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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에 송악(松嶽:開城)의 토호(土豪) 왕건(王建)이 분열된 한반도를 다시 통일하여 세운 왕조(918∼1392). 공양왕(恭讓王)까지 34대 475년간 존속했다. 왕건은 태봉(泰封)의 왕인 궁예(弓裔)의 부하로 있다가 918년 궁예를 추방하고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건국과 민족의 재통일】 왕건은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배현경(裴玄慶)·복지겸(卜知謙) 등의 추대를 받아 철원(鐵圓:鐵原)에서 즉위하여 도읍을 송악으로 옮긴 다음 호족세력 통합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崇佛政策) 등으로 세력구축에 힘썼다. 이때 한반도 내의 형세는 후삼국(後三國)의 분열기였는데 935년 신라를 병합하였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격파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성취하였다.
【왕권의 안정】 태조 때는 호족세력 통합의 방도로 호족과의 정략결혼이 성행함에 따라 대두한 많은 외척세력과 종실세력(宗室勢力)이 왕위 계승을 놓고 대립, 왕실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그 실례가 왕규(王規)의 난이다. 4대 광종(光宗) 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956년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958년 과거제도, 그리고 공복제도(公服制度)·칭제(稱帝)·건원(建元)을 실시하는 등 왕권의 위세를 과시하고 불평 귀족을 숙청하여 정치기강을 확립하였다. 5대 경종(景宗)은 전시과(田柴科)라 하여 전국가적 규모의 토지제도를 마련하여 관리들의 생활안정을 도모하였고, 최승로(崔承老)의 보필을 받은 6대 성종(成宗)은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하여 유교적 정치사상에 입각한 2성(省) 6부(部)의 중앙관제를 마련하였으며, 성종 때는 지방관제를 정비하여 최초로 지방관(地方官)을 파견하는 등 중앙집권제 강화에 힘쓰는 한편, 학문과 산업을 장려하여 국가기반을 굳혔다. 11대 문종(文宗)에 이르러 율령(律令)·전제(田制)·관제(官制)·병제(兵制) 등이 완비되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완성되었다.
【사회의 동요와 무신의 난】 문종의 문치정책(文治政策)에 따라 최충(崔? 등이 12도(徒)를 설치하고 인재를 배출하여 문운(文運)을 크게 떨쳤으나,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경시하는 풍조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특히 문종 이후 17대 인종 때까지 인주이씨(仁州李氏)인 이자연(李子淵)→이호(李顥)→이자겸(李資謙)이 7대 80년간 왕실과 중복으로 혼인관계를 맺고 외척세력으로 등장하자, 왕권의 쇠약과 더불어 권력층은 토지를 겸병하기 시작하여 농민들의 몰락을 촉진시켰다. 이자겸의 세력이 왕권을 능가하자 인종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1126년 이자겸의 난을 일으켰으며, 이자겸과 척준경(拓俊京) 사이의 반목으로 척준경·정지상(鄭知常)·김부식(金富軾)의 순으로 집권자가 바뀌는 등 귀족정치의 모순이 폭발되어 고려는 내란기로 접어들었다.
35년(인종 13)에는 묘청(妙淸)이 서경천도와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을 주장하자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립으로 묘청의 난이 일어나 귀족정치의 내분이 폭발하였다. 인종에 뒤이어 즉위한 의종(毅宗)은 군신과 더불어 향락을 일삼고 정사를 소홀히 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과거부터 불만이 많았던 무신들은 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켜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보내고, 명종(明宗)을 즉위시켰다(정중부의 난). 그 후 무신간의 정권쟁탈전이 전개되어 79년(명종 9) 경대승(慶大升)은 정중부를 죽이고 집권하였고, 경대승이 병사하자 83년 천민출신인 이의민(李義旼)이 집권, 또 96년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을 죽이고 집권하여 최씨 무신정권은 우(瑀)·항(沆)·의(? 4대 60여 년간(1196∼1258) 계속되었다. 이 결과 전시과의 붕괴로 농장이 확대되었고, 노비 증가·사병(私兵) 양성·하극상(下克上) 풍조의 대두로 천민 및 농민의 반란이 일어나 사회질서가 붕괴되었다.
무신집권 기간에 일어난 사건을 보면 1173년 문신과 결탁하여 의종 복위운동을 한 김보당(金甫當)의 난, 74년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의 난과 승려들의 반란, 하층민의 반란으로는 76년 공주(公州) 명학소(明鶴所)의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의 난, 82년 전주(全州)의 관노(官奴)인 죽동(竹同)의 난, 그리고 93년 신라 부흥을 외쳤던 김사미(金沙彌)의 난과 효심(孝心)의 난, 1217년(고종 4) 서경에서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했던 최광수(崔光秀)의 난, 37년 전라도 담양에서 백제 부흥을 표방했던 이연년(李延年)의 난, 그리고 1198년(신종 1) 최충헌의 사노(私奴)인 만적(萬積)이 노비신분 해방운동을 전개한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231년에 몽골의 침입을 받아 강화(江華)로 천도하였으나 59년 원(元)나라와 화의하여 충렬왕(忠烈王) 이후 공민왕(恭愍王) 때까지 80여 년간은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자주성을 잃었다.
【대외관계】 한반도의 역사는 중국 대륙의 정치형세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고려가 건국할 때는 916년 요(遼:거란)나라, 5대 10국, 그리고 960년 5대 10국을 통일한 송(宋)왕조가 일어났다. 이때 고려는 대외정책으로 친송배요(親宋排遼)를 표방한 북진정책을 썼으므로 세 차례 거란의 침입을 받았다. 962년 광종 때(송나라 태조 3) 송나라와 국교를 맺은 양국간의 관계를 보면 송나라는 북방에 위치한 요나라와 금(金:女眞族)나라를 의식하여 정치적·군사적 의도에서 제휴하려고 하였으나,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문화 수입에 주목적을 두고 친선관계를 맺었다.
고려와 여진족과의 관계를 보면 숙종 때 만주 하얼빈[哈爾濱] 지방에서 일어난 완엔부[完顔部]의 추장 영가(盈歌)가 여진족을 통합하여 북간도 지방을 통일한 후 우야소[烏雅束]가 함흥(咸興)까지 진출하여 고려군과 충돌하자, 숙종은 임간(林幹)에 이어 윤관(尹瓘)을 파견하여 여진정벌을 단행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윤관은 별무반(別武班)을 편성, 1107년(예종 2) 윤관과 오연총(吳延寵)이 여진을 토벌하여 9성(城)을 축성하였으나 1년 후 9성을 포기하였다. 그 이유는 여진족이 환부(還附)를 애걸해왔고, 수비의 곤란 및 보수세력의 성장 때문이었다. 그 후 여진족은 15년 아구타[阿骨打]가 국호를 금(金)이라 하고 25년(인종 3) 요나라를 멸한 뒤 26년 금나라는 고려에 사대(事大)의 예를 강요하기에 이르러 당시 집권자 이자겸 등의 주장으로 사대관계를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고려사회는 내분만 격화되어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무신의 난 등으로 더욱 혼란하여 원나라의 침입을 받아 자주성을 상실하기도 하였다.
그 후 1370년 공민왕 때에 이르러 지용수(池龍壽)와 이성계(李成桂)가 랴오둥[遼東] 지방을 공략하여 랴오양[遼陽]을 점령하였다. 공민왕 때 2차에 걸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과 특히 우왕(禑王) 전후기의 왜구(倭寇)의 침입은 국정을 불안하게 했고 국력을 소모시켰다. 이와 같은 정치적·사회적 불안기에 명나라가 만주를 점령한 뒤 원나라가 지배하였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자, 이에 분개한 최영(崔瑩)은 우왕에게 품의하여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이때 우군도통사 이성계는 위화도(威化島)에서 4불가론(不可論)을 내세워 회군을 단행하여 최영을 고양(高陽)으로 귀양보내고, 우왕을 폐위시켜 강화로 추방한 뒤 아들 창(昌)을 즉위시켰는데, 이가 곧 창왕(昌王)이다. 이렇게 하여 정치적·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새 왕조 조선을 개창할 계기를 마련하였다.
【중앙관제】 고려의 관제는 후삼국 통일 후 태봉과 신라의 관제를 병용하였는데, 당(唐)·송(宋)나라와 고려의 독자적인 제도도 섞여 있었다. 이러한 관제는 6대 성종 때에 정비되기 시작하여 문종에 이르러 일단 완성되었다. 체제의 특징을 보면 2성 6부는 당제(唐制)에 가깝고, 중추원(中樞院)과 삼사(三司)는 송제(宋制)를 채용한 것이며, 도병마사(都兵馬使)와 식목도감(式目都監)은 고려 자체의 필요성에서 생긴 것이다.
관직상의 품계는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인 양반제도를 두고, 관등급은 정(正)·종(從) 각 9품의 도합 18품으로 나누었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宰府)과 중추원은 각각 2품과 3품을 획선으로 하여 상하 이중적 조직으로 그 직무도 달랐다. 중서문하성의 2품 이상의 고관은 재신(宰臣:省宰·宰相)이라고 하여 정책을 수립·결정하고, 3품 이하의 관원은 성랑(省郞:郞舍·諫官)이라고 하여 봉박(封駁)과 서경(署經) 등의 임무를 맡고 있었으며, 정책의 실무를 담당한 것은 상서육부(尙書六部)였다. 여기에는 상서(尙書:정3품)가 책임자였지만, 그 위에 판사제(判事制)를 따로 두어 중서문하성의 성재(省宰)로 겸직시킨 점은 고려의 정치체제가 귀족중심이었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특히 왕권의 전제성(專制性)을 규제하는 대간제도(臺諫制度)가 있었는데,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어사대(御史臺)의 관원(官員)을 대간(臺諫)이라고 하였다. 대간제도를 보면 간쟁(諫諍)·봉박(封駁:중서문하성의 심사권과 도병마사의 의결권)·서경제도(署經制度)가 있었다. 이것도 귀족적 성격을 농후하게 반영해 주고 있다. 고려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기에는 관제상의 격(格)을 낮추어 다음 도표와 같이 개편하여 운영하다가 공민왕 때에 관제가 다시 복귀되기도 하였다.
【지방관제】 기구 개편의 연혁을 보면 983년(성종 2) 12목(牧), 995년에 10도(道)·3경(京)·5도호부(都護府)·8목(牧)·양계(兩界)가 설치되고, 1018년(현종 9) 전국을 도와 양계로 나누어 그 밑에 4도호(都護)·8목을 비롯해 군(郡)·현(縣)·진(鎭) 등을 설치하였다. 5도제(道制)가 전국적으로 정착된 시기는 예종(睿宗)·인종(仁宗) 이후이다. 지방행정기구의 운영상의 내용을 보면 3경은 풍수설(風水說)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태조 때는 개경(開京)과 서경(西京)을, 성종 때는 동경(東京:慶州)을 설치하였으며, 문종 이후 동경 대신에 남경(南京:서울)을 넣었는데, 서경에는 분사제도(分司制度)를 두어 왕이 머무를 경우 정무처리를 할 수 있게 하였다. 경기는 특수행정구역으로 전시과의 사전(私田) 지급의 대상지로 삼았으며, 5도는 일반 행정구역으로, 도 밑에는 주(州)·현을 두고 군·현에 한하여 외관(外官)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을 주군(主郡:領郡)·주현(主縣:領縣)이라고 하였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군(屬郡)과 속현(屬縣)이 더 많아 외관이 없는 속군과 속현은 외관이 파견된 군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최하층인 촌(村)과 천민집단으로 구성된 향(鄕)·소(所)·부곡(部曲)은 현에 소속되어 향리(鄕吏)가 직접 다스렸다. 향리는 일반 평민이나 천민집단의 조세·공물의 징수와 노역징발의 사무를 관장했으며, 일품군(一品軍)의 장(長)이 되기도 하였다. 영향력이 있는 향리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와 기인제도(其人制度)를 실시하였다. 군사적 특수지역인 양계(兩界)는 진(鎭)과 촌(村)을 두어 군사적 체제를 갖추었는데, 외관은 진까지 파견하였다.
【군사제도】 고려의 기본군제는 중앙의 2군(軍) 6위(衛)와 지방의 주현군(州縣軍:도)과 주진군(州鎭軍:양계)으로 편성되었다. 6위가 형성된 것은 995년(성종 14)경이며, 2군이 형성된 것은 현종(顯宗) 무렵이고, 친위대인 2군은 6위보다 우위에 있었다. 2군 6위는 각각 정·부 지휘관으로 상장군(上將軍)과 대장군(大將軍)이 있었다. 이들 2군 6위는 8개 군단의 정·부 지휘관으로 구성된 군사최고 합좌기관(合坐機關)인 중방(重房:정원 18명)을 갖추었다. 2군 6위의 병력은 모두 1,000명의 군인으로 조직된 영(領)으로 구성되었다. 영은 병종(兵種)에 따라 보승(保勝)·정용(精勇)·역령(役領)·상령(常領)·해령(海領)·감문위령(監門衛領)으로 구분되어 도합 45령으로 4만 5000명이었다. 영(領)의 지휘관은 장군(將軍) 1명, 중장군(中將軍) 2명, 그 아래 낭장(郞將)·별장(別將)·산원(散員)·위(尉)·대정(隊正) 등 군관이 배치되었으며, 이들도 합좌기관인 장군방(將軍房)을 가지고 있었다. 2군 6위의 중앙군은 신분과 군역 의무를 세습하는 군반씨족(軍班氏族) 출신의 전문적 군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에게는 군인전(軍人田)이 지급되었으며, 중앙군과 지방군과는 교류가 없었다.
지방군은 도와 계(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도의 주현군 중 보승과 정용은 주현군의 핵심으로 치안(治安)·방수(防戌)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일품군(一品軍)은 노동부대로서 공역(工役)에 동원되었다. 양계는 국경지대의 군사적 지역인 만큼 진마다 초군(抄軍)·좌군(左軍)·우군(右軍)을 중심으로 한 정규군이 주둔하였다. 주현군은 947년(정종 2) 광군(光軍)이 그 효시가 된다. 주현군은 군인전이 지급되지 않는 병농일치(兵農一致)의 군인이었다. 이 밖에 광군(光軍)·별무반(別武班:神騎軍·神步軍·降魔軍)과 최우(崔瑀) 집권 때는 삼별초(三別抄)가 있었다.
【토지·조세 제도】 고려의 토지제도 정비과정을 보면, 940년(태조 23) 역분전(役分田)을 실시하였다. 역분전은 고려 건국과정에서 태조를 도운 조신(朝臣)과 군사(軍士)에게 품계가 아닌 충성도(忠誠度)에 따라 지급된 토지로 논공행상의 성격을 지녔다. 그 후 집권체제가 안정된 976년(경종 1) 전시과제도가 전국가적 규모로 실시되어 현직 및 퇴직자에게 관직의 고하[四色公服:紫·丹·緋·綠]와 인품에 따라 전지(田地)와 시지(柴地:땔나무를 얻는 땅)를 지급하였고, 따라서 이 제도 역시 역분전의 성격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였다. 이후 토지제도 체제가 정비된 것은 998년(목종 1)에 비로소 성종 때의 관제를 기준으로 관직의 고하에 따라 18과(科)로 나누어 토지를 지급한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18品田柴科)를 마련하면서부터였다.
개정전시과는 1076년(문종 30) 갱정전시과(更定田柴科)로 개정되었는데, 이의 특징은 토지지급의 결수가 줄고, 무관에 대한 대우가 상승하였으며, 퇴직자는 토지 지급대상에서 제외되고 현직관리에게만 지급하되 경기에 한하였다. 전시과의 규정에 따라 지급된 토지는 수조권(收租權)의 귀속 여하에 따라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으로 나누어 지급하였다. 지급된 토지는 완전한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수조권만을 일정기간 인정하였는데, 이것은 모든 토지 관리권을 국가가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토지의 종류로는, 과전(科田)·공음전(功蔭田)·공해전(公田)·군인전(軍人田)·외역전(外役田)·내장전(內庄田)·구분전(口分田)·한인전(閑人田)·궁원전(宮院田)·사원전(寺院田)·둔전(屯田)·투화전(投化田) 등이 있었다. 조세(租稅)의 납부는 성종 때 수조권이 개인 또는 관청에 있는 사전은 수확의 1/2을 조(租)로 바치고 수조권이 국가에 있는 공전은 1/4을 조로 바치게 하였다. 공부(貢賦)는 지방의 특산물을 나라에 바치는 것인데, 주와 현에서 해마다 바치는 상공(常貢)과 소(所)에서 생산된 특정물건(금·은·동·종이·먹 등)을 바치는 별공(別貢)과 과일나무·삼밭[麻田] 등에 부과하는 잡공(雜貢)이 있었다. 또 요역(役:賦役)이라고 하여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평민 남자는 병역과 부역의 의무가 있었다. 병역은 군포(軍布)로 대납할 수 있었으며, 부역으로 토목공사에 동원될 때의 식사(食事)는 자기가 부담하였다. 호적(戶籍)은 3년마다 재작성하였다.
【화폐제도】 농업을 기본 경제로 한 당시 사회는 곡물(쌀)과 베[布]로 물물교역의 기준을 삼았으며, 996년(성종 15) 건원중보(乾元重寶)라는 한국 최초의 철전(鐵錢)을 만들어 썼으나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 7대 목종 때는 차·술·음식의 매매시에 국한했다가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15대 숙종(肅宗) 때 의천(義天)과 윤관(尹瓘)의 주전론이 대두되어 주전도감(鑄錢都監)을 설치, 1101년 은병(銀甁:은 600g으로 주전하였다)을 만들었으나 귀족들 사이에서만 거래되거나 뇌물을 주고받는 데 많이 이용되었다. 1102년(숙종 7) 다시 해동통보(海東通寶)·해동중보·삼한통보(三韓通寶)·삼한중보·동국통보(東國通寶)·동국중보를 주조하였으며, 1278년(충렬왕 4) 쇄은(碎銀), 1331년(충혜왕 1) 소은병(小銀甁), 34대 공양왕 때 한국 최초의 지폐인 저화(楮貨)를 발행하였으나 모두 유통되지 못하였다.
【교육제도】 태조 때부터 교육기관으로 개경학(開京學)·서경학(西京學)을 두었으나 학교기관의 정비는 성종 때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한 정치기구 정비에 따라 관료 양성기관이 필요하여 992년(성종 11) 중앙에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였고, 지방의 12목에 경학박사(經學博士)·의학박사를 1명씩 파견하였다. 국자감의 특징을 보면 삼학(三學)은 동일한 내용을 교수했으나, 입학자격은 신분이 각기 달랐다. 삼학에는 박사(博士)와 조교(助敎)를 두고 가르쳤으나 잡학에는 박사만 두었다. 문종(文宗) 때는 개경에 최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 등 12도의 사립학교 설치로 사학(私學)이 발달함에 따라 관학(官學)이 쇠퇴하자, 16대 예종은 관학 진흥책으로 국자감을 국학(國學)으로 개칭하고 국학 내에 최충의 9재학당을 모방하여 7재(七齋)를 설치하고 중국 고전을 중심으로 교육하는 한편, 국학 발전을 위한 육영재단으로 양현고(養賢庫)와 학술기관인 청연각(淸閣)·보문각(寶文閣)을 설치하였다. 1127년(인종 5) 지방교육기관으로 향학(鄕學)이 설치되어 교육기관이 완비되었다. 잡학 이외의 기술교육은 그 특수성에 따라 사천대(司天臺:천문·역법·지리·측후)·태사국(太史局:음양·술수)·태의감(太醫監:의학)·통문관(通文館:외국어)에서 담당하였다. 교육시설과 교육재단은 수서원(修書院:성종)·비서원(秘書院:성종)·서적포(書籍:숙종)·섬학전(贍學錢:충렬왕)이 있었으며, 국학과 향학의 교육운영을 위하여 학전(學田)을 지급하였다.
【사회】 고려사회도 신분의 세습을 원칙으로 하는 양반관료와 중인·평민(농민)·천민으로 구성되었다. 왕족과 귀족으로 편성된 상류층은 족벌세력을 형성하였고, 과전·공음전·공신전을 소유하여 경제적 부(富)를 독점했을 뿐만 아니라 정권에 참여하여 출세의 길도 독점하였다. 특히 5품 이상의 귀족에게 음서(蔭敍)나 공음전과 같은 특권을 부여한 것을 보더라도 특권계급을 공공연히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류층은 남반관리(南班官吏)·기술관·하급관리·하급장교로 지배층의 말단에 포섭되었고, 하류층인 평민은 일반 주·군·현에 거주하며 주로 농업에 종사하여 생산을 담당하는 농민들이었다. 고려에서는 이들을 백정(白丁)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특정한 직역(職役)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국가에 대한 조세·부역·역역(力役) 등을 부담하였으며, 제도적으로는 과거에 응시하여 관인(官人)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이 점은 국학에 입학할 수 없었던 것을 보아도 짐작이 간다. 천민층은 향·소·부곡의 주민과 진척(津尺)·화척(禾尺:조선시대 백정)·재인(才人) 및 공·사의 노비뿐만 아니라 역(驛:교통기관)·관(館:숙박소)의 주민들이었다. 특히 노비들은 신분을 세습하여 매매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같이 편제된 고려사회는 평민으로부터 상류 귀족에 이르기까지 종(縱)으로는 5대, 횡(橫)으로는 8촌까지 포함하는 친족공동체를 이루고, 다시 가장이 통솔하는 몇 개의 가족단위로 분화되었는데 이러한 단위로 편제된 이유는 세·역·공물의 편리한 운영을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고려시대에 이르러 성(姓)이 보편화되자 출신지를 본관(本貫)으로 정하고, 본관을 세력평가의 표준으로 삼기도 하였다.
【법률과 풍속】 당률(唐律)을 모방한 71조의 법률과 보조법률이 있었으나 일상생활과 관계되는 관습법을 중심으로 자치 질서를 인정하였다. 형벌은 태(笞)·장(杖)·도(徒:징역)·유(流:귀양)·사(死:사형)의 5형으로 나누었고, 죄의 종류는 모반죄·대역죄·악역죄·불효죄·살인죄·강도죄·절도죄 등이 있어, 그 중 모반죄·대역죄·악역죄·불효죄를 중죄로 다스렸으며, 관리의 독직(瀆職)은 과전(科田)을 몰수하고 장·도형에 처하였다. 풍속은 부처에게 제사지내는 연등회(燃燈會)와 토속신앙과 불교가 융합된 팔관회(八關會)가 성행하였으며, 명절은 설날·대보름·삼짇날[上巳:3월 3일]·석존제(釋尊祭)·단오절(5월 5일)·유두(流頭:6월 15일)·백중(百中:7월 15일)·중추절(가위:8월 15일)·중양절(重陽節:9월 9일)·상달(10월 15일)·동지 등이 연중행사로 발전하였다. 오락으로는 공치기·씨름·제기·석전(石戰)·바둑·장기·윷·연·광대놀이·꼭두각시놀이 등이 있었다.
의복관계는 4대 광종 때 공복제도를 마련하였으나 시대에 따라 달랐다. 평민은 대개 흰옷을 입었고, 여자들은 홍색(紅色)·황색(黃色)의 옷도 입었다. 남자는 상투·두건(頭巾)을 썼고, 부인은 머리에 쪽을 쪘으며, 귀부인은 외출 때 너울을 썼다. 처녀는 붉은 댕기, 총각은 검은 댕기를 달았고, 귀족은 가죽신, 서민은 짚신을 신었다. 죄인은 관이나 두건을 쓰지 못하였다. 장례풍속은 불교의 성행으로 화장(火葬)하는 풍습이 퍼졌고, 부모상은 100일 동안 복상하였으며, 고려 말에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가 수입된 뒤에 3년 동안 복상(服喪)하는 풍습이 시작되었다.
【유학과 한문학】 4대 광종은 유학을 중심으로 한 과거제도 실시로 새로운 지식계급이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였고, 6대 성종은 국자감·비서원·수서원을 설치하여 유교정치의 실천력을 담당할 수 있는 지식계급을 형성하였다. 특히 성종 때 최승로(崔承老)·김심언(金審言)의 활약으로 유교의 정치사상체계를 성립시켰는데, 이것은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전시대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한 것이다. 문종 때 최충의 9재학당을 비롯한 12도의 사학(私學)이 출현하여 경서(經書)·사적(史籍)·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고, 정배걸(鄭倍傑)·노단(盧旦)·곽여(郭輿) 등의 유학자가 배출되었다. 이후 15대 숙종과 예종·인종 등의 관학진흥책으로 최약(崔)·홍관(洪灌)·박승중(朴承中)·김인존(金仁存)·김부식(金富軾)·정지상(鄭知常)·최윤의(崔允儀) 등이 활약하여 유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성리학(性理學)은 고려 말 문화변동의 원동력이 되었는데 1289년(충렬왕 15) 안향(安珦)이 연경(燕京)에 갔다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이것을 유교의 정통이라고 생각하여 책을 베끼고 주자의 초상화를 그려 가지고 왔다. 충선왕(忠宣王)은 연경에 만권당(萬卷堂)을 설치하여 양국의 문인(중국측:趙孟·虞集·閻復, 고려측:李齊賢·白正)들을 교류하게 함으로써 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였다. 이때 원나라에서 충선왕을 10년간 받들었던 백이정(白正)이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고 온 뒤 이제현(李齊賢)·박충좌(朴忠佐)에게 전하여 고려 말기에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길재(吉再) 등 뛰어난 성리학자가 배출되었는데, 특히 정몽주의 노력으로 철학적 이해가 깊어지게 되었다. 성리학은 고려 말 신흥 사대부 계급에 수용되었다. 고려 초기 한문학(漢文學)의 학풍은 중국을 모방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독자적 성격을 지니고 관념적이며 사대적 경향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9대 덕종(德宗) 말년에 왕가도(王可道)를 중심으로 한 북진파가 몰려나고, 인주(仁州)이씨가 집권하자 보수적 성격을 띤 유교 경전(經典)보다 안일함만을 찬미하는 한문학이 발달하였다. 이때 시(詩)나 문장에 뛰어난 사람은 김인존·김부식·정지상·홍관 등을 꼽을 수 있다.
무신의 난 이후 한문학 경향은 고려 초기 향가문학이 차츰 사라지면서 패관문학(稗官文學)이 대두되어 최씨 무신집권 하에서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패관문학은 주로 전설·신화·일화·풍속을 주제로 서술되었는데, 필자마다 색다른 성격을 띤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은 무신의 난 이전 시대에 대한 회고,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은 종래의 한문학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운 문장체를 이룩하여 한국 전통과 연결된 새로운 문학체계를 발전시켰다.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은 무신의 난이 일어나기 전 천태종의 정치 참여를 비난하였고, 무신의 난이 일어난 원인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였다. 그리고 성리학자들의 많은 문집이 나왔는데 전기의 시(詩)·문(文)과는 달리 정치·사회 등에 관한 논설이 중심이었다.
【국문학】 고려 초기에는 향가형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한문학은 과거제도에서 문예를 중시하여 한시(漢詩)가 발달하였고 귀족들의 필수적 교양이었으나 국문학은 대중 사이에 행해졌고, 민중은 향가 대신 민요를, 지식계급에서는 향가에서 변모한 경기체가(景幾體歌)가 유행되었다.
【역사편찬】 국초부터 춘추관(春秋館)에서 역사편찬을 담당하였다. 거란 침입 후 전란으로 소실된 사적을 편찬하기 위하여 1013년(현종 4) 최항(崔沆)·김심언(金審言) 등은 태조 때부터 7대 목종 때까지의 사적을 편찬, 32년(덕종 1) 황주량(黃周亮)은 《칠대실록(七代實錄)》(30권)을 완성하였다. 문종 때 박인량(朴寅亮)의 《고금록(古今錄)》, 예종 때 홍관은 연대미상인 《편년통재(編年通載)》의 뒤를 이은 《속편년통재(續編年通載)》를 편찬하였으나, 모두가 전하지 않는다. 1145년(인종 23)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삼국의 역사를 보수적 유교사관에 맞추어 기록한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전한다. 역사의식은 무신의 난과 몽골침입으로 시련을 겪은 뒤, 고려의 지식계급은 유교사관에 입각한 사학(史學)의 경향이 새로 대두되어 불교의 폐단, 권문세가들의 횡포 등 사회모순이 격화됨에 따라 이에 대한 비판과 민족적 자주성을 재인식하고 여기에 정통과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사관을 받아들여 새로운 역사학이 성립되었다.
23대 고종(高宗) 때 각훈(覺訓)은 불교계 정리책의 일환으로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을 편찬하였고, 25대 충렬왕 때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불교 입장에 서서 고대문화와 관계되는 주요한 사실을 기록하여 정통적 사관을 제시하였다. 또 충렬왕 때 이승휴(李承休)는 한시(漢詩)로 중국과 한국역사를 적은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썼다. 특히 이제현은 고려국사를 편찬하다가 중단하였으나 그의 사학은 조선시대의 역사서술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김종서 등이 편찬한 고려사), 그의 사관은 정통과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인쇄술】 고려문화 중 특히 발달한 것이 출판문화이다. 목판인쇄로 된 현종 때의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숙종 때의 《속장경(續藏經)》, 1251년(고종 38)에 완성된 《팔만대장경》 등 많은 장경사업을 이루었으며, 숙종 때는 서적포를 두어 서적출판을 담당하였다. 금속활자로는 1234년 최윤의(崔允儀)가 편찬한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이 독일 구텐베르크의 것보다 200년이나 앞선다. 이 사실은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전한다. 1377년(우왕 3)에 인쇄되었고, 하권이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직지심경(直指心經:直指心體要節)》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다.
【예술】 고려예술은 귀족적·불교적 색채를 띤 미술이 성행했으나, 석탑·석등·불상 등 조각분야는 퇴화되고, 귀족들의 생활기구를 중심으로 한 자기·나전칠기·불구(佛具) 등이 발달하였다. 예술품 중 상감청자(象嵌靑瓷)는 세계적 공예품으로 민족예술의 정수이다. 자기의 발달을 보면 11세기 예종·인종 때에 이르러 송자(宋瓷)의 영향을 벗어나 장식이 없는 푸른 하늘색과 선(線)이 특징인 비색청자(翡色靑瓷)를 제작하였다. 12세기 중엽 의종 때에 이르러 고려인의 독창적 재능을 발휘한 자기가 상감청자이다. 상감청자는 비색청자의 표면에 양각(陽刻)·음각(陰刻)의 무늬를 넣고 백토와 흑토를 그릇 표면에 새겨넣는 방법으로 완성한 것이다. 고려 전기의 건축은 왕궁[滿月臺]·사찰[興旺寺]·귀족의 저택 등 귀족적·불교적인 건축에 치중하였으나, 말기에는 고려의 독특한 기상을 나타내고 있다.
건축의 특색은 층단식으로 외관이 높고 웅대하며, 건물의 기둥은 안쪽을 약간 기울게 하였고, 기둥을 주심포형(柱心包形)으로 하여 안정감을 보였으며, 태양광선의 이용법도 채택하였다. 대표적 건축으로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 안동 봉정사(鳳停寺)의 극락전(極樂殿), 예산 수덕사(修德寺)의 대웅전(大雄殿)이 현존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정돈된 형태를 중시하지 않는 양식이 유행하여 안정감·정돈미가 무시되고, 탑의 형식이 다양화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1020년 현종 때 만든 신라계통의 양식인 현화사(玄化寺) 7층석탑, 광종 때 만든 송나라 때의 모형인 월정사(月精寺) 8각 9층석탑, 충목왕 때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만든 목조형(木造形) 양식인 경천사(敬天寺) 10층석탑이 유명하다. 그 밖에도 1009년의 예천(醴泉) 개심사(開心寺)의 5층탑, 21년의 흥국사(興國寺)의 탑, 22년의 제천(堤川) 사자빈신사석탑(獅子頻迅寺石塔) 등이 있다.
부도(浮屠)로는 신종(神宗) 때의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강원도 원성군 법천사)과 태조 때의 홍법국사실상탑(弘法國師實相塔:충북 중원군 정토사)이 대표적 걸작으로 현재 경복궁 안에 있다. 불상(佛像)으로는 부석사 무량수전 안에 있는 소조여래상(塑造如來像)은 목조좌상(木造坐像)인 아미타여래상으로 신라 불상 형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제일의 걸작이다. 이 밖에도 967년에 세운 은진미륵(恩津彌勒), 충주(忠州)의 철불좌상(鐵佛坐像)이 있다. 이 철불은 양 팔이 없어졌으나 아담하고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범종(梵鐘)으로는 천흥사범종(天興寺梵鐘:덕수궁 소장), 수원의 용주사범종(龍珠寺梵鐘), 탑산사범종(塔山寺梵鐘:해남 대흥사 소장) 등이 있는데, 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한 종이다.
또한 연복사범종(演福寺梵鐘)·조계사범종(曹溪寺梵鐘) 등이 있고, 일본 등지에도 20여 개의 고려범종이 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석비(石碑)로 남아 있는 것은 937년에 세운 해주의 광조사 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廣照寺眞澈大師寶月乘空塔碑), 940년의 원주 흥법사 진공대사탑비(興法寺眞空大師塔碑)와 강릉의 보현사 낭원대사오진탑비(普賢寺朗圓大師悟眞塔碑), 943년의 충주 정토사법경대사 자등탑비(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 975년의 여주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 1017년의 정토사 홍법대사실상탑비(淨土寺弘法大師實相塔碑) 등이 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석등(石燈)으로는 은진(恩津)의 관촉사석등(灌燭寺石燈), 회양(淮陽)의 정양사석등(正陽寺石燈), 나주 서문내석등(西門內石燈), 신륵사 보제석종전석등(普濟石鐘前石燈), 개풍의 공민왕현릉비정릉석등(恭愍王玄陵妃正陵石燈)이 있다. 당간(幢竿)으로는 청주 용두사(龍頭寺)의 철당간(鐵幢竿), 나주 동문 밖의 석당간(石幢竿)이 유명하며, 당간지주(幢竿支柱)로는 남원의 만복사(萬福寺)와 천안의 천흥사(天興寺) 옛터, 홍천 희망리(希望里)와 춘천 근화동(槿花洞)의 것이 유명하다.
【그림과 글씨】 그림은 국초 이래 화가 양성을 위하여 도화원(圖畵院)을 설치하였다. 대표적 화가로는 《예성강도(禮成江圖)》의 이령(李寧),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의 이광필(李光弼),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의 공민왕, 혜허 등이 유명하다. 전해지는 작품으로는 《천산대렵도》 《음산대렵도(陰山大獵圖)》,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가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안향(安珦)의 초상화가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있고, 혜허의 양유관음상이 일본에 있다. 벽화로는 모란과 들국화를 그린 예산 수덕사의 벽화와 사천왕상과 보살상을 그린 부석사 조사당의 벽화가 현존한다. 개풍군 수락암동(水落岩洞) 및 장단군 법당방(法堂坊) 고분의 벽화가 있다. 고려시대의 서체(書體)는 무신 집권기까지는 왕희지체(王羲之體)와 구양순체(歐陽詢體)가 유행하였고, 충선왕 때부터는 조맹부체(趙孟體)인 송설체(松雪體)가 유행하여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다. 그 중 유명한 사람은 유신(柳伸)·탄연(坦然)·최우(崔瑀)·이암(李)·유공권(柳公權)·한수(韓脩) 등이다.
【음악】 속악(俗樂)·아악(雅樂)·당악(唐樂)이 있었다. 속악은 한국 고유음악으로 가곡에는 《동동(動動)》 《대동강》 《한림별곡》 등이 있고, 악기에는 가야금·비파·장구·퉁소 등이 있다. 아악은 궁정·종묘 등에서 연주하는 정악(正樂)으로 송나라에서 예종 때 안직숭(安稷崇)이 전래하여 궁중음악으로 발달, 현재까지 한국에만 보존되어 있는 동양의 고전적 정악(正樂)이다. 악기로는 금종(金鐘)·옥경(玉磬), 각종 현금(絃琴)과 피리·퉁소 등이 있는데, 1370년 공민왕 때 명나라 태조가 고려 사신에게 새로 악기를 보내어 내용이 풍부해졌다. 이러한 음악은 가면극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져 처용무(處容舞) 등 탈춤을 중심으로 한 산대극(山臺劇)도 크게 유행하였다.
【불교】 태조 이래 불교를 국교로 숭상함으로써 정치·사회의 지도이념이 되었다. 불교의 경향을 보면 사찰에는 사원전(寺院田) 외에 왕실 귀족들의 희사로 토지와 노비가 증가되어 대장원(大莊園)을 소유하였고, 광종 때는 승과제도(僧科制度)를 마련하여 승과에 합격하면 교·선종을 막론하고 대선(大選)이란 첫 단계의 법계(法階)를 주었으며, 또 왕사(王師)·국사(國師) 제도로 승려들을 우대하였다. 문종 때 승려 개인에게도 별사전(別賜田)을 지급하였으며, 사원에는 면세·면역의 특전까지 부여하는 등 보호책이 강구되었기 때문에 많은 승려들이 배출되었다. 불교의 성격은 호국적·현세구복적(現世求福的)·귀족적 불교로 보호육성되었다. 따라서 역대 군왕들은 국가의 대업이나 안태(安泰)를 위하여 대사찰의 건립, 연등회 행사, 대장경 조판 등 국가적 불교사업을 추진하였다. 고려 초기 불교의 종파는 5교(五敎:敎宗)와 9산(九山:禪宗)이 양립, 존재하면서 대립 침체된 상태에 있었다.
당시의 고승으로는 균여대사(均如大師)·혜거(惠居)·탄문(坦文)·체관(諦觀)·의통(義通)이 있고 그들의 활약이 컸다. 이때 체관은 오월(吳越)에 건너가 《천태사교의(天台四敎義)》를 저술하여 천태종(天台宗)의 기본교리를 정리하였고, 의통은 오월에 건너가 중국 천태종의 13대 교조(敎祖)가 되어 교세를 떨쳤다. 문종의 아들인 의천(義天)은 송나라에서 화엄교리와 천태교리를 배우고 돌아와 교·선종의 대립으로 침체된 불교를 통합 발전시킬 의도에서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주장하고, 숙종 때 천태종을 창설하여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주장하였다. 천태종은 무신의 난 이전까지 왕실과 귀족의 보호로 육성되었으나, 그후 교단 자체 내의 변동으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은 조계종(曹溪宗)을 개창하여 고려의 불교는 양종으로 분리되었다. 조계종은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을 깨닫는 것이며, 좌선(坐禪)을 주로 하여 마음에 경전을 깨닫도록 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수도방법으로 수행을 강조하였다.
조계종이 교리상 발전을 보자 최씨정권은 왕족 문신들과 연결, 현실참여적인 천태종 세력을 억압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조계종을 후원하여 조계종을 무신정권의 사상적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몽골 간섭기에 미신적인 면이 강한 라마 불교가 들어오면서 폐해가 많아져 불교행사, 사탑의 건립 등으로 재정의 낭비가 컸다. 또한 승려들의 토지겸병과 고리대금업·상업행위·군역도피의 소굴 등으로 그 부패가 심하여져 고려 말 신흥사대부층의 성리학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정도전은 그의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불교를 멸륜해국(滅倫害國)의 도(道)라고 공박하였다. 후기의 고승으로 보우(普愚)는 임제종(臨濟宗)을 전래하여 조선 선종의 주류가 되었고, 혜근(慧勤)은 인도의 지공(指空)에게 구법, 조계종을 발전시켰으며, 자초(自超)는 조선 태조의 왕사(王師)로 활약하였다. 이와 같은 교세의 변화는 원효(元曉)의 사상적 기반이 있었으므로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할 수 있었고, 지눌도 의천의 사상적 통일 경험과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조계종의 사상체계가 수립된 것이다. 조계종도 고려 후기 사회의 모순을 시정하는 원동력은 못되었으나 교리상의 발전으로 불교계에 신풍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