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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차레를 지낸 다음날인 어제.
오전에 작은딸네가 서울 잠실 아파트로 왔다.
간장게장을 맛있게 하는 집에서 점심을 먹자는 제의에 아내는 찬성하고는 금세 나들이 옷으로 갈아입었다.
나는 가기 싫어서 망설이었다가 아내의 지청구를 먹고는 외출복을 입었다.
큰딸은 새 구두를 꺼냈고, 나는 그냥 헌 운동화를 신고 현관문 밖으로 나섰다.
지하주차장에서 차에 탔다.
사위는 잠실 올림픽로를 달린다. 아니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여? 잠실 동네가 아녀?
도로는 차에 갇혔다. 올림픽로가 주차장을 방불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여? 묻지도 않는 째 주변을 보니 하남시, 미사리, 덕소 쪽이다.
대교 위에는 모든 차가 고장이 났나 보다.
아내와 사위가 주고받는 말을 가만히 들으니 밥 먹을 장소가 남양주시 강변마을, 팔당댐 인근인 것 같았다.
예봉산(688.2m), 예빈산(589m) 강변도로로 계속 직진했다. 아니 거북이처럼 걷다가 쉬다가를 반복했다.
두 시간 반이 넘어서야 한적한 길로 접어들었고, 도둑게장이란 상호가 걸린 음식점이 보였다. 허름한 주차장이 널널해서 좋았다. 70대 영감이 주차장에 드나드는 자동차를 손짓으로 유도했기에 안전하게 주차했다.
'도둑게장' 음식점 2층으로 올라갔다. 생선 비린내가 비위를 거슬렸다.
꽃게보다 조금 작은 중게로 젓담은 게가 반찬 그릇에 가득 찼고, 테이블에도 꽉꽉 놓여져 있었다.
나는 두 시간 반이나 넘도록 자동차에 앉아 있었기에 소변이 마려서 얼른 화장실부터 찾은 뒤에 손을 씼었다. 아무래도 간장게장을 먹으려면 손에 간장을 잔뜩 묻혀야겠기에.
작은딸내외. 우리 내외 넷이서 식탁 하나를 차지했다.
테이블 위에는 게장이 올라왔다. 생게를 뜯어서 등짝이를 벗겨놓은 게딱지 속에는 알살이 흐물거리고, 붉은 고추가루를 잔뜩 묻힌 게다리도 올랐다.
전남 광양군 골약면 도이리 갯마을 출신답게 아내는 간장으로 짜디짜게 젓담은 게 다리를 들었다. 입안에 덮썩 넣었다. 맛있다면서.
나는 삶은 게가 더 맛있다는 말을 차마 하지도 못한 채 사위가 이미 주문한 날게를 먹어야 했다.
나는 비닐장갑을 왼손에 끼고는 집게를 들고, 가위를 잡아서 게를 잘게 썰기 시작했다. 바닷게는 껍질이 무척이나 딱딱하고 단단해서 쉽게 잘라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손아귀에 힘을 주면서 게를 썰었다. 아주 자잘하게. 이빨(치아)가 노화되어 자꾸만 부서지는 요즘이기에 나는 딱딱한 게다리를 잘못 씹다가는 치아를 상할까 싶어서 게를 잘게 썰었다.
게장의 비린내가 무척이나 그랬다.
'이 게는 여기 한강에서 잡은 거여?' 물었더니만 작은사위가 웃었다.
설마하니 한강, 양수리 부근에서는 큼직한 바닷게가 살 것 같지는 않을 테니까.
작은사위네 부모님은 충남 태안군에서 사시기에 갯바다가 무척이나 가깝다. 사위도 인천에서 자랐다고 하니 갯바다 생태를 잘 알고 있을 거다.
내 아내의 친정은 갯바다와 맞붙은 갯마을이라서 서해안 갯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농촌마을에서 사는 나보다는 갯것들을 잘 알 터.
내 고향은 서해안 보령시 작은 산골마을이다. 무챙이 갯바다에 가려면 사십 분 정도를 걸어야 했고, 어머니의 친정인 용머리에 가려면 한 시간 정도는 걸어야 했다. 대천해수욕장에는 두 시간 넘게 걸어야 했다.
요즘에는 자동차가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금세라도 바닷가에 갈 수 있다. 나도 갯바다 해산물에는 어느 정도껏 맛을 안다.
내 어머니는 꽃게로 장을 담았다.
구루마로 무챙이 갯바다에서 박대(넓적한 생선), 꽃게 등을 사 오거나 무챙이 갯마을 여편네들이 함석 다라에 게를 이고는 이웃 마을로 팔러다녔기에 싱싱한 게를 쉽게 살 수 있었다. 커다란 장바탱이에 꾹꾹 눌러서 간장을 부어서 게젓을 담았다.
어린 시절부터 게장 냄새에 익숙했던 내 코에는 서울 한강 양수리 부근에서 맛보는 게장 맛하고는 냄새부터가 사뭇 달랐다. 강변마을의 설익은 게장에서 나오는 비린내가 내 비윗장을 거슬렸다.
그래도 점심을 사는 작은사위한테 내색하지도 못해다.
맛있다고 커다란 게 발조차도 우적우적 씹는 아내를 보고는 나는 아뭇소리도 보태지 못했다.
'게는 이렇게 먹는 거여' 하면서 나는 가위로 자른 게다리를 천천히 씹으면서 간장 맛을, 게살 맛을 찬찬히 다 빨았다. 쪽쪽 다 빨아먹었다. 게다리 뼈는 조심스럽게 오랫동안 씹고는 뱉었다. 알뜰하게 먹었다. 예전 시골집에서, 엄니가 게장 담아서 주었던 그 맛을 떠올리면서.
아쉽게도 한강이 바로 코앞인 내륙에서 먹는 게장이란 나한테는 사뭇 비린내나 기억될 게다.
가격표를 슬쩍보니 1인당 11,000원. 생각보다는 저렴했다. 푸짐하게 나왔으니까.
밥 손님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나갔기에 '도둑게장'이란 상호가 아무래도 밥도둑이었을 것 같다. 게장맛이 밥도둑이었을 게다.
점심 뒤 다산 정약용 생가로 갔다.
다산 정약용은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났고(1762 ~1736년),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1800년 초에 전남 강진으로 18년간 유배생활했다. 그의 형 정약전은 흑산도에 유배되어 '자산어보' 바다생물에 대한 과학적인 책을 남겼으나 섬에서 생을 마쳤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풀려 나 위 생가에서 마지막 생을 마쳤다.
생가에서는 최근에 새로 지은 모조품 형태가 역역히 남아 있었다.
예전 두어 차례 방문했던 강변마을이다. 그세 주변이 무척이나 더 많이 깔끔해졌다.
한가위 연휴라서 그럴까, 추석 뒷날이라서 그랬을까. 주차장에 주차를 하지 못하고 도로 나와서 도로변에 차를 주차했다.
다산 유적지에는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었다.
여유당 안을 슬쩍 돌아다녔고, 생가 바로 뒷산에 있는 다산 무덤을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유당은 생가 터에 새로 지은 기와집이다. 정약용 15살까지 살았던 집의 형태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지를 모르겠다. 후세 사람들이 꾸며서 지은 집이라서 역사적인 고증을 제대로 검증했는지를 모르겠다. 여유당 건물이 자꾸만 궁색해지는 느낌이다. 건물 소유주가 누구인지를 모르겠다.
작은사위네는 시간이 없다면서 나중에 한번 올라가겠다면서 뒤로 미루웠다.
길 건에에는 실학박물관이 있었다.
18세기 중반대의 실학파, 북학파의 한 사람인 홍대용 전시전이 있었다.
나는 실내로 들어섰다. 입장료는 무료.
전에는 유료였기에 내가 입장을 포기했던 때도 있었는데도 금년 5월부터 경기도청이 무료로 전환했다고 한다. 잘하는 지방행정이다.
북학파, 실학자 홍대용(1735 ~1783년) 북경에서 3개월 머물면서 세상밖 과학을 배웠다. 서양 문물에 일찍 눈을 떴다. 특히 천문학 밤하늘 별자리에 관심을 갖고는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했으며, 별을 관찰하는 기구인 혼천의 만들었던 만큼 실학 박물관에는 별자리에 관한 과거와 미래의정보가 많이도 전시되었다.
나는 덜렁대듯이 잠깐씩만 눈여겨 보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한강변을 다듬어서 최근에 조성한 생태공원 안을 거닐면서, 많은 야외식물에 관심을 가졌다.
최근에 조성한 탓으로 공원은 아직도 어설픈게 있었지만 그래도 하얗게 핀 구절초가 강바람에 하늘거렸다.
하얗게 솜털이 꽃잎처럼 나붓끼는 물억새, 보이지 않을 만큼 잘디잔 씨앗이 매달린 꽃수술대, 색깔이 칙칙한 스크렁이 무척이나 많았다. 아름드리 양버즘(플라타너스)가 가을하늘을 가리고, 짙게 퇴색한 잎새가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은 중반에 들어서고 있었다.
두물머리는 북한강물과 남한강물이 합쳐지는 능내리 마을을 휘돌아서 팔당댐으로 흐른다.
이날 오랜 가뭄 탓일까?
팔당댐 아래에는 강물이 줄어들어서 강물 위로는 바위들이 많이도 모습을 들어냈다.
더 구경할 시간이 없어서 오후 5시가 넘어서 귀가를 서둘렀다.
차를 돌려서 팔당댐으로 향했다. 팔당댐 위로는 일반인도 통행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는 말을 최근에 들었기에 우리도 팔당댐 위로 진입했다. 팔당댐 육교에서는 댐 아래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서해안 산골마을에서 사는 내가 서울 올라와 경기도 한강물을 가둬서 수도권 시민한테 물을 공급하는 현장을 구경할 수 있다는게 대단한 일이었다.
귀가 노선은 하남시로 들어섰기에 잠실로 돌아오는 시간은 한 시간도 채 안 걸렸다.
작은사위네 덕분에 오랫만에 간장게장 맛을 보았으며, 다산유적지도 방문하고, 팔당댐도 건넜다.
아내는 제 집으로 돌아가는 작은딸한테 시골에서 가져온 무화과를 고아서 만든 잼, 앵두주, 배(사위가 선물로 가져 온 배) 몇 개, 송편, 차례 지낸 반찬을 꾸러미로 싸주었다.
2
밤중에 내가 문득 핸드폰 생각이 나서 열어보니 대전 누나한테서 문자가 왔다.
누나는 충남 보령시립공원묘지에 들러서 남편(나한테는 매형) 무덤을 찾은 뒤에 이십리 쯤의 거리에 있는 친정집(내가 사는 시골집)에 들렀나 보다.
들렀다고 해도 대문을 빗장질했으니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텃밭이나 후이 둘러보았을 터.
누나가 텃밭에서 밤송이를 터는데도 자식들은 차 안에서 내리지 않고는 '얼른 떠납시다'라는 뜻으로 크랙션을 연거푸 눌렀단다.
메세지에는 텃밭에서 애호박 몇 개를 따고, 밤은 몇 개 줍지도 못하고 옛 친정집을 떠나야 하는 아쉬움이 담겨져 있었다.
일흔두 살의 누나는 친정 엄니가 생각났을까?
엄니는 아흔일곱 살 나던 며칠 뒤 먼 길 여행 떠났기에, 무창포해수욕장 가는 길목인 서낭댕이(서낭당) 뒷산에 묻었다.
그 이후로는 하나뿐인 아들인 나는 서울로 그참 떠났기에 어머니가 용머리에서 다섯 살(아니면 일곱 살) 이사와서는 살았던 옛집, 함석집은 텅 비기 시작했다.
게으른 텃밭농사꾼인 나는 어미를 2015년 2월 말에 아버지 무덤 곁에 묻고는, 세 자리 텃밭농사를 포기하고는 처자식이 사는 서울로 올라왔으니 내 텃발은 오죽이나 잡목과 잡초가 우거졌으랴.
수백 그루의 과일나무, 가꾸다가 그만 둔 정원수는 제멋대로 키를 늘리고 가지를 아무렇게나 마구 뻗어가고 있었다. 키 작은 화초들은 억새, 환삼덩쿨, 산딸기 가시덩쿨과 같은 억센 잡초로 뒤엉클어졌다가는 햇볕 부족, 영양 보족으로 자꾸만 죽어서 사라졌다.
누나는 밤을 얼마 줍지를 않았다고 문자 보냈다.
추석 지낸 뒤에 남동생인 내가 혹시나 시골에 내려올까 싶어서 남겼단다.
나. 언제 시골로 내려갈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10월이 거의 끝날 무렵에나 내려갈 생각이다.
아쉽게도 무화과는 다 익어서 땅바닥으로 쳐졌을 것이고, 벌레 먹은 밤송이도 숱하게 땅 아래로 떨어져서 들쥐나 파 먹을 테고, 늙은 호박도 썩어서 문들어졌을 게다. 올해 호박 모종 200포기를 심었는데도 서울에서만 오래 머문 탓으로 호박모종은 잡초인 강아지풀, 바랭이풀, 돼지감자 등 키 큰 잡풀에 치여서 사그라져 죽었을 게다. 누나는 어제 애호박이 별로 눈에 띄이지 않았고 문자 메세지 보냈기에 나는 내 농작물 상황을 미리 짐작했다. 철 지난 방울토마토도 다 죽었을 터이고, 올해 늦여름에 잦은 비로 감도 피해을 많이 입었고, 벌레에 먹혀서 물렁감이 되어 땅바닥에 철부덕 떨어졌을 게다.
아무도 주워가는 사람이 없기에 은행알은 마당, 마을안길 바닥에 떨어져 냄새나 피울 게다. 마을안길 위에 덜어진 은행알은 지나가는 차 바퀴에 으깨어져서 역한 냄새를 더욱 많이 피울 게다.
텅 빈 시골집, 친정집에서 누나는 무엇을 느꼈을까.
시골집 함석집에서 조금만 걸으면 닿은 서냉댕이 뒷산 아비 어미 무덤에도 들렀을까?
지난해에 집단 이주한 무덤들이 더욱 쓸쓸히 보였을 게다.
친정에 갔어도 누나의 자식 자손들은 자동차 안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대전으로 되돌아 가자고 크랙션을 빵빵 거렸단다.
지난 9월 중순경.
나, 당숙네, 사촌네들 남정네들이 모여서, 예초기를 등에 짊어진 늙은 일꾼들을 사서 산소 풀을 깎았기에 그나마 덜 쓸쓸했을 게다. 풀 깎는 일꾼이란 타동네의 여든 살 쯤의 노인네들이라니... 시골에는 품 팔러 다닐만한 사람조차도 드물었다.
이제는 아쉬움만 남는 고향이다.
모든 것이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한가위 추석 다음날의 모습이었다.
모든 것은 변한다.
세월도 세상이치도, 나도...
하루의 일기를 종합하여 줄인다.
종가 종손인 나도 서울에서 내 자식들과 외국인 사위와 함께 어울여서 차례를 지냈다.
무덤이 잔뜩 있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기에 '간장게장'을 사 드린다는 작은사위의 차를 타고는 남양주로 내달았다.
예전, 다리가 성성할 때에는 남양주의 적갑산(566m), 예봉산(683.2m), 예빈산(589m), 운길산(610m) 등으로 산행했다. 아쉽게도 퇴직한 뒤 시골로 내려간 뒤에는 이 지역 1일 코스의 등산도 접었다.
어제 차창 너머로 바라보는 산들, 한강 남쪽인 검단산도 무척이나 높게만 보였다.
또 등산화 끈을 졸라매고는 후적후적 산골로 들어서고 싶다. 서해안 촌늙은이가 무릎과 다리 아픈 것도 모르는 양.
2017. 10. 6.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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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추석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또한 나이가 들어가니 저도 부모님 생각 보다는
제옆에 있는 아이들의 건강이 더 우선시 되네요
설, 추석 명절이 자꾸만 변화하고, 진화하겠지요.
명절이라는 것도 빛깔이 퇴색하고요. 그냥 개인들만 남겠지요.
한 울타리였던 연대가 풀어져 이기적인 개인만 남겠지요.
어쩌면 그게 합리적일 수도 있고, 지혜롭기도 하겠지요.
부모님들은 극도로 노쇠하지 않다면 나름대로 생활하시겠지요.
저는 이제는 모셔야 할 부모도 없고,자식들은 다 커서... 오로지 나와 아내의 건강만 신경써야 할 세월이네요.
일상으로 돌아가고픈 요즘입니다.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