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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기획연재 -미국의 여성 불교 >
가부장제 이후의 불교
(Buddhism after Patriarchy)의 소개 (2)
글 | 송광섭 (대한불교 조계종 국제포교사)
저자에 대하여
리타 엠 그로스 (Rita M. Gross)는 위스콘신 대학교 (University of Wisconsin-Eau Claire)의 비교 종교학 교수이다. 불교 기독교 연구 협회의 전 회장 인 그녀는 Beyond Androcentric (문화 및 역사의 중심에 남성적 관점을 배치함으로써 문화적으로 여성 성을 소외시키는 의식적이든 아니든 관행을 기초로한 세계관): 여성과 종교에 대한 새로운 에세이, 낸시 포크와 함께 언급되지 않는 세계: 여성 종교 생활의 편집장입니다. 그녀는 또한 여성과 종교에 관한 수많은 기사와 에세이의 저자이기도합니다.
가부장 제 이후의 불교(Buddhism after Patriarchy)에 대한 소개
이 책은 역사상 여성들이 불교에서 활동한 부분과 가부장제 성립 이후의 미래에 불교가 어떻게 될지를 조망합니다. 작가는 일반적으로 불교가 개입되지 않았던 여성의 특성을 논의 함으로써, 기록으로서의 불교 역사를 완성하며, 종교의 구성으로서 불교 에서 발견 된 페미니스트에 대한 주요 개념에 대한 최초의 분석을 제공 한다. 역사 전반에 걸쳐 불교권에서 흔히 볼 수있는 여성 차별 관행에도 불구하고, 그로스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 남성 지배보다는 양성 평등을 조장한다는 것을 확인하여 주고 있다. 이번호에서는 본문의 제 3장에 대한 소개를 보내 드린다.
제3장
달마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주요 불교 개념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분석
제8절 불교 페미니즘을 위한 자원
여성과 불교에 관련된 문제에 대한 연구자들이 종종 역사적 관점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으며, 그러한 역사적 지식이 없다면, 불교에 관련된 모든 논의는 비젼이 작으며, 내용도 단차원적이며, 비정형적인 현대 불교 신자들의 집단적 불교적 경험에 대한 묘사로 한정 될 수 있다. 특정한 주요 불교 개념에 대하여 페미니스트적 함의에 대해 주장하거나 불교의 재구성을 제안할 때, 불교 조직과 제도와 개념에 대한 역사적 깊이는, 연구자의 통찰력과 논점을 강화시켜 준다. 불교의 주요 개념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분석과 불교에 페미니스트적 재건을 위하여, 정확하고 확인 가능한 과거 자료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러나 종교적 전통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논의는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에 더 관심이 많다. 전통의 과거에 대한 정보는 그 자체가 종말이 되기 보다는 페미니스트적 분석과 전통의 재건을 촉진하기 위해 사용된다. 비록 불교에 대한 이전의 페미니스트 역사학 학문은 거의 없었지만, 적어도 불교에서는 여성의 역사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앞의 장에서 많은 것을 조사한 불교 교리 자체에 포함된 논의를 제외하고는 성별 문제에 대한 불교 교리의 함축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리타 엠 그로스
서구 페미니스트 사상의 배경
불교 페미니스트 분석과 재건을 위한 모험의 가장 큰 자원 중 하나는 지난 20년 동안 학문과 이해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페미니스트 사상의 거대한 실체이다. 학문적인 방법으로서나 사회적 비전으로서 페미니즘에 관한 방법론에 있어서 의식혁명을 통한 학문적인 증명이나 관습적인 진리는 그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방대하고 심오한 많은 페미니스트적 분석과 불교 재건은 불교와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기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모험은 기독교와 페미니스트적 이해를 연결하는 비슷한 벤처크리스타니아 페미니스트적 사고와 유사하다.
기독교 페미니스트 사상은 불교에 비해 훨씬 발달되어 있고, 대중들의 많은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 신자나 기독교 여성주의자가 직면하는 대부분의 질문들은 매우 유사하며, 사용하는 전략의 대부분이 공통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 페미니스트 사상과 불교에 정통한 사람들이 기독교 페미니스트 사상과 유사한 유사한 논점을 가지고 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유사점을 모방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20년 전 기독교 페미니스트 운동의 초기에 본질적인 첫 질문이 제기되었다. 이미 확립된 전통 안에서 활동하는 것과 페미니스트적 비전이 양립할 수 있는 남녀간 성차별적 논의의 핵심을 찾는 것이 가능한가? 기독교의 맥락에서 나오는 종교적인 페미니스트적 사고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데 있어서 대략 두 진영으로 나뉜다. 한편, 우리는 기독교의 거대한 실체적 존재와 전통을 재건하는 것에 전적으로 전념하는 소수의 유대인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을 발견한다. 이러한 사상가들은 전통의 핵심은 본질적으로 성차별주의자, 여성혐오자, 가부장주의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평등주의적이며, 사람을 위해 인간이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문화적 관습과 편견은 남성과 여성에 대한 편견을 심각하게 오염시켰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그 전통에 일말의 정의로운 것이 포함되어 있다면, 계속해서 그것을 주장한다. 평등주의 가르침의 핵심인 부패한 상황은 전통의 재건을 허락할 뿐만 아니라 필요로 한다. 종교 체제의 상징이 너무나 절망적으로 가부장적이라 종교적 전통의 상징에서 벗어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신을 넘어서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일신교의 상징을 재구축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남성 일신교는 파괴될 수 없다는 관점이 발생하게 되었다.
페미니즘의 불교적 정의
불교와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정의를 통해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불교도 이 정의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여자와 남자의 인격 동일체에 대한 급진적 이해와 실행을 포함한다. 나는 정의에 사용되는 각 단어에 초점을 맞춘다. 급진적 상황은 사물의 근원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주요 실존적 질문에 대한 매우 불교적인 접근법이다. 불교에서는 외모나 관습적인 이해로 인하여 본질이 사물의 표면에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우리에게 전통적인 남녀 구분과 이에 따른 고정 관념을 동일시 하도록 요구한다. 불교는 이상하게도 자신이 받아들이고 활용했던 남녀에 대한 고정 관념에서 종래의 단어 순서가 여자와 남자로 뒤바뀌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정의에 대한 본질적 변화가 이동하면서 비록 불교가 언어적 표현을 궁극적인 진리를 포착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언어, 정밀성에 대한 진지한 관심은 불교와 철학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중요한 것은 남성과 여성의 평등적 인격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남성들 역시 완전히 통합된 인간이 될 수 있다. 이 진술로 나는 남성들이 가부장, 성차별주의자, 그리고 여성혐오자가 되는 것을 극복할 수 없는,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들로 보는 페미니즘의 버전에서 나를 분리시키고 있다.
페미니즘을 실용적 운동으로 보는 것은 페미니스트 학계에서 흔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언어는 매우 불교적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근본적으로는 영적 규율인 실천이며, 다양한 명상 기법은 전통의 심장이며, 차분하고 통찰력 있고, 해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이다. 자신의 언어, 기대, 정상성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 싹싹한 언어를 사용하여 일어나는 것, 여성과 남성의 공통의 인간성에 대한 페미니즘의 근본적이고 터무니없는 진실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이 지속되어야 한다.
불교는 페미니즘이다
불교와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은 단순히 불교의 본질은 페미니즘이다! 라고 말하는데, 그들은 불교가 자신에게 진실할 때, 그것은 페미니즘과 같은 비전을 나타낸다는 확신을 직감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불교가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내 안에 깊은 감동을 내리치기는 하지만, 그 반대 주장인 불교는 만들어질 수 없다. 페미니즘은 광범위한 의식 운동이며, 영적 지향으로 분명히 그들은 페미니즘의 비전에 충실하기 위해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간에 불교가 그 비전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불교 자체가 되거나 불자가 될 필요는 없다. 또한 페미니즘의 일부 부분적 버전일수록 더 호전적이거나 분리주의적으로 경사되고, 페미니즘은 불교와 화해를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한 페미니즘이 페미니즘의 규범이나 비전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불교가 페미니즘보다 주장을 굽히지 않는 누군가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불교와 페미니즘의 근본적 지향성 사이에, 적어도 네 가지 심오한 유사점들은 불교가 페미니즘이라는 주장을 강화시킨다. 서양의 대부분의 철학적, 신학적 유산과 달리 불교와 페미니즘은 모두 경험에서 시작하여 경험적 이해를 매우 강조하고, 경험에서 이론으로 옮겨가는데, 이것이 경험의 표현이 된다. 둘 다 전통적인 견해와 도그마들이라는 접근방식을 공유한다. 경험이 실제로 자기 세계에 대한 경험과 어떤 것의 충돌에서 이론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가치가 없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세상에 대해 배워왔고, 페미니즘과 불교는 모두 경험을 부정하거나 억압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론 이전의 경험에 대한 의존은 불교와 페미니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수행으로 단식을 하려는 의지와 용기, 진리의 통찰력을 붙잡는 두 번째 중요한 유사성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관점 모두, 해방을 인간 존재의 요점, 즉 모든 존재가 구속되는 목적이라고 말한다. 해방을 개념화 한 언어는 두 가지 관점에서 피상적으로 다르다. 불교에 있어서, 그 언어는 해방을 세계로부터의 자유로 보는 것과 세계 내부의 자유를 나중에 더 완전하게 탐구할 불교 내부의 중요한 모호성으로 보는 것 사이에서 정서적인 방황을 한다. 페미니즘에 있어서 해방의 정의는 남녀의 역할과 성적 고정 관념으로 부터의 분명한 자유를 의미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와 개념화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요점을 놓치는 것이다. 페미니즘, 불교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에 대한 비젼, 쉬운 해결책과 관습적인 관점의 즉각적이고 설득력 있는 함정을 넘어 그러한 비유를 초월하는 여자와 남자의 평등한 인격성을 이해하는 급진적 자유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불교와 페미니즘의 상호변혁
불교를 페미니즘이라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고 정확하지만, 완전한 정답은 아니다. 불교와 페미니즘 사이의 잠재적 상호 변혁은 불교 페미니즘에도 똑같이 중요한 자원을 제공한다. 유사성보다는 상호 변혁에 초점을 맞출 때, 강조점은 두 가지 관점이 얼마나 양립할 수 있는가를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으로 바꾼다. 불교와 기독교의 상호 변혁을 향하여, 대화를 넘어선 상호 변혁이라는 구절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정한 대화에서 비롯되고, 다른 영적 관점들 사이의 상호작용과 변화의 가장 적절한 방식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대화와 그에 따른 상호 변혁은 중도이다.
강건한 이념적 자기 합리화와 위대한 영적 세계에서의 동기 부여적이며 일시적인 쇼핑 사이의 길, 상호 변혁의 개념은 진정한 대화에 들어가면 하나가 바뀐다는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진정한 대화는 가능한 한 토론, 논쟁, 느린 수행(漸修) 또는 전환의 의제를 버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이며, 진정한 대화에서는 자기 자신만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진정한 대화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만남의 시작에서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파트너를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진정한 대화는 본질적으로 위험하고, 어떤 설득의 이데올로기에도 위협적이다. 대화 상대들의 변화는 점진적으로,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되는 내적 성장의 과정에서 비롯된다. 그 변화들은 의도적으로 추구하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적 자기 합리화의 보호가 없이 일어날 것이다.
제9절 무대의 설정: 불교의 세계관 추정
불교 내부의 중요한 3대 교리적 발전 과정에서 각각에 특유한 주요 개념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분석의 출발점으로서 불교 세계관의 몇 가지 전제들을 검토해야 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그 중에서 더 명백하고 구체적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형성하게 하는 배경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그들은 불교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분석에 대한 중요한 의미 이지만 쉽게 망각될 수 있었다. 우리는 우선 불교가 페미니스트들이 재구성하기 매우 어려운 두 가지 만연한 종교적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는 행운도 있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불교에서 남녀의 성 계층과 성 특권의 관행을 옹호하기 위해 가장 자주 사용되는 불교 개념인, 범인도적 개념인 카르마(業障)를 철저히 조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종교적 상징체계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분석과 비평에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불교 전망은 이원적이고 다른 세계인가?
부정적 축복을 세어라: 싸울 필요가 없는 논쟁
불교는 무신론적 종교다. 불교가 다른 많은 종교들과 큰 차이점들 중 하나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자주 제시되는 이 문장은 무심론의 의미와 근거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간단히 말해서, 불교의 무신론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부정하는 것은 그러한 존재들이 깨달음을 주거나 지각 있는 존재들을 윤회적 존재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무신론에 대한 가장 간략한 가능한 설명은 아미타바의 순수한 땅에서도 자신이 아닌 타인에 의한 대리 성불은 있을 수 없으며, 외부 구세주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불교는 다른 많은 종교들의 관심과 에너지를 그렇게 소비해 온 범주인 절대적 최고 존재, 창조주, 신등의 상징이 부족하다. 이것이 페미니즘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왜냐하면 절대적 최고존재는 또한 의인화되어 성별을 포함한 인간의 특성을 부여받는다. 사회의 신과 남성 우위의 악의성이 서로를 거울로 비추고, 보강하고, 검증하는 것이다. 인간의 상상 속에서 생겨나고 가부장제에 의해 그럴듯하게 지속된 아버지 신의 상징은 결국 여성의 억압을 위한 메커니즘을 올바르고 적합하게 보이게 함으로써 이러한 유형의 사회에 봉사하게 되었다.
유의미한 신화적, 상징적 여성적 인물의 부족은 여성들에게 있어 주요한 심리적, 정신적 장애라고 결론짓는다. 유대교 전통이나 기독교 전통에 남기를 원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서의 전통적인 신상을 되돌리는 신에 대한 다양한 대안적 이미지들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불교 페미니스트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법적 분쟁은 불교 사원 내에서 비구니들의 서품이나 비구니들의 지위 문제를 놓고 벌어진다. 이 규칙들은 매우 상세하고 불교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규칙은 계시나 우주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일반 불교 신자들은 신의 계명이나 우주적인 계명으로 깨지지 않는다. 나이든 성 역할과 성 상호작용의 패턴과 충돌할 때 나타나는 모델들 그들은 단지 받은 사회적 관습만 바꾸고 있다. 그러므로 성 특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일반 불교계 내부의 남성은 신이나 우주인들에게 그를 검증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 그가 단순히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의욕에 의해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은 훨씬 더 분명하다. 이것은 사회 관습이 잘 정착되어 있기 때문에, 심지어 사람들 사이에서도 쉽게 변화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정적인 카르마와 여성의 탄생: 일부 페미니스트적 논평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불교도들은 남녀간의 성 계층과 남성 지배를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고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들은 카르마의 범인도적 개념, 원인과 결과의 법칙, 그리고 부활에 대한 신념에 호소한다. 페미니스트 분석의 맥락에서 이 개념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기 전에, 그 개념을 좀 더 완전하게 논의하는 것이 유용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카르마는 그 개념을 철저하게 알지 못하는 서양인들이 그런 식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약탈의 이론은 아니다. 사람은 부정적인 효과를 내는 원인을 활성화하기 위해 구속되지 않는다. 습관적인 경향은 영적으로 미성숙한 것에 의해 특정한 조건 하에서 어떤 원인이 활성화되는 것을 거의 피할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상과 다른 적절한 영적 규율을 통해 그러한 습관적인 경향을 서서히 회복시켜 원인과 결과의 주기를 깨뜨릴 수 있다.
전통적으로, 이 원인과 결과의 법칙은 재탄생에 대한 믿음과 얽혀 있었고 많은 전통적인 인도티베탄 불교 신자들은 재탄생을 믿지 않고는 불교가 되는 것을 거의 상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서양 불교 신자들은 재탄생에 대한 믿음이 불교에 대한 이해나 불교 영적 규범을 실천하는 이유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업보의 개념은 부정적인 습관성 경향과 같은 구체적인 원인이 필연적으로 심리적 고뇌와 같은 구체적인 효과를 낳는다는 것을 다소 잘 설명하지만, 왜 어떤 사람들은 마약에 중독되어 태어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나는가를 만족스럽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업의 법칙을 보편적인 설명의 틀로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사람의 삶과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는 데 심리적으로나 치료적으로 매우 유용하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개념들의 전통적인 적용을 여성이라는 사실에 대해 검토할 수 있다.사람들은 그것들을 수동적으로 단지 나의 업보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분류하고 그것들을 바꾸는 일을 할 필요가 있다. 그 다음, 잠재적인 감정적 피로를 완화시킬 수 있다.
불교는 이중적이고 다른 세계인가?
근본적인 페미니스트적 질문
많은 교과서들이 불교를 현재 세계를 부정하는, 다른 세계를 지향하는 종교로 설명하고 있으며, 확실히 불교 전통 안에서 그러한 해석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전통 안에 있는 사람은 현세에서 불교를 통한 자유의 길이나 현실 세계로부터의 자유로의 길로 갈수있는 여정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 불교를 세계 속에서 자유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불교를 현실 세계로부터의 자유라고 보는 것 보다 더 친숙하며, 포스트 가부장적 비전과 훨씬 더 잘 어울린다. 불교 세계관의 적절한 해석에 관한 이 질문은 페미니스트적 관점에서 비판적이다.
서양에서는 그런 영성이 여성 혐오적인 경향이 있고 가부장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에 보통 그들은 그런 종류의 영성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다. 기독교 시대 이전에, 지중해 세계의 사람들은 자연의 우주 세계의 주기적인 과정과 리듬에 대한 믿음을 잃기 시작했다. 그 대신 그들은 자연의 세계 밖과 그 너머의 구원과 그러한 순환 과정에 포함된 유한성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사람들은 경험에 대하여 선악(善樂)의 이중성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선의 편에 선 정신, 반면에 본질적으로 악은 아니더라도 자연과 육체는 죽음 이후의 영혼에 대한 영적 구원의 초월을 통하여 쉽게 사람들을 유혹했다. 이 세상과 다른 세계의 이분법, 정신과 육체나 자연, 지성과 감정이 남녀간 성적 극성을 강화하고 강화시켰다. 여성은 육체, 감정, 자연의 영역과 연관되어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은 거부되고 통제되어야만 정신의 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이원론적 시각과 다른 세계관을 여성과 여성에 대한 고전적인 기독교적 관점에 주요한 기여 요소로 보고 있다.
게다가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종종 다른 세계, 이원론적 영성과 현재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들 사이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침략과 전쟁을 널리 미화하는 것과 지구를 유한한 존재의 매트릭스로 간주하지 않고 지구 생태계를 착취하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한다. 여성혐오와 애국정치는 종종 반세계적 전망과 공격 또는 착취 사이의 중요한 연결고리로 보여진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으로부터의 자유가 정말로 우리의 올바른 정신적 목표라고 확신한다면, 우리의 임무는 비애국적이고 비미학적인, 그러나 다른 세계적인 영성을 허용하는 사회적 재건에 참여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반세계성이 진정 우리의 진정한 정신적 목표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때 다른 세계성을 영적으로 매력적으로 만들었던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러한 힘은 이제 고갈되어 버렸고, 적어도 종교적이고 영적인 사고의 선도적인 가장자리가 발견되는 비인기적인 수준의 종교 관행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서로 얽히지 않는다. 이러한 복잡성을 인식하면 남성만이 그 안에 있는 종교적인 엘리트였기 때문에 타세계적인 영성이 발달하거나 여성이 창조하고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다소 단순한 결론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오직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영성
그러나 불교는 세계 속의 자유로 이해하고 페미니스트와 애국 후 여성, 그리고 남성의 우려에 의해 알려지게 되면 가부장적이고 남성으로 창조된 불교가 세계로부터의 자유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우려와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제10절 주요 불교 개념의 페미니스트적 분석 전략
어떤 주요 종교에서든 페미니스트적 사고의 주요한 전략은 전통의 중심적 개념이 페미니즘과 양립할 뿐만 아니라 종교에 대한 가부장적, 구조화, 해석보다는 페미니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전통의 상징과 교리는 전통의 가부장제도와 관행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그들은 보다 현명하게 그 종교의 평등하고 비차별적인 발현을 지지할 것이다. 전통 불교에서는 업보에 대한 가르침을 제외하고는 남성 지배를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는 데 주요한 가르침은 사용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쉽게 그들이 인간을 묘사하는 인상을 형성할 것이다. 여성과 남성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그것을 다루는 방법들을 조건화하고 규정한다. 많은 불교 교사들은 그들의 교육방식에서 암묵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그 인상을 강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 기관들은 일반적이거나 수도원적이거나 남성적인 지배를 받고 있다. 너무나 흔한 일이지만, 우리는 종교적인 삶과 제도의 남성 지배와 연관된 모든 인간에게 적절한 성중립적 가르침을 발견한다. 불교의 즉, 불교는 자신의 비전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불교와 백년대계, 가부장제를 초월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박식한 불교 신자들은 이러한 평가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불교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오랜 관습의 변화를 옹호하기를 꺼릴 것이다.
저자가 남녀간의 성, 성별과 관련된 주요 불교 교리를 조사하기 위해 사용할 관념적 주제는 법륜의 3회전 개념개념개념이다. 이 비유는 부처가 처음 가르쳤을 때 달마의 수레바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옛 사상을 사용하는데, 이는 또 다른 법륜, 수레바퀴, 즉 윤회하는 존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다. 이 사상에 따르면, 바퀴가 두 번 더 회전했는데, 이것은 불교의 새로운 결정적인 시작을 나타낸다는 인식을 나타낸다.
아마 다시 법륜의 바퀴가 돌 것이다. 서양 불교에서 여성에 대한 가장 완벽한 논의는 바퀴 돌리기: 새로운 불교를 창조하는 미국 여성들'이라는 제목이다. 한편, 불교도들은 이러한 전환이나 단계를 서로 쌓아가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개업 의사가 진료를 할때, 세번째 단계부터 치료를 시작해서 결코 이전의 1,2 단계를 건너뛸 수 없다. 같은 방법으로, 새로운 페미니스트, 그리고 성실한 불교는 이전의 변화를 반영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가르침은 오랜 기간에 걸쳐 순차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심리적이거나 영적인 것이다; 이런 것들은 실천자가 자유와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발전의 단계들이다.
제11절 성별 및 무아: 불교 기본 가르침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논평
이 장에서, 나는 가장 중요한 불교적 삶의 방식을 설명하는 팔정도에 대한 주요 요소들에 대한 나의 의견을 정리할 것이다. 팔정도는 흔히 3가지 프라자나(智慧), 실라, 도덕, 사마디, 즉 영적 규율로 응축된다. 이 세가지 주요 요소 각각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함의 불교 생활 방식, 하지만 내 논평들을 다수 권리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논의로 구성된 중요하다.
프라즈냐(지혜), 성별, 본성
불교는 그것의 시작에서부터 현재의 발현까지, 자아가 없는 것과, 암시적으로, 자아가 없는 것과 반대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첫 번째 태동적인 가르침을 강조해왔다. 불교인들이 말하는 이러한 용어들은 불교 안팎에서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혼란스럽게 했다. 다른 주요 불교 교리와 마찬가지로, 불교 문학의 모든 영역에서 이 교리의 많은 뉘앙스를 충분히 탐구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여성주의 분석과 결합했을 때 자아와 이 무아에 대한 불교적 가르침들이 어떻게 불교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해석의 도구와 불교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토론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자아의 한 측면으로 성별 구성과 인간의 성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페미니스트적 사고는 우리에게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반응이 계급, 인종, 민족뿐만 아니라 성별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의존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깨닫게 했다. 또한 페미니스트적 사고는 대부분의 이전의 불교 논객들에게 여성의 재탄생의 바람직하지 않은 가능성에 대해 충격을 주었을 것이라는 생물학적인 결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별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정도를 우리에게 인식시켰다.
상상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형성하고 제한하는 사람들 반면에 가부장적 사회에서 구성되는 남녀의 문제에 대한 모든 탐구에는 페미니즘은 단지 존재한다. 불교는 오랜 전통으로 자아 없는 것을 배양하고 탐구하는 데 있어 이론적으로나 실무적으로나 상당히 이 주제를 파고들었다. 그러므로 자아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이 두 체계는 서로 할 말이 많다. 첫째, 우리는 불교 신자들이 자아 와 무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특히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첫 번째 청문회에서 에고리스의 불교 개념이 그들에게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양의 심리학에서는 대개 그 목표가 건강한 자아를 발전시키는 것으로 보는 반면 불교에서는 자아를 정신적 질병을 일으키는 문제로 간주하기 때문에 많은 용어상의 해석에서 어려움이 발생한다. 두 전통이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태도는 비구니들의 법계에 대한 현대의 불교적 설명에서 상당히 크게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별과 무해 의 윤리
팔정도의 두 번째 구성 요소는 규율과 윤리적 행위를 모두 내포한 계율로 구성되어 있다. 부정적 의미의 언어로 가르치는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등은 불교 윤리 행위의 고전적 내용이다. 테라바다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계율은 불교 교파의 관점에서 가르쳐지는 것처럼 그 메시지는 절제된 것 중 하나이며, 사색을 통한 자기 계발이다. 자기 자신을 돌보고 습관적인 부정적 패턴을 어느 정도 길들이기에 충분하다. 만약 자신의 부정적인 패턴이 진정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꽤 도움이 될 것이다. 거의 구호처럼 나와 함께 있는 그 진술은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모든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며 해로운 일들을 그만둘 수 있다면 세상은 엄청나게 개선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 윤리적 발전 경로 지도가 유용할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사회적 행동에 관여하는 페미니스트들과 같이 현 상태와 대안 질서에 대한 그들의 비전에 대한 불행을 조직, 시연, 또는 다른 방법으로 가시화시키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도구로서 불운한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 많은 미국인들 불교 신자들은 60년대의 다양한 시위운동에 상당한 관여를 한 후에 불교 신자가 되었다. 몇 년 동안 불교의 영적 규율에 진지하게 관여하고 난 후, 그들은 종종 그들의 불교 이전의 관여를 돌아보고 그 운동에 있어서 자신과 동료들 사이에서 많은 자아와 분노를 보게 된다. 그런 다음 그들은 자아를 해체하기 위해 명상을 하는 것이 원인에 관여하는 것보다 우월하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사마디(三昧)와 자기개발
불교의 명상법은 자기 계발과 자기 계발을 위한 강력한 기법이다. 첫 번째 가르침의 주요한 강조점은 자아를 해체하고 고통을 유발하는 습관적 경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명상과 사색의 규율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16가지 생각을 억압하거나 판단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단순하고 기본적인 관행에서 마음 가짐과 인식에 대하여 경험하는 법을 배운다. 사람은 관찰하고 알아차리고, 인식을 높이며, 즉시 그것을 고치거나 바꾸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사고 패턴과 습관적인 경향에 훨씬 친숙해지도록 가르친다. 명상의 실천을 통한 그러한 자기 배양의 목적은 위에서 논의된 개인의 해방이다. 또한 다양한 치료법과 자조노력에 익숙한 많은 서양 불교 신자들은 쉽게 해석한다.
가부장제에 의해 자아가 형성되고, 자기 의식이 심각하게 훼손된 여성들에게 있어서, 내실화든 가치관과 싸우든, 이 과정은 두 가지 수준에서 강력하게 치유될 수 있다.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의 자아의식을 왜곡하는 것은 많은 여성들이 여성인 것에 대해 스스로를 혐오하는 것만큼 없다. 혹은 그 감정이 자기 혐오가 아니라면, 상대방은 한 사람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잠재력을 부정하고 있는 것에 대한 좌절감이다. 불교와 페미니즘의 결합은 서로를 강화하고 강화시킨다. 개인의 해방과 자기 수용을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지금도, 미래에도 불교와 함께 전투를 계속할 용기와 기술을 원한다.
왜냐하면 사물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만이 목적에 적합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결국 상대적인 차원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상대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성별 역할과 고정 관념은 단지 그러한 차이들을 다루기 위한 편리한 옹호나 방법일 뿐이다. 그런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적절성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성 역할과 고정관념이 단지 편리한 상대적 관습일 뿐이라면, 그들은 너무 완고하고 경직되게 주장되고, 왜 그렇게 세심하게 사람들에게 사회화되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편안한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꽤 억압적인 것일 수도 있다. 얼마나 편리한 조정과 무해 행동을 결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페미니즘, 즉 사회 개혁의 다른 움직임으로 향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한 비판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페미니즘이나 다른 어떤 입장으로 자아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그래서 페미니즘이나 그 밖의 어떤 원인으로부터도 절대화시킬 수 있다. 대신, 일정한 영적 규율은 사람이 심각하게 여기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유머, 온순함, 온순함, 가벼운 촉감이다. 페미니스트 윤리와 보살 경로마하야나 불교는 서로 평행하고 상호의존적이어야 하는 두 가지 이상과 연민을 강조한다.
마하야나 불교의 많은 버전에서, 부두교의 학문을 실천하는 것을 통한 연민의 발전은 사실상 공허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보다 더 즉각적으로 중요하다, 비록 장기적으로 볼 때, 그들은 종종 자신의 오른손과 왼손에 비해 상호의존적이다. 마하야나 불교에서 여성의 역할과 이미지에 관한 장에서 이미 논의된 이야기에서 우리는 깨달음의 사상의 발견, 즉 열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그러나 보살의 서약을 받을 때처럼 개인의 해방이 아닌 보편적 해방을 택할 때, 개인의 청렴을 넘어 대규모 사회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공동노력으로 나아갈 때가 왔다. 깨닫는 순간 얼마나 해방되지 못하고, 얼마나 억압적이고,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심리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사회 조직과 권위의 지배적인 형태 중 일부로서, 어느 정도 수준에서 사회적 행동에 관여하지 않고서는 해방이나 보두의 길에 대해 진지하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불교사의 개요에서 보았듯이 반복적으로 행해져 왔다; 비구니들은 비구들에게 예속되었다; 그들의 명령은 불교 세계의 많은 곳에서 사라지게 허용되었다; 여성들은 심각한 영적 규율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적극적으로 낙담했다; 여성들은 그들의 특정한 형태의 귀중한 인체를 내려다보는 법을 배웠다.
제12절 성별 및 충성도: 마하야나에 대한 페미니스트 논평
가장 초기의, 가장 잘 알려져 있고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마하야나의 가르침은 철학적 개념 슈나야타(shunyata)이며, 보검의 길이라는 윤리적 가르침이다. 여기서 우리는 후대의 마하야나 개념들 중 일부를 달마 수레바퀴의 또 하나의 완전한 혁명으로 보는 제도에 따라, 이들을 제2회 회전의 가르침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는 모든 마하야교 신자들조차 합의하지 못한 분류 체계다. 신화적으로, 붓다 자신이 붓다 봉우리에 있는 라자그리하에서의 공허의 교리를 프라즈나파라미타 문학, 특히 가장 유명하고 널리 알려진 반야심경에서 서술한 대로 보드라바스와 아라한트 양쪽의 신도들에게 가르쳤고, 대승(마하야나)의 가르침에 대한 간결한 요약을 사용했다.
3회전 조직 틀에서 2회전 가르침은 특히 마하야나 철학의 마야미카 학교와 연관되어 있는 반면, 세 번째 법륜의 행사에서, 불타는 가르침은 특히 요가카라 학교라고 불리는 학교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공허(無)와 보살의 길이라는 개념도 모든 마하얀파에게 중심적으로 중요하다. 초심자 지적은 특히 공허함에 대한 구체적인 강조와 해석을 가리킨다. 이 장에서 논의해야 할 공허의 해석은 순야타가 아닌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해석은 주요 불교개념에 대한 이 페미니스트적 분석의 후속 부분에서 순냐타는 아무것도 아니다 를 이해하는 토대가 된다. 더욱이 이 장의 맥락에서 철학적 전망과 윤리적 교훈은 서로 상호의존적이다: 공허함이 있기 때문에 모두의 길은 가능하다.
Shunyata, 두 가지 진실 및 성별: 고전 불교의 주장
순야타는 무아(egoless)라는 말보다도 외부인과 내부자를 혼동하게 한다.
불교 교과서 자체는 그 개념이 쉽게 오해될 수 있다는 것과 그러한 오해의 극히 심각한 결과에 대해 경고한다. 무엇이 아닌가를 실증하는 다른 많은 불교적 개념처럼, 이론가들은 그 개념 자체에 이질적인 부정성으로 끈질기게 귀속시켰다. 이 개념은 서양인들, 특히 불교를 서양 사상에서 특정한 어려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철학적, 정신적 영감의 가능한 원천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흥미롭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증명되었다.
그것은 성차별의 불교 관행을 비판하기 위해 불교 고전 문헌에 사용된 유일한 불교 개념이다. 불교 신자들은 오래 전에 논리적으로 공허의 사실이다른 모든 차별과 마찬가지로 성별 차별은 부적절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비록 순야타에 관한 논쟁과 분석이 엄청나게 복잡해질 수 있고 따라서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만약 누군가가 계속해서 기초로 돌아간다면, 많은 복잡성과 혼란은 해소될 수 있다. 마하야나의 관점에서 보면 순야타는 무아와 상호의존적 공동연구를 철저히 이해하는 논리적 결과라고 보는 것이 가장 간단하다. 일과 우주가 비어 있다고 할 때, 중요한 질문은 무엇이 비어 있는가? 대답은 그들이 본질적인 존재인 자아가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원인과 조건에 따라 그들의 매트릭스에 상대적인 것이다. 마하야나 불교에 있어서 그러한 공허함은 철저하고 만연해 있다. 그 어떤 것도 본질적으로, 그 자체로, 원인과 조건의 대상이 아닌, 그 매트릭스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없다.
최고 존재든 영원한 영혼이든, 심지어 불교 열반이든, 완전하고 특별한 존재는 없다.순야타의 특색이 짙은 마하얀주의자들은 항상 공허함은 철저한 이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해 왔다. 초기의 불교적 분석은 주로 재화의 첫 번째 대상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는 기존의 심리적인 반응을 완전히 배제하는 사람들에 의해 실제로 존재하고, 실질적으로, 본질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이다. 그 재 정립된 자아는 조사되었고, 그것의 구성 부품으로 분해되었고, 그 부분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어떤 형이상학적 접착제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중하는 대신 마하야나 분석은 자아 자체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는데, 마하야나 분석에서는 단지 기본적인 공간, 개방성, 만능성, 순야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3절 성별 및 부처의 본성: 제3의 법륜 가르침과 밀교수행에 대한 페미니스트 논평
세 번째 법륜에 의한한 가르침은 세 번째 법륜과 불교의 3교파 체제가 겹칠 때 마하야나의 일부로 간주된다. 이 세 번째의 가르침들, 예를 들면 트라이카야, 세 가지 가르침들 중 많은 것들이 많다. 불상의 발현, 그리고 부처의 본성인 타다가타바(Tathagatagarbha)는 일반적인 마하야나 개념적 틀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마이다미카 학교의 철학적 대안인 이른바 요가카라나 비즈납티마트라타 학교와 관련된 철학적인 개념은 그렇게 널리 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소테리아학적으로 그는 세번째 법륜이 카타파 언어의 우세 때문에 일요타에 대한 보다 높고 균형 잡힌 이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불교의 가르침을 세 갈래로 분류하는 불교 종파에 따르면, 제3의 법륜 가르침과 해석은 순야타를 제2의 법륜 가르침 보다 비록 단어와 개념들이 관련된 영적 가르침에서 발생하더라도 더 충만하고 종교적으로 적절한 방법으로 이해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 인식 후에, 그 때 현실은 힘과 의미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일부 잘 쓰여진 문장들은 차이점을 요약한다. 제2회 법륜 순야타(공성)는 주로 우리의 언어적이고 개념적인 현실 버전의 비위생으로 명시되어 있는 반면에, 제3회 법륜 선\순야타는 주로 부처의 지혜와 연민의 충만함으로 명시되어 있다. 말과 개념에 바탕을 둔 이원론적 삶에서 나을 때, 공허함, 심연, 무에 빠지지 않는다. 사람은 결국 그때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
요가카라와 마이다미카 학교의 이 소내학 캘리 순위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사람들은 그들의 다소 다른 표현 방식을 알아야만 한다. 그들의 역사적 질서나 영적 길에 대한 발전질서가 뒤바뀌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공허함을 없는 것으로 발견한 것만이 아무것도 아닌, 타타타 사물-그것들-그것들-그것들- 그러한 것, 따라서 그러한 것-이라는 용어의 어색한 영어 번역들을 나열하는 공허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순야타와 타타타의 차이점은 하나는 빈것이고 다른 하나는 채움이라는 것 외에 무엇이 있을까? 그들은 동전의 양면이지만, 양쪽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두 번째 법륜을 통해 우리는 형식은 공허함을 배우지만, 세 번째 법륜부터 빈 공간은 형식이다 라는 진리를 배울 필요가 있다.
마하야나의 가르침을 체계화하는 이 방법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순야타를 넘어서는 충만함과 풍요가 필요하기 때문에 세 번째 법륜의 내용을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직관적인 공허함을 통해 개념적 절대성의 세계를 탈출하고, 능숙한 방법을 통해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순야타의 두 번째 해석은 본질적인 여성적 혹은 남성적 특성의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남녀간의 성 편견을 과소평가한다. 타다가타가르바에 대한 세 번째 가르침은 공허함을 넘어서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불교적으로 남여간의 행동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비판과 불교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해석에 더욱 큰 힘을 준다. 타타가타가바이라는 용어는 종종 부처 본성으로 번역되지만, 이것은 문자 그대로의 번역은 아니다. 지금까지 회피해 온 보다 문자 그대로의 번역은 타타가타-웅이나 타타가타-엠브리오가 될 것이다. 타타가타는 부처의 칭호인데, 가르바는 womb와 embryo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불상의 배아나 불상의 배아를 가지고 있다. 이 용어는 모든 지각 있는 존재의 내재적 잠재력인 불상을 어떤 해석에서는 물리적 우주를 포함한 모든 것의 내재적 잠재력인 불상을 일컫는 말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성별 특권과 평등주의에 대한 부정적, 긍정적인 주장을 서로에게 구축하면서, 제 2와 제 3의 교훈이 함께 작용하는 방식이다.
여러 종교적인 맥락에서 볼 때, 귀중한 탄생은 제2의 출생, 의식적인 부활이며, 이는 부정적인 면을 뒤집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자의 몸에서 출산 중. 때때로 그 상징성은 신체적인 출생에서 그 기초와 너무나 분리되어 많은 사람들이 재탄생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진성 남성다움과 여성임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성과 남성은 성 특징에 의해 정의되거나 성 역할과 고정관념에 의해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한편,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의 본질은 부처님에 대한 그들의 잠재력이다.
본질과 행위들: 여여한 것과 사회
부처 본연의 개념은, 어느 정도 강조를 받든 간에, 제3의 가르침에서 특정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마하야나 불교 형태에 공통적이다. 그러나 알라야비지나, 즉 창고 의식에 관한 복잡한 정신과 인식 이론과 '마음만'이라는 교리는 제3의 가르침과 시타마트라 또는 요가카라 학교의 전문화된 초점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이러한 복잡한 개념들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단지 성 문제에 대한 이러한 이론들의 몇 가지 중요한 함축적 의미를 지적할 것이다.
아주 일반적인 말로, 시타마트라 학교에 따르면, 우리가 일해야만 하는 것은 마음과 그 인식인데, 그것은 불붙지 않은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충돌, 부정적인 감정에 의해 더럽혀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신적 발달 수준에 따라, 이러한 인식들이 어느 정도 혼합되어, 계몽된 사람들에게서 정화되었다. 이런 것들과 별개로 객관적인 현실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지각, 그래서 흔히 유식학 학교라고 불리는 것이다. 인식의 기초는 알라야 의식이며, 다른 수준의 의식은 개인의 업보, 일반 업보, 타다가타바 등 알라야에 저장되어 있는 내용뿐 아니라, 더럽혀진 인식을 초래하는 의식의 수준도 있다. 이러한 수용은 전통적인 불교 사상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억압적인 조건에 관한 비비판적인 수동성 때문에 더욱 쉽게 번성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예언적인 목소리가 현명하게 변형된다면 불교 사상에 미칠 수 있는 공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전통 불교가 강조하는 숙소와 수용에도 필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내 논문 중 하나는 명상으로 태어난 나의 점점 더 평온해지는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페미니스트 사상에 대한 매우 유용한 구분이 인간의 상태에 내재된 고통과 가부장적 왜곡에 의존하는 고통 사이에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페미니스트, 내가 제안했듯이, 때때로 두 사람을 흐리게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논평은 주로 여성주의자들이 과잉반응할 수 있는 동일한 조건들에 대한 불교적 반응의 경향을 지향하는 동일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면도날의 중간 경로가 좁다.
본성과 신성한 수행 양식: 삼법륜 부터 밀교 수행까지
불교의 가르침을 세 갈래로 분류하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주요한 주장 중 하나는 일단 두 번째 전환에서 공허함이 확고히 확립되면, 동전의 뒤집힘이 종교생활을 위한 풍부하고 충분한 기초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주 강조되듯이, 철저하게 이해된 공허함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상을 수정하지 않고 감상하는 기초가 된다. 현상들은 더 이상 들러붙고 고정시키는 불쾌한 반응을 일으키는 유혹적인 요소가 아니라, 원시적으로 순수하고 생생하며 비이중적인 그런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그들은 피할 필요가 없지만, 감사하고, 축하하고, 해방시킬 수 있다. 보통의 경이적인 존재의 모든 요소들은 이 신성한 방식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모든 것이 영적인 규율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스러운 수행 양식의 발전이라고 불리는 이 태도는 모든 존재를 부처로, 만트라처럼 소리내어, 모든 현상을 행복과 공허의 결합을 나타내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전에는 진지한 영적 실천과 상당히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졌던 인간의 육체, 감정, 성욕은 이제 일상 생활에서나 의식에서나 리터기, 상징에서나 영적 변혁의 매개체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에 신성한 전망과 영적 규율 속에 통합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영적인 도구로서 이러한 원시적 경험에 대한 전통적인 밀교 수행의 논평에는 남녀 성별에 관한 부정적인 관습적 태도와 관행에 대항하기 위해 여성이나 남성들에 의해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아마 여러 가지 이야기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이유일 것이다. 이전에 매우 소수의 불교 신자들은 성별에 관한 전통적인 태도와 관습이 얼마나 해롭지 않은지를 깨달았다. 아마도 상상하는 대안은 훨씬 적었을 것이다.
이중성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이중적인 오버레이가 없는 경험의 연속성과 유동성이 있을 뿐이다. 모니즘은 현상의 다양성을 근본적인, 비영구적이고 보이지 않는 "실제" 기질로 붕괴시킨다. 다양한 현상들은 환상의 영역으로 좌천된다. 유일주의로, 사람들은 다양한 현상들을 넘어서, 진실되고 가치 있는 그들의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현실에 도달한다.
따라서 예를 들면, 아래에서는 남녀 공통 인격체를 강조할 수도 있다. 성별, 인종, 계급의 다양성, 그리고 다양성의 특징보다 더 기본적이고, 요소적이며,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아니면 아마 더 정확하게는 그 사람들이 눈에 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은 그들이 날카롭고, 생생하고, 명확하고, 구체적이고, 상세하기 때문에. 그러나 구체성은 더 이상 현상을 제한하고 제한하며, 현상을 나누고 분류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 더 이상 그들에게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없다. 따라서 비 이중성은 이원론과 모니즘의 양극단 사이의 중간 길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그런 것과 비이중성이 서로 수반된다. 성별에 대한 이러한 비이중성의 이해를 적용하는 것은 상당히 급진적이고 조명적이다. 그것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발견되는 불교에 대한 애국적이고 성스러운 후 재건을 많이 안내할 것이다.
이제 남성적이고 여성적인 원리의 은유 아래, Vajrayana 불교의 범위를 탐구해 보겠다.성별에 대한 비이중적 접근의 모델을 제공한다. 이 토론에서 사용될 지침은 경이로운 세계 속에서 여성적이고 남성적인 원리의 균형을 추구하고 찾는다. 구체성과 이중성은 모두 개념적으로, 상징적으로, 그리고 명상과 리터리를 통해 논리적으로 광범위하게 정교화된다. 그러나 이미 Vajrayana 불교에서 여성의 역할과 이미지에 관한 장에서 강조했듯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징들을 사회 현실로 지속적으로 번역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징들은 불교의 페미니스트적 재평가에는 현재의 불교에서 가장 유용한 자원이 될 수 있다. 토론하고 묘사할 때, 먼저 철학, 그리고 나서 여성적이고 남성적인 원칙과 관련된 우상화와 의식에 대해 논하고 설명할 때, 몇 가지 어려운 질문들을 다루어야 한다. 남성적이고 여성적인 원칙들은 추가적 이분법들과 연관되어 있다. 사실 경험의 세계는 지속적으로 연관된 쌍으로 분류된다. 왜 이 특별한 상징적 계획이 선택되었는가?
여성적이고 남성적인 원칙이 정말로 보완적이고 비계층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이 기호 시스템에서 넓음이 위치의 의미에 대해 논한 다음, 동정적인 능숙한 활동과의 관계를 논한다. 명상에 훈련되지 않은 페미니스트는 여성 원리가 수동적이며 보다 중요한 남성 원리를 수용하고 가능하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간은 불교의 명상에서 이해한 바와 같이 수동적이지 않으며, 숙식은 서양적 의미에서 수동성과 전혀 같지 않다. 공간은 모든 것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활기찬 매트릭스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만이 그것을 무시한다. 지혜로운 자는 일단 기본 공간의 에너지에 익숙하고 편안하면 다른 어떤 것도 가능하지만, 그 전에는 정말 가능한 것이 없다.
더욱이 공간을 인식하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지혜를 개발하는 것(프라자)을 배우는 것이 영적 훈련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일단 관습과 방해를 받지 않은 우주 시야가 발달하면, 적절한 능숙하고 동정적인 활동이 저절로 생기고 행복해지는 반면, 그러한 시야가 발달하기 전에 활동은 대개 헛되고 방향이 잘못된다. 그러나 공간과 지혜는 왜 여성 원리와 남성 원리와 동정적인 활동과 연관되어야 하는가? 되돌릴 수 없었을까? 논리적으로, 그들은 할 수 있다. 어떤 상징 체계에서는 그들은 뒤바뀌었고 서양의 성별 고정관념은 종종 그것을 뒤집을 것이다.
여성적 원칙은 동반자와 어머니 모두다. 동반자로서, 지혜와 연민이 함께 계몽된 존재를 구성하는 것처럼, 남성적이고 여성적인 것은 공리적이고 상호 보완적이다. 그러나 어머니로서 여성적 원칙은 선행이다. 엄마와 아이는 공동 평가와 보완이 될 수 없다. 공간이란 형태가 생겨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며, 지혜는 인정 많고 능숙한 활동을 낳는다, 그 반대가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공간과 지혜는 남성적 원리보다는 여성적 원리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은 같은 방식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영적으로 여자나 남자가 성숙할수록 그녀는 정서적 성향으로 둘 다 드러나게 될 것이다. 여성적 원리와 남성적 원리의 이러한 상징적이고 개념적인 균형을 고려할 때, 때때로 우상화와 소송적 원문이 남성적 형상에 더 초점을 맞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특정 소송 텍스트의 표현을 바꾸는 것은 더 이상 궁극적인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하나는 의미가 아니라 단어만을 바꿔서 그 단어들이 그 의미에 더 밀접하게 일치하도록 하는 것이다. 현재 구성되고 있는 불교에 대한 이 마지막 장은 중요한 여성 이담인 Vajrayogini와 관련된 명상 관행에 대한 약간의 성찰과 함께 끝날 것이다.
깨달음과 여성적 원리
내가 그 동안 그녀에게 정식으로 소개한 것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녀의 만다라에 입문하는 것과 그녀의 새다나를 조명하고, 힘을 주고, 힘을 주는 나의 오랜 연습은 기껏해야 절제된 표현이다. 내가 강력하고 긍정적인 여성 종교적 상징과 영적 모델 없이 문화 속에서 여성들을 성장시켰기 때문에 그러한 경험은 얼마나 많은 것인가?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그게 중요한가요? 전통적인 불교 문화조차도 더 이상 남성의 신분이 아닌 여성이 비슷한 심리적, 정신적 경험을 할 만큼 가부장적이지 않은가? (계속)
송광섭 / 대한불교 조계종 국제 포교사
본지 편집위원으로 1952년 생이다. 1975년 해군사관학교,
1978년 서울공대 전기과, 1981년 서울공대 대학원, 1989년
미시간대학원, 2001년 웨인 주립대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78년부터 해군사관학교 교수부에서 전기공학 교수로 근무
하였으며 해군사관학교 법우회 지도교수를 담당하면서 불교
포교를 하였다. 2003년 해군을 전역하였으며 현재 해군사관
학교 명예교수겸 미해군대 방문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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