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다음날 이른 새벽 나는 어김없이 달랏시장으로 향했다. 순시하듯 한 바퀴를 돌고 지난 번 호치민에서 산 사과와 같은 체리 빛 사과 한 봉지와 반미를 사서 하나는 먹고 하나는 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나중 기사를 줄 속셈이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8시 반쯤 달랏시장에 모두 가 기념사진을 한 방 찍고 달랏대학교로 향했다. 앞선 글에서 보았지만 달랏시장의 시간대별 장사들이 바뀌는 현황파악도 내게는 의미 있다 싶었다. 우리는 5일장 새벽에 가면 자리싸움이 치열한데 참 기특한 사람들이다.
이윽고 도착한 달랏대학교, 석교수는 이미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정문 앞 맨 앞이 우리들로 치면 본관 같은 곳이다. 규모는 작았는데 그곳에 총장님이 있다고 했다. 그 뒤는 물리학과 건물, 작은 다리가 눈에 띄었다. 석교수가 한 번 걸어보라고 했다. 솔직히 우리는 무감하다시피한 평범한 다리인데 그는 이 다리를 건너설 때면 색다른 느낌을 갖는다고 했다. 작은 도랑인데 그러고 보니 다리가 맵시가 있고 운치가 있다. 탐구의 세계로서 철학적인 견지로서 찬찬히 건너면 달라지는 세상, 필시 이 다리는 그에게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같은 어느 신념이 새겨진 것이 아닐까. 수년전 특강을 하러 이곳에 왔을 때 바로 이로 통하여 왔노라고 그는 했다. 누구든 각별한 의미의 곳은 따로 존재한다.
화학과 교양학부 등등 빠짐없이 일일이 석 교수는 소개해주었다. 달랏대학교에 한류열품이 불어 수천 명이 모였다는데 지금 한국어학과는 당초보다 규모를 늘려 약 300명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고 한다. 베트남은 한 학기 등록금이 300 USD로 매우 저렴한데 이는 외국인에게도 적용되고 있다. 학비만 저렴한 것이 아니라 기숙사 비용 또한 저렴하다. 그런데 특이한 이름이 눈에 띈다. 한국말로 써 있는데 ‘베트남 국립 달랏대학교 부설 교육원’ 이곳은 한국 학생들에게 베트남어 교육을 실시하는 곳이라고 한다. 베트남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에게 베트남어 및 영어를 14개월간 교육하는 교육원이라는 것이다.
이 교육원은 (전)주베트남 대사를 역임하고 달랏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유태현 교수가 제안 하여 교육원 설립이 추진되어 2015년 4월 첫 강의를 목표로 신입생을 보집하였다고 했다. 향후 10년 후가 기대되는 국가 베트남을 그는 내다본 것 같았다. 나도 베트남을 훑어보면서 못 살 이유가 하나도 없는 나라라고 생각을 했는데 비단 학생뿐 아니라 기업인들도 여기서 말을 읽히는 것도 괜찮겠다싶다. 요강을 보니 1천 5백 만 원에 기숙사까지 제공하고 베트남어를 중급수준까지 끌어준다니 나부터도 솔깃해진다. 그가 묵는 집으로 향하는 길, 한편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그는 현실적으로 그게 불만이다. 조용한 시간이 간절한 교수님으로서는 이는 큰 장애물이 아닐 수 없다.
집 앞에 꽃나무 몇 그루가 보였다. 이국땅에서 이에 쏟는 정성은 남다를 수밖에는 없다. 외로움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타국에서는 더 말해 뭣하리. 작년 우기 때 비가 넘쳐나 아름드리 소나무가 통째로 집 앞으로 쓰러졌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활엽수면 몰라도 소나무가 쓰러졌다는 것은 거의 들어본 바가 없는데 이해가 안 간다. 알다시피 소나무의 착근 실력은 다 알지 않는가. 그만큼 비가 오면 많이 온다는 반증도 된다 싶다. 제발 올해는 조신하게 잘 지내다오, 소나무야. 옆집이 전에 대사하시던 분이 산다하더니 물어는 안 보았지만 유 교수님이 아닌가 싶다. 그의 산책길이라는 샛길 너머에 푸른 벼가 넘실거린다. 우리는 한 겨울인데 벌써 웃자라 결실을 재촉하고 있다. 저것이 깟디엔이라는 유기농 쌀인가. 저 녀석이 우리나라에 들어온다면 저것도 무시 못 할 존재가 될지 모른다. 곳곳에서 발전의 현상이 목격되는 이곳 달랏, 아마 머지않아 느억맘으로 버무린 김치가 우리 식탁에 오를 날이 머지 않았다싶다. 중국 보다는 베트남이 정감 있고 훨씬 낫지 않은가.
물밀 듯 밀려들 농수산물, 이미 쥐포나 생맥주집에 나오는 한치만 해도 모두 베트남 산이다. 공산품만 빼면 아직은 값이 싸 살만하다고 한 석 박사 사모님의 말씀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우리나라 제품은 그곳에서 고가로 최상급을 말하니 말이다. 그가 북쪽에 우뚝 선 불상을 가리켰다. 황금불상이다. 출근 때 한 번은 보고 강의 길을 나선다는 그의 말이 깊은 느낌으로 마음에 꽂힌다. 굳이 종교를 떠나 그에게 저 불상은 그 이상 어느 신조일 수 있다. 나는 아파 병원에 누워있을 때 가족들 사진을 몰래 훔쳐보곤 했었다. 이는 내가 살아야하는 이유였고 희망이기도 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216364F58CD2D8D0D)
달랏대학교에서 북쪽으로 보이는 황금 불상, 반항사(Van Hang Chu). 나도 그가 잘되기를 황금불상을 보고 간절히 소망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학교 안 커피샵에서 커피 한잔을 하고 그와 헤어졌다. 달랏에서 그와 한 시간들, 그의 치밀함으로 알찼으며 마음껏 웃고 즐거웠고 행복했다. 사실 지금 쓰는 이 글은 달랏 유혹이 컸기 때문이다. 쓰는 글을 다 책으로 만들 수는 없는 처지, 괜한 허실을 두지 말자 하여 포기하곤 하는데 그래도 이번만은 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 한 게 실은 지난 밤 달랏 호텔방에서였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잠을 설쳤지만 얼추 이 정도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스무 편, 그런 게 벌써 33편이 넘는다.
이제부터는 우리의 벤츠는 일행 7명과 기사 아저씨 하여 총 8명이다. 나트랑(나짱)으로 향하는 길 ,올라왔으니 다시 내려가야 할 것이다. 달랏이나 나트랑은 프랑스 식민지시절 안남국에는 속했지만 그들로서는 이미 말 한대로 아주 각별했던 곳이다. 많은 프랑스인들이 낯선 기후와 이국 생활에서 오는 질병을 치료하고 휴양하고자 프랑스의 기후와 비슷한 지역을 찾아나서다 발견한 인공도시 달랏, 이쯤 나도 코친차이나 역사풀이는 종결을 지어야 한다. 베트남 쌀국수의 기원이 프랑스인들이 뜯어먹고 난 돼지 뼈다귀를 가져가 국물을 우려 만들어 먹은 게 그 기원이라는데 나짱부터서는 더 이상 프랑스이야기를 안 끄집어내는 게 예의인 듯싶다.
우리나라 역사도 소홀히 하는 판국에 남의 나라 역사이야기 길게 하면 재미없다. 짧게 요점만 말하자면 이렇다. 살펴 본대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됨으로 1차생산물인 쌀, 고무, 커피, 후추 등의 농작물을 거대 플렌테이션을 통해 수탈을 당하게 됐고, 그 결과 지금도 베트남은 아시아지역에서 가장 많은 커피원두를 생산하는 국가가 되어있다. 흔히 알고 있듯 남베트남 북베트남으로 갈려 이념에 의한 전쟁을 치룬 베트남이라는 나라는 사실 원래 남-북이 투닥거리는 사이였다. 18세기 중엽 북쪽은 여씨가, 남쪽은 완씨가 세력을 키워 서로 투닥 대다 프랑스의 원조를 약속받고 완씨가 베트남을 통일하게 된 것이 아닌가. 이름 하여 응우옌왕조.
그런데 프랑스는 약속과는 달리 별로 한 것도 없이 쥐꼬리만 한 원조를 빌미로 이것저것 조약을 맺다가 베트남을 보호령에 편입시켜 식민지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북 베트남인들은 '남쪽 병신들이 외세에 굴복해서 나라를 잃었다'라고 생각하며 이를 부득부득 간다. 당시 하노이 사람들은 사이공 사람들을 병신이라고 정말 불렀다. 이것이 호치민이 돋보이는 이유다. 아무튼 이는 훗날 베트남 전쟁의 비엣민(월맹)에게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잠시 머물던 일본군들 수탈이 끝나고 1945년 일본군이 베트남에서 물러나면서 베트남 역시 한국처럼 독립을 맞고 독립국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는 일본군이 주둔했지만 일본은 프랑스인들의 권리행사를 묵인한 상태였고 어찌 보면 프랑스 총독부 자체는 베트남에서 그대로 식민지에 대한 권리행사를 계속 해왔던 거나 다름이 없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프랑스는 일본패망 후 예전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 다시 군대를 파병해서 진주하게 된다. 자원이 넘쳐나는데 그들이 쉽사리 포기할 인도차이나가 아니다. 그런데 웬 걸?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군들은 상당수 무기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가버렸고 더 이상 식민지는 안 된다며 궐기한 지방의 명문 호족 군벌 세력들이 일본군이 두고 간 무기로 이미 무장을 해버렸다. 무장한 지방군벌의 저항에 직면한 프랑스는 베트남의 무장해제를 위해 영국과 중국에게 베트남에 군대를 주둔할 것을 요청한다. 그래서 북위 17도 기준으로 북쪽은 장개석의 국민당 군이, 17도 이남은 영국의 로열아미가 각각 군대를 주둔을 시키게 되는데, 장개석의 국민당 군은 본토에서 모택동의 인민해방군한테 밀리고 있는 와중이라 베트남 정세까지 개입할 여력이 안 되었기에 그냥 명목뿐인 군대주둔이었다.
호치민은 그 무렵 북부지방 호족의 군벌세력을 통합하며 북베트남 정세를 수습하고 공산주의 노선을 표방하게 된다. 즉, 스탈린과 모택동 편에 붙은 것이다. 이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비엣민, 즉 월맹(Viet Minh/ 越盟)이다. 이렇게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북베트남, 남베트남으로 갈라지게 된다. 영국도 군대를 주둔시키긴 했는데 버마(현 미얀마)하고 인도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나 영국은 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빼버린다. 어쨌든 북쪽은 이미 호치민이라는 인물이 거의 장악을 한 상태였고, 프랑스는 이제 베트남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를 혼자서 해결해야만 했다.
장고 끝에 악수라고 커져가는 월맹의 압박에 고민하던 프랑스는 월맹의 거점도시였던 항구도시 하이퐁에 포격을 가하고 군대를 투입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2차 대전의 전화를 피부로 느껴보지 못했던 베트남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공포로 패닉에 빠지게 되었고 당장은 체계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월맹군은 하노이를 버리고 산악지대로 숨어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치게 된다. 그 때가 1949년도인데 그 무렵은 잘 알다시피 미-소-중 간에 가장 큰 관심과 경제/군사력을 집중한 곳은 한반도, 즉 우리나라였다.
이때부터 벌어진 전쟁을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 부른다. 1945년 기갑사단을 충원 받은 프랑스군은 공산반군을 토벌하기 시작했다. 이에 호치민은 베트남인의 항전을 호소하면서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은 처음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정글로 숨어들어간 월맹군을 토벌하기 힘들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다는 명분이 있던 월맹은 주민들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고 기습공격으로 프랑스군을 꾸준히 괴롭혔다. 공산화된 중국은 이웃한 베트남이 프랑스나 미국이 지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월맹에 대량의 무기와 은신처를 제공했다. 하지만 강화된 월맹군은 1951년 1월에 프랑스군의 거점인 하노이를 4개 사단을 동원해 공격했으나 프랑스군의 우세한 화력에 패주하고 만다. 아직은 무기도 그렇고 조직도 열세인 월맹군이다.
1953년 베트남-중국 국경에서 쫓겨난 프랑스군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하노이 서쪽 450km 라오스와의 국경의 작은 마을 ‘디 엔 비엔 푸’에 대규모 공세를 위한 전초기지를 세운다. 이곳은 중국 국경과도 가까웠기 때문에 월맹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본거지를 타격할 계획이었다. 1953년 11월 2개 대대의 프랑스 공수부대가 강하한 이래 디엔 비엔 푸에는 2개의 활주로와 사령부, 지하병원 등을 갖춘 거대한 요새가 건설되었다. 외인부대까지 합쳐진 병력은 16,000명이나 되었고 반경 3km 이내에 8개의 전초기지가 세워졌던 것이다. 적의 포위공격에 대비해 100대의 수송기로 보급선도 확보했다. 한마디로 난공불락의 요새인 디 엔 비엔 푸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세계 전쟁사에도 이름을 남긴 전투다. 이 이야기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