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영웅 – 천하의 시작>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중국 전국시대가 배경이다.
진나라 왕 영정은 중국 대륙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품은 인물이다.
이미 절반이 넘는 땅을 차지해서 다른 나라의 암살 표적이 되었다.
이런 영정을 두렵게 하는 인물이 있었는데 당대 최고의 무예를 자랑하는 자객 은모장천과 파검, 비설이다.
그래서 ‘백 보 금지령’을 내린다.
아무도 백 보 이내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단 그 자객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십 보 거리에서 자기를 알현하는 영광을 허락했다.
진나라 왕을 아무나 십 보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왕의 근심 정도는 덜어주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대체 하나님께 어떤 대접을 받고 있을까?
영화를 위한 설정이지만 진나라 왕을 만나는 것도 이렇게 힘들다.
그런데 하나님은 늘 우리를 기다리신다.
그냥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다.
먼저 하신 일이 있다.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십자가에서 죽게 한 일이다.
모압이나 암몬에서는 그모스나 밀곰을 섬기기 위해서 아들을 제물로 드리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만났을까?
만일 그모스가 자기를 섬기는 모압 족속을 위해서 아들을 죽였다고 하자.
모압 족속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무래도 잠깐 감격하고 이내 잊어버렸을 것 같다.
실제 상황이 아니고 그렇게 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된 영문일까?
예수님의 대속 사역이 단지 교리의 문제일까?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스터드(C. T. Studd)라는 학생이 있었다.
부유한 집 아들에 학업 성적도 뛰어났고 크리켓 선수로 전국 대회 우승 경력도 있었다.
크리켓은 우리나라에는 생소하지만 영국에서는 상당히 인기 있는 운동 종목이다.
스터드는 그야말로 전도가 유망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신앙은 아쉬웠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미지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생사의 갈림길에 선 형 조지 스터드의 병실을 지키던 중 회심을 했고, 이후 중국 선교에 헌신하게 된다.
넉넉한 가정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마다한 것이다.
10여 년의 중국 선교는 그의 육신을 쇠약할 대로 쇠약하게 만들었다.
생명이 위험할 정도였다.
별수 없이 영국으로 돌아와서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기약 없는 투병 생활 중에 잠깐 외출을 했는데 길가에 붙은 포스터를 보았다.
“아프리카의 식인 부족들도 복음을 기다립니다.”
그 포스터를 보고는 아프리카로 가기로 결심한다.
주변에서 다 미친 짓이라며 만류했다.
특히 담당 의사는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고도 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건 너무 지나친 헌신이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스터드가 답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신 것이 실제 상황이라면 그 어떤 헌신도 헌신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치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실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