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의 효자 이야기 2
<자료1> 효자 효녀 72인 이야기(성동호저)
우정(禹鼎) 부부 -청․ 호군에 잡힌 몸을 금강에 던진 효자 부부-
인조 때의 문관으로 호를 갈계라 하는 우정이라는 효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본관은 단양이고 고향은 공주입니다. 아버지는 판사였습니다. 조선 때의 판사는 오늘의 법원 판사와는 직책이 달라 돈령부, 의금부, 중추부에 속하는 종1품의 높은 관직이었습니다.
우정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깊고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웠으며 성심으로 어른들을 받들었습니다. 게다가 학문에 정진하여 고향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우정이라는 선비는 참으로 된 사람이야. 그의 아버지가 종1품 벼슬을 했는데도 언제나 노인들에게 공손하고 서민을 업신여기는 법이 없거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미 진사과 과거에 급제했으면서도 문과에는 못 붙었다지 않아! 참으로 애석한 일이야. 그런 분이 관이 되어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데 말이야.”이와 같이 말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우정이 생원이 된 것은 1633년이었는데 얼마 후에는 고장 사람들의 여망대로 진사과 출신으로서 성균관에 출사하게 되었습니다.
성균관에는 공자를 제사하는 문묘와 유학을 강학(講學)하는 명륜당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문묘에 딸린 직위가 내렸습니다. 그 후 그는 계속 성균관에서 봉직하고 있었는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습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모든 높고 낮은 성균관 벼슬아치들은 마치 천적을 만난 거미떼처럼 재빠르게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우정만은 달랐습니다. 홀로 남아 문묘 안팎을 정리 정돈하고 모든 문서철을 곳간에 넣어 자물쇠로 채웠습니다. 그리고는 고향인 공주로 향했습니다.
우정은 무사히 향리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의 앞에는 큰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향에 돌아온 지 며칠 만에 부인과 함께 오랑캐 병정한테 붙들리고 말았습니다.
“여보, 당신만은 끝까지 사셔야 해요. 자아, 무엇을 좀 잡수셔야죠.” 함께 잡혀온 김씨 부인은 남편에게 매달렸습니다. 벌써 붙들린 지 3일째가 되었건만 남편은 적병이 갖다 주는 물조차 마시려 하지 않았습니다. 부인은 애처롭다는 듯한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았습니다. 부인은 이때 남편의 얼굴에서 자결하겠다는 심정을 읽었던 것입니다.
“부인, 안됐군요. 당신이나 살아 보도록 하시오. 나는 이 나라의 관원, 목숨을 건지기 위해 절개와 지조를 굽힐 수야 없지 않소! 사흘을 굶었으면서도 우정의 음성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들 부부는 잡힌 지 3일 만에 청국군에 이끌려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과 함께 북쪽을 향해 공주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금강변에 이르러 나룻배를 기다렸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우정이 그 깊은 강물 속에 뛰어든 것은, 모든 사람이 ‘어이쿠’ 하고 고함을 지르는 순간 김씨 부인 역시 남편 뒤를 쫓았습니다. 우정 부부는 강물 속에서 서로의 손을 잡더니 이내 세찬 흐름에 휩쓸려 모습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난이 끝난 뒤 호서 지방의 관찰사 정태화가 우정 부부의 실정을 조정에 보고하자, 크게 감격한 임금은 쌍정문(雙旌門)을 세워 주어 그 충렬심을 기리도록 했습니다. 쌍정문이라 함은 두 개의 정문을 말합니다.
우정은 의로운 사람인데다가 효자였으므로 세워졌고, 남편을 따라죽은 김씨 부인은 열녀로서의 정문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숙종 조에 이르러 우정에게는 지평 벼슬이 중직되었습니다.
*지평(持平) ; 조선시대 사헌부의 정5품 벼슬. (조선시대 삼사의 하나로 정치를 논하고 관리의 비행을 감찰하고 백성의 억울함을 들어주던 곳)
논산군 연산면 임리 선산에 모셔져 있는 우정(禹鼎) 묘
자료. 효 학습 지도안 직접 만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