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차지숙
<2부>
50대의 나이에, 운전면허를 따자마자, 직접 차를 몰고 '짜잔'
시댁에 방문해서 모두를 놀라게 하는 나의 상상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오랜만에 만난 시댁 식구들과 오순도순 추석 명절을 지내니 행복했다.
그렇게 명절 연휴를 보내고 서울로 오는 기차 예약까지 마쳤는데,
명절이라고 시어머니께서 이것저것 한 보따리를 싸주신 게 아닌가.
세어보니, 총 보따리수가 일곱 보따리다.
(우리 어머니는 예나 지금이나 자식에겐 아낌없이 퍼주신다)
이번엔 차도 안가지고 와서 기차 타고 가야하는데...
이 보따리를 다 챙겨가려니 난감하긴 했지만,
어머니의 성의를 거절할 수 없어, 딸이랑 남편과 셋이서
보따리를 챙겨서 기차를 탔다.
풍기에서 밤 12시 넘어 출발하는 야간 기차였는데,
늦은 시간이기도 했고, 명절을 보내고 피곤했던 지라,
기차에서 눈 좀 붙이려고 하는데,
풍기에서 떠난 열차가 단양을 지난 즈음,
갑자기 기차가 급정거.
창문 옆 고리에 걸어두었던 가방이 떨어지고,
남편이 가방을 주우려는 순간,
쾅! 하는 굉음과 함께 기차가 어딘가 부딪히며, 순식간에 정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기차 안은 금세 아비규환이 됐다.
얼마 후,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승무원의 방송이 나왔다.
기차 탈선 사고였다.
살다보니, 내 생애 기차 사고를 다 당하다니...
그때가 2003년 태풍 '매미' 때였다.
태풍으로 인한 산사태로 기차 탈선 사고가 이어진 건데,
당시 뉴스에 떠들썩했던 태풍 매미로 인한 열차 탈선 사고 현장에
우리 가족이 있었던 것이다.
나와 딸은 그나마 괜찮았는데,
가방을 주우려고 고개를 숙였던 남편은
앞좌석에 심하게 얼굴을 부딪히며, 콧뼈가 부러지고,
코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남편이 피를 흘리니,
어찌나 무섭고 불안하던지...
그렇게 공포의 몇 분이 흘렀다.
이곳저곳에서 다친 사람들이 속출하고
승무원들도 정신없이 이리저리 사건 수습에 바빴다.
잠시 후, 구급차가 대기 됐으니,
모두 기차에서 내려 이동을 하라고 한다.
불빛도 제대로 없는 어두운 밤에, 비바람은 몰아치고,
길도 제대로 없는 진흙탕을 지나 도로까지 걸어 가야하는데...
어머님이 싸주신 보따리는 어찌나 많은지..
그때만큼은 바리바리 싸주신 떡보따리가 야속하고 시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쇼핑백은 비에 젖고 얼마나 난감했던지.
남편은 피가 나는 코를 틀어막고 구급차로 향했고,
딸과 나는 보따리를 챙겨들고, 피난민을 방불케하는 풍경을 연출할 수밖에 없었다.
119기동대가 와서 병원으로 이송하는데
떡보따리와 이것저것 싸주신 먹거리 보따리가
우리 세 식구보다 자리를 더 차지한다. (민망)
119라고는 그때 처음 타보았다
그렇게 구급차를 타고 단양의 한 병원에 이송됐다.
열차사고라 절차가 얼마나 복잡한지 환자들에게 치료보다
사고 난 경위와 신분에 대한 기재만 수도 없이하고 치료는 뒷전이다.
서류 정리를 하니, 제천의 좀 더 큰 병원으로 옮기자고 한다.
남편의 피나 좀 멈춰 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제천 병원에 가서도 똑같은 질문은 끝이 없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서야 남편 치료 차례가 되었다.
응급처치를 하고나서야 겨우 지혈이 됐다.
눈도 붙이지 못한 채, 어느 덧 병원 밖은 밝아왔고,
그 밤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철도청 관계자가 와서, 부상 있는 승객들을 따로 모아,
아침 식사를 대접하고, 위로금이라고 20만원씩을 줬다.
내가 보기엔 나이롱(?)환자들도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대부분 봉투를 못 이긴 척 받는데,
막상 코 뼈 부러지고, 피를 철철 흘린 남편은 안 받겠다고 사양하는 게 아닌가.
(자기 몫도 못 챙기는 남편 같으니!!!)
식사를 끝내고, 다친 몇 사람을 위해 열차 한량을 대절해서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기차 안은 평온했지만,
또 탈선을 하는 건 아닌가, 걱정스런 마음에 잠이 오질 않았다.
(이래서 트라우마라는 게 생기는 가 보다. 물론 20년 쯤 지난 지금은
모두 극복됐다)
철도청에서는 남편에게 입원을 하고, 코뼈 정형수술을 하라고 했지만,
남편은 뼈야 그냥 두면 붙기 마련이고, 사는데 큰 지장이 없으니 괜찮다고
거절하는 게 아닌가.
그 잘생긴 콧대가 삐뚤어진 것도 눈에 안 보이는지...
그리고 문득, 추석 전 남편이 꿨던 꿈이,
이 사고를 예견했던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건 사고는 남의 일로만 여겼는데 우리의 사고가 뉴스에 나왔다니.
뉴스에 나올 정도로 대형사고였지만,
그래도 다행히 남편의 콧대가 살짝 삐뚤어진 것 외에는
큰 부상 없이 무사히 세 가족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었으니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철도청에서 치료비와 위로금을 보내왔다.
생각지도 않았던 돈!
남편은 코뼈가 삐뚫어지는 불행을 겪었지만
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분이다.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기분이 엄청 좋았다.
다시없을 경험이 뜻 깊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쉬움으로 남는 한 가지가 있다.
추석 명절에 내가 운전하고 갔더라면 남편이 코뼈가 부러지는
불행은 없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