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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세례요한의 죽음의 역설적인 교훈(신나오미)
마가복음 6:17-29: 17.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9.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21.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 할 새 22.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3.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4. 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25. 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마가는 침례 요한의 투옥처를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유대 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요한이 베레아 지방에 속하며, 사해 동쪽에 위치한 요새 마케루스(Machaerus) 산성의 감옥에 투옥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마가는 요한의 투옥 이유가 “그 여자”를 위한 것이었다고 전한다. 즉 헤롯이 헤로디아를 위해 침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아마도 헤로디아의 요구에 의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본문의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는 문자적으로 “헤로디아가 요한에게 원한을 계속(미완료 시제) 품고 있었다.” 더 나아가서 “헤로디아가 반드시 그를 처벌받게 할 것이다” 등의 뜻으로 헤로디아의 깊디깊은 적의를 소개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더 깊은 죄악(살인)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장 20절 헤롯이,,,,두려워하여 보호하며,,,,달게 들음이러라. 19절에서는 헤로디아가 요한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반면에 20절에서는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 곧 아무런 범죄를 저지른 일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요한을 “보호하려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두 사람이 극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따라서 마가는 헤로디아를 상대적으로 매우 악한 여자로 부각시킨다. 이러한 묘사가 평행 구절인 마 14:5에서는 없고 다만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했다고만 밝힌다. 그러나 여기서는 오히려 헤롯이 침례 요한의 말을 듣고 요한의 비판을 긍정하면서 내적으로 몹시 괴로워하는 매우 심약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가는 이와 같이 헤로디아와 헤롯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헤로디아의 악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또한 헤롯의 선함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요한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즉, 요한으로부터 공격받은 헤롯이 직접 요한을 가리켜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요한의 의로움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여기서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의인이 얼마나 허무하게 죽임을 당히는가를 알려 주는 것이다. 의인은 악인들에 의하여 장난거리로 죽임을 당한다.
헤롯은 소녀의 춤 때문에 요한을 죽인다.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귀인들은 요한의 죽음에 대해 침묵한다. 헤로디아는 딸의 춤의 대가로 요한의 목숨을 요구한다. 많은 경우 의인은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다. 도리어 의인은 보통 사람보다도 못하게 죽는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은 의인이 이렇게 장난거리처럼 죽는다 해도 그는 악인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두려움으로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헤롯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문을 들었을 때 자신이 목베어 죽인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6. 바다야 잔잔해 져라
마태복음 8:23-27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배에 탄 것은 예수께서 배척한 두 제자의 모습과 반대되는 이름다운 모습이다. 또한 그들이 큰 지진으로 인해 격렬한 풍랑을 맞을 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해 달라고 외친 것도 역시 제자들이 가져야 할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적인 모습에 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직도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는 아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불안과 걱정을 극복하지 못하는 적은 믿음이다. 어떠한 사람이기에게와 같은 능력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감탄의 말이다. 배를 침몰시키려는 파도와 폭풍우를 말씀으로 잔잔하게 하신 예수 앞에서 그들은 놀라고 놀라 그가 하나님 그 자신이심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제자 자신들이 지금까지 알아왔던 그분의 인격에 관한 지식이 참으로 보잘 것 없었음을 실토한 것인 동시에, 하나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거센 파도와 폭풍우를 잠재울 수 없다는 고백이었다. 그리고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의 ‘순종하는가’란 말은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그에게 순종하는가’이다. ‘그에게’를 강조한 것이다. 이는 예수의 절대적 권위를 보이는 동시에, 창조주에 대한 자연계의 능동적이고 즉각적인 순종이 강조되어 있다.
이와 같이 자연계를 지배하는 것은 구약적 배경에서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또한 마태는 풍랑이란 단어 대신 큰 지진이란 단어를 본 기록에서 사용한 것 은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의미심장하다. 큰 지진이 있기 전에 배에서 잠을 자고 계시던 예 수님이 잠에서 일어나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후에 이방 땅으로 성공적으로 가는 모습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이방 땅으로 건너가게 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바로 예수께서 잠에서 깨어나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후에 가다라 지방에서 두 청년들에게서 군대귀신을 축출한 사건은 이러한 모습과 무관하지 않다.
47. 왕보다 앞서서 달려가자
열왕기상 18:41-46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42.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43.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44.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45.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여호와의 말씀에 아합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그의 운명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그의 반응을 다루기 전 18장에 나타난 아합의 성격에 대해서 몇 가지 사항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첫째, 아합은 비록 18:17에 서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라고 부르고 있지만 엘리야에게 적극적으로 적대적인 모습을 취하지는 않는다. 17:1에서도 그랬듯이 18~19장에서도 역시 별다른 위해를 가하려 틀지 않는다. 오바다가 걱정하는 바도 아합이 자기를 죽이려 들면 어떻게 하나 히는 것이지 결코 아합이 엘리야를 죽이려 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18~19장 어디에서도 아합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이려 했다는 말은 없다.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언제나 이세벨이다
여호와의 선지자인 엘리야에 대한 아합의 이런 태도를 적극적으로 여호와 종교대신 바알종교를 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란 자신의 세속 적 목적들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만약 여호와 종교가 자신의 성공을 보장해준다면 그것을 택하고, 바알종교가자신의 성공을 보장해준다면 그것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아합은 자신의 세속적 목적, 즉 시돈과의 관계를 위해 결혼한 아내 이세벨의 강력한 바알종교 지지 및 여호와종교 박해를 수동적으로 방조한 것뿐이지 주동적으로 전면에 나서서 여호와종교에 반기를 들고 바알종교를 조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합이 정말 그 식사를 받아들인 것인지는 막연하게 남아 있다. 모든 사건을 목도하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 진 것을 목도한 아합은 엘리야가 앞의 종교대결에서 기도한 바대로 해야 했다. 그는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 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리는 기도 및 그가 목도한 여러 가지 기적들 앞에서 사르맛 과부와 같이 반응했어야 했다. 아합은 사르맛 과부처럼 엘리야가 기도한 바를 자신의 입으로 고백해야 했다.
결국 불로 응답받은 엘리야의 제단이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킨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쌓은 제단 위에 불로 응답되는 역사현장을 볼 때 백성들의 마음은 기경되고 갱신된다. 그리스도인들의 몸이 불의 제단에 바쳐진 향기로운 번제물이 될 때 일반 백성들은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 을 인정하게 된다. 바알과 야웨 하나님 사이에서 방황하던 백성들은 야웨가 참 하나님을 인정하고 엘리야에게 가까이 다가왔을 뿐만 아니라 바알 선지자 850명을 심판하는 엘리야를 도왔다. 온 백성들이 회개했을 때 많은 구름과 바람을 동반한 큰 비가 쏟아졌다. 엘리야는 손바닥 만한 구름조각이 수명선에 나타날 때까지 두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기도한다. 마침내 작은 조각구름을 보면서 큰 빗소리를 듣는다. 즉시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큰 비 소식을 전달한다. 엘리야의 부흥운동은 방황하던 백성들과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운동이었고 야웨 하나님께 다시금 굴복하도록 초청하는 강력한 영의 시위였다. 엘리야가 지속했던 3년 동안의 경건한 자기연마와 영적집중의 삶이 엘리야를 제단의 불꽃으로 태웠던 것이다. 영적지도자가 하나님의 제단 앞에 바쳐진 번제물이 되고 그 번제물 위에 하나님께로부터 불의 응답이 내려올 때 백성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급진적인 전향을 경험한다. 제물을 태우는 불꽃 속에서 장대비 같은 은총의 역사가 예기된다. 온 백성이 회개하여 자기 삶을 쪼개서 맛보는 장대비 부흥은 어떤 부흥사도 가져다 줄 수 없는 부흥이요, 어떤 영적 지도자도 열매를 독점할 수 없는 진정한 하나님으로 부터의 부흥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흥이 한국 교회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의 종들이 먼저 하나님의 번제단 위에 불꽃처럼 타올라서 향기로운 제물이 될 때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여 자복케 할 수 있을 것이다.
48. 라마나욧과 같은 교회
사무엘상 19:19-24.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20.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1.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2.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여 물어 이르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이 이르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23.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24.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라마나욧은 “라마의 선지자 학교”란 뜻이다.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에서는 사무엘보다 다윗을 앞서 언급하는 본 어구는 다윗이 이미 역사의 주역이 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여기서 ‘나욧’은 ‘거처, 거주지, 초원지대’ 등의 의미를 가지는 아카디아어 ‘나움’에서 온 단어로서, 마치 오늘날의 기숙사와 같은 숙소 시설을 가리킨다. 이 같은 추정은 이 단어가 항상 특정 지명과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로써 보다 분명해 진다. 라마나욧은 말씀이 충만한 교회였고, 위로가 충만한 교회였다. 다윗은 미갈의 도움으로 인해 사울을 피하여 도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영토 내에 있는 한 그의 목숨은 사울의 처분에 달려 있음이 분명하다. 사울은 그 당시에 온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절대 권력자였고 3,000명 군사들을 거느리고 다윗을 찾아 죽이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사무엘이 있는 라마 나욧을 찾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 부은 하나님의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사울은 라마 나욧에 다윗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들을 보내었는데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임하매 그들이 예언을 하게 되었다.
사울 왕은 3번이나 전령들을 보내었으나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신에 사로 잡혀 예언을 하게 되었고 다윗을 체포하기를 포기하게 되었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왕의 명령에 거역하였다. 다윗은 더 이상 피할 곳도 없는 절제절명의 위기 속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 완벽하게 구원을 받게 되었다. 이제는 사울이 직접 라마 나욧으로 갔으나 사울 왕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걸어가며 예언을 하게 되었다. 그는 사무엘 앞에서 옷을 벗고 예언을 하며 벗은 몸으로 누워 잇게 되었다. 성령의 역사는 강팍하고 살인적인 사울의 심령 상태를 완전히 녹이고 불태워 버렸던 것이다. 라마 나욧에서 사울 왕 같은 사람까지도 은혜 받고 변화되는 역사가 이러났다.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사무엘 같은 사람들도 있고, 다윗과 같은 사람들도 있고, 사울과 같은 사람들도 있다. 우리에게는 답이 있고 그 길이 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서 오시므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개척하여 처음으로 보내는 대림절, 강림절 4주를 준비하면서 너무나 힘든 길임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귀하고 험한 길이기는 하지만, 불려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차게 된다. 이러한 가득함과 설레임을 주님앞에 가는 날까지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날마다 말씀으로 살아갈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시는 목사님과 사모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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