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인물 탐구 - 권절, 조상치, 엄흥도, 기건
■ 귀머거리, 미치광이 흉내로 일관한 권절
권절(1422-?)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단조, 호는 율정이다. 어릴 적부터 얼굴이 빼어나고 힘이 장사여서 남이 장군과 함께 쌍벽을 이루었으며 많은 책을 읽어 두루 박식하였다. 세종 29년(1447)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세종은 그의 재주가 문무를 겸한 것을 보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더 익히게 하여 사복시 직장을 제수하고 집현전 교리로 뽑았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때 자주 그의 집에 와서 장래의 일을 이야기하였는데, 권절은 귀먹은 척하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세조가 즉위한 후 그의 재주를 아껴서 첨지중추부사로 선발하고 궁중 수의를 맡겼으나 권절은 미친 척하고 그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면 고개를 숙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국가는 태평하고 성주는 만수하소서!"
그는 일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이렇게 보냈다.
숙종 30년(1704)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숙이다.
■ 군자는 때에 따라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상소한 조상치
조상치의 본관은 창녕, 자는 자경, 호는 정재, 또는 단고이다. 세종 원년(1419)에 생원시를 거쳐 문과에 장원하여 부제학이 되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병을 핑계하여 들어가서 축하 인사를 하지 않고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르는 것은 바로 군자가 경계할 일입니다"
세조는 그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허락하였다. 세조는 그를 예조 참의에 승진시켜 벼슬을 내렸지만 그가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입궐하여 인사하지 않고 곧바로 동대문 밖으로 나갔다. 박팽년이 그에게 "가신 길 바라보니 우뚝하여 따를 수 없네"라는 편지를 썼다.
성삼문이 그에게 편지하기를 "영천의 맑은 바람이 동방의 기수 영수 되었으니 우리들은 조 선생의 죄인이다" 하였다.
영천으로 돌아온 조상치는 서쪽을 향하여 앉는 일이 없었으며, 단종의 '자규사'를 보고 동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다음과 같이 화답하는 시를 썼다.
소쩍소쩍
달 뜨는 저녁 산속에서 무엇을 호소하나
뻐꾹뻐꾹
파잠을 바라보고 날아서 건너고 싶어라
다른 새들 옹기종기 둥지에 모였는데
너 홀로 꽃가지를 향해 피를 토하고 있구나
쓸쓸한 얼굴에 초췌한 모습
즐겨 숭배하지 않고 누구를 돌아보는가
아! 인간의 원한이 어찌 나뿐이랴
충신과 의사의 가슴속의 불평이
손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리라
단종이 죽자 사람 만나기를 일체 사절하여 식구들조차 그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는 밤마다 홀로 앉아 잠도 자지 않고 슬피 울었다. 그는 못난 돌을 구해다가 면을 다듬지도 않고 울퉁불퉁한 면에다 "노산군 조정 부제학 도망자 조상치의 무덤"이라고 새겼다.
■ 단종의 장례를 치른 호장 엄흥도
엄흥도의 본관은 영월이고, 직책은 영월군 호장이다. 세조 3년 10월에 단종이 승하하였다. 엄흥도는 곧 달려와 곡을 하고 모든 준비를 하여 시신을 거두고, 다른 의논이 있을까 겁을 내어 즉시 장례 하였다. 이때 엄흥도의 일가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 만류하자 엄흥도가 말하였다.
"선행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요"
그는 장례가 끝나자 아들 엄호현을 데리고 도망갔다. 엄흥도가 죽은 뒤에 그 아들은 몰래 영월로 되돌아왔다.
현종 10년(1669)에 우암 송시열이 엄흥도의 자손을 쓰자고 청하자 상이 허가하였다. 영조 때 정려각이 세워지고 공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현종이 제문을 지었다.
『 어느 때인들 충신열사가 없으리요마는 어찌 엄흥도의 충성만 하겠는가.
아! 그때의 강원도에는 감사도 있었고 수령도 있었지만 일개 호장으로서
능히 큰 충절을 세웠구나. 아! 사육신은 마음을 다해 섬겼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거니와 영월 호장 엄흥도는 무슨 요구가 있고 무슨 소망이
있기에 일가들의 만류도 아랑곳하지 않고 감히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가.
이는 진실로 한 조각 붉은 마음 때문일 것이니, 지난 역사에도 듣기 힘든
일이구나. 백대를 전하도록 의열이라 할 만하다 』
■ 제주도민에게 장례법을 가르친 기건
기건(?-1460)의 본관은 행주이고, 집이 청파동 만리고개에 있었기 때문에 호를 청파라 하였다.
제주목사로 부임해 보니 백성들은 전복을 따먹고 밥을 먹지 않았다. 또 부모가 죽으면 장례를 치르지 않고 언덕이나 구릉에 갖다 버렸다. 이를 본 기건은 고을 사람들에게 관을 짜고 장례 치르는 방법을 가르쳤다. 제주도 사람이 부모 장례를 치를 줄 알게 된 것은 기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어느 날 기건이 꿈을 꾸었는데, 3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뜰 앞에 와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공의 덕택으로 우리의 뼈다귀를 거두었으니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금년에 공은 반드시 어진 자손을 둘 것입니다"
과연 그 해에 손자를 낳았으며, 그는 문과에 합격하여 응교가 되었다. 그 뒤로 기씨 자손이 크게 번창하였으니 그 꿈이 맞은 것이다.
그의 벼슬은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단종조에 벼슬을 그만두고 문을 닫고 들어앉아 사람을 일체 사절하였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때 그의 집을 세 차례나 방문하였으나 기건은 자기의 눈이 청맹과니라고 핑계하였다. 세조는 사실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 침을 들고 그의 눈을 찌르는 시늉을 하였으나 기건은 눈 한 번 깜짝거리지 않고 끝내 일어나지도 않았다.
또한 우리 나라 풍습에 부인들이 외출할 적에 너울을 쓰지 않았는데 기건이 처음으로 너울을 만들어서 쓰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