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종택의 ‘수첩을 정리하며’
해가 바뀌어서 수첩도 새 것으로 바꾸었다. 만나는 사람, 드나드는 곳이 뻔한 나로서는 대개는 지난 해의 묵은 수첩의 전화 번호들을 그대로 옮겨 적게 마련이다. 예전에는 직장에서 나오는 교직원용 수첩을 그대로 사용했으나 그것이 너무 크고 두꺼워서 요즘에는 손바닥보다 더 작은 미니 수첩을 사용한다. 겨울철에는 별 문제가 없으나 상의를 짧고 얇은 것으로 입어야 하는 여름에는 그것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가끔 경험하는 일이지만 수첩을 옮겨 적으면서 문득 펜을 멈추어야 할 때가 있다. 며칠 전, 나는 새로 산 수첩의 빈칸에다 예의 그 이름들과 전화번호들을 옮겨 적어 나가다가 문득 낯선 이름을 발견하고는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내게 기억나지 않는 이름이 거기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내 필체가 아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아니면 어느 골목의 희미한 가로등 아래서 서둘러 꺼낸 나의 수첩에 그 사람이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내게 써 주었을 것이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그가 누구인가보다는 내가 그를 당연히 잊어야 할 사람인가 잊어서는 안 될 사람인가가 떠오르지 않는 점이었다. 아니 나는 그를 종이에 적어 놓았지 마음에는 적어 놓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 그를 건너뛰어 버렸다. 영문과의 술친구 김 아무개 교수의 이름은 삼분지 이쯤 쓰다가 지워버렸다 그는 지난해에 교환교수로 미국으로 떠났는데, 일 년이라고 당국에 신고는 했지만 사실은 과거 유학했던 대학에서의 학위를 마무리하기 위해 일 년을 더 묵을 예정임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지워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연필로 그냥 ‘희’라고만 적힌 사람의 전화번호를 옮겨 적었다. 아직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전화번호였지만 문득 서울 생활이 고슴도치 등처럼 차갑고 자신이 호롱불처럼 외롭게 흔들릴 때 한 번쯤은 다이얼을 눌러보고 싶은 옛 친구의 호출 부호였다.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허전한 일이다 라고 아마 이상(李想)이 그랬을 것이다.
등기소와 구청 민원실의 전화번호가 나란히 적혀 있었는데, 그것은 이번에는 옮겨 적지 않았다. 그들이 불친절해서가 아니라 이미 은행 융자를 받은데다가, 이자를 갚는데는 그 번호가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정 아무개의 전화번호도 이번에는 옮겨 적지 않았다. 지난 해에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다가 필요할 때면 언제나 그쪽에서 먼저 나를 수배해 왔기 때문이다.
박 아무개의 이름이 나오자, 수첩이 오래된 고문서(古文書)처럼 낯설어 졌다. 그의 호출부호는 이제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지금 없다. 그를 떠나보내면서 친구들은 취해서 소리치고 화가 나서 울었지만 하관(下棺)할 때 ‘아무개 이자식아.’라고 불러 본 그 이름이 마지막이었다. 묵은 수첩의 것들을 새것으로 옮겨 놔 보았더니 두 페이지는 줄었다. 크게 휘갈겨 쓴 글씨들을 작게 정돈시켜 놓았으니 그리 된 터이겠지만, 어쨌든 내 수첩에 입력된 분량은 그만큼 초라해진 셈이다.
수첩을 새 것으로 바꾼다고 모두 바뀌지 않았다. 바뀌지 않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 바뀌어져 버린 것과 지워져 버린 것을 함께 거기 있었다. 묵은 수첩은 서랍 깊숙이 넣어 둔다. 묵은 수첩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거기에 버리지 못할 것들이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건너 뛰고 지워버렸던 이름들이 서랍 깊숙한 곳으로부터 다시 걸어나오곤 했기 때문이다.
수첩을 정리할 때면 늘 거기에는 나의 기억과 망각이라는 이기심의 조각들이 편리하게 정돈되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페이지가 줄어버린 수첩에서 그만큼 줄고 있는 우리들의 욕망의 실제를 보게 될 것이다.
첫댓글 예전에는 년말이 되면, 다음 해의 수첩을, 요즘의 달력을 구하는 만큼 쉬웠습니다. 그러면 지인의 주소나 전화번호, 기타 중요 사항을 옮기는 작업을 했습니다. 언제부턴가, 스마트 폰에 자료를 저장하면서, 수첩의 용도는 멀어졌습니다.
지난 번에 스마트 폰이 갑자기 깜깜해지면서, 그래서 폰 점빵에 갔더니, 폰을 바꾸어야 한다나요. 저장된 자료는? 하니까 모두 다 자유의 몸이 되어서 제 갈대로 가버려서 불러 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폰의 저장 자료를 또 수첩에 기록해둡니다. ---
아나로그 시대에는 저장용량은 적어도 잘 잃어 버리지는 않는데. IT 시대에는 저장용량은 한정없이 커지는데 조금만 잘못 만지거나 매일같이 바뀌는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니 학장님 말씀에 이해가 충분히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