遊雞龍山記 宋相琦 玉吾齋集
동행인물 宋道錫, 宋相琦, 宋相維, 宋必煥, 尹淑, 李世晟, 鄭堥 記
계룡산유람기〔遊雞龍山記〕
내가 오래전부터동학사(洞壑寺)의 이름은 들어 보았지만 한번도 가 보지 못했다. 8월 20일 이후에 아우 지경(持卿송상유(宋相維)의 자)이 나의 아들 필환(必煥) 등을 데리고 유람하고서 물과 바위, 암자와 요사채(寮舍寨)의 아름다움을 편지로 알려 오니 마음이 더욱 솔깃하였다. 9월 9일, 성묘하러 나섰다가공암(孔巖)에서 길을 돌려계룡산을 찾아갔다. 골짜기 입구로 막 들어가니 한 줄기 시내가 바위와 숲 사이에서 쏟아져 나와 혹은 격렬히 부딪치며 솟구쳐 오르기도 하고, 혹은 평탄하고 잔잔하게 흐르기도 하였다. 물은 푸르기가 하늘빛 같고, 바위 색도 푸른 기운이 감도는 흰색을 띠어 사랑스러웠다. 좌우에는 붉은 단풍과 푸른 솔이 마치 그림처럼 이어져 있었다. 동학사에 들어가니계룡산의 바위 봉우리가 웅장하게 솟아 빽빽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짐승이 웅크리고 앉은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이 서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절은 여러 봉우리들 사이에 자리 잡아 형세는 좁고 험하였다. 절 앞의 물과 바위는 매우 아름다웠는데 떨어지면서 작은 폭포를 이루기도 하고, 물이 모여 맑은 못을 이루기도 하였다. 정각암(淨覺庵)은 절 뒤에 있는데 매우 높고 험하였다. 암자에는 두어 명의 승려가 있었으며,정실(淨室)이 깨끗하였다. 상원암(上院庵)은 또 그 위에 있었는데 산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암자의 뒤로는 천 길이나 되는 바위 봉우리가 마치 병풍처럼 깎아지른 듯 솟아계룡산의 여러 산등성이들이 모두 발 아래로 보였다. 동쪽과 남쪽 두 방향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구름 낀 하늘 사이에 뾰족뾰족 솟아 있었다. 그러나 시력이 미치지 못하여 어느 지역의 무슨 산인지 알 수 없었다. 암자는 옛날 건물과 새 건물이 함께 있고, 옛날 건물 앞에는 두 개의 탑이 서 있었다. 탑 앞에 누대가 있는데, 그 주위는 비로 쓴 듯이 깨끗하였다. 정각암에서 이곳까지는 2, 3리 정도 떨어져 있는데, 벼랑이 험준하여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찔아찔하였다. 등나무와 칡넝쿨을 부여잡고 올라가는데 길이 좁아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었다. 한 노승이 암자를 지키고 있었다. 탑 앞의 누대에서 바위를 따라 내려오려니 길이 너무나 위태하게 기울어져 가마를 타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 고개를 하나 넘어 4, 5리쯤 갔는데 이곳이 바로계룡산의 뒤쪽 산기슭이 펼쳐지는 곳으로 산세가 뛰어나지 않았다. 곧바로 천장암(天藏庵)으로 갔다. 암자 옆으로 난 돌길은 매우 험준하게 절벽을 이루어 간신히 걸어 지나갔다. 이곳에 도착하니 산세가 조금 낮아지고, 암자도 특별한 볼거리가 없었다. 석봉암(石峰庵)은 그 아래에 있었는데 물과 바위가 대단히 아름다웠다. 맑은 샘물이 콸콸 흐르니 그 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으며, 절의 단청이 계곡에 비치어 찬란하였다. 석양이 산에 걸려 있어서 울긋불긋한 만 가지 경관을 연출하자 아득히 돌아갈 생각을 잊어 버려 땅거미가 지는 줄도 몰랐다. 적멸암(寂滅庵)과 문수암(文殊庵)이 또 그 위에 있었지만 날이 저물어 미처 가지 못하였다. 작은 고개를 하나 넘어 동학사로 돌아와 잠을 잤다. 10일 이른 아침에 귀명암(歸命庵)을 찾아 나섰다. 벼랑을 따라 작은 오솔길이 있는데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뒤엉켜 우거져 있었다. 험한 고개를 하나 넘으니계룡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뒤쪽에 귀명암이 있는데 비교할 곳이 없을 만큼 높고 가팔랐다. 앞마루에 앉자 기이한 봉우리와 높은 절벽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으니계룡산의 참 모습을 단번에 다 살필 수 있었다. 무수히 많은 숲과 골짜기에 단풍잎이 무성하니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였다. 암자에는 짤막한 기문이 있었다. 숭정(崇禎) 갑진년(1664, 현종5)에 벽암(碧巖)이 지었다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송대(五松臺)는 서봉(西峰)의 정상 부분에 있으니 예전에송담(松潭)할아버지께서 노닐던 곳을 볼 수 있었다. 옛날에는 암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해가 저물어 동학사에 돌아왔다가 곧회덕(懷德)으로 갔다. 이번 유람에는 공주 목사 정무(鄭堥), 어영대장윤숙(尹淑),성환 찰방송도석(宋道錫)등이 따랐으며,면천(沔川)의 종형(從兄)과 익경(翼卿) 두 사람도 또한 찾아와 함께 유람하였다. 동학사 구경을 다 마치고, 산 너머에 큰 절로 이름난 갑사(甲寺)가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유흥(遊興)이 일지 않아 그만 두었다가 19일에 회덕에서 돌아오는 길에 구티〔九峙〕를 넘어서 찾아가 보았다. 산은 굽이지고 길은 구불거리는데 사이사이 산촌에 돌밭과 초가집이 있어서 산뜻하였다. 길 옆에 절터가 남아 있으니 옛날에 옥산사(玉山寺)라 불리던 곳이었다. 앞쪽으로 흐르는 시내는 더러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10여 리를 가니 곧 갑사 입구였다. 그곳에는 많고 큰 고목이 좌우로 그늘을 드리워 해를 가렸다. 절 앞으로 시내가 모여 못 하나를 이루었는데 맑고 투명하여 거울처럼 비춰 볼 수 있었다. 못 옆의 큰 바위는 위가 평평하여 사람이 앉을 수 있었다. 절의 누각은 높고 웅장하였다. 겹겹의 봉우리와 높다란 숲이 사방을 에워싸 깊고 고요하였다. 양쪽에서 흐르는 시냇물이 절 앞에서 합쳐져 흐르는데 물과 바위가 대단히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구경할 만하였다. 서남쪽 봉우리 아래에 암자가 하나 있는데 노란 잎과 푸른 숲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하니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갑사의 동쪽에 새로 지은 전각에는 아주 많은 경판(經板)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 앞의 높이가 33층이나 되는 철탑은 어느 시대에 세운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만든 솜씨는 근래에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밤이 되자 동쪽 요사채에서 묵었다. 공주 목사, 아우 지경, 아들 필환 등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거문고와 피리를 연주하고노래도 불렀다. 내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한 이후로 이런 것들을 전혀 가까이하지 않았는데, 지난번 마곡사(麻谷寺)를 유람할 때 내가 함께 놀러온 사람들에게 “오늘은 비록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하더라도 괜찮겠다.”라고 하였다. 공주 목사가 이 말을 듣고서 이번 유람에 준비한 것이다. 밤이 깊어가자 달빛이 마치 대낮처럼 밝았다. 누각 그림자와 푸른 산빛이 달빛에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웠다. 다음 날 아침에 갑사의 여러 전각을 두루 둘러보니 오밀조밀하게 배치되어 있는 모양이 벌통을 열고 바라본 벌집 그 이상이었다. 승려가 “사자암(獅子庵)에 올라가 보면 가장 볼 만합니다.”라고 하기에 마침내 견여(肩輿)를 타고 길을 나섰다. 벼랑 사이로 구불구불 길이 났는데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소나무, 삼나무, 단풍나무, 대나무가 길을 따라 자라서 햇살에 빛나고, 낙엽이 오솔길을 덮어 흙먼지 하나 볼 수 없었다. 몇 리쯤 가자 옛 절터가 있는데, 거기에는 부도와 석탑이 있었다. 여기로부터 산은 더욱 높고 길은 더욱 험하였다. 사자암은계룡산뒤쪽 봉우리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온통 돌로 이루어진 봉우리는 대단히 괴이하고 장엄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그 앞에는 깎아지른 벼랑에 층층의 폭포가 대여섯 길이나 되었지만 물은 거의 흐르지 않았다. 암자에는 몇 명의 승려가 있었다. 동쪽 산기슭 한 줄기의 우뚝한 곳에 누대를 지었는데, 산 밖으로 은진(恩津), 석성(石城), 임천(林川), 한산(韓山)의 큰 들판과 먼 산이 눈 아래 뚜렷하게 보였다. 진경암(眞境庵)은 사자암과 의상암(義相庵) 사이의 우묵한 곳에 있어 돌길을 지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고개 하나를 넘어 곧바로 의상암으로 향하고, 아우 지경 등은 진경암으로 향했다. 그들이 와서 말하기를 “경치가 깊고 맑아계룡산에서 가장 좋았으며, 폭포 또한 최고로 아름다웠습니다.”라고 하니 함께 가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의상암은 특별히 볼 만한 것이 없었다. 앞에 있는 누대 근처에는 고목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기에 그 밑을 이리저리 노닐 만하였다. 원효암(元曉庵)은 두어 번 소리치면 들릴 만한 곳에 있는데, 수많은 골짜기의 푸른 산기운이 이곳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동쪽 벼랑에 있는 높은 폭포에는 물줄기가 층층의 바위로 쏟아져 내렸지만 물줄기는 그리 크지 않았고, 돌도 그다지 희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일 비가 와서 물이 불어나면 제법 장엄하다고 하였다. 이 계곡물이 바로 갑사의 동쪽으로 흐르는 시내이다. 계곡을 따라 갑사로 돌아오니 거리가 대략 5리 정도였으며, 대비암(大悲庵)은 그 중간에 있었다. 원효암으로부터 아래쪽으로 골짜기와 바위, 그리고 계곡물 등의 경치가 마음에 흡족한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신원사로 갔다. 갑사에서의 거리는 10여 리였다. 이종형 김제 군수(金堤郡守) 이숙기(李叔器), 그리고 공주 목사가 함께 왔다. 신원사의 누각은 제법 전망이 툭 트였다. 이 절은계룡산뒤쪽 기슭에 있어 절 앞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지세가 낮고 습하며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경치라서 눈길을 끄는 광경이 없었다. 신원사 뒤의 몇몇 암자들이 볼 만하고 절 동쪽의 물과 바위도 또한 아름답다고들 하는데, 지금까지 지나오면서 찾아본 곳이 너무 많았기에 흥이 식어서 마침내 발길을 멈추었다. 애당초 여기서부터 아름다운 경치를 가진 용추(龍湫)와 봉림(鳳林)도 찾아가보려 했지만 때마침 새로 부임한 관찰사가 공주에 거의 다 왔다는 소식이 전해져 더 이상 머물기가 곤란하였으므로 저물녘에 감영으로 돌아왔다. 지경 등은 신원사에서 하루를 더 묵고 다음날 용추와 봉림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그들과 헤어지려니 이별의 안타까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평소에 산과 물을 좋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유명한 산과 큰 사찰이 관할 지역 안에 가까이 있어도 문서 처리에 몰두하느라 찾아가 볼 겨를이 없었다. 이제 다행히 여가를 틈타서 며칠간의 유람을 하였으니“오랜 소원이 기쁘게도 비로소 이루어졌다.”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게다가계룡산은 쉽게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경치이다. 비록 사람들이 가까이 있는 것은 소홀히 여기고 멀리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에 지금까지 이곳 명승지를 탐방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하였지만 보기 좋은 아름다운 경치는 조선 땅에 있는 여러 명산에 뒤지지 않는다. 산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다행함과 불행함이 있어서 그러한 것인가. 애오라지 이 일을 기록하여 후세에 찾아와 유람하는 사람에게 전한다.
[주-D001] 동학사(洞壑寺): 계룡산동쪽 기슭에 있는 절이다. 마곡사의 말사(末寺)로 724년(성덕왕23)에 회의 화상(懷義和尙)이 창건하였으며, 신라 말기 도선(道詵)이 중건하였다. 동학사(東鶴寺) 혹은 동학사(東學寺)로도 표기한다. [주-D002] 공암(孔巖): 지금의 공주시에 속한 지명인데,계룡산아래에 있다. [주-D003] 정실(淨室): 신불(神佛)을 모시는 집을 말한다. [주-D004] 송담(松潭): 송남수(宋枏壽, 1537~1626)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로(靈老), 호는 송담이다. [주-D005] 회덕(懷德): ‘회천(懷川)’은 지금의 대전광역시 대덕구에 있는 회덕의 다른 이름으로, 송상기의 고향이 이 지역에 있다. [주-D006] 윤숙(尹淑): 숙종조의 무관으로 1705년(숙종31)에 영종 방어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주-D007] 송도석(宋道錫): 1652~?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1687년(숙종13)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주-D008] 면천(沔川): 충남 당진시 면천면이다. [주-D009] 노래: ‘육(肉)’은 입으로 노랫소리를 내는 것을 말한다. 《진서(晉書)》 권98 〈맹가열전(孟嘉列傳)〉에 “거문고는 피리만 못하고, 피리는 노래만 못하다.〔絲不如竹, 竹不如肉.〕”라고 하였다. [주-D010] 오랜 …… 이루어졌다: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말이다. 그의 〈남산시(南山詩)〉에 “어제 맑게 갠 날을 만나니 오랜 소원이 기쁘게도 비로소 이루어졌네.〔昨來逢淸霽, 宿願忻始副.〕”라는 구절이 있다.
遊鷄龍山記 余嘗聞洞壑寺之名,而未得一覽。八月念後,持卿携煥輩往遊,書報其水石庵寮之勝,心益嚮往。重陽日作省行,仍自孔巖,轉往訪焉。初入洞口,一派溪流,瀉出巖藪間,或激觸噴薄,或平鋪潺湲,色靑若空,石色亦蒼白可愛。左右楓丹松翠,點綴如畵。 入寺則鷄龍石峰,拔地磅礴,森立羅列,或如獸蹲,或如人立。寺居衆峰之間,面勢窄隘。寺前水石尤佳,懸而爲小瀑,匯而爲澄潭。淨覺庵在寺後,絶高且險,庵有數僧,淨室瀟洒。上院庵又在其上,而處於絶頂。庵後石峰千丈,削立如屛,鷄岳群巒,盡在脚下。東南兩面,千峰萬岫,簇簇於雲霄間,目力不及,莫辨爲何地何山也。庵有新舊兩構,舊庵前,竪雙㙮。㙮前有臺,淨潔如掃。自淨覺到此可數里,砯崖斗絶,步步欹危,攀藤捫葛,僅通人跡。一老僧守庵。自㙮臺循巖而下,甚危仄不能輿。踰一嶺,行四五里許,此乃鷄山後麓走散處,山形無奇,仍訪天藏庵,庵側石路陡斷,僅步而過,到此山勢稍下,庵亦無異觀。石峰庵在其下,水石最佳,淸泉㶁㶁,響穿林薄,精藍丹碧,輝暎澗谷,夕陽在山,紫綠萬狀,悠然忘歸,不知暝色之近也。寂滅、文殊兩庵,又在其上,而日暮未及見。過一小峙,歸宿寺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