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3년째 취업을 준비 중인 26살 여자입니다. 최근 들어 부모님과 동생에게 시한폭탄 같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자꾸 짜증이 나요. 화장실에 휴지가 없거나 찾는 물건이 제자리에 없다는 이유로도 금세 폭발하곤 합니다.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막상 그 순간이 되면 나도 모르게 가족에게 화를 냅니다.본능에 의해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은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지만, 상황이나 타인의 지시에 따른 행동을 할 때는 스트레스가 발생합니다. 성취에 대한 압박감이나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상상도 스트레스의 원인입니다. 별것 아닌 사소한 스트레스들이 누적되면, 어느 순간 모든 일이 하기 싫어지죠. 꽉 차서 넘실대는 잔에 물이 1방울 떨어지면, 결국 넘쳐버리는 격입니다. 이때부터는 앞에 떨어진 종이를 바로 옆 휴지통에 버려달라는 부탁조차 짜증이 납니다. 일을 시킨 사람이나 주어진 상황에 책임을 돌리며 분노하게 되죠. 투덜거리기만 하고 내가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제야 “내가 왜 이러지? 우울하다. 내가 나쁜 사람인 것 같다”라고 표현합니다.
정신없는 생활 속에서 이렇게 누적된 스트레스는 우리 몸 어딘가에서 고장을 일으키는데요. 뇌 기능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만성적인 스트레스가 해마를 비롯한 변연계에 영향을 주면, 기억장애가 나타나는 등 다양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뇌의 여러 부위 중 감정과 충동의 절제와 관련된 부위는 전두엽의 한 부위로 전전두엽 내측 아래쪽입니다.
VMPFC(Ventromedial Prefrontal Cortex)로 알려진 이 부위는 충동조절, 쾌감조절, 도덕적 판단, 의사결정과 관련된 부위로 알려져 있습니다. 만성적인 스트레스로 이 부위의 기능이 저하되면, 충동조절 기능이 떨어지고 욱하고 짜증스러운 기분 표현이 많아지며 부정적인 생각이 초래됩니다. 이런 이유로 우울증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도 봅니다. 교도소 수감자 중 이 부위의 기능이 선천적으로 저하된 사람이 많다는 연구결과는 이 부위와 충동조절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근거 중 하나입니다.
VMPFC 부위에 작용하는 대표적인 신경전달물질은 세로토닌으로, 짜증이 많고 분노조절이 안 되는 스트레스성 우울증에는 세로토닌의 기능을 강화하는 항우울제를 처방합니다. 최근에는 우울증 치료로 경두개자기자극법(Therapeutic Magnetic Stimulation) 같은 방법도 쓰이는데, 약화된 이 부위를 전자기로 자극하여 뇌 기능을 강화시켜주는 방법입니다.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아 뇌가 불안정해지면, 자연스럽게 유지되던 뇌의 기능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제력과 충동조절이 곤란해지면 내부의 공격성이 외부로 드러나게 되는데, 이것이 짜증입니다. 가장 가깝고 만만한 대상에게 공격성을 드러내는 과정이 오래되면, 당연히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텐데요. 그때부터는 공격성이 내면을 향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 자책하는 이 단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우울증이 시작되는 단계입니다. 따라서 짜증, 분노는 우울증의 초기 증상에 가까우며, 치료받았을 때 좋아질 가능성이 큽니다.
보통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데는 ‘들어오는 스트레스 줄이기’ ‘스트레스 처리하는 나 자신이 강해지기’ ‘들어온 스트레스 잘 배출하기’ 등 3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들어오는 스트레스 줄이기는 간단한 것들로, 맡겨진 일 미루기, 일 그만두고 휴가 가기, 안 해도 괜찮은 일은 안 해버리기 등이 있죠. 그러나 여태까지 하던 일을 갑자기 그만두는 것은 쉽지 않을 뿐더러 무조건 좋은 방법이라 말할 수도 없습니다. 효율성을 위해 일을 안 하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습니다. 휴식하는 것이 나은데 흥분해서 쉬질 않는다든가, 자신이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힘들다든가, 상사의 쓸데없는 꾸중으로 일이 손에 안 잡힌다든가 하는 상황들인데요.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휴가를 떠날 수도 있으며, 문제가 되는 상황만을 제거하거나, 상대방에게 좋지 못한 말을 들을 것 같으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등 사소해 보이지만 자신이 가장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서 실천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됩니다.
‘스트레스 처리하는 나 자신이 강해지기’는 스스로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으로, 정신치료가 주로 관여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보통 강한 정신은 마음을 굳게 먹거나 의지로 얻어지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심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증진시키고 타인을 대하는 관점의 다양성을 획득해 세상의 불합리성을 이해하는 데서 나옵니다.
먼저 자신이 살아온 방식, 삶의 목표, 지금까지 이뤄놓은 업적 등을 생각해보고, 현재 내가 힘들어하는 일이 과연 꼭 나쁘게만 볼 일인지, 혹시 포기해도 되는 것은 아닌지 등을 고려합니다.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힘들었던 일이 가볍게 보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상대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나라는 인간과 서로 상호작용하는 사람으로서 상대를 파악해보아야 합니다. 또한 상대의 현재상태나 살아온 환경 등을 이해할 경우, 그에 대한 분노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상황의 맥락을 파악하고 나름의 개연성을 찾아낼수록 내면의 분노는 잦아들게 되니까요.
‘들어온 스트레스 잘 배출하기’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음주부터 음악, 독서, 운동, 연애, 종교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됩니다. 대개 가장 쉽고 즐거운 일들은 입을 사용하는 일들, 즉 폭식을 하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키스를 하는 것 등입니다. 그다음은 눈이나 귀를 사용하는 일로, 음악 감상, 게임, TV나 영화 보기 같은 가벼운 취미들이 여기 속합니다. 몸을 사용하는 운동,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단체나 종교활동도 있고, 고도로 두뇌를 사용해야 하는 독서, 고찰, 명상 등의 활동도 있습니다.
그런데 감각기관만을 사용하는 원초적인 취미들은 쉽고 편하고 누구에게나 즐거운 반면, 너무 자주 하면 부작용도 많고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같은 활동이라 하더라도 몸이나 머리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활동이 더 오래가고 스스로도 가치를 느낄 수 있죠. 예를 들어, 먹는 것만 하더라도 아무 생각 없이 탄수화물만 섭취하면 폭식이지만, 맛, 조리법, 문화적 맥락을 따지면서 먹으면 식도락이 되는 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게임 역시 어떤 사람에게는 파괴욕구를 분출하는 도구일 뿐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는 장일 수도 있습니다. 게임제작과정에 관심을 갖거나 왜 이 게임은 재미가 있을까 하는 심리적 의문을 품을 수도 있고요.
스스로 짜증을 줄이는 것이 쉽지 않다면, 병원에서 간단히 약물처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프로작, 파록세틴, 졸로프트, 에스시탈로프람 같은 세로토닌재흡수저해제(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s, SSRI)1) 같은 약물이 대중적이며 효과가 좋아서 1~2주 정도의 사용만으로도 가벼운 분노나 우울감은 해결될 수 있습니다. 부작용이나 의존성은 일반적인 약물과 비교할 때 거의 차이가 없으나, 한국사회의 정신과 및 약물에 대한 편견으로 부정적인 소문들이 많습니다. 처음부터 약물을 추천할 수만은 없겠으나, 단시간 내에 가족이나 직장 내에서 감정을 조절하고, 나아가 미래의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예방한다는 차원에서의 투약은 적극 권장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