게 일러준 소식이요, 여간 가깝게 일러 준 소식이 아니로다.
이 한마디에 물론 나고 죽는 생사를 잊어버리고
한번 뜀에 부처님의 자리인 여래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얼른 알아차려야 한다.
이 소식을 알지 못하면 한마디를 답할 수 있겠느냐”라며 양구하고 계시다가,
주장자를 다시 한 번 치시고 말씀하시기를,
“앉아서 시방을 끊어도 오히려 이마에 점 한 번 딱 찍는 것이니
은밀히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하늘을 나르는 용을 볼 것이다.
부처란 무엇이냐. 불(佛)이란 깨달음이다. 마음을 보고 마음인 줄 깨닫는 것이 불이다.”
동산 스님 말씀입니다. 동산 스님의 그 당시 설법을
이 법사가 녹음기가 되어서 여러분에게 일러주는 것입니다.
동산 스님의 뜻은 이러합니다.
그 마음을 깨치지 못하고 미혹하게 쓰는 것이 중생이라는 것입니다.
깨치고 미한 것은 다르지만 그 마음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제외하고는 마침내 다른 부처를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도이니 해탈이니 열반이니 온갖 소리를 다 한다 하더라도 부처에는 허물이 없습니다.
중생이 잘못 알고 자기 마음이 부처인 줄 알지 못할 뿐입니다.
이러할 진데 자기 마음의 부처를 어찌하여 찾지 않느냐고 경책 하신 것입니다.
또 게송을 읊습니다. 동산 노사의 이 게송을 들으십시오.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 나의 주인공이 그 어느 곳에 있어서 안심입명하는고?”
이제 용성 스님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용성 스님은 3ㆍ1독립 운동을 이끈 33인 중 1명입니다.
스님은 불교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경전을 한글로 번역한 최초의 역경가입니다.
또한 위대한 포교사이자 선농일치의 조사선을 실천한 대선사입니다.
한국불교의 중흥과 새로운 나라를 지도할 이념으로 대각교를 창립,
사상혁신을 주창한 민족과 불교의 큰스승입니다.
수행자라면 견도·수도 해야
말씀드렸듯이 기미년 3.1 독립만세운동에 민족 독립운동 대표가 33인입니다.
천도교는 15명, 기독교 16명, 그래서 용성 스님이 “만해 한용운 너와 나만 들어가자” 해서
민족 대표가 33인이 된 것입니다. 33명은 33천 도리천을 의미합니다.
애초에는 천도교 11명, 기독교 11명, 불교 11명으로 하기로 했지만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자 기독교장로회, 감리회에서 우리도 11명씩 달라고 해서 44명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55인이면 어떻고 44인이면 어떻고 66인이면 어떻냐”고 했지만
도리천은 33천이 있기 때문에 33을 딱 채우기 위해서
불교계에서 줄여서 두 사람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용성 스님은 삼도를 통달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삼도란 견도, 수도, 무학도를 말합니다.
견도라는 것은 눈으로 본다, 귀로 듣는다, 코로 냄새 맡는다, 혀로 맛본다,
몸으로 감촉한다, 뜻으로 헤아린다,
요놈이 들어서 악업을 짓기도 하고 선업을 짓기도 하고 도업을 쌓기도 한다는 소립니다.
그런데 이 악업과 선업을 뛰어넘어서 도업으로 들어가는 소식을 견도라고 합니다.
알음알이를 벗어버린 경지를 견도라고 합니다.
용성 스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스님이나 전 세계의 모든 종교인들이 알음알이에서 벗어나서
견도를 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온 산이 온 생각 물든 가운데 시무불성을 찾는 나그네가
텅 빈 집에 둥근 달이 환히 비치는 가운데 홀로 앉았도다.
모나고 둥글고 길고 짧음 이것이 누구의 도이랴.
주인공아, 너는 어떤 놈이냐?”
용성 스님은 또한 수도를 하셨습니다.
수도란 얽혀있는 정을 풀어버리든지, 탁 끊어버리든지,
관념의 상으로 맺어진 그것을 녹여버리든지,
아니면 탁 때려 부셔버리든지 하는 것이 수도입니다.
용성 스님은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스님, 이 땅의 모든 종교인들이
이렇게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스님은 또한 끊임없는 노력으로 생각도 없고 말도 없는 무학도의 경지에도 이르셨습니다.
그리고 23세 되시던 해에 신라불교의 초전법륜성지인 구미 도개동 아도모례원 모례정 근처에서
용맹 결사 정진 끝에 보리도를 증득하시고 낙동강을 건너시면서 오도송을 읊으셨습니다.
용성 스님의 오도송을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금오천추월 金烏千秋月
낙동만리파 洛東萬里波
어주하처거 漁舟何處去
의구숙로화 依舊宿蘆花
금오산 천년의 달이요, 낙동강 만리의 파도로다.
고기잡이 배는 어느 곳으로 갔는고,
옛과 같이 갈대꽃에서 자도다.
이 법문은 2007년 7월 12일 범어사 대적광전에서 열린
지장백일기도 및 고승초청 대법회의 초재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 도문 스님은
도문 스님은 1935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1946년 용성 스님의 제자인 동헌 완규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스님은 순창 대모암과 장수 죽림정사에서 58안거를 성취한 후
고운사 백양사 주지, (재)대각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특히 스님은 1983년 은사 스님이 열반하면서 부촉한 뜻을 이어
지금껏 용성 스님의 유훈 10가지를 선양하고 실천하는데 진력해왔다.
용성 진종 조사 탄생지인 장수 번암면 죽림리 장안산 아래 죽림정사를 건립하고
현재 조실로 주석하고 있다.
‘백용성 조사 유훈실현후원회 지도법사’도 맡은 도문 스님은
최근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됐다.
출처 :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