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는 쉽게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
-사랑하면 다가오는 것들
여행은 ‘얼마나 좋은 곳’을 갔는가가 아니라 그곳에서 누구를 만나고 얼마나 자주 그 장소에 가슴을 갖다 대었는가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하며, 그것에는 시간이 걸린다. 세상에는 시간을 쏟아 사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신비가 너무 많다. 가고, 또 가고, 또다시 가라. 그러면 장소가 비로소 속살을 보여줄 것이다.
월든 호수에 처음 갔을 때 그곳의 평범함과 일상성에 실망했다. 겨울 저녁이었는데, 단단히 언 호수 한복판에서 덩치 큰 남자 몇 명이 굉음을 울리며 전기톱으로 구멍을 뚫어 얼음낚시 채비를 하고 있었다. 호수 옆 도로에는 차들이 내달리고, 소로의 오두막이 있던 자리는 돌무더기와 알림판이 전부였다. 소로와 관련된 책과 기념품 파는 가게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소로의 정신을 느끼기 위해 먼 길을 간 나로서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나는 자유의지대로 살기 위해 숲 속에 왔다. 삶의 본질적인 문제들만 마주하면서 삶이 아닌 것은 모두 엎어 버리기를 원했다.’라는 그의 선언이 무색할 만큼 월든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호수였다.
영적 스승 크리슈나무르티가 말년을 보낸 캘리포니아의 오하이밸리도 동일했다.
그가 <마지막 일기>에서 명상적으로 묘사한 오렌지 과수원들과 석양은 영적 기운과는 거리가 먼, 그저 흔한 풍경이었다. 고급 상점들이 시내 중심을 차지하고, 관광지여서 물가가 비쌌으며, 저녁이면 부자들이 차를 몰로 레스토랑으로 쏟아져 나오는 동네였다. 캘리포니아의 대표적인 명상마을이라는 간판이 어울리지 않았다.
‘꽃마을’로 소문난 북인도 라다크의 시골 부룩파에 갔을 때는 실망이 더 컸다. 다큐멘터리에서 감동적으로 본, 형형색색의 꽃들 사이에서 전통의상을 입고 머리에 꽃을 꽂고 살아가는 사람들, 돈보다는 꽃을 더 소중히 여기는 마을을 직접 보기 위해 4천 미터 높이의 고지대로 갔건만 실상은 너무나 달랐다. 전통 옷을 입은 사람은 할머니 두세 명이 전부였으며, 머리에 꽃을 꽂기는커녕 꽃을 든 사람조차 없었다. 다큐멘터리는 잘 각색된 허구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내 기대를 무너뜨린 곳은 인도였다.
처음 인도에 갔을 때의 일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자정 넘어 도착한 뭄바이 공항에서 나를 맞이한 것은 지혜로 충만한 현자들이 아니라 사기꾼 운전사들과 헐벗은 걸인들이었다. 상인들은 가는 곳마다 바가지를 씌우고, 명상 센터를 입장료부터 요구했다. 영적인 나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물질적이고 혼탁한 나라였다. 진리의 가르침을 귀동냥하기 위해 가진 돈을 다 털어 여행 온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초기의 나의 여행은 이런 실망감의 연속이었다.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종교 성지는 호객꾼들로 가득하고, 성자의 동굴을 상상한 히말라야 트레킹은 게스트하우스와 식당들 사이를 이어달리는 극기 훈련이었다. 사두(힌두 탁발승)들은 세수조차 하지 않는 현실도피자들이었으며, 사원들은 욕심많은 성직자들의 장터였다.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장소는 자신의 속살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장소들은 본래의 모습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다. 여행자는 며칠 만에 장소가 가진 신비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먼 길을 찾아가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다. 오랜 수고와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장소는 자신의 진정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낯선 이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장소의 요정들은 재빨리 모습을 감춘다.
그래야 현명한 체하는 조언자들은 신비주의에 현혹되지 말라고 경고한다.
“갠지스 강은 영감 충만한 곳이 아니라 똥물이며, 시체 소각장 때문에 해로운 연기가 자욱하다. 소를 숭배하는 문화라서 지천에 널린 소똥을 피해 다녀야 한다. 느긋한 국민성 탓에 기차는 대여섯 시간 연착하는 게 보통이고, 매 순간 사기꾼들을 경계해야 한다. 인도에는 카레조차 없다.”
이런 글들이 인도여행에 대한 흔한 감상평이다.
우리가 장소에 대해 실망하는 것은 아직 그 장소가 가진 혼에 다가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슴을 그곳에 갖다 대지 않은 것이다. 아직 자신과 그 장소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어느 신전 문의 현판에 적힌 ‘이곳에 들어오려면 머리를 바쳐야 한다.’는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서귀포에 살 때 친구로 지낸 사진작가 김영갑에게서 나는 중요한 것을 배웠다.
어느 평론가도 썼듯이 그는 365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오름에 올랐다. 앉아서도 오름을 보고, 서서도 보고, 누워서도 보았다. 그렇게 해서 그는 누구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오름의 혼을 사진에 담았다.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혼을.
그 후 나는 월든 호수를 열 번 가까이 갔다. 봄에도 가고 가을에도 갔다. 호수를 돌기도 하고, 물가에 앉아 있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소로와 상관없는 나의 월든 호수를 발견했다. 오하이밸리는 캘리포니아에 갈 때마다 들렀다. 지도도 필요없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내 아들을 그곳 학교에 보냈다. 그곳에서 지금까지 우정이 이어지는 친구를 만나, 크리슈나무르티가 산책하던 길을 함께 걷곤 했다. 이제 그곳은 언제나 그리운 오하이밸 리가 되었다.
라다크는 여섯 번을 갔다. <오래된 미래>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도 그곳에서 만나고, 마당 가득 꽃을 심는 게스트하우스 부부와 한 가족이 되었다. 그들은 숙박료도 사양하며, 라다크의 사원들과 인더스 강 유역의 마을들로 나를 데리고 다녔다. “줄레, 줄레!”하며 라다크 식 인사로 아침잠을 깨우면 그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내 정신의 파편이 흩어져 있는 라다크!
갠지스 강이 흐르는 바라나시는 25년 째 해마다 가고 있다. 내 눈이 깊지 않아선지 이제야 조금씩 보인다. 장소들과 그곳에 사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에 가려진 웃음과 슬픔의 물감 축제들이. 이제는 바라나시만을 무대로 여행기 한 권을 쓸 수도 있게 되었다.
낯선 나라와 장소들을 여행한 사람들은 곧잘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들은 그 장소에 대한 긍정적인 여행담을 비난하고 허구라고 단정짓는다. 그들의 말이 옳다. 한 장소를 오래 만나지 않으면 어떤 이야기도 허구일 수밖에 없다. 장소의 혼들은 처음에는 매력 없는 면만을 보여줄 것이다. 당신 자신도 그렇듯이 장소 또한 낯선 이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돈을 뜯으려는 호객꾼과 가방을 뒤지는 여인숙 종업원과 길에 널린 소똥들로 당신을 쫓아 보낼 것이다.
여행은 얼마나 ‘좋은 곳’을 갔는가가 아니라 그곳에서 누구를 만나고 얼마나 자주 그 장소에 가슴을 갖다 대었는가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하며, 그것에는 시간이 걸린다.
세상의 모든 장소들은 사리와 숄로 얼굴을 가진 여인과 같다. 낯선 자가 다가오면 더 가릴 것이다. 그리고 그 색색의 천 뒤에서 검은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세상에는 시간을 쏟아 사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가고, 또 가고, 또다시 가라. 그러면 장소가 비로소 속살을 보여줄 것이다.
짐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일정은 계획한 것보다 더 오래 잡으라.
인생은 관광이 아니라 여행이다. 그리고 여행은 고난과 어원이 같다.
장소뿐만 아니라 삶도 쉽게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삶을 사랑하면 삶 역시 우리에게 사랑을 돌려준다.
사랑하면 비로소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109쪽
2017.4.6.(목) 6:04 타이핑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밖에서 찾지말고 그 자리에서도 극락이 나무아미타불
인생은 관광이 아니라 여행이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