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활동
임병식 rbs1144@daum.net
아내 떠난 뒤끝이 허전하다. 몸이 아파 사람 구실을 못 하는 몸이나마 집을 나고 들며 함께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막상 세상을 떠나고 보니 온 집안이 텅 빈 기분이다. 세상 떠난 지 일 년이 되다 보니 지금은 남은 훈기마저도 사라져서 집에만 들어서만 적막강산이다.
해서 며칠 전부터는 갈무리해둔 영정사진을 꺼내어 거실에 걸어두고 있다. 함께한다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그래 놓으니 쓸쓸함이 좀 가신 기분이다.
얼마 전에는 유품을 정리했다. 한꺼번에 내어놓기가 뭣해서 시나브로 재활용 옷가지 수거함에 넣었다. 봄여름 가을 겨울, 철 따라 입던 옷들이 상당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달포 전에는 그간 조금씩 깎아둔 손발톱과 잘라둔 머리카락을 아내가 묻힌 납골묘 옆에 묻어두고 돌아왔다. 화장하면 아무래도 유전자가 온전히 보존되지 않음으로 보충해 두자는 의미에서였다. 그래놓고 오니 조금은 위안이 되는데, 어찌 살아있음에 비교할 수 있을까.
아내는 일차 뇌졸중으로 편마비가 오고, 두 번째 쓰러져서 전신 마비가 되었다. 그야말로 사지(四肢)를 쓰지 못하는 중환자가 되었다. 두 번째 쓰러지던 일을 어찌 잊을까. 한 2년여간 재활운동을 열심히 하여 병원에 갈 때만 해도 부축하여 차를 탈 수 있었다. 그런데 응급실에 도착하니 의식을 놓아버렸다.
“어떻게 하든지 살려주세요.”
“사향을 한번 써보겠습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비싼 약값만 몽땅 들어갔다. 아니, 나중에 깨어나 사지를 못 쓰게 된 것이나마 굳이 그것의 효과라고 한다면 효과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나는 그것은 부정한다. 사지를 쓸 수 있어야지 겨우 연명하는 수준이 무슨 효험이란 말인가.
MRI를 찍어 상태를 보여주는데 아내의 뇌 기능은 3/1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상태로 아내는 22년을 버텨주었다. 나는 병원에서 2년간 병간호를 하다가 아내를 집으로 데려왔다. 더는 재활 치료 이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기에 병원에서 배운 재활운동 기법을 익혀 그대로 실천했다.
그것은 괜찮은데 집에 돌아오니 요양보호사가 문제였다.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한 20명이나 바뀌었나. 그중에 몇 분은 좋은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못했다.
내가 알아서 휠체어에 앉히고 대소변 처리를 내가 전적으로 맡아서 하는데도 불평이 많았다. 이 닦는데 신경 쓰이게 한다느니, 짜증을 낸다느니 입소문을 냈다. 그걸 보며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만두라고 하고 싶었지만, 약자인 보호자로서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내는 놀라운 정신력을 보여주었다. 명절날과 부모님 제삿날은 물론이고 나와 아이들의 생일을 잊어버린 때가 없었다. 내가 미처 모르고 지나칠 기미라도 보이면 달력을 앞으로 가져오게 하여 어눌한 말투로 일일이 짚었다. 3/1밖에 남지 않는 뇌를 가지고 놀라운 기억력을 발휘했다.
아내가 세상 떠난 상황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있다. 일하던 요양보호사가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하여, 대신 다른 분이 오게 됐는데 그는 감기 걸린 사람이었다.
기침을 콜록콜록하기에 마스크를 쓰라고 했더니 자기는 마스크를 쓰고서는 일을 못 한다고 거부했다. 그런데 바로 독감이 옮은 것이다. 그런 걸 누굴 원망하랴.
아내는 죽음이 다가오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놀라운 투지를 발휘하여 서울에 사는 아이들이 내려오는 시간을 기다려주었다. 그렇게 하여 먼길을 달려온 자식들의 임종을 지켜보게 한 것은 마지막 선물이 아닌가 한다.
생각하면 길고 긴 투병 생활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만큼 긴 병간호의 생활이기도 했다. 나는 아내가 숨지기 달포 전에 조그만 선물이지만 여수시장의 표창장을 받았다.아픈 아내를 요양 시설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직접 간호한 걸 칭찬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칭찬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내는 세상을 떠났고 나는 홀로 남아 홀아비가 되었는데. 살아보니 생명이라는 게 허무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아내의 긴 투병 생활을 생각하면 생명 활동이 경이롭게도 느껴진다. 마지막까지 실낱같은 기억력을 붙들고 버텨준 것이 그지없이 고맙기만 하다.
생각하면 나도 여생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아내의 사진을 들여다보면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그런 아내가 이제는 나를 걱정한다. ‘옷 부실하게 입고서 다니지 말고 식사 잘 챙겨 먹으라.’ 당부한다. 사진 속의 아내와 얼굴이 마주치면 그렇게 일러주는 것만 같다. 그러한 무언의 당부가 있는 한 아내는 여전히 생명 활동을 이어간다. 나는 그렇게 믿고 함께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산다. (2024)
첫댓글 어느덧 1년이 흘러갔군요 생각하면 부부의 백년해로란 지난한 일인 듯합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선 그 오랜 병수발을 통해 백년해로를 넘어선 천생의 연을 엮으신 것이지요 영정 사진을 집안에 모시고 사모님과 대화하시니 죽음조차도 갈라놓을 수 없는 부부애에 숙연하여 그 깊은 하늘의 배분에 대한 상념에 잠깁니다
써놓은 작품이 많고, 80안에 책을 묶어내야 한다는 초조감에 묶어낼 작품을 일별해보니 하나가 빠진것 같아
이 작품을 부랴부랴 쓰게 되어습니다,
그동안 안보인 곳에 놓아둔 사진을 걸어두니 한결 마음이 든든합니다.
외출할때나 돌아와서 마주하는데 안부을 전하는 것 같아 좋습니다.
'옷 부실하게 입고 다니지 말고 식사 잘 챙겨 먹으시라’ 사모님이 現夢하는 듯 합니다.
사모님이 이생을 달리 하셨지만 슬픔을 이기시고 힘차게 살아가시길 祈願합니다.
生者必滅 아쉬움이 크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즐겁게 사는 것이 亡者의 願일 것입니다.
22년이란 산천이 두 번이나 바뀌는 간병을 하셨으니 주환 기환도 크게 깨닫는 본이 되었을 것입니다.
麗水市長도 늦게 나마 알고 다행으로 표창을 해 주웠으니 당연하며 자랑스럽습니다.
사모님 오랜 간병을 통해 숭고한 '생명 활동'의 고귀한 삶을 깨우쳐줘서 고맙습니다.
건강 잘 챙기시고 기쁨이 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거실에 걸어둔 사진속의 집사람이 나를 쳥겨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지니 옷챙겨입고, 식사도 거르지 말라고 당부하는것 같아
함께하고 있다는 든든한 마음입니다.
책을 내면 처작품으로 올려놓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