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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만난 후배들이었다.
내가 생애처음으로 오른 산은 북한산 백운대였다. 그 당시 나의 나이는 고작 13세였다. 문안이 집이였던 나는
백운대를 가기위하여 버스를 타고 미아리고개를 넘어 흙먼지가 풀풀거리며 나는 신작로를 따라 가다 화계사
초입에서 하차하였다. 당시 버스 노선 종점은 의정부! 우이동으로 접근하기위하여는 화계사 초입에서
내려 유리병공장을 지나 바둑판 모양의 경작지 가운데 길을 걸어서 가오리에 도착한 후 다시 걸어 솔밭길을
가로질러야했다.
아름다운 솔밭을 지나면 300여년된 느티나무가 있었다. 이 느티나무를 돌아서 산밑으로 접근하면 곧이어
손병희선생님 묘역이 나온다. 이어서 다시 오르면 천도교회관과 봉황각이 울창한 송림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붉은 벽돌을 단아하게 쌓아 올리고 그 중간 중간 화강석을 정으로 쪼아 단정하게 올린 창받침석과 아치석이
붉은 적송과 어울려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랐다. 이 아름다운 숲에서 십여걸음을 산밑으로 옮기면 우이천
용개울이 기다리고 있었다. 용개울의 원류가 바로 소귀천이다. 문자 그대로 풀어쓰면 우이천(牛耳川)
이란 뜻이다. 비로서 산밑에 다달은 것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곳이다. 산길이라야
고작 두명정도 엇비슷하게 오고갈 수 있는 좁은 길이었다. 오르는 산길 좌측으로는 용암골에서 발원하여
김상궁바위를 지나 도선사 허리를 감아 돌아 소귀천과 합류하여 만든 용소가 바로 용개울인 것이다.
용개울을 지나 우이령에서 내리는 물과 합수되면서 우이천이 형성되고 이물은 다시 중량천과 만난 후 한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소귀천 다리를 건너면 아주 가파른 산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배가 무릎에 달
정도의 경사지였다. 가파른 길을 넘어서면 북한산과 오랜 인연을 지니고 있는 개나리산장이 나온다.
이 개나리 산장은 역사가 무척깊은 곳이다. 초창기 산을 찾던 산꾼들을 위한 산막주점으로 출발하여 놀이
집으로 변하였다가 현재는 유원지 형태의 식당으로 변모하였다. 이 집 부근 도로는 거의 평지 수준이다.
한 숨 돌리고 나면 바로 가파른 부처바위가 나온다. 아들을 점지 받기위하여 도선사를 찾는 많은 신자들이
납짝한 조약돌을 바위면에대고 긁으면 바위에 붙는다. 떨어지지 않고 붙으면 아들을 점지 받은 것이라고
연신 절을 하는 바위였다. 상단에는 이런 석문이 적혀있다. 나무아미타불........
이 바위 지나면 바로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좌측은 도선사로 바로 오르는 길이고 우측은 깔딱고개로 향하는
길이다. 지금은 수십년 휴식년제로 묶어 놓아 갈 수 없다. 이 길을 막아 놓고 현재 다니고 있는 하루재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깔딱고개는 이름 그대로 바위투성이 험한 길이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고개다.
이 고개를 넘어서면 만경대 밑에서 부터 흐른는 질 좋은 개울물이 있었다. 수량도 풍부하고 물맛도 기가
막혔었다. 개울에 앉아서 그냥 퍼먹어었다. 갈증을 이 물로 풀어내고 다시 오르면 바위로된 깔딱고개가
기다린다. 좌측이 협곡이라 추락을 방지하기 위하여 철막대기를 박아 쇠줄을 묶어 놓았다. 이곳을 넘어서면
비로서 사각돌로 지은 백운산장이 나왔다. 약 10여평 크기로 홀과 작은 쪽방으로 구성된 이 산장은 80연대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목재산장은 산악인들의 후원금과 이영구씨의 공력으로 지어진 산장이다.
이 산장은 이경구씨가 운영중이며 그 아들들이 이름이 인수와 백운이다. 산장 뒷편에 있는 봉우리를 따서
지은 이름이며 이 영구씨의 동생인 이경구씨도 인수산장을 운영하였었다. 백운산장에는 질 좋은 우물이
있어 물맛이 기가막히게 좋다. 이 우물에서 물을 보충하고 마신 후 다시 위문까지 가파른 길을 올라선 후
바윗길을 쇠줄을 이용하여 오르면 드디어 백운대 정상이 나온다. 정상에는 뜀바위가 있고 고인돌 같은
돌이 있어 그위가 정상이다 현재 늘 태극기가 펄럭인다. 이 곳에서 바로보면 서쪽으로는 서해바다, 강화도
마니산, 북쪽 개성 송악산, 동쪽은 원주 치악산, 남쪽으로는 관악산과 그 넘어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이런 환경때문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시키고 있을 때 민족의 정기를 끊어낼 목적으로 7개의 솨말뚝을
박아 사방의 맥을 끊어 놓았었다. 이를 1984년 모 산악회에서 전부 뽑아 내었다. 비 쇠말뚝의 방향이 동서남북
그리고 명산을 향하고 있어 민족의 정기를 끊으므로서 인물이 나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울 그리고 그 외곽의 풍광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는 해가 지는 석양무렵까지
앉아 난지도 부근의 노을빛과 서해상으로 지는 낙조를 보는 황홀경에 빠져 지내다 하산하곤 하였었다.
이 무렵부터 나도 모르게 산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중학교 졸업후 나에게는 시련이 찾아 왔다.
모교 진학에 실패한 나는 재수의 길을 걷게 되어었다. 그리고 다시 실패 그러다 마지막으로 영,수,국 시험보는
조건으로 흥국고교 입하게 된것이다. 그후 동대부고로 바뀌었지만.... 입한 한 후 내가 한일은 산악활동을
함께 할 동지의 규합이었다. 그 때 눈에 뛴 아이들이 바로 중수,영재,그리고 인호였다. 그래 4명이 두조가 되어
50km 경보대회를 참석하여 7시간 46분 47초만에 주파하였다. 등수는 들지 못하였지만 완주증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으며 그 경험이 나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많이 만들어 주어었다. 이어서 산악연맹이 주관하는 대통령기
등반대회를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후배들을 신입회원으로 받아들여 정식으로 동대부고 산악반으로
출범하였다. 이 후 영재와 중수는 일반산악회 맴버로 떠났고 대신 광진이가 새롭게 합류하였다.
1994년까지 매학기 마다 신입생이 5-7명씩 가입하여 신입생환영회를 도봉산 거북암 초입 야영장에서
행사를 갖어었다. 1967년 시작하여 1994년까지 명맥이 유지된 것이다. 이후에는 학교측의 비협조로 신입학생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모교관계자를 만난 설득하였으나 학부모들이 원치 않아 할 수 없다는
통보만 받을 수 밖에 없엇다. 그래 OB중심으로 운영하다. 2000년 무렵 활동이 잠시 중지되는 시련을 겪었다.
공식적인 활동은 못하고 비공식적으로 가까운 선후배끼리 모여 산행을 하다 금년 9월부터 공식적인 행사를
부활하기로 정하고 9월행사를 갖은 것이다. 참으로 감격스럽다. 벌써 OB의 막내가 올해 40 -41 살이란다.
격세지감이다. 이 녀석들 신입환영회를 갖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불혹이라니 ㅎㅎㅎㅎ 이들과 함께 찍은 단체
흑백사진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진천 장군봉 아래 통나무집 거실에 걸려 있다. 그 당시 나의 아들과 딸은
아들이 여섯살 딸이 네살이었다. 이 녀석들도 데리고 참석한 기억이 참 새롭다.
기용군이 아들과 함께 나왔다. 큰아이는 딸이란다.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 벌써 아이들이 이만큼 자랐다.
평택에 살고 있는 순기군도 참으로 반가운 얼굴이다. 원래 고향은 수원 종로통이었는데 개인적인 업무로
인하여 연고지를 평택으로 바꿔 산지 꽤 오랜되었다. 순기군에게는 누이가 있어 학창시절 누이를 아내로 맞아
너를 아래처남으로 만들게다고 놀려먹고 하였는데.... 순기군도 두 아이의 아버지다. 큰 아이는 대학에 입학
하였단다. 그리고 이번 전문서적을 출판하였다고 책을 들고 왔다.
원래 전공은 한양대 공업화학을 하였으나 대학원에서 사진학을 전공하였다.
사진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사진에 관한 전문가이다.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 전문서적을 출판하여
좋은서적으로 선정되어 상까지 받았다.
지금도 사진에 대한 기호학을 완성하기 위하여 끝없이 학문에 매진하고 있는 후배가 자랑스럽다.
속표지에 자신의 이름과 싸인을 적어 후배는 나에게 건넸다. 나는 즉석에서 약속을 하였다. 정독으로 10회
숙독 후 독후감을 적어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오늘 산행코스는 산곡초등학교 출발 - 약수터 -전망대 - 용마산 시작점 - 밤나무 골 계곡 - 산곡초등학교
원점회귀 산행으로 잡았다. 약수터 가기 전 삼거리에서 잠시 쉬면서 사과를 나누어 먹었다.
사과를 나누고 우유를 먹은 후 다시 산행을 시작하였다. 바람이 소슬한 것이 가을 바람이 맞다.
숨가쁘게 몰아치는 깔딱고개 마루가기 전 8부능선상에 있는 샘이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다. 한 바가지 떠서
뒤 따르는 후배들에게 권하였다. 그리고 기용이 아들에게 주었더니 씩씩하게 마신다.
그리고 능선에서 우회하여 용마산 초입에서 산곡으로 회귀하였다.
원주에서 대학교수를하는 후배 중배다. 허리병으로 고생을 많이하였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괜찮단다.
자신도 신기한 일이라 그런다. 산학합동으로 옻나무에서 축출하는 생약을 만들었단다. 그 기념으로 집으로
택배하겠다고 오늘 참석한 산악부 식구들의 주소를 적어갔다.
그리고 학장시절 오봉으로 가 암벽을 하던 이야기를 회상하며 추억을 현실로 끌어낸다. 나 역시 중배 이야기를
들으며 그 동안 잃어버렸던 추억을 다시 살렸다. 중배가 나와 관련된 추억은 이런 이야기들이었다.
오봉으로 암벽을 하러 가는 우이주능길에서 작은 래듸오를 넵섹에 걸고 걷는 여유로움이 너무 좋왔단다.
그리고 군에 가기전 후배들과 산행을 하면서 암벽장비를 몽땅 주는 내 모습에 보기가 좋았으며 선배는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하고 느껴었단다. 그리고 80년대 초반 내가 여의도에서 근무할 때 장비문제로 중배를 부른적이
있었다. 그런데 벼란간 윗사람이 호출하여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점심도 주지 못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것이 서운했었는지 오늘 그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내가 제대로 해명을 하지 못했었나보다.
다음산행 때 그 이유에 대하여 설명이 필요할까보다.
후배 순기군의 망중한 ......
부자지간의 모습이 정겹다. 산행을 끝내고 저녁겸 회식하는 자리로 이동하여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기용군과 만홍이는 운전관계로 술을 못하고 저녁만 든 후 파하는 자리에서 처에게 전화를 걸어 아내를 바꿔주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다. 죄송해요~ 선배님 챙기지 못하고 찾아뵙지도 못하고 이렇게 시간만 흘러 갔네요
자꾸 미안타 한다. 제수씨 피차 마찬가지~~ 빠른 시일내에 통나무 집으로 초대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운전 조심을 당부하고 기용이를 먼저 보냈다. 멀어져 가는 차 꽁무니를 나는 한 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려서는 길에 순기가 찍어준 사진이다. 원래 대장장이 집에 식칼이 없으며 목수의 집 추녀끝이 시원치
않은 것 처럼 카메라 든 놈은 사진이 없다. 이를 알고 있는 순기가 박아준 사진이다. 사진을 통하여 본 나를 보고
60년의 삶의 허물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참으로 인생의 길이는 아침볕처럼 참으로 짧다. 그런데 그 짧음
속에 웬 풍파가 많은지 말도 많고 탈도 많으니, 그래서 생은 인고라 했던가.....
먼저 보낼 후배들은 전부 보내고 우리는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겨 몇순배 더 마신 다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병맥주 몇병 사들고...... 후배들 덕택에 행복한 하루를 살았다. 그리고 몇통의 전화를 받았다.
형님 죄송합니다. 다음달에는 꼬옥 나가겠습니다. 나는 그래그래 그렇게 해라! 하고 즐거운 목소리로 답을 하였다.
순기가 차로 아파트까지 데려다 주어 쉽게 편하게 귀가할 수 있었다. 아주 행복한 산행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후배들과 가족수를 셈하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서른 -- 쉰.... 아~ 이렇게 많구나
하기는 28년간 지속된 산악부인데 매년 5명씩만 입회하여도 140명 그리고 거기에 장가서 아내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응!! 그렇구나. 또 10월 산행을 기다리며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