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9월 30일,
한국과 소련 수교
기록에 따르면 한국과 러시아의 첫 만남은 조선 효종의 나선정벌이다. 1952년부터 1689년까지 청나라
러시아(당시 루스 차르국)는 아무르강 이북의 청 영토를 차지하려고 국경분쟁이 있었다. 1654년 2월
청나라 순치황제는 조선 효종에게 나선정벌을 위해 조총 포수 100명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고, 마지못해
5월을 시작으로 2차례 파병하게 되었다. 이것이 첫 만남이었다.
나선정벌
그리고 역사 속에서 빠져 있다가 러시아인들과 다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이다.
동진정책에 열을 올리던 러시아 측에서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조선
내정에 대한 간섭을 시도했고, 당시 열강들의 세력싸움이 치열하던 조선에서는 친러파가 생겨나기도 했고
이로 인해 ‘아관파천’이란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서 일본이 승리하며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자 다시금 양국 사이는
멀어졌고, 광복 직후 소련군 장교 출신 김일성이 북한정권을 빠르게 장악한 뒤로는 약 반세기 동안
적대국으로 서로를 마주해 왔었다.
적대적이던 한소관계는 1970년대 동서진영의 데탕트가 시작되면서 상호입국허용, 제3국을 통한
간접교역, 문화교류 등으로 점차 호전되었다. 그러나 1983년 9월 1일 'KAL기 피격사건'으로 개선의
분위기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냉랭하던 양국관계는 세계적 냉전 분위기 종식과 함께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구상서(口上書)를 교환하는 것을 시작으로 소련이 올림픽에 788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참가시키면서
다시 호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88올림픽 리듬체조 금메달리스트 마리나 로바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89년 4월 3일 소련연방상공회의소 서울사무소가 개설되었고,
7월에는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모스크바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89년 11월 17일
양국간 영사처(Consular Department) 설치를 합의, 86년 만에 공식외교관계를 복원하였다.
양국 간 외교관계에 있어 결정적 전환점이 된 사건은 1990년 6월 4일 열린 한국-소련 간 첫 정상회담
이었다. 방미 중이던 노태우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
호텔 스위트룸에서 만난 약 65분간의 짧은 회담을 가졌던 것으로 이 자리서 양국 정상은 서로의
필요성을 인정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90년 6월 정상회담 후
이후 국교 정상화 수순에 들어간 한국과 러시아는 그 해 9월 30일 최호중 외무장관과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유엔에서 만나 수교 합의 의정서에 서명 후 이를 교환했다. 수교 직후인 12월 31일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을 이듬해 4월에는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한국을 각각 방문했다.
최호중 외무장관(오른쪽)과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1990년 9월 30일 역사적인 한소 수교
조인서에 서명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 의장실에서 열린 서명식에는 현홍주 유엔대사, 공노명
주소련 영사처장, 보론초프 유엔주재 소련대사 등이 배석했다.
한소수교는 노태우정권의 북방정책과 소련의 한반도정책이 효과적으로 맞물린 결과로 평가된다.
즉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페레이트로이카, 글라디노스트)과 탈냉전에 조응하려는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가 추진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는 1991년 9월 남북한유엔동시
가입, 1992년 8월 한중국교수립 등으로 이어진다. 1991년 12월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된 후에 독립국가연합
(CIS)이 탄생함에 따라서 소비에트연방을 법적으로 승계한 러시아공화국과 양국간의 외교관계가
자동으로 승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