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내가 얼마나 단순하게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될 때가 있다.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오고, 과제를 하고, 다시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오고 과제를 하고, 또 학교…… 일상이란 매우 단순하고 반복적인 것이었다. 물론 그 속으로 자세히 파고들면 여러 가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소설을 쓸 때면 난 이렇게 단순한 일상을 더 단순화시키려는 노력을 한다. 일상에서 듣는 말들,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일일이 신경을 쓰다보면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다. 하성란 선생님께서 ‘좋은 글을 쓰려면 일상을 단순화시켜야 한다. 일상은 너무 복잡하고 유혹이 많다’고 말씀하셨을 때,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성란이라는 작가를 문단에 등장시킨 건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이다. 그 전엔 선생님의 작품이 예심에서 다 떨어졌고, 등단한 해에도 당선작인 「풀」만 본심에 올랐다고 했다. 의외의 말씀이었다. 습작기 때 다른 사람들이 알아봐주지 못한 작품을 쓰신 분이 지금은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가 되셨다니.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선생님 말씀에 집중했다.
80년대 소설들은 대부분 거시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고 한다. 알고보니 선생님께서는 습작기 때 수많은 습작품들을 쓰면서 다른 작가들이 쓰지 않은 걸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셨고,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소설을 쓰기로 하셨단다.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이 선생님의 작품을 알아보지 못한 건 아마 기존 소설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김영승 시인께선 ‘모든 사물은 인간의 한 면모를 닮아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하성란 선생님은 평소 모든 사물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셨다. 그럼 지금 내 방에 있는 것들, 공책, 거울, 소설책 같은 것들에도 사람의 모습이 들어있을까? 무엇 때문에 내가 그것들을 필요로 했으며, 내 삶의 어느 부분이 그 속에 담겨있을까.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제일 좋아했던 샬롯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를 책꽂이에서 꺼냈다. 감성에 젖고 싶은 날이나 사는 것에 지쳐 힘든 날이면 꼭 한 번씩 찾는 책이지만, 겉표지부터 자세히 관찰해보니 느낌이 새로웠다. 하얀 바탕에 ‘제인 에어’라는, 크기가 70pt정도 되어보이는 글자가 궁서체로 쓰여있고, 표지 상단에 정사각형 모양으로 샬롯 브론테의 얼굴이 그려져있고, 책 모서리엔 까맣게 먼지가 묻어 있고…… 이 모든 것이 나의 어느 것을 닮아있을까, 생각해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나는 사람들 사이에 고립되어본 적은 없지만, 이상하게 친한 친구들에게도 나의 모든 것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자신의 치부나 상처를 거리낌없이 다른 이들에게 털어놓는 아이들이 부러웠고,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말을 하려니 입술이 딱 붙어 떼어지질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입을 틀어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혼자 끙끙 앓고 있는 사이 나는 사람들에게서 조금씩 멀어졌다. 어느샌가 나는 다른 이들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그리고 그들에게 완전히 이해받지도 못하는 이방인이 되어있었다.
내가 하성란 선생님의 작품들을 읽을 때 그 주제나 의미를 곧바로 파악해낼 수 있었던 건, 이러한 경험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하성란 선생님은 삶의 본질을, 등장인물 개개인의 인생이 아닌, 주로 인간관계 속에서의 소외와 소통의 부재를 통해 이야기하시는 분이다. 그분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혼자서’ 외롭게 산다. 삶이란 게 무엇인지 아직 완전히 알 만한 나이는 아니지만, 그동안 내 인생에서 고독은 갓 걸음마를 뗀 아이가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처럼 나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때문에 하성란 선생님께서 만들어낸 인물들에 대해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 하루하루 늘어가는 과제에 치여 제대로 된 내 글을 쓰지 못했다. 하성란 선생님의 말씀처럼 습작생이라면 소설을 쓰게 해주는 감각을 얻는 것이 먼저이므로, 어떻게든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은 내 글을 써야겠단 생각을 했다. 좋은 말씀 아낌 없이 해주신 하성란 선생님과 문학행사를 열어주신 큰선생님, 한선생님께 감사드린다. 행사를 준비해주신 선배님들과 오랜만에 만난 문우들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미리 와서 준비를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