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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 - 志高 ‘뜻을 높게 !’] …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 1 - 18 回(끝) · 11-09-15 ~ 11-14
창간기획 - '뜻을 높게 !' ...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1-18回 |
[ 志高く· ‘뜻을 높게 !’ ] … ‘일본 IT 신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
| 손정의 회장이 본 연재를 기념해 직접 써 보내온 좌우명 “뜻을 높게 (志 高く·고코로자시 타카쿠)!”. | |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도전 40년 ‘뜻을 높게!’ 삶과 경영 연재
‘일본 IT 신화’, 손정의(孫正義 · 54) 소프트뱅크 회장은 재일동포 3세다. UC버클리대학 경제학 학사. 現 소프트뱅크 대표이사 회장. 지난해 말 기준으로 일본 4위 부자. 연매출 3조 엔(약 43조원)의 아시아 대표 정보통신기술(ICT) 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는 일본에서 ‘ICT 업계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로 불린다. 료마(龍馬)는 메이지(明治) 유신의 초석을 놓은 일본 근대화의 영웅이자 손 회장의 롤모델이다. 손 회장은 "내 거대한 꿈과 무모한 도전은 모두 그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전했다. 본지는 손 회장의 성공 스토리를 연재한다. 그는 이를 기념해 직접 쓴 좌우명(志高く)을 보내왔다. ‘뜻(志)을 높게!’라는 의미다. ‘손정의 시리즈’ 마치며 … 도쿄 소프트뱅크 회장실서 만나보니
| | 손정의 회장이 자신의 집무실을 언론에 이례적으로 공개했다. 손 회장의 뒤로 사카모토 료마의 사진이 보인다. | | | 초고층빌딩이 운집한 일본 도쿄 남부의 히가시신바시(東新橋). 그중 심장부 격인 시오도메(汐留) 시티센터에 소프트 뱅크 본사가 있다. 지난달 28일 26층에 있는 손정의(54) 회장 집무실을 찾았다. 일본 1위 부자(올 초 ‘포브스’ 집계)를 만나러 가는 것치곤 절차가 간단했다. 신분증을 맡기고 통행증을 받은 것으로 끝. 26층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는 몇몇 사람 중 눈에 익은 인물이 있었다. 소탈한 웃음을 지으며 손님들을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배웅하러 나온 이, 손 회장이었다.
잠시 뒤 사실상 그의 집무실인, 30여 명은 들어갈 법한 대회의실에서 손 회장과 마주했다. 장식이라곤 없는 방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 손 회장 자리 바로 뒷벽을 온통 차지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전신사진이었다. 손 회장은 올 9월부터 지난주까지 본지에 연재한 ‘손정의 회장의 삶과 경영’ 을 통해 “료마는 내 인생의 영웅이자 롤 모델” 임을 거듭 고백했다. 그는 그렇게 료마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하루 5~10개의 회의를 소화한다. 점심도 저녁도 도시락. 간혹 귀한 손님이 오면 전속 출장요리사가 사무실을 찾아 직접 요리를 낸다고 했다.
손 회장은 “그간 한국 정보기술(IT) 업계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아 왔다. 늘 받기만 했는데 중앙일보 연재 덕에 나 또한 (한국인들에게) 뭔가 줄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자신의 삶과 생각을 처음으로 정확히 전달할 수 있었고, 덕분에 비로소 한국과 상호자극을 주고받는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게도 없는 사진을 찾아내고, 잊다시피 한 에피소드들까지 끄집어내 놀라웠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연재가 매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에피소드로 이어질 수 있었던 건 그의 삶 자체가 위기와 반전, 실패와 재기로 점철된 한 편의 대하드라마이기 때문이다.
19살 적 ‘50년 인생계획’을 세운 그는 매번 ‘미쳤다’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에 뛰어들었다. 26세, 중증 간염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자 절망하는 대신 책 4000권을 읽었다. 손자병법을 원용한 ‘제곱병법’을 창안했다. ‘일본에서 온 거품남’이란 비아냥을 무릅쓰고 ‘야후’ 대주주가 됐다. “망해도 좋다”는 각오로 일본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시작했다. 일본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을 통해 소프트뱅크 모바일을 설립했고, 5년 만에 가입자 수를 두 배로 늘리는 ‘기적’도 창출했다.
- 중앙일보 도쿄=이나리 기자 2011.11.14 18 · 끝. ‘내 기업만 잘 꾸린다? 그것만으론 안 되는 일도 있다’ |
| 대지진 발생 11일 뒤인 3월 22일 후쿠오카 원자력발전소 사고 대피소에서 이재민들과 대화 중인 손정의 회장. 손회장은 이날 높은 방사능 수치에도 불구하고 이재민들과 고통을 함께하려 마스크 없이 현장을 누볐다. 상황의심각성을 절감한 그는 곧바로 주변 지방자치단체장들을 찾아가 “식대, 통신료, 일자리를 책임지겠으니 이재민들에게 주거지를 제공해 달라”고 설득했다. [소프트뱅크 제공] | |
18·끝 “내 기업만 잘 꾸린다? 그것만으론 안 되는 일도 있다”
쓰나미가 바꾼 내 인생관 … 100억 엔 + 은퇴 때까지 월급 다 기부
올 3월 11일 오후 2시48분. 일본열도에 사는 모든 이의 삶을 뿌리째 흔든 대재난이 일어났다. 규모 9.0의 강진으로 후쿠시마를 비롯한 일본 북동부가 쑥대밭이 됐다. 정부는 ‘일본 관측 사상 최대’라고 했다. TV 화면으로 본 거대한 해일, 성냥갑처럼 쓸려가는 마을의 참상은 충격 그 자체였다. 더 무서운 일은 그 다음 일어났다. 원자력발전소 피해로 막대한 방사선이 유출된 것이다. 공포, 혼란, 무기력, 불안. 나는 가슴을 쳤다.
“내가 죄인이다!”
누가 일본의 대기와 바다를 오염시켰는가. 나 또한 그런 범법자 중 한 명 아닌가. 전 세계에 미안했다. 젊은이들이 걱정돼 견디기 힘들었다. TV에선 가족을 모두 잃은 92세 할머니가 눈물을 쏟고 있었다. 나도 울었다. 대지진은 내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꿨다. 삶은 뭔가, 회사란 뭔가. 내가 살아가는 보람이란 과연 무엇인가. 정보기술 혁명으로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 하지만 이 역시 에너지 없인 불가능하다. 원전에 기대지 않는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 내 기업만 잘 꾸려간다고 될 일이 아니다. 깊은 고민 끝에, 나는 행동하기로 했다. 돈, 시간, 열정 모두 아끼지 않기로 했다.
세상을 바꾸는 일에 동참하기로 한 순간 내 주요 소통도구는 트위터가 됐다. 직원뿐 아니라 일본 국민 모두에게 알려야 할 일들이 잔뜩 있었다. 공포에 질려 걱정만 할 게 아니라 누군가 판단하고 움직여야 했다. 지진 당일, 그래서 난 이런 트윗부터 날렸다. “오늘부터 일주일간 소프트뱅크 가입자의 문자 서비스는 모두 무료입니다.” 다음날엔 “16일부터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모금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그대로 실행했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매일 ‘네온사인 자제’ ‘구호식품 전달’ ‘자원봉사자에게 무제한 사용 가능한 휴대전화 지급’ 같은 진행 상황을 트위터로 알렸다. 기업인으로서, 이동통신 사업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하고 싶었다. 동분서주했지만 마음은 갈수록 지옥이었다.
▲ 총리보다 먼저 현장으로 달려가다
| | 손정의 회장이 9월 20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 자연에너지재단’ 설립 기념식에서 사진 촬영에 응하고 있다. 그의 뒤로 재단 로고가 보인다 | | | 미야기현 해변에 시신 수백 구가 방치돼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날, 트위터에 “나는 겁쟁이”임을 고백했다. 목숨 걸고 수습에 나선 이들에게 면목이 없었다. 한편으론 정부에 몹시 화가 났다. 당장 후쿠시마로 달려갔어야 할 총리는 “날씨가 나빠 헬기를 못 띄운다”며 도쿄에서 미적대고 있었다. 원전 운영사인 도쿄전력 사장은 “두통이 심하다” 며 출근도 안 했단다. 내가 아는 한 올바른 문제 해결의 첫걸음은 언제나 ‘현장’ 이다. 나라도 가봐야 했다.
지진 발생 11일 만인 3월 22일, 이재민들이 모여 있는 후쿠시마현 다마라시의 체육관으로 차를 달렸다. 밀도 높은 전문가용 마스크로 단단히 무장하고 휴대용 방사능 측정기도 챙겼다. 도쿄에서 2시간20분. 현장에 다가갈수록 방사능 측정기의 경고음이 잦아졌다. 대피소에 다다랐을 즈음엔 아예 쉴 틈 없이 삑삑거려 마음이 몹시 불안했다. 차 안에서 5분 정도 고민했다. 이윽고 난 마스크를 벗어던진 뒤 대피소로 들어갔다. 거기 있는 사람 대부분이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0여 명의 주민이 체육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대피소엔 방사능 측정기도 없었다. 구호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담요·의약품은 물론 물과 음식물마저 부족했다. 나는 체육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주민들과 대화를 나눴다. 어르신들의 손을 꼭 잡고 “얼른 더 먼 곳으로 피하시라”고 했다. 주민들은 한숨짓고 눈물을 흘릴 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정부가 명확한 피난 지침이나 구호대책을 내놓지 않은 탓이었다. 세계 3위 경제대국에서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피가 끓어올랐다.
▲ 놀라운 추진력 · 실행력 “손정의를 총리로”
그날로 당장 주변 지방자치단체장들을 차례차례 방문했다. 피난민들이 머물 거처를 마련해 달라, 집단 이주 비용과 식대, 이재민 일자리는 소프트뱅크가 1년간 보증하겠다고 설득했다. 원전이 향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바른 선례를 만들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는 이동통신사업자다. 사고 지역 기지국이 붕괴되면서 수많은 휴대전화가 무용지물이 됐다. 통신만 이어졌어도 살 수 있는 생명이 있었을 게다. 난 큰 책임감과 그 이상의 무력감을 통절했다. 이에 앞으로 소프트뱅크를 통해 출시하는 대부분의 디지털 기기엔 지진속보 기능을 탑재하기로 했다. 스마트폰 화상통화를 통한 심리상담을 시작했다. 효율적 복구 · 지원을 위한 포털 사이트도 서둘러 구축 중이다. 4월 3일에는 피해 복구를 위해 100억 엔(1430억원)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언론은 “일본 개인 기부 사상 최고액” 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더해 올해부터 은퇴 때까지 최고경영자(CEO)로서 받는 보수 전액도 기부하기로 했다. 내 연간 급여는 2억 엔 안팎이다. 소프트뱅크 기업 차원에서도 10억 엔을 따로 내놓았다.
이런 내 활동에 대해 “결국 소프트뱅크를 홍보하려는 것” “일개 기업인이 과도하게 나선다” 는 식의 비난 또한 없지 않았다. 실제 일본 재계는 정부 정책에 반기를 드는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지지와 격려를 보내주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트위터엔 “고맙다” “덕분에 용기를 얻었다” “나도 동참하겠다” 는 댓글이 이어졌다. “손정의를 총리로!” 라는 글도 간혹 눈에 띄었다. 정부의 우왕좌왕 느린 대응에 실망한 탓인 듯했다. 정부도 뒤늦게나마 내 뜻에 화답했다. 도호쿠 지역 지방선거를 연기하고 사고지역 고아 현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 “경제인 이전에 생명 생각하는 사람 돼야”
급박한 초기 대응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난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과거 나도 원전 건설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더 이상 필요 없다. 경제성 또한 자연에너지보다 딱히 나을 게 없다. 환경보호는 물론이다. 원전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내 생각은 확고해졌다. 수명이 다한 원자로는 멈춰야 한다. 태양열 · 풍열 · 지열 · 바이오 에너지로 새로운 일본을 건설해야 한다.
주장만 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나는 우선 10억 엔을 출자해 자연에너지 협의회를 설립했다. 일본 47개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34개 현 지사들을 설득해 이 재단에 동참케 했다. 4월에는 동일본지역에 태양광산업 전문단지인 ‘솔라벨트’를 조성해 무상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지진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역할도 할 것이다. 약 80억 엔을 들여 일본 전역에 10개의 대규모 태양광 발전소를 건설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자연에너지 개발을 위한 이 모든 사업은 애초 내놓기로 한 100억 엔 외에 추가 기부를 통해 추진할 계획이다.
지진 발생 한 달쯤 뒤 난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국가가 어려울 때 경제인이기 전에 생명을 생각하는 인물이 되고 싶다. 내 시간의 30%를 이 국난을 위해 쓰고 있다. 지금은 평상시보다 일하는 시간을 1.5배 늘렸다.” 며칠 뒤엔 이렇게도 적었다. “원전 사고라는 국난이 아무 일 없이 끝나 ‘당신이 너무 소란스러웠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면 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기꺼이 굴욕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내 삶은 열일곱에 단신 미국 유학을 결심했던 그 순간부터 지진과 해일, 폭풍의 연속이었다. 굴욕과 실패 또한 없지 않았으나 어떻게든 다시 일어섰다. 난 인간의 의지를 믿는다. 뜻 높이 세운 청춘의 힘을 믿고, 타인을 위해 몸 바치는 선의와 열정을 믿는다. 내 그런 진심이 중앙일보와 함께 한 이 프로젝트를 통해 독자 여러분께도 충분히 전달되었기를 바란다. -了-
- 중앙일보 [창간기획 - 志高く ‘뜻을 높게 !’] 정리=이나리 기자 | 2011.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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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60대 목표 '회사 물려주기' 이미 시작 |
|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 홈페이지(http://www.softbank.co.jp/academia)에 게시된 입교생 모집 광고. 소프트뱅크 그룹의 후계자 양성을 위해 개원한 아카데미아엔 직원뿐 아니라 누구라도 지원 가능하다. 국적·성별은 물론 소속 조직도 따지지 않는다. 이미 여러 명의 경쟁사 직원, 외국인들이 수업을 듣고 있다. 손정의 회장의 직강은 종종 인터넷 개인화 방송 서비스인 ‘유스트림’을 통해 온라인 생중계된다. | |
17. 60대 목표 ‘회사 물려주기’ 이미 시작
손정의 후계자 찾기 … 젊다면 보너스 100억 엔쯤 요구할 배포 있어야
지난해 6월 25일 제30회 정기 주주총회 자리에서 ‘소프트뱅크 신(新) 30년 비전’을 발표했다. 예상대로 이런저런 의문과 비아냥이 쏟아졌다. 요지는 “30년 뒤 세계 톱10 기업이 되겠다, 계열사를 5000개로 늘리겠다면서 왜 구체적인 실행계획은 없느냐”는 거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실은 그런 질문이 외려 좀 답답하게 여겨졌다. 30년 비전을 통해 나는 소프트뱅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제시했다. 우리 본업은 마이크로칩 제조도, 소프트웨어 판매도 아니다. 정보혁명을 추진하는 것이다. 미래에 도달해야 할 이미지도 확실히 그려 놨다. 그를 위한 전술, 즉 구체적 방법론은 시대와 더불어 변하며 도구도 달라진다. 사업상 라이벌도 현재와는 다를 것이라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니 방법론이란 건 큰 원칙 정도만 제시해 두면 된다. 물론 확실히 준비해야 할 것도 있다. 새 시대에 맞는 이른바 ‘웹(Web)형 조직’ 이다. 구성체들이 자율·분산·협조의 원칙에 따라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이다. 각 구성체는 적재적소에서 자기 역할을 하며 타 조직들과 연대한다. 특정 브랜드 · 기술 · 사업모델에 매이지 않는 ‘멀티형 조직’ 이기도 하다. 이런 구상의 핵심에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 가 있다.
30년 비전을 발표한 한 달 뒤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를 개원했다.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 를 본뜬 이 학교의 제1 목표는 ‘손정의 2.0’을 만드는 것이다. 나 대신 소프트뱅크를 이끌어갈 차세대 최고경영자(CEO)를 배출하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열아홉 살 때부터 계획한 일이다. ‘인생 50년 계획’ 중 60대의 목표가 바로 ‘다음 세대에 사업을 물려준다’ 는 거였다.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돈이나 명예보다 사람을 남기고 싶다. 누군가를 통해 내 뜻을 남기고 싶다’ 는 생각을 했었다. 내 나이 올해 쉰 넷, 35년을 숙성시킨 목표를 이루려면 이제쯤엔 발동을 걸어야 한다. 그런 비상한 각오로 문을 연 것이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다.
▲ ‘소프트뱅크 DNA’는 피보다 진하다
내겐 두 딸이 있다. 모두 맞벌이 주부다. 성실한 배우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 사랑하는 딸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준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인류 역사상 300년 이상 존속한 국가는 의외로 드물다. 동로마제국, 중국의 청나라를 포함해 11개국 정도다. 이들은 하나같이 장자 상속을 포기했다. 능력과 상관없이 큰아들이라, 혹은 내 핏줄이란 이유로 후계자로 삼는 건 매우 위험하다.
그렇다고 내가 ‘오너십’을 가벼이 여기는 건 아니다. 대기업 샐러리맨 사장의 임기는 기껏해야 4~5년이다. 이래서야 자기 임기 동안 책임질 수 있는 정도의 계획밖에 세우지 않는다. 큰 시야로 사업을 펼 수도 없다. 대업을 이루려면 역시 20~30년의 시간 축으로 생각해야 한다.
▲ 회장보다 ‘교장 선생님’으로 남고 싶어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는 바로 그런 큰 스케일로 미래를 그려갈 후계자를 기르는 곳이다. 무슨 사업부장 같은 리더를 키우기 위한, 일반 회사에서 시행 하는 사원 교육 프로그램 같은 것이 아니다. 정원은 일단 300명. 그중 200명은 소프트뱅크 그룹 내에서, 나머지 100명은 외부에서 선발했다. 트위터를 통해서도 신청을 받았다. 무려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패기 만만한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개중엔 우리 경쟁사 직원도 있고 외국인도 있다. 후계자가 꼭 사내에서 나올 필요는 없다. 30년 뒤 소프트뱅크를 지금의 100배 규모로 키우려면 보통의 생각으론 불가능하다. 밖에 큰 인물이 있다면 당연히 데려와야 한다.
이들은 말 그대로 ‘통치자가 되기 위한 실전 교육’ 을 받는다. 수강생 각자는 ‘내가 소프트뱅크 CEO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항상 생각하도록 훈련받는다. 매주 수요일 오후 5시부터 4~5시간 진행하는 교육은 힘 닿는 한 내가 직접 수행한다. 말하자면 내가 교장인 셈이다. 사실 교장 선생님이 되는 건 내 오랜 꿈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의 교장으로 죽고 싶다. ‘사장’이나 ‘회장’이라 불리며 죽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수강생의 긴장도는 상당하다. 6개월마다 한 번씩 프레젠테이션 경연을 한다. 일종의 ‘물갈이 전쟁’이다. 소프트뱅크 CEO로서 사업 전략과 성장 전략, 투자 전략을 공개한다. 수강생들이 직접 채점한다. 이를 통해 하위 10%를 솎아낸다. 빈자리는 다시 새 수강생으로 채운다. 밀려난 사람이라도 원하면 언제든 재도전할 수 있다.
▲ 소프트뱅크, 웹형 조직으로 거듭나야
이 학교에 대해 내가 그리는 이미지는 ‘도장(道場)’이다. 검도에서 되받아치기를 하듯 그렇게 치열한 경쟁을 통해 강한 미래 경영자로 거듭난다. 물론 내가 사범이다. 전성기에 접어든 검도 선수의 근육은 점차 약해진다. 하지만 경험은 그대로 남는다. 그러니까 젊은 검도 선수들의 솜씨를 보며 ‘근육이 좋군’ 하고 읊조리는 위치에 서는 거다. 멋지지 않나.
물론 내 후임이 될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렇더라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후보군은 여러 명 둘 생각이다. 그 외 인재들도 모두 소중하다. 소프트뱅크가 진정한 웹형 조직으로 자리 잡으려면 각 소조직의 리더가 될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들 또한 나와 소프트뱅크의 DNA를 품고 있기를 희망한다. 30년 뒤 소프트뱅크 5000개 자회사의 CEO 중 상당수는 바로 여기서 탄생하지 않을까.
참고로 내 후계자, 소프트뱅크그룹의 CEO가 될 사람에게는 스톡옵션으로 100억 엔 정도를 줄 생각이다. 그러니 지금 당신이 20대, 30대 젊은이라면 배포를 크게 가졌으면 한다. ‘보너스로 한 100억 엔(약 1430억원) 정도 받아볼까?’ 하는 정도가 딱 좋다.
◆ 손정의가 생각하는 ‘기업 지배권’ = 손정의 회장은 세계적인 인수합병(M&A) 전문가다. 이런 그가 기업 지배권 확보에 집착하지 않는 건 뜻밖의 일이다. 손 회장은 “흔히 기업을 인수할 때 소유 지분을 51%로 하니 마니 하는 얘기들을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51%를 가지면 본업이고 그 이하면 본업이 아닌 건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지배권에 집착하는 건 일방적·이기적 판단이며 상하관계를 고집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보면) ‘머릿속이 봉건사회에서 못 빠져나온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소유 지분이 50% 이하라도 파트너십으로 맺어진 조직이라면 문제 없다는 것. 요컨대 “내 안에는 지배권 운운하는 정의 따윈 아예 없다”는 게 그의 공언이다.
◆ 아카데메이아(Akademeia) =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기원전 400년께 만든 교육기관. 왕 · 장군 같은 차세대 통치자를 육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주로 철학을 가르쳤다. 진정한 통치자가 되려면 수학·과학을 배우는 이상으로 철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구자인 메디치가에서 이를 ‘플라톤 아카데미’란 이름으로 부활시킨 적이 있다. 손정의 회장 또한 이를 본떠 후계자 양성기관인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를 열었다. 고대 아카데메이아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문을 지나지 말라’는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 손 회장은 이에 착안해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의 문에는 ‘디지털 정보혁명에 뜻이 없는 자, 이 문을 지나지 말라’는 문구를 쓰고 싶다”는 말을 했다.
- 중앙일보 [창간기획 - 志高く ‘뜻을 높게 !’] 정리=이나리 기자 | 2011.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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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뒤 시가총액 200조 엔이 허황되다고? 그런 자신감으로 사업해라
| | 6월 20일 11년 만에 공식 방한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서울 장충동 신라 호텔에서 소프트뱅크 신 30년 비전을 주제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고 있다. 손 회장은 이 자리에서 “30년 뒤엔 글로벌 톱10 기업이 되는 것이 목표” 라며 “일본 · 한국 · 중국의 5000개 기업에 투자해 ‘오리엔탈 특급 열차(Oriental Express)’ 를 타고 세계로 뻗어갈 것” 이라고 말했다. [강정현 기자] | | | 200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트위터를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지금에 와선 일본에서 가장 많은, 139만 명의 팔로어를 둔 사람이 됐다. 애초 내가 트위터에 도전한 건 ‘소프트뱅크 신(新) 30년 비전’을 위해서였다. 창립 30주년을 맞는 2010년 6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앞으로 30년, 아니 300년을 이어갈 회사의 비전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그냥저냥 모아놓으려는 게 아니었다. 정확한 예측, 확고한 비전이야말로 성공의 밑바탕이다. 소프트뱅크의 미래를 위해 그걸 확립해놓고 싶었다. 몇몇 전문가의 힘만으론 안 된다. 집단지성이 필요했다. 2만여 직원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의견도 폭넓게 들을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다. 그래서 택한 게 트위터였다. 내가 하는 많은 일이 그렇듯, 이 프로젝트 또한 사내·외에서 심심찮은 조롱과 비판을 받았다. 나는 “비전엔 반드시 30년 뒤 소프트뱅크를 시가총액 얼마짜리 회사로 만들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직원들은 몹시 난처해했다. “그걸 지금 어떻게 예측하느냐”는 거였다. “꼭 숫자를 밝혀야 하나. 안전하게 가자” 는 의견도 많았다. 아니, 난 꼭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의를 다지려면 선언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그보다 조금 더 높은 목표를 공표한다. 물론 아무 말도 안 하면 창피당할 일도 없다. 그게 옳을까? 자신감을 추구하지 않으면 인생은 끝이다.
신30년 비전을 발표하기 석 달 전인 지난해 3월, 소프트뱅크 입사를 앞둔 청년들에게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모든 내용은 트위터와 실시간 인터넷방송 서비스인 ‘유스트림’을 통해 생중계됐다. 그 자리에서 난 소프트뱅크 최고경영자(CEO)로서 추구해 온 목표 두 가지에 대해 말했다. 30년 비전과 관련 깊은 내용이다. 내가 말한 첫째 목표는 ‘세계 1위 모바일 인터넷 기업이 되겠다’, 둘째 목표는 ‘아시아 인터넷 비즈니스 시장을 제패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생각의 바탕엔 산업의 거대한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
▲ 아이폰 · 아이패드로 업무 99.9% 해결
과거 산업혁명이 있었다. 1차 산업혁명은 영국의 경공업, 2차 혁명은 미국의 중공업에 기반한 것이다. 요즘 일본 경제가 빛을 잃어가는 건 지금이 바로 2차 산업혁명의 말기이기 때문이다. 공업혁명의 토대는 풍부한 인력, 값싼 원재료다. 당연히 중국·인도로 중심이 옮겨갈 수밖에 없다. 일본은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 일본이 공업국으로서 옛 명성을 되찾을 가능성을 제로다. 난 청년들에게 “내기를 해도 좋다” 고 했다. 그렇다면 살 길은? 역시 인간의 ‘머리’ 뿐이다. 즉 정보기술(IT) 산업이다. 이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1차 ‘머리 혁명’은 미국에서 일어났다. 2차 혁명은 아시아에서 일어날 것이다. 이 역시 나는 확신한다.
그렇다면 왜 모바일 인터넷일까. 무엇보다 이 시장은 아직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효용과 가치는 엄청나서 크게 발전할 것이 틀림없다. 나는 지난해부터 컴퓨터를 쓰지 않는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만으로 업무의 99.9%를 해결한다. 이 얘기를 하는 건 ‘미련 없이 교체한다’ 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과거에 누구나 썼던 것들, 예를 들면 콤팩트디스크(CD)나 키보드 같은 것에 집착하면 안 된다. 기술의 변화와 함께 비즈니스 모델을 바꿔나가야 한다. 자신부터 달라져야 한다.
▲ 아시아를 제패하는 자, 세계를 제패한다
아시아를 강조하는 건 무엇보다 중국 때문이다. 이 나라 인터넷산업의 성장률은 그야말로 눈부시다. 타오바오는 소프트뱅크와 알리바바닷컴이 각각 지분 50%씩을 보유한 중국의 인터넷거래 업체다. 이 회사의 2년 전 매출은 3조 엔, 지난해엔 무려 5조 엔이었다. 동종 일본 최대 기업 라쿠텐의 6배가 넘는다. 이런 식으로 중국은, 아시아 인터넷 시장은 무섭게 커갈 것이다.
하여튼 이런 얘기를 풀어놓은 당시 강연은 인터넷을 타고 한국·중국·미국·유럽까지 퍼져갔다. 호응도 뜨거웠다. 그만큼 미래를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다는 방증일 게다. 그러니 역시 용기와 신념을 갖고 목표를 향해 달리려면 올바른 비전이 필요하다. 내가 1년 동안이나 전 그룹이 뒤흔들릴 만큼 억세게 30년 비전 수립을 밀어붙인 연유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닥쳤다. “30년 뒤 모습을 그린 영화나 소설도 많지 않은가. 우리가 더 보탤 게 뭐 있느냐” 는 회의론이었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 해법을 제시했다.
첫째, 앞이 잘 안 보일 땐 더 먼 곳을 봐야 하는 법. 300년 뒤부터 그려보자. 둘째, 정확한 예측을 위해선 컴퓨터의 앞날부터 파악해야 한다. 그랬더니 경이로운 결과가 나왔다. 아메바의 뇌세포는 인간 뇌세포의 300억분의 1이다. 300년 뒤 인간과 컴퓨터의 차이는 이보다 더 커질 것이다. 이를 기반 삼아 산업은 물론 의료·교육·재해구조까지 완전히 달라진 미래를 구상했다.
▲ “허풍이라고? 계산법 차이일 뿐”
지난해 6월 25일 30회 정기주총에서 드디어 ‘소프트뱅크 신30년 비전’ 을 발표했다. “크게 감동했다” 는 이도 있 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는 뜬구름 잡기” 란 비난도 만만찮았다. 30년 뒤 시가총액 200조 엔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니, 허풍도 그런 허풍이 없다는 거였다. 그럴 만도 한 게, 200조 엔이면 현재 마이크로소프트의 10배 규모며 30년간 매년 15.5%씩 성장해야 한다. 나는 여유롭게 대꾸했다.
“사기에는 ‘연작(燕雀 · 제비와 참새)이 어찌 홍곡(鴻鵠 ·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리오’ 란 말이 있습니다. 소인은 대인의 뜻을 알지 못한다는 거지요. 요컨대 이건 ‘계산법의 문제’ 입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건방지다고 해도 좋다. 목표 달성은 가능하다. 다만 어설픈 자세로는 안 된다. 다행히 주총에서 발표한 2009년 매출은 훌륭했다. 영업이익 일본 3위. 소프트뱅크는 한 단계 더 도약했다.
◆‘소프트뱅크 신 30년 비전’ 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 2009년 6월 1일, 손정의 회장은 경영전략그룹의 임직원들을 불러 “1년 뒤 있을 제30회 정기 주주총회에서 30년 비전을 공개할 계획” 이라고 밝혔다. 며칠 뒤 29회 정기 주총에선 아예 “내년 이 자리에서 소프트뱅크의 미래 비전을 발표할 것”이라고 공표해 버렸다. 전사적 ‘비전 만들기’가 시작됐다. 30년 뒤의 기술·기업·생활의 변화상을 연구할 비전검토위원회부터 발족했다. 이들은 오다 노부나가의 천하제패 전략부터 뇌과학·생물학·경영학까지 섭렵하며 비전의 밑그림을 그려갔다. 이어 트위터를 이용해 사내·외 의견을 모았다. 다음해엔 각사 선발 멤버로 비전 검토 전담팀을 꾸렸다. 직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각사와 부문별로 프레젠테이션 대회도 열었다. 최고경영자(CEO)들의 비전 발표, 프레젠테이션 대회 결선이 이어졌다. 2010년 6월 25일 제30회 정기 주총에서 손 회장은 드디어 ‘30년 비전’ 을 발표했다. 그 다음 달엔 이틀에 걸쳐 전 사원이 참여하는 ‘넥스트30’ 사원대회까지 열었다. 주총에서 선언한 대로 후계자 양성을 위한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 도 문을 열었다. 신 비전 수립 425일의 대장정이 끝난 것이다.
손정의, 트위터로 ‘비전의 힘’을 말하다
masason 孫正義 사상의 오류로 개인은 인생을 허비하고 국가는 백 년을 허비한다. 2009년 12월 30일 01 : 20
masason 孫正義 비전을 뚜렷이 해야 전략이 보인다. 2009년 12월 30일 10 : 11
masason 孫正義 컴퓨터 3대 요소(CPU, 통신 속도, 메모리 사이즈)에 대한 명확한 예측 없이 미래를 말하지 말라. 2010년 1월 29일 22 : 45
masason 孫正義 예측 없이도 꿈을 이룰 수 있을 만큼 현실은 녹록지 않다. 2010년 1월 29일 23 : 40
masason 孫正義 시대를 좇아서는 안 된다. 읽고, 준비하고, 기다려라. 2010년 4월 9일 23 : 47
- 중앙일보 [창간기획 - 志高く ‘뜻을 높게 !’] 정리=이나리 기자 | 201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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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트위터에서 내 별명은 '야리마쇼 (합시다)’ |
| 손정의 회장이 지난해 5월 18일 일본 도쿄에서 새로 출시할 14종의 휴대전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날 손 회장은 트위터의 공동 창업자 중 한 명인 에번 윌리엄스를 화상 연결해 공개 대화를 했다. 손 회장은 세계에서도 드물게 트위터를 애용하는 최고경영자(CEO)다. 그는 “트위터로 인해 우뇌와 좌뇌에 이어 외뇌(外腦)를 하나 더 얻은 느낌” 이라는 말을 했다. [블룸버그] | |
15. 트위터에서 내 별명은 ‘야리마쇼(やりましょう · 합시다)’
팔로어 139만 명 ‘일본 1위’ … “트위터는 나의 또다른 뇌”
지난 10년, 세상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아마도 휴대전화 사용자의 엄청난 증가일 게다. 약 7억 명에서 50억 명 이상이 됐다. 앞으로 10년간의 변화는 더 클 것이다. 50억 명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쓰게 될 것이다. ‘전화회사’ 의 시대는 가고 ‘모바일 인터넷 회사’ 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내가 사업을 시작한 뜻은 ‘디지털 정보혁명으로 인류를 행복하게’ 이다. 디지털 혁명을 통해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한데 모아 세상을 보다 행복한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이상이다. 2009년 말 나는 거기 딱 맞는 소통도구를 만났다. 트위터다. 그해 12월 24일 나는 첫 트윗을 날렸다. 애초 목적은 2010년 발표할 ‘소프트뱅크 30년 비전’ 을 보다 알차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트위터를 통해 다양한 의견과 지혜를 모으고 싶었다. 한데 기대 이상이었다. ‘30년 뒤 교육은 어떠해야 할까요?’ 란 질문을 던지니 한 시간 만에 230개의 답이 올라왔다.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일은 뭘까요?’ 란 질문엔 하룻밤 새 2500개의 답글이 쏟아졌다. 트위터를 시작한 지 오늘로 672일. 어느새 나는 일본에서 가장 많은 팔로어를 둔 사람이 됐다. 세계 139만2155명이 내 트윗을 받아본다. 언론에 따르면 일본 유력 주간지 발행부수의 두 배를 훌쩍 넘는 숫자란다. 파급력은 훨씬 크다. 소셜 네트워크의 가공할 힘이다.
200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내가 첫 트윗을 날리자 바로 이런 댓글이 올라왔다. ‘당신, 손정의 맞아?’
뒤를 이어 ‘진짜일 리 없다’ ‘누군가 대필하는 게 분명하다’는 트윗이 이어졌다. 나는 답했다.
‘제가 진짜인지 묻는 코멘트가 많습니다만, 진짜입니다. 대필도 부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즐거운 일을 남에게 맡길 수는 없지요. 여러분에게도 실례가 되니까요. 그러니 오자 같은 게 있더라도 용서해 주세요.’
▲ “이 재미있는 걸 왜 대필 시킬까?”
| | 손정의 회장의 트위터. 프로필난에는 손 회장이 직접 작성한 자기 소개 글이 담겨 있다. ‘트위터를 통해서 시공을 초월해 많은 이들과 마음이 통할 수 있다는 데에 감동 받았습니다. 인터넷의 등장이후 처음 느낀 감동입니다 …’ | | | 정말이다. 트위터 활동은 정말 재미있고 신난다. 수많은 이들과 심상한 일상을, 재미있는 얘기를, 때론 심각한 토론을 언제든 맘껏 나눌 수 있다. 기업인치곤 내가 꽤 많은 팔로어를 갖게 된 데에는 아마도 이렇듯 격의 없는 태도가 한 몫 하지 않았나 싶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사극의 방영 시간이 다가오면 이런 트윗을 올리기도 한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30분 뒤면 시작이다!’ 언젠가는 한 극우 성향의 트위터리안이 ‘손정의는 일본에서 나가라!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마!’ 하는 막말을 남겼다. 나는 가볍게 답했다. ‘어디로 가면 돼?’
말조심을 해야 할 상장기업 대표라면 하지 않을 법한 얘기도 그냥 해버린다. 일본 정부의 고질적 낙하산 인사를 비판하고, 창의력을 저해하는 주입식 교육을 공격한다. 지난해 4월에는 통신업계의 ‘상전 중 상전’ 인 하라구치 당시 총무상과 트위터 설전을 벌였다. 정부의 이동통신 정책이 너무 인기영합적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지난해 9월에는 트위터상에서 내가 주장하는 광케이블 정책에 대한 지지 서명운동도 벌였다. 3만4000명의 트위터 서명을 받아 총리실에 제출했다. 디지털교과서 반대론자와 실시간 토론도 벌였다. 올 4월엔 일종의 ‘트위터 단식’ 도 감행했다. 정부가 인터넷업체의 이용자 통신 기록을 영장 없이 요청할 수 있는 법안을 만들었다는 뉴스를 읽고서다. 나는 트위터에 ‘앞으로 3일간 트위터를 하지 않겠다. 오늘 일본 정부가 인터넷 규제 강화 법안을 결정했기 때문’ 이라고 선언했다.
이런 내 활동을 회사 재무담당이나 법무담당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안다. 한 담당자는 ‘회장님이 회사 기밀이나 해선 안 될 소리를 해버릴까 잠이 안 온다’는 말을 했다. 그럼에도 내가 열성적 트위터 활동을 멈추지 않는 건, 이것이야말로 집단 지성과 네트워크의 힘을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이 시대 최상의 미디어란 확신 때문이다.
▲ 업무 보고도 트위터로 하는 직원들
실제로 트위터는 소프트뱅크에 또 한번의 혁신 바람을 일으켰다. 소프트뱅크 홈페이지(http://www.softbank.co.jp/ja) 왼쪽 아래편엔 ‘합시다(やりましょう · 야리마쇼)’라는 제목의 박스가 있다. 이를 클릭해 들어가면 다시 네 개의 항목이 나타난다. 첫째는 ‘전체 의견’, 둘째는 ‘합시다’, 셋째는 ‘검토 중’, 넷째는 ‘(해결)했습니다’ 이다. 트위터리안들이 우리 회사에 대한 불만, 질문, 요청을 담은 글을 올리면 이를 검색해 그에 대한 답변이나 해결 방안, 처리 결과를 알리는 사이트다. 이를 위해 회사의 고객지원 부서에선 ‘소프트뱅크’나 ‘전파’ ‘기지국’ 같은 키워드 수백 개를 정해놓고 트위터를 수시로 검색해 고객의 소리를 수집한다. 이렇게 모은 트윗은 하루 두 차례에 걸쳐 회사 각 부서에 통보된다. 일방적 비난이나 인신공격성 글도 여과 없이 전달한다. 각 부서에선 실제 개선이 필요한 것들, 답변해야 할 것들을 골라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덕분에 회사 전체의 업무 진행 속도가 대단히 빨라졌다. 이젠 직원들조차 내 업무 지시에 대한 보고를 트위터로 할 정도다. 덕분에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야리마쇼’가 됐다.
이런 일도 있었다. 지난해 3월 몇몇 트위터리안이 내게 ‘후지 록페스티벌 현장에선 휴대전화 통화가 안 된다. 소프트뱅크 모바일이 나서서 해결해 주면 어떠냐’ 는 제안을 올렸다. 나는 즉시 ‘공연이 언제 시작되느냐’ 고 물었다. 열흘쯤 뒤엔 ‘오늘까지 대안을 마련하겠다. 기지국의 전파 처리 용량을 늘리겠다’ 고 답했다. 7월 13일 담당 직원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란 보고를 트위터로 했다. 8월 1일, 나는 ‘처리했습니다. 전파 용량 100배 증강, 임무 완료’라는 글을 남겼다. 요즘 소프트뱅크 모바일의 고객관리 업무는 상당 부분 이렇게 진행된다.
▲ 흐려진 마음 다잡게 해준 실시간 소통
무엇보다 기업 경영자로서 트위터를 통해 내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은 고객의 속마음을 헤아리게 됐다는 거다. 지난해 3월, 나는 ‘소프트뱅크 전파 개선 선언’이라는 걸 했다. 소프트뱅크 모바일의 통화 품질을 획기적으로 높이겠다는 내용이었다. 계획을 밝히자 임원들의 반대가 빗발쳤다. “아직 빚도 다 갚지 못했는데 무슨 소리냐”는 거였다. 트위터를 하기 전이었다면 나도 그런 한가한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트위터에 실시간 올라오는 고객 불만을 빤히 보면서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사실 트위터 사용 초기엔 쏟아지는 고객 목소리에 ‘쿵!’ 하고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 가운데 깨달았다. ‘내 마음이 잠시 흐려졌었구나. 진짜 중요한 건 돈이 아닌데.’ 매일 조금씩 늘어가는 팔로어 수를 보면 이런 내 진심이 통한 듯해 감사하고 행복하다.
◆ 트위터(twitter)=블로그의 인터페이스와 미니홈피의 ‘친구맺기’ 기능, 메신저 기능을 한데 엮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2006년 3월 미국의 벤처기업가 잭 도시, 에번 윌리엄스, 비즈 스톤이 공동 개발했다. 트위터란 ‘지저귀다’는 뜻. 하고 싶은 말을 그때그때 짤막하게 올릴 수 있다. 한 번에 쓸 수 있는 글자 수도 최대 140자로 제한돼 있다. 트위터 사용자를 ‘트위터리안’, 올리는 글을 ‘트윗’이라 한다. 특정 글을 다른 사용자에게 퍼뜨리는 것은 ‘리트윗’이다. 상대가 허락하지 않아도 일방적으로 ‘뒤따르는 사람’, 즉 ‘팔로어’로 등록할 수 있다. 웹이 아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접속 가능하다.
- 중앙일보 [창간기획 - 志高く ‘뜻을 높게 !’] 정리=이나리 기자 | 201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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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회사 살 수 있을까' 대신 '협력할 수 있을까' 를 묻다 |
|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사진 내 글자) | |
아이폰 나오기 7개월 전, 잡스 만나 “그 사업 나와 합시다”
2006년 4월 일본 3위 이동통신업체인 보다폰재팬을 인수했다. 1조7500억 엔. 일본 인수합병(M&A) 사상 최고가 거래였다. 나는 이 딜을 1년 이상 치밀하게 준비했다. 2005년 초 보다폰재팬 새 사장으로 빌 모로스가 부임했다. 바로 연락을 취해 사업 제휴를 이슈로 서서히 친분을 쌓았다. 그에게 인수 제안을 할 때도 “회사를 살 수 있을까요?”가 아니라 “우리가 협력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는 훗날 “손 회장의 민첩함과 정중함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말했단다.
소프트뱅크는 이 거래에 그룹 자산의 대부분을 걸었다. 그런 만큼 최고경영자(CEO)가 돼 직접 지휘봉을 잡기로 했다. 그리고 서둘러 애플의 스티브 잡스 CEO를 만났다. 그 무렵 미국 실리콘밸리엔 “애플이 MP3P인 ‘아이팟’ 내장 휴대전화기를 내놓을 것”이란 소문이 조금씩 퍼져가고 있었다. 나는 잡스와 만나 “그 사업을 함께하자” 고 제안했다. 아이폰이 세상에 나오기 7개월 전, 이미 나와 잡스 사이엔 ‘아주 특별한 대화’가 오간 것이다. 그 두 달 뒤 나는 회사 이름을 소프트뱅크 모바일로 바꿨다. 이어 모종의 ‘혁명’을 준비했다.
2006년 10월 일본에 번호이동제가 실시됐다. 자기 전화번호 그대로 가입 이동통신사를 바꿀 수 있는 제도다. 사람들은 “이제 소프트뱅크 모바일은 시장 1, 2위 업체인 NTT도코모와 KDDI에 가입자를 모두 빼앗기게 됐다”고 수군댔다. 난 속으로 ‘그럴 리가…!’ 하고 생각했다. 우리 비밀무기는 일본인들이 이제껏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파격적 할인요금제였다. 나는 여기 ‘화이트 플랜’이란 이름을 붙였다.
▲ ‘폭탄할인제’ 정체된 시장을 뒤흔들다
화이트 플랜의 핵심은 오전 1시부터 저녁9시까지 가입자 간 통화는 몽땅 무료라는 것이다. 2007년 1월 이 요금제를 출시하면서 나는 “경쟁업체들이 요금을 내릴 경우 24시간 안에 추가 할인제를 내놓겠다”고 큰소리쳤다. 업계에선 나를 숫제 상대도 않으려 했다. 그래서야 적자만 쌓일 뿐이라는 거였다. 내 생각은 달랐다. 당시 나는 이미 음성통화만으로는 지속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참이었다. 미래 핵심 수익원은 콘텐트 판매와 데이터 통신이 될 것이었다. 이를 위해선 가입자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또 모든 사업이 그렇듯 이동통신 또한 일정 수 이상의 가입자를 확보해야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었다.
화이트 플랜에 대한 소비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수년간 꼼짝도 않던 가입자수 추이 그래프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번호이동제 와중에서 고객을 잃기는커녕 외려 성장의 전기를 마련했다. 1년 새 전체 가입자 수가 400만 명 가까이 늘었다. 그해 일본 이통시장 순증 가입자의 50%가 소프트뱅크 모바일로 몰렸다. 덕분에 모회사인 소프트뱅크는 2007년 상반기 사상 최대 순익을 기록했다. 언론도, 경쟁사도, 심지어 직원들조차 상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경사는 또 있었다. 소프트뱅크가 33%의 지분을 보유한 중국 인터넷경매업체 알리바바닷컴이 홍콩 증시에 상장한 것이다. 알리바바닷컴에 투자한 돈은 20억 엔, 상장 뒤 33% 지분 평가액은 1조 엔이 넘었다. 당시 주가로 투자 대비 500배 이상의 수익을 거둔 거였다. 나는 전해에 이어 2년 연속으로 포브스 선정 일본 최대 갑부가 됐다. 2007년 5월 내 재산은 6960억 엔. 당시 환율로 약 5조5000억 원이었다.
▲ 잡스와 나, 벚나무 아래서 맺은 우정
그해 10월, 소프트뱅크 모바일의 모든 휴대전화에 야후 검색 버튼이 탑재됐다. 이어 열린 실적 발표회장에서 나는 정식으로 천명했다. “이제 휴대전화는 음성 머신이 아닌 인터넷 머신이 될 겁니다. 인터넷에 강한 소프트뱅크가 이동통신 시장도 장악할 것입니다!”
2008년, 하얗고 귀여운 개 ‘오토상’을 내세운 TV 광고가 대히트 하면서 회사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고객도 크게 늘었다. 사실 이동통신 시장에서 특정 회사 가입자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한국만 해도 SK텔레콤과 KT, LG유플러스의 시장 점유율엔 수년째 큰 변화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소프트뱅크 모바일의 가입자 수는 단 1분기도 정체되거나 뒷걸음질 없이 계속 증가했다. 그 해 6월, 우리는 또 하나의 ‘혁신 폭탄’을 준비했다. 애플 아이폰이었다.
내가 스티브 잡스와 서로 마음 터놓는 사이가 된 건 1980년대 후반의 일이다. 잡스는 85년 자신이 창업한 애플에서 쫓겨났다. 이듬해 그는 심기일전해 PC제조사 넥스트를 설립하고 3D그래픽업체 픽사까지 인수했지만 마음의 상처까지 모두 아문 건 아니었다. 그 무렵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오라클 CEO 래리 앨리슨의 집에서 그와 만났다. 우리 셋은 벚꽃 만개한 뜰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앨리슨은 잡스를 가리키며 “이러다 애플이 도산할 것 같다. 부활할 방법은 단 하나, 저 천재를 귀환시키는 것” 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삶과 비즈니스, 상실과 상처, 목표와 열정에 대한 대화와 공감 속에서 우리는 친구가 되어갔다.
▲ 아이폰은 내 꿈과 비전의 메신저
앞서 밝혔듯 나와 잡스는 아이폰 출시 훨씬 전부터 ‘콘텐트와 휴대전화의 결합’이란 주제에 몰두해 있었다. 2007년 1월 애플의 첫 아이폰이 공개됐다. 난 기필코 그 제품을 우리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보다폰재팬을 인수할 때처럼 치밀하고 끈질긴 공략이 시작됐다. 잡스와의 친분은 기본, 난 우리가 열정과 비전을 공유하는 사이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에 더해 필요한 건 역시 결단. 경쟁사인 NTT도코모는 애플이 통화료 수입의 일부를 요구하자 난색을 표했다. 난 여봐란 듯 흔쾌히 응했다.
아이폰은 그냥 휴대전화가 아니었다. 신세계를 향한 관문이었다. ‘손 안의 PC 세상’이란 내 꿈을 이뤄줄 최고의 파트너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폰 효과는 대단했다. 2008년 6월 아이폰을 출시하자 경쟁사 가입자들이 속속 옮겨왔다. 고객 수만 늘어난 게 아니다. 1인당 사용료도 증가했다. 내가 예상한 대로 사람들이 아이폰을 통해 데이터를 본격 소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9년 상반기, 소프트뱅크는 다시 사상 최대 실적을 갱신했다. 전해 같은 기간에 비해 영업이익은 8%, 순이익은 무려 72%가 증가했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담담히 말했다. “그럭저럭 40대의 마지막 승부도 무사히 끝나 가는군.”
◆ 화이트 플랜 = 소프트뱅크 모바일이 2007년 1월 내놓은 파격적 할인요금제. 기본료(98엔)가 기존의 3분의 1 수준으로, 일부 시간대를 빼고는 가입자 간 통화가 무료다. 6개월 만에 600만 가입자를 돌파하는 빅 히트를 쳤다.
◆ 오토상(おとうさん·사진)=소프트뱅크 모바일의 TV 광고에 등장하는 홋카이도산 개 ‘지로’의 별명. 오토상은 일본어로 ‘아버지’라는 뜻이다. 광고 속 오토상은 말 그대로 한 가정의 가장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아들·딸과 산다. 오토상 외엔 모두 멀쩡한 인간, 그중 아들은 흑인이다. 광고 시리즈 후반부엔 오토상의 새아버지로 흑인 아들보다 젊은 남성이 등장한다. 이 광고는 ‘가족 가입자, 화이트 플랜 요금제 가입자끼리는 통화가 무료’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기획된 것이다. 나이 · 인종은 물론 ‘종족’도 상관없다는 파격적 발상이다. 2008년 처음 선보인 이 광고는 폭발적 화제몰이로 회사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오토상은 소프트뱅크의 상징 캐릭터가 됐다. 그릇부터 쿠션까지, 캐릭터 상품 인기도 대단하다.
- 중앙일보 [창간기획 - 志高く ‘뜻을 높게 !’] 정리=이나리 기자 | 201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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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불평할 시간에 목숨 걸고 덤벼라, 그래야 파문이 일어난다' |
| 손정의(왼쪽) 소프트뱅크 회장이 2005년 초 소프트뱅크 호크스 왕정치 당시 감독(오른쪽), 소속 선수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손 회장은 왕 감독을 부사장으로 승진시켜 구단 운영의 전권을 맡겼다. [소프트뱅크 제공] | |
소프트뱅크를 알려라 … 100억엔 들여 프로야구단 인수 결단
경쟁의 힘은 놀라웠다. 2003년 드디어 일본의 초고속인터넷 요금이 한국보다 싸졌다. ‘작지만 매운 고추’ 소프트뱅크와 일본 최대 통신업체 NTT가 치열하게 겨룬 결과다. 물론 고비도 있었다. 2004년 2월 가입자 정보 425만 건이 유출됐다. 나는 단호히 대응했다. 범인의 협박전화를 받자마자 경찰에 알렸다. 용의자 체포 뒤 피해 규모를 파악하곤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초고속인터넷 사업이 막 본궤도에 오른 참이었다. 임원들은 내가 전면에 나서는 걸 말렸다. 이를 뿌리치고 카메라 앞에 섰다. “보안 시스템이 허술했다. 고객정보 취급 부서가 비정규직 위주로 짜여 있었다”고 곧이곧대로 알렸다. 비난이 쏟아졌지만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 누구도 토 달기 힘든 과감한 대책들을 잇따라 내놨다. 그중엔 고객정보 담당 정규직 3000명 채용 계획도 있었다. 그대로 시행했음은 물론이다.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소프트뱅크의 도전으로 일본에 초고속인터넷 세상이 열린 뒤 나는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러니까 세상이 문제네, 정치가가 잘못이네, 경기가 나쁘네, 그런 푸념 따위 해본들 소용 없다.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불평은 결국 본인의 그릇을 작게 만드는 거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목숨 던질 각오로 덤벼라. 그래야 파문이 일어난다.”
▲ 왕정치 … 소년 시절 우상을 만나다
2004년 12월 나는 소프트뱅크 직원들도 깜짝 놀랄 만한 뉴스를 발표했다. 다이에 호크스 구단을 인수키로 한 것이다. 호크스 구단의 근거지는 후쿠오카. 내가 태어나고 또 처음 사업을 시작한 곳이다. 거기서 보낸 어린 시절 나는 정말 야구를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내겐 하늘 같은 우상이 있었으니 바로 왕정치(王貞治·오 사다하루) 선수였다. 마침 매물로 나왔을 당시 다이에 호크스 감독은 왕정치였다. 그와 함께 팀워크를 맞춰볼 수 있다니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총 100억 엔에 이르는 딜에 뛰어들 순 없는 일이었다. 사업적 필요도 분명했다.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하기 전까지 소프트뱅크는 일반에 널리 알려진 회사가 아니었다. 야후재팬이 일본 사이버 스페이스를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었지만 유명한 건 ‘야후’이지 ‘소프트뱅크’가 아니었다. 초고속인터넷 브랜드를 소프트뱅크BB가 아닌 야후BB로 지은 연유다. 소프트뱅크가 대중과 보다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또한 일본프로야구협회의 새 구단주 영입 심사는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다. 3개월간 기업의 재무상태는 물론 오너의 도덕성, 주요 납품처가 어디인지까지 따진다. 그런 만큼 일본에서 프로야구 구단주가 된다는 건 그만큼 깨끗하고 믿을 만한 기업이란 뜻이다.
▲ “드라마 ‘겨울연가’처럼 운영하겠다”
2004년 11월 30일 구단 인수를 공식 발표하며 나는 드라마 ‘겨울연가’ 얘기를 꺼냈다. 당시 일본에선 한창 한류 바람이 일고 있었다. 그 중심에 겨울연가와 ‘욘사마(연기자 배용준)’가 있었다.
“겨울연가 제작진은 하루 2~4시간밖에 못 자는 강행군 속에서도 인터넷에 올라오는 팬들의 의견을 매회 반영해 스토리를 다듬었다고 합니다. 저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구단을 운영하겠습니다.”
인터넷 시대에 발맞춰 구단과 팬 사이에도 양방향 의견 교환이 실시간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원칙을 밝힌 것이다. 그 바탕엔 ‘야구 팬도 고객’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구단주 회의 내용을 언론에 투명하게 알리겠다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다음 날 ‘스포츠닛폰’ 신문은 이런 논평을 내놨다. ‘욘사마는 수일 전 폭풍처럼 일본에 왔다 곧 돌아갔지만 손사마(손정의)의 개혁은 일본 야구계에 새 바람을 일으킬 게 틀림없다”고.
인수 한 달 뒤 나는 주주총회를 열고 구단 이름을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바꿨다. 이어 왕정치 감독을 부사장 겸 제너럴 매니저로 승격시켰다. 현역 프로야구 감독으론 일본에서 두 번째로 임원이 된 것이다. 나는 그에게 “오 간도쿠(왕 감독), 뭐든 당신이 다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구단 운영의 전권을 넘긴 것이다. 2006년 왕 감독이 위암 투병을 시작했을 때도 나는 흔들림 없는 지지를 보냈다. 소프트뱅크 직원들도 자발적으로 나서 쾌유를 비는 종이학을 접어 전달했다. 위의 90%를 잘라내고도 그는 초인처럼 다시 일어섰다. 2008년 퇴임할 때까지 팀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대만 국적으로 온갖 차별과 역경을 딛고 일본 야구의 살아있는 신이 된 왕정치. 내가 그에게 품은 마음은 단지 존경심이 아닌 어떤 동류의식일지 모른다. 왕 감독의 피와 땀이 스민 호크스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일본 퍼시픽리그에서 우승했다. 후쿠오카인의 구단 사랑 또한 대단하다. 500만 주민 중 절반이 소프트뱅크 모바일 가입자일 정도다. 소프트뱅크 모바일은 2006년 설립한 이동통신기업이다. 이제 일본 역사상 최대 빅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다.
▲ ‘꼴찌’ 이통사, 일본 역사상 최대액 인수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인수하던 해 나는 마흔일곱 살이었다. 곧 해가 바뀌었고 50대가 2년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또 한 번의 결전을 준비했다. 일본 ‘꼴찌’ 이동통신사인 보다폰재팬을 인수하기로 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이동성이다.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어야 한다. 이동통신은 피할 수 없는 승부처였다.
2005년 말 초고속인터넷 가입자가 500만 명을 넘어서자 나는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이번에도 단번에 전 재산을 던져야 할까 숙고했다. 답은 “그렇다”였다. 당시 소프트뱅크 시가총액은 2조 엔으로 회복돼 있었다. 야후BB 시작 때 2000만 엔까지 떨어졌던 것이 5년여 만에 열 배로 불어난 것이다. 그 모든 역량을 쏟아붓기로 했다. 11개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2006년 3월 인수를 마무리 지었다. 가격은 1조7500억 엔. 당시까지 일본 역사상 최고액의 인수합병 프로젝트였다. 여기저기서 “손정의가 이번엔 정말 미쳤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렇든 말든 나는 직접 새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를 맡기로 했다. 다시 백척간두의 사투가 시작됐다.
◆ 왕정치 (王貞治)(dot-com bubble) = 일본 이름 ‘오 사다하루’, 중국 이름 ‘왕전즈’. 대만 국적을 가진 일본 최고의 홈런왕이다. 1940년 중국계 부친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이란성 쌍둥이 중 동생으로 태어났다. 쌍둥이 누나는 출생 1년3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도 몸이 약해 세 살 때까진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학교 입학 뒤 야구에 놀라운 재능을 보여, 몸담았던 와세다실업고를 고시엔(선발 고교 야구) 정상에 올려놓았다. 최고 몸값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으나 처음 3년간은 성적이 나빠 ‘왕은 왕인데 3진왕’이란 비아냥에 시달려야 했다. 초인적 노력으로 슬럼프를 극복, 통산 홈런 868개라는 대기록을 세운다. 이로 인해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국민영예상의 첫 수상자가 된다. 이후 지도자로 변신, 요미우리 구단에 이어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으로서 명장의 반열에 오른다. 소프트뱅크가 호크스를 인수한 뒤엔 손정의 회장의 절대적 신임하에 구단 전체의 경영까지 책임진다. 2006년 위암 발병으로 2008년 결국 현역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여전히 소프트뱅크 호크스 이사회 회장이자 일본 야구의 ‘살아있는 전설’로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
- 중앙일보 [창간기획 - 志高く ‘뜻을 높게 !’] 정리=이나리 기자 | 201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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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내가 3시에 보자고 하면 그건 새벽일 수도 오후일 수도 있었다' |
| 손정의 회장이 14일 일본 도쿄 시부야 거리에 있는 소프트뱅크모바일 매장에서 애플 아이폰4S를 선보이고 있다. 손 회장은 초고속인터넷 사업 성공의 여세를 몰아 2006년 보다폰재팬을 인수했다. [도쿄 로이터=연합뉴스] | |
오른팔의 배신 … 초고속인터넷 올인하자, 믿었던 기타오 회사 살림 걱정하며 떠나
2001년 6월 19일, 드디어 일본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시작했다. 일본 최대 통신업체 NTT보다 훨씬 빠른 서비스를, 그 8분의 1 요금에 제공한다고 선언했다. 야심 찬 출발이었지만 곳곳이 지뢰밭이었다. 회선과 기지국을 빌려 줘야 할 NTT는 느리고 비협조적이었다. 가입 과정은 복잡했고 고객들의 인식도 낮았다. 서비스 체계 또한 손볼 곳 투성이였다. 무엇보다 이 모두를 개선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돈이 없었다. 융자를 얻고 싶었지만 은행들이 상대해 주지 않았다. 증자도 여의치 않았다. 나는 가진 걸 팔기로 했다. 전략사업이라 생각해 온 것들까지 내놨다. 미국 야후 본사 주식도 넘겨 버렸다. 야후BB(초고속인터넷 사업을 위해 설립한 야후재팬 자회사)를 살리는 게 소프트뱅크가 살 길이요, 내가 꿈꾸는 디지털 정보혁명에 성큼 다가서는 방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자산매각 과정에서 나는 예기치 못한 고통과 맞닥뜨렸다. 최고재무책임자(CFO)인 기타오 요시타카(北尾吉孝)와 심각한 갈등에 빠진 것이다. 노무라증권 뉴욕지점장 출신인 기타오는 1990년대 초부터 나와 정말 많은 일을 같이 해온 ‘동지’였다. 수많은 인수합병(M&A) 뒤엔 어김없이 기타오와 그가 이끄는 무적의 재무팀이 있었다. 그런 그가 내게 등을 돌린 것이다. 미래가 불확실한 초고속인터넷에 ‘몰빵’ 하느라 회사 재무상태를 심각한 상황 으로 모는 데 대한 반감이었다.
▲ 초고속인터넷 ‘몰빵’ 에 회사 뛰쳐나간 CFO
2002년 결국 기타오는 이사회멤버로서의 권한을 이용해 소프트뱅크 본사 일부분을 뚝 떼어내 독립했다. SBI홀딩스란 회사의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창업자의 오른팔이자 재무책임자가 회사를 떠나다니, 주가는 떨어지고 뒷소문이 난무했다.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나는 서둘러 새 CFO를 물색했다. 후지은행 부사장으로 은퇴한 65세의 가사이 가즈히코(笠井和彦)를 영입했다. 기존 임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령인 데다 평생을 대형 은행에 몸담았다 명예롭게 퇴임한 인물이었다. 그만큼 안정적이고 발도 넓어 기타오가 떠난 후유증을 단기간에 극복할 수 있었다.
사업하는 이에게 재무책임자의 의견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돈 계산만을 앞세우다가는 도약을 위한 혁신과 모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기타오는 다시 없이 탁월한 인물이지만 내가 무턱대고 그의 의견만 따랐다면 오늘의 소프트뱅크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요즘도 가끔 기타오를 만나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신다. 여전히 그의 고견을 고맙게 듣는다. 하지만 판단을 하고 책임을 지고 미래를 여는 건 결국 내 몫이다.
▲ 사장실 버리고 회의실서 하루 19시간 집무
그렇게 돈 마련하랴, NTT로 정부 부처로 뛰어다니랴 새 사업을 시작한 지 6개월이 훌쩍 지나갔다. 2001년 말 지금까지 실적을 체크하는 8시간 마라톤 회의를 진행했다. 나는 절망했다. 서비스가 성공적으로 개통된 사용자는 2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사업 시작 1년 안에 100만 가입자를 모으겠다고 큰소리 친 나였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나는 비서에게 “앞으로 1년간은 그 누구와도 골프 일정을 잡지 마라”고 말했다. 또 "내일부터 내 집무실은 야후BB 추진팀이 있는 4층 회의실이다”고 말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지만 나는 골프광이다. 집 지하에 세계 10대 골프장의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깔아놓은 개인 연습실까지 마련했을 정도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그 연습실을 보고 반한 나머지 시애틀 집에 똑같은 시설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런 내가 1년 동안 골프채를 잡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회의 참석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다음 날부터 나는 정말 손바닥만 한 4층 소회의실에서 집무를 보기 시작했다. 하루 열다섯 시간, 열아홉 시간…. 내가 누군가에게 “3시에 보지”라고 말하면 그건 꼭 오후 3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새벽 3시에도 회의를 소집했고, 필요하면 언제든 밤을 새웠다. 사무실엔 온통 직원들의 땀 냄새, 며칠 동안 목욕을 못한 나의 시큼한 냄새가 가득했다.
▲ 승리로 끝난 ‘오케하자마 전투’
그렇게까지 매달린 이유가 있었다. 나에게 초고속인터넷 사업은 ‘오케하자마(桶狹間) 전투’였다. 일본 전국시대, 오케하자마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단 2000명의 병사로 수만 대군을 물리친 역사적 전투다. 당시 나와 소프트뱅크의 ‘적’은 NTT였다. 규모도, 노하우도, 자금도 비교가 안 되는 회사에 맞서 일본에 진정한 인터넷 시대를 열겠다는 일념으로 싸우고 있었다. 또 우리는 자신이 있었다. NTT는 거인이다. 그래서 무겁고, 느리고, 따져야 할 것도 많다. 우리는 몸이 가볍다. 소수 정예 결사대다. 서로를 동지라 믿고 함께 몸을 던진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듯 죽도록 노력한 결과 정말 11개월 만에 우리는 100만 가입자를 유치했다. 그 사이사이 진행된 강렬한 프로모션들도 효과가 컸다. 지하철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공짜로 가정용 초고속인터넷 셋톱박스를 나눠줬다. 가당치 않게도 “가입 신청 뒤 개설까지 열흘 안에 끝내 드린다”는 ‘10영업일 집중’ 캠페인도 벌였다. ‘규모의 경제’와 혁신의 모습으로 시장과 소비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지려 애썼다.
그렇게 매년 1000억엔 씩 적자를 보는 사업을 4년간 흔들림 없이 진행했다. 경쟁사들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떻게든 소비자들이 야후BB로 가는 걸 막는 데 치중하던 그들이 본격적 서비스 경쟁에 돌입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적은 적이 아니었다. 소프트뱅크와 NTT는 넓은 의미에서 소비자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 함께 노력하는 일종의 ‘친구’가 된 것이다. 2004년 6월 소프트뱅크는 일본텔레콤 인수에 성공했다. 일본텔레콤은 철도선을 따라 개설된 전화 네트워크를 보유한 일본 내 주요 통신사업자다. 덕분에 야후BB의 서비스는 빠르게 안정화돼 갔다. 2005년에는 드디어 흑자 전환이 이루어졌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다.
◆ 이베이와 야후재팬의 8년 전쟁(dot-com bubble) = 소프트뱅크가 초고속인터넷 분야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데엔 야후재팬의 힘이 컸다. 2000년 초 닷컴버블 붕괴와 시장의 불신 속에서도 야후재팬은 성장을 거듭했다. 1999년 8월 시작한 인터넷경매 사업이 주요 동력이 됐다. 손정의 회장은 애초 일본 진출 예정인 세계 최대 인터넷경매 기업 이베이와 조인트벤처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협상이 여의치 않자 이베이가 일본법인이 설립되기 한 달 전 서둘러 경매사업을 시작했다. 이베이재팬이 본격 영업을 시작할 때쯤엔 이미 야후재팬이 시장을 선점한 뒤였다. 초기 야후재팬은 모든 경매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했다. 직원들은 “서버 운영비라도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손 회장은 ‘공짜’를 고집했다. 적자 상황에서도 뚝심을 발휘해 먼저 시장 키우기에 몰두했다. 사업 시작 2년여 뒤에야 조금씩 유료화를 진행했다. 일본 인터넷경매 시장은 이미 야후재팬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이때부턴 이베이재팬이 “수수료 무료!”를 외치며 대대적 반격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베이는 2002년 3월 결국 일본 사이트를 폐쇄하고 철수했다. 2007년 12월, 야후재팬과 이베이는 “새 시장 창출을 위해 제휴한다”는 발표를 했다. 이베이가 일본 시장 진출을 위해 택한 카드는 결국 야후재팬이었다.
- 중앙일보 [창간기획 - 志高く ‘뜻을 높게 !’] 정리=이나리 기자 | 201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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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Life is only one time ... 손정의. 산 정상 3 퍼센트밖에 못 왔다' |
▲ 주일 미국대사와 특별대담
“목표로 했던 산 정상까지 아직 3%밖에 못 온 것 같다. 산은 점점 커지고, 난 아직도 너무나 작은 존재다.”
연매출 3조 엔(약 45조원)의 회사를 이끄는, 지난해 말 기준 일본의 네 번째 부자인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말이다. 15일 ‘시대를 만드는 두 가지 방법’이란 제목의 주일 미국 대사관 주최 특별대담에 초청받은 그는 ‘당신이 목표로 한 산 정상까지 얼마나 왔느냐’는 한 청중의 즉석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주일 미국대사관은 이날 도쿄 아오야마(靑山)의 복합문화공간 ‘스파이럴 가든’ 에서 손 회장과 존 루스 주일 미국대사의 대담장을 만들었다.
사전 인터넷 예약을 통해 방청권을 획득한 250명의 청년들과 기업가들은 손 회장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을 향해 던진 손 회장의 메시지는 명쾌했다. “한 번뿐인 인생을 위해 정열과 꿈을 가져라” “자신만의 큰 영웅 (big hero)을 만들고, 도전할 산(mountain)을 정해라. 그 뒤엔 고민하지 말고 도전하라. 이 산과 저 산 사이를 저울질하는 건 그냥 배회하는 것일 뿐이다”였다. 그의 영웅은 19세기 최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근대화를 이끈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그가 정한 산은 정보통신기술(ICT)이었다. 그는 대담에서 재일동포 3세에 대한 차별에 괴로워하던 16세 때 가족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료마처럼 살겠노라’라며 미국 유학을 결심했던 추억을 떠올렸다.
그러곤 3 · 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활력을 잃은 일본 젊은이들을 향해 “외국으로 빨리 떠나 배워라, 인생의 눈을 떠라” 고 권했다. 해외 유학이 줄고 있는 일본의 현실에 대해 그는 “직업이 정해지면 떠나기가 어렵다. 한국 이나 중국엔 도전정신이 확대되고 있는데 일본 청년들은 조금 움츠러들고 있다. 넓은 세상에 뛰어들라” 고 말했다. 또 “일본에서 태어난 나는 일본을 사랑한다. 그렇지만 그 말이 다른 나라와는 싸운다는 의미는 아니다” 라며 ‘일본을 사랑 하면서도 미국 · 한국 · 중국 모두를 사랑하고 돕는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업가들에게 강조한 그의 키워드는 ‘stay young and hot(젊고 뜨거워야 한다)’ 이었다. “94세 된 내 아버지가 올해 초 100만 달러를 달라고 하더라. 이유를 물었더니 아버지는 ‘돈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인도에다 회사를 차리고 싶다’ 고 하더라. 성장 가능성이 큰 인도에 회사를 차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손 회장은 “아버지의 이런 정신을 존경하고 있다”고 했다.
2시간에 걸친 대담 내내 “꿈을 크게 가지라”고 조언했던 그가 청중을 향해 던진 마지막 한마디는 “인생은 딱 한 번뿐 (Life is only one time)” 이었다.
- 중앙일보 도쿄=서승욱 특파원 | 2011.10.17
| 사업 막혀 “분신하겠다”는 내게 … 공무원 “여기선 하지 말게”
미지의 분야에 신규 투자할 때 작게 시작할까, 아니면 크게 밀어붙여야 할까. 열 중 아홉은 ‘작게 간다’가 답일 것이다. 하지만 한두 번쯤은 큰 승부를 걸어야 한다. 소프트뱅크로 보자면 2001년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시작할 때가 그랬다. 일본 최초로 전국 규모의, 기존보다 5~10배 빠른 서비스를 선뵈는 일이다. 일본 최대 IT기업 NTT의 텃세를 이겨야 한다. 정부 정책도, 네트워크도 미비하다. 경험은 없고 시장도 아직 활성화돼 있지 않다. 누군가는 “그럴수록 반찬 간 보듯 조심스레 가야 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른다. 내 생각은 달랐다. 진입장벽이 높다는 건 그만큼 경쟁자가 적다는 뜻이다. 당장의 시장은 작지만 곧 미래 산업의 핵심 인프라가 될 터이다. 압도적 공세로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 나는 폭풍처럼 몰아쳐 해일처럼 집어삼키기로 했다. 손정의가 아니면, 소프트뱅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리라 마음먹었다.
주가 폭락에도 소프트뱅크 주주들은 ‘일본 최초 초고속인터넷 사업’이란 도전에 박수를 쳐주었다. 2000년 여름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아는 것도, 가진 것도 없었다. 사장실을 뛰쳐나가 사흘 만에 100여 명의 인재를 끌어모았다. 통신 분야 엔지니어라면 무조건 데려다 놨다. 회사 조례 중 “거기 서 있으니 자네가 이 일을 하게” 하며 차출하기도 했다. 초고속인터넷 전문 통신업체 ‘야후BB’의 시작이었다(BB는 초고속인터넷을 뜻하는 ‘브로드밴드’의 약자다).
▲ 2000년 포브스 선정 ‘올해의 비즈니스맨’
이때 한국의 도움이 컸다. 나는 “디지털 사업에서 한국이 나의 스승”이란 말을 종종 한다. 당시 한국은 이미 ADSL 방식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전면 도입한 상황이었다. 네트워크 설계부터 장비 구매, 서비스 운용까지 한국 기업과 전문가들로부터 많이 배웠다.
새 사업 준비로 바쁘던 2000년 말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나를 ‘올해의 비즈니스맨’으로 선정했다. 이유는 이랬다. ‘일본의 경기 회복 지연 속에서도 회사를 의욕적으로 키웠다. 파산한 일본채권은행(현 아조라은행)을 인수해 벤처·중소기업에 적극적으로 투·융자를 해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신규 사업에 힘을 쏟았다. 네트워크 비즈니스를 하려면 NTT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법에 따라 NTT는 신규 업체에 기지국을 임대해주고 네트워크 구축도 대행해줘야 했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은 힘들었고 이런저런 기술적 난관 또한 적지 않았다.
2001년 6월, 드디어 도쿄 시내에서 시범 서비스를 시작했다. 나는 처음부터 전국 서비스를 하고 싶었다. 임원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NTT와의 협상이 어려운 데다 기술적 검증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서비스 출시 행사 전날, 나는 야후BB의 모회사이자 서비스 신청 접수를 대행할 야후재팬으로 달려갔다. ADSL 접수 홈페이지 담당자를 직접 찾아 도쿄에서만 서비스 신청을 하게 돼 있는 공지 내용을 전국에서 가능한 것으로 고쳐버렸다. 큰 승부를 위해, ‘규모의 경제’ 실현을 위해 대형 사고를 쳐버린 것이다.
다음 날인 2001년 6월 19일, 출시 행사가 열리는 도쿄 오쿠라호텔 연회장은 1000여 명의 기자와 증권사 애널리스트들로 붐볐다. 나는 분홍색 셔츠와 흰 바지 차림으로 당당히 무대에 올랐다. 나는 선언했다.
“NTT의 IDSN보다 5배 빠른 초고속인터넷을 NTT 요금의 8분의 1인 월 990엔에 서비스하겠습니다. 초기 설치비는 무료, 프로모션 기간 중엔 가정용 모뎀을 무료로 드리겠습니다!”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엄청난 선언을 했건만 박수 치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나는 아랑곳 않고 외쳤다.
“다들 저보고 미쳤다고 합니다. 많은 애널리스트들이 소프트뱅크는 곧 파산할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전 제 방식대로 세상을 봅니다. 이 사업은 성공합니다!”
▲ 모건스탠리 “아무리 노력해도 적자” 전망
| | 2007년 5월 한 일본 남성이 소프트뱅크 통신 서비스에 대한 광고 이미지로 감싸여 있는 기둥에 기대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있다. 소프트뱅크는 2001년 출시한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조기 안착시키면서 단번에 일본의 주요 통신업체로 부상했다. NTT와 경쟁하며 초고속인터넷 2위 업체가 됐고, 2004년 6월에는 일본 국토의 80%를 커버하는 유선전화 네트워크사 일본텔레콤을 인수했다. 2006년에는 보다폰재팬 인수로 이동통신 사업에까지 진출했다. [블룸버그] | | | 매스컴의 반응은 과연 비판 일색이었다. 모건스탠리는 “소프트뱅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최소 1억2000만 달러의 영업손실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소비자 반응은 달랐다. 도쿄는 물론 전국 여기저기서 서비스 신청이 빗발쳤다. 두 달여 만에 신청자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 문제는 네트워크였다. 8월 시작하기로 한 정식 서비스를 9월로 미뤘으나 답을 찾기 어려웠다. 신청자들의 항의가 쏟아져 정상 업무를 보기 힘들 정도였다. 가장 큰 이유는 NTT의 지극히 비협조적인 자세였다. 나는 총무성(한국의 행정안전부에 해당)으로 달려갔다. 담당 과장을 찾아 책상을 내리치며 피 토하듯 소리쳤다.
“여기서 내 몸에 석유를 끼얹고 내 손으로 불을 지르겠소! 총무성 당신들이 NTT에 똑바로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독점적 네트워크를 무기로 이런 불법 행위를 일삼는 걸 묵인한다면 100만 고객을 볼 면목이 없는 나는 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소!”
총무성 관료는 화들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주게. 제발 여기서만은 일을 벌이지 말아주게!”
나는 더더욱 악에 받쳤다. 그럼 여기 말고 다른 데 가서 죽으면 된단 말인가?
“무슨 소리요? 지금 그게 문제요? 당신들이 책상이나 차지하고 앉아 책임을 회피할 때 우리는 피가 마른단 말이오!”
한바탕 난리법석을 피우고서야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 담당 과장은 지친 목소리로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물었다. 나는 “댁들이 대단한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인허가권이 있지 않나. NTT 사장에게 전화해 공정하게, 법대로 하라고 한마디만 해달라”고 요청했다. 과장은 그대로 했고, 덕분에 간신히 파국을 면할 수 있었다.
◆ 손정의의 ‘늑대론’ = 손정의 회장은 벅찬 목표에 도전하는 임직원들에게 종종 ‘늑대론’을 강조한다. “호랑이나 버펄로가 왜 늑대를 두려워하는지 아는가? 늑대는 한 마리로 안 되면 떼로 덤비고, 그래도 안 되면 그룹으로 에워싸 상대가 지칠 때까지 물고 늘어진다. 여러분이 경영하는 회사는 늑대 한 마리가 될 수도, 늑대 떼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덤비다 아예 죽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전체가 똘똘 뭉쳐 열정과 비전으로 몰아붙이면 언젠가 반드시 승리한다. 가족, 친구, 동료에게 존경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늑대의 정신을 본받아 열정을 다해 일하라.
◆ ADSL 과 ISDN = 2000년 당시 일본 최대 통신사인 NTT는 인터넷 전송방식으로 ISDN을 채택하고 있었다. 전화 모뎀보다 속도가 4배가량 빨랐다. 소프트뱅크가 이에 맞서 내놓은 일본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가 바로 ADSL이다. 진화한 ADSL은 전화 모뎀보다 속도가 100배 이상 빠르다. 손정의 회장은 “한국이 1990년대 말 ADSL를 적극 도입해 인터넷 강국으로 발돋움한 것에 큰 자극을 받았다”고 했다.
- 중앙일보 [창간기획 - 志高く ‘뜻을 높게 !’] 정리=이나리 기자 | 201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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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배 앞을 보면 멀미 나지만, 몇백㎞ 앞을 보면 바다는 잔잔하다' |
| 손정의 회장이 2004년 10월 도쿄 증권거래소에서 초고속 인터넷 사업 자회사인 ‘야후BB’의 상반기 실적을 발표하고 있다. [블룸버그] | |
주가 100분의 1 토막 ‘성난 주총’ … 6시간 경청이 주주를 감동시키다
내 40대 초반은 화려했다. 19세 때 계획한 ‘1조 엔, 2조 엔 규모의 큰 승부를 한다’ 는 목표를 조기 달성한 셈이었다. 내 포부를 몽상가의 헛소리쯤으로 치부했던 이들도 그때쯤엔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쳐주었다. 1999년 소프트뱅크는 10여 개 자회사와 120개 이상의 손자회사를 둔 대그룹이 됐다. 야후를 비롯해 클릭 수가 세계 1, 4, 9, 12위인 사이트가 우리 소유였다. 세계 인터넷 트래픽의 50%가 여기서 발생했다. 매달 130종, 900만 부의 잡지를 찍어냈다. 한창 주가가 오를 땐 재산이 일주일에 1조원씩 불어나곤 했다. 그해 타임과 뉴스위크는 각각 나를 ‘올해의 아시아 인물’로 뽑았다. 그런데 이듬해 3월 ‘하늘’이 무너졌다. ‘닷컴 버블’이 한순간에 꺼져버린 것이다.
주당 1200만 엔(약 1억2000만원)을 넘나들던 소프트뱅크 주가는 100분의 1 토막이 났다. 내 재산 또한 700억 달러에서 10억 달러 미만으로 내려앉았다. IT기업가들은 졸지에 범죄자 취급을 당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야후의 제리 양,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창업자의 처지도 비슷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돈이 귀찮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빚이 재산보다 더 많았다. ‘아차’ 싶었지만 또 그럴수록 전투력이 치솟았다.
나는 99년 이미 주주들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앞으로는 인터넷 사업에 올인할 거다. 그 외 사업은 모두 정리하겠다. 전화 · 컴퓨터가 그랬듯 등장 5, 6년 만에 흑자를 내는 신사업은 없다. 우리도 한동안 적자를 각오해야 할 거다.”
▲ 디지털 정보혁명, 꿈을 버리지 않다
아무리 그랬다지만 2000년의 버블 붕괴는 치명적이었다. 그렇더라도 인터넷은 결국 부활할 거란 내 믿음엔 변함이 없었다. 외려 기업 가치가 터무니없이 떨어진 이때야말로 투자의 적기라 판단했다. 2000년 한 해에만 투자사를 600여 개로 늘렸다. 나는 이전부터 “예측 못할 앞날은 없다”고 믿어왔다. 배를 타고 가며 바로 앞을 보면 멀미가 나지만, 몇백㎞ 앞을 내다보면 바다는 잔잔하고 뱃속도 편안해진다. 같은 이치 아니겠는가.
아울러 나는 진짜 큰 승부, 그때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에 초고속 인터넷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일본 인터넷은 속도가 느리고 요금도 매우 비쌌다.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물론 이 사업을 처음 구상한 건 인터넷 주가가 한창 고공행진을 할 때였다. 돈이 없다고 지레 포기하긴 싫었다.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밀어붙이자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돈도 없다, 욕도 먹을 대로 먹었다, 겁날 게 뭔가.
계획을 밝히자 주위의 반대가 대단했다.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한다는 건 곧 일본 최대 IT기업인 NTT에 정면 도전함을 의미했다. 임원들은 여기 덧붙여 “경쟁사 좋을 일을 왜 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맞다. 이 사업은 잘되면 나 하나 덕 보는 게 아니다. 야후재팬(소프트뱅크 자회사)의 경쟁자인 다른 인터넷 기업들도 톡톡히 혜택을 보게 돼 있었다. 나는 소리쳤다.
“바보 같은 소리! 배포가 그리 작아서 어찌할 건가. 야후재팬이 잘되면 그만인 거지, 경쟁사 잘되는 것까지 왜 걱정이야? 야후재팬 이용자만 싸게 주자고? 이런 멍청한 놈들!”
▲ “당신을 믿는다” 주주 눈물에 이 악물어
| 2001년 야후BB 직원들이 도쿄 지하철역에서 초고속 인터넷 판촉전을 벌이고 있다. [소프트뱅크 제공] | |
내 뜻은 정말 그랬다. 소프트뱅크를 왜 만들었나. 디지털 정보혁명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서다. 싸고 빠른 인터넷을 제공하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있을까. 혹자는 “그렇게 애써봤자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누구 덕분이었는지 얼마 안 가 다 잊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나는 대꾸했다.
“그럼 어떤가. 이름도 필요 없다, 돈도 필요 없다, 지위도 명예도 목숨도 필요 없다는 남자가 제일 상대하기 힘들다. 바로 그런 사람이라야 큰 일을 이룰 수 있다.”
이는 일본 개화기 정치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한 말이다. 그렇듯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인간은 아무리 누르려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시작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주주들을 설득해야 했다. 안 그래도 주가 폭락으로 주주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총일, 나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주주들 앞에 서서 그들의 비난과 타박, 호소를 마음으로 들었다. 시간을 이유로 말을 끊지도 않았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했다. 그렇게 여섯 시간이 지나자 주주들의 표정이 한결 담담해졌다. 한 할머님이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남편 퇴직금을 몽땅 털어 소프트뱅크 주식을 샀어요. 그게 99% 하락해 1000만 엔이 10만 엔이 돼버렸어요. 절망스러웠는데 오늘 얘기를 듣고 보니 당신 꿈에 투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믿을게요. 부디 열심히 해주세요.”
주주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박수로 나를 격려해주었다. 깊이 감사의 절을 올리며 나는 이를 물었다. ‘저 마음, 저 믿음을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 반드시 성공하겠다. 결과로 돌려드리겠다’.
◆ 닷컴 버블(dot-com bubble) = 인터넷을 중심으로 IT 분야에서 1995부터 2000년 초까지 이어진 거품 경제 현상. 2000년 3월 10일 미국 나스닥에서 절정을 이룬 버블(거품)은 그 다음 날부터 붕괴하기 시작해 단 6일 만에 주식가치의 9%가 사라졌다. 이후 2004년까지 살아남은 닷컴기업은 절반에 불과했다.
▲ 손정의 · 저커버그 · 베조스 - WSJ ‘제2의 잡스’ 꼽아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사장이 ‘포스트 잡스’ 시대를 이끌 혁신가로 지목됐다. 9일(현지)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헨리 포드와 토머스 에디슨의 뒤를 이었듯 혜안을 지닌 또 다른 혁신가가 나타날 것이라며 손 사장을 주요 후보 중 한 명으로 꼽았다. 그의 끊임없는 기업가 정신과 도전이 잡스를 닮았다며, 2008년 애플을 설득해 일본의 대형 통신사 NTT도코모를 제치고 소프트뱅크의 아이폰 출시를 따낸 것을 한 예로 들었다. 중국 알리바바의 잭 마 사장도 ‘아시아의 잡스’로 주목받았다.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마크 저커버그는 걸어온 길이 잡스를 닮은 ‘리틀 잡스’로 꼽혔다. 그도 잡스처럼 대학을 중퇴하고 창업가의 길을 택했다.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는 ‘잡스에 가장 가까우며 애플에 가장 위협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인터넷 서점 아마존을 전자제품, 가구뿐 아니라 영화·음악 콘텐트를 유통하는 거대 온라인 업체로 키웠다.
WSJ는 ‘새로운 잡스’의 깜짝 등장 무대로는 에너지와 건강 진료시스템 분야를 주목했다. - 심서현 기자
- 중앙일보 [창간기획 - 志高く ‘뜻을 높게 !’] 정리=이나리 기자 | 201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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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월 손정의 회장이 중국 최대 인터넷상거래 사이트인 ‘알리바바’ 창업자 잭 마와 일본 도쿄의 한 행사장에서 자리를 함께했다. 손 회장은 2000년 1월 이후 알리바바에 8000만 달러를 투자해 지분 33.3%를 획득했다. 알리바바의 현재 시가총액은 나스닥 기준으로 191억 달러에 이른다. 잭 마는 최근 “야후의 인수에 관심 있다”는 의사를 밝혀 세계 정보기술(IT) 업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블룸버그] | |
적자 200만 달러 야후에 1억 달러 투자 … “일본 거품남” 비아냥 쏟아졌다
1994년 7월 소프트뱅크의 주식 공개 뒤 1년6개월간 나는 미국에서 총 31억 달러 규모의 인수합병(M&A)을 진행했다. 덕분에 세계 최대 IT 전시·출판 그룹의 수장이 됐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이제 겨우 인터넷 세상을 헤쳐갈 보물지도와 나침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95년 가을, 막 인수한 지프 데이비스 출판 부문의 에릭 히포 사장에게 주문했다. “인터넷 시대가 본격화하면 없어서는 안 될 회사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지프 데이비스의 정보력을 동원해 물색해 주세요.” 그는 기다렸다는 듯 한 회사를 추천했다. “야후라는 벤처가 있습니다. 창업한 지 반년밖에 안 됐지만 아주 유망해요. 실리콘밸리의 가장 믿을 만한 벤처투자사인 세콰이어캐피털이 이미 200만 달러를 집어넣었답니다.”
야후. 드디어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야후가 있는 캘리포니아로 날아갔다. 공동 창업자 제리 양과 데이비드 파일로, 직원 여남은 명이 늦도록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우리는 콜라와 피자를 시켜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열 살 때 대만에서 미국으로 이민왔다는 제리 양과 특히 뜻이 잘 맞았다. 나는 곧 투자를 결정했다. 우선 5% 지분을 확보했다. 사실 마음 같아선 야후의 대주주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걸림돌이 많았다. 창업자들도, 기존 주주들도 내가 거액을 투자해 대주주로 올라서는 걸 원하지 않았다. 주도권을 내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설득하기로 했다. 다음해 1월 다시 제리 양을 만나 간곡하게 말했다.
“인터넷 비즈니스는 선점이 중요합니다. 라이코스, AOL 같은 경쟁사들이 속속 치고 올라오고 있어요. 하루빨리 더 큰 자본으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해야 해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또 컴덱스와 지프 데이비스를 통해 전방위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어요.”
5시간의 지루한 협상 끝에 결국 내 뜻을 관철할 수 있었다. 1억 달러를 더 투자해 야후 지분 29%를 추가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거래를 완료하기 전 나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 넷스케이프의 짐 클락, 시스코의 존 챔버스,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스콧 매닐리 최고경영자(CEO)에게 e-메일을 보냈다. ‘야후의 대주주가 되려 한다. 하지만 당신들 중 누구라도 적극 반대한다면 포기하겠다. 의견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IT업계 생리를 잘 알았다. 이후의 여러 비즈니스를 위해 이런 거물들과 척지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다행히 모두 내 투자에 오케이 사인을 보내줬다. 당시 야후는 연 매출 100만 달러에 적자가 200만 달러인 보잘것없는 회사였다. 그런 야후가 불과 한두 해 뒤 세계 인터넷 시장을 석권하리라는 걸 이들 중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투자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언론들은 나를 ‘일본에서 온 거품남’이라며 대놓고 비웃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외려 서둘러 일본에 야후재팬을 설립했다. 소프트뱅크가 지분 51%, 야후 본사가 49%를 보유한 합작 회사였다. 나는 야후재팬을 아시아 최대 인터넷 포털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야후재팬은 서비스를 시작하자마자 돌풍을 일으켰다.
나는 미디어산업에도 진출하기로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세계 최대 미디어재벌은 호주의 루퍼트 머독 뉴스코퍼레이션 회장이었다. 96년 4월 미국 할리우드에 있는 머독 회장의 사무실을 찾았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일본에 오면 같이 식사라도 하자”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2개월 뒤 정말 머독에게서 “도쿄에서 파티를 열려 하는데 인사말을 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파티 전날 저녁, 도쿄 긴자의 한 고급 일식당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머독은 일본에서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기회를 낚아챘다.
“나와 함께합시다. 일본엔 강력한 경쟁자가 많아요. 이들과 싸우려면 최소 2000억 엔은 필요합니다. 내가 1000억 엔을 대지요.”
머독은 내 제안을 즉석에서 받아들였다. 만남이 있은 지 열흘 만에 합병회사를 설립했다. 머독과 나는 417억 엔을 투입해 오분샤 미디어가 보유한 테레비아사히 지분 21%도 매입했다.
그러나 이 거래는 “소프트뱅크가 외국 자본과 손잡고 일본 미디어를 장악하려 한다”는 비난에 부닥쳤다. 다음해 나는 지분을 미련 없이 재매각했다. 대신 머독과 함께 설립한 위성방송 J스카이B 운영에 매진했다. 97년엔 또 다른 일본 내 위성방송 퍼펙트TV와 합병을 실현했다. 이로써 나는 유통·인터넷·미디어·전시회에 이르는 주요 디지털 인프라를 손에 쥐게 됐다. MS·시스코와의 합작, 미국 메모리보드 시장의 60%를 장악한 킹스턴테크놀로지 인수 등으로 네트워크와 테크놀로지 인프라 부문에서도 세계적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이처럼 숨가쁜 투자와 M&A의 결과는 곧 ‘돈’으로 나타났다. 96년 5월 30일 야후 본사가 미국 나스닥에 상장됐다. 97년에는 야후재팬이 일본 자스닥에 상장됐다. 두 회사 주가는 그야말로 고공 행진을 계속했다. 99년 말 소프트뱅크가 보유한 야후 주식 총액은 1조4586억 엔에 이르렀다. 초기 투자액의 360배였다. 같은 시기 야후재팬 주식도 주당 1050만 엔까지 올랐다. 나는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E트레이드·지오시티즈 같은 실리콘밸리 유망 벤처에 잇따라 투자했다. 재산은 점점 불어나 99년 가을에서 2000년 2월까지는 “손정의의 재산이 또 10억 달러 늘었다”는 기사가 세계 언론에 종종 보도됐다. 단 사흘이지만 빌 게이츠를 누르고 IT업계 제1 부자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돈에 대한 감각이 없어졌다. 백화점에 가도 ‘이 건물을 통째로 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쇼핑할 재미가 나지 않았다. 97년엔 지금껏 살던 임대주택에서 나와 40억 엔을 들여 새로 지은 3층 집으로 이사도 했다. 세계 주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부와 명성의 절정을 누렸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2000년 3월, 이른바 ‘닷컴 버블’ 붕괴가 시작됐다. 소프트뱅크 주가는 100분의 1 토막이 났고, 나는 사기꾼이란 오명을 쓰게 됐다. 세상과의, 나 자신과의 진짜 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 야후(Yahoo!) = 1995년 4월 미국 스탠퍼드대 대학원생이던 제리 양, 데이비드 파일로가 창업한 포털. ‘야후’는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종족 이름이다. 90년대 후반~2000년대 중반 세계 1위 검색 포털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이후 구글에 밀려 현재 미국 검색 시장 점유율은 16% 안팎이다. 소프트뱅크는 시장 점유율이 하락하기 전인 2001년 야후 주식 대부분을 매각했다. 이 자금으로 일본 최초의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시작했다.
- 중앙일보 [창간기획 - 志高く ‘뜻을 높게 !’] 정리=이나리 기자 | 2011.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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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컴덱스, 지프 데이비스 인수에 성공하다 |
| 1997년 8월 26일 손정의 회장이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컴덱스코리아 97’에서 김종필 당시 자민련 총재에게 신형 노트북PC를 시연해 보이고 있다. 소프트뱅크는 95년 8억 달러를 들여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전시회인 컴덱스를 인수했다. 세계 최대 IT미디어 그룹인 지프 데이비스도 사들였다. 당시 한 해 매출보다 몇 배 더 큰 거래를 성사시킴으로써 손 회장은 단숨에 세계 IT 업계의 거물로 떠올랐다. | |
M&A는 전광석화가 기본 … 8억 달러 협상, 단 5분도 안 돼 끝내
나는 열아홉 살 때 ‘인생 50년 계획’을 세웠다. ‘사업으로 이름을 알린다’는 20대 목표는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30대 계획은 ‘1000억, 2000억 엔 단위의 자금을 모은다’는 것이었다. 1994년 만 36세에 주식 공개로 그 씨알을 마련했다. 남은 4년간 완성을 봐야 했다. 마침 인터넷 시대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폭풍을 뚫고 전진하려면 ‘지도’와 ‘나침반’이 필요했다. 나는 세계 정보기술(IT) 정보의 길목을 잡기로 했다. 아시아인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열기로 했다. 주식 공개로 마련한 돈은 2000억 엔이었다. 그 전부터 마이크로소프트(MS), 시스코 같은 실리콘밸리 기업들과 함께 일하며 미국 시장을 들여다본 터였다. 나는 30대의 승부를 그 땅에서 보기로 했다. 1년 중 8~9개월은 미국에서 살았다. 목표는 이미 정한 터였다. 세계 최대 IT전시회인 컴덱스, 그리고 역시 세계 최대 IT미디어그룹인 지프 데이비스를 인수였다.
컴덱스 인수를 처음 마음먹은 건 93년 가을이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컴덱스 쇼에 갔다가 오너인 셜던 G 아델슨 회장이 회사를 팔 거란 소문을 들었다. 나는 곧바로 회장실을 찾았다. 거두절미하고 “컴덱스를 사겠다”고 했다. “돈은 있느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지금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회사 이름이 ‘뱅크(bank·은행)’ 아닙니까. 왠지 돈이 무더기로 들어올 것 같지 않나요?”
이렇게 넉살 좋게 답하자 아델슨 회장은 껄껄 웃었다. 나는 내쳐 “컴덱스를 사려는 건 단지 돈을 벌고 싶어서가 아니다. 나는 PC업계를 정말 좋아한다. 회사를 인수해 미국뿐 아니라 세계 시장을 개척하겠다” 고 열변을 토했다. 그와 나 사이에 진심이 통함을 느낄 수 있었다.
▲ 반전과 집념의 협상 드라마
1년쯤 뒤 마침내 컴덱스와 본격 협상에 들어갈 즈음 더 솔깃한 뉴스를 접했다. ‘미국의 세계 최대 IT미디어그룹 지프 데이비스가 매각 절차를 밟는다’는 기사가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린 것이다. 지프 데이비스는 수많은 IT 관련 미디어를 생산하는 ‘정보 큰손’이었다. 여기서 발간하는 잡지 PC위크는 세계 IT 종사자의 필독서였다. 광고 수익이 플레이보이나 포춘보다 많았다. 그에 자극 받아 90년 3월 이미 나는 PC위크의 일본 판권을 확보한 터였다. 나는 감히 지프 데이비스의 핵심인 출판부문을 사기로 했다. 하지만 돈이 부족했다. 주거래처인 고교은행은 물론 일본의 어떤 금융사도 융자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나는 미국에서 팀을 짜기로 했다. 모건스탠리를 고문으로, 프라이스 워터하우스 쿠퍼스를 회계 감사로 기용했다. 이들은 내 무모한 계획을 비웃지 않았다. 신용 담보 융자인 LBO (Leveraged buyout) 방식을 제안했다. 소프트뱅크와 지프 데이비스의 수익을 합하면 ‘1+1=2’ 가 아닌 ‘1+1=3’ 의 신용도를 갖출 수 있다는 거였다. 모건스탠리의 주선으로 뱅크 오브 뉴욕·씨티은행 · 체이스맨해튼은행 관계자들과 저녁을 했다. 일주일 뒤 세 곳 모두에서 OK 사인이 왔다. 94년 10월 말 나는 자신만만하게 입찰일을 맞았다. 한데 정오쯤 믿을 수 없는 전화가 왔다. 투자전문사 포스트먼 리틀이 단독 교섭권을 얻어 출판부문을 인수해버렸다는 거였다. 단독 교섭권이란 입찰 전 파격 조건을 제시해 받아들여질 경우 전액 현금을 지불하고 회사를 가져가버리는 것이다. 지프 데이비스 측에서 유력 매수처인 소프트뱅크가 자금이 부족하다는 루머를 듣고 거래를 조기에 타결해버린 거였다.
나는 우선 팀을 다독였다. “미국식 M&A를 제대로 배웠다” “과정 습득 자체가 재산” 이라며 껄껄 웃기까지 했다. 하지만 속은 말이 아니었다. 며칠째 잠을 못 잔 상황이었다. 호텔방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졌다. 얼마나 잤을까. 불현듯 눈을 떴다. 오후 4시55분. 입찰 마감까지 딱 5분이 남은 상태였다. 갑자기 머릿속에 불이 번쩍 했다.
‘지프 데이비스엔 출판부문 말고 전시회부문인 ‘인터롭’도 있지 않나. 인터롭은 컴덱스에 이은 미국 2위 전시회다. 그걸 사자!’
나는 곧바로 모건스탠리에 전화했다.
“지금 바로 지프 데이비스에 연락해 시간을 더 달라고 하게. 인터롭을 살 테니 입찰액 계산을 위해 자정까지 마감을 미뤄달라고 말이야.”
컴덱스를 곧 인수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여기 더해 인터롭까지 사면 미국 IT전시 시장의 70~80%를 잡게 된다. 나는 모건스탠리 사무실로 달려갔다. 그날 자정 인터롭 인수를 확정했다. 값은 2억 달러. 나는 모건스탠리에 10억 엔이 넘는 고문료를 기꺼이 지불했다.
▲ ‘5분 독대’ 로 끝낸 3조원 빅딜
다음해 초엔 컴덱스 인수에 나섰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본사로 가 아델슨 회장과 독대했다.
“받고 싶은 금액을 말씀하십시오. 타당한 수준이면 흥정 없이 지불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상치를 벗어난 값이면 미련 없이 물러나겠어요.”
나는 이어 “더 높은 값을 쳐 줄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의 꿈을 존중하고 더 큰 성취를 이룰 사람은 바로 나” 라고 강조했다. 아델슨 회장이 값을 불렀다.
“8억 달러.”
나는 말없이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협상은 5분도 안 돼 끝났다.
컴덱스 측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빌 게이츠, 에커드 파이퍼 컴팩 회장 같은 거물들과 막역한 사이란 걸 알고 있었다. 시스코 본사의 사외이사 이기도 했다. 회사 인수 뒤 나는 기존 멤버를 한 명도 교체하지 않았다.
얼마 뒤엔 기어코 지프 데이비스 출판부문마저 가져왔다. 포스트먼 리틀의 테드 포스트먼 회장과 역시 ‘단판 승부’를 벌였다. 그는 21억 달러를 요구했다. 나는 두말 않고 받아들였다. 95년 당시 소프트뱅크의 매출은 600억 엔이 좀 넘었다. 그런 회사가 1년6개월 새 무려 3100엔 규모의 국제적 M&A를 성사시킨 것이다. 혹자는 이처럼 전광석화 같은 빅 딜에 아연실색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결코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소프트뱅크는 M&A 전 온갖 데이터를 동원해 그야말로 가능한 모든 변수를 계산한다. 이를 바탕으로 신속하고 확고한 결정을 내린다. ‘수치(數値) 매니지먼트’와 ‘압도적 속도’는 소프트뱅크 DNA의 원형질이다.
◆ 소프트뱅크식 팀제 = 전사 조직을 9명 이하 팀으로 나눈 것. 경영학에서 말하는 관리자 1인의 통제 범위가 5~9명임을 감안했다. 또 팀의 규모가 너무 클 경우 회사보다 조직 자체의 이익에 준해 판단할 수 있음을 고려했다. 이 회사 팀장은 권한이 크다. 사장이나 본사가 모든 권한을 갖는 건 1000m 떨어진 곳에서 권총으로 목표물을 맞히려는 것과 같다고 봐서다. 반면 현장 팀장에게 권한을 위임하면 1m 앞에 서서 과녁을 명중시킬 수 있다. 재량권이 큰 만큼 책임도 막중하다. 팀별 독립채산제 형태로 운영해 실적이 부진할 경우 반드시 책임을 묻는다.
- 중앙일보 [창간기획 - 志高く ‘뜻을 높게 !’] 정리=이나리 기자 | 2011.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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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7월 손정의 회장이 인터넷 비즈니스 합작 투자 발표를 위해 영국 런던에서 루퍼드 머독 뉴스코퍼레이션 회장과 자리를 함께했다. 호주 출신 미디어 재벌 머독과 손 회장은 96년 TV아사히 지분 인수, 97년 일본 위성방송시장 진출을 비롯한 여러 건의 투자 및 인수합병을 공동으로 진행했다. [런던 AFP=연합] | |
M&A는 모험 아닌 과학 … 2만 페이지 분량 시뮬레이션도 해봤다
중증 간염을 이겨내고 일선에 복귀했다. 1986년 5월, 스물아홉이 코앞이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투병 중 나 대신 사장으로 일한 이가 애초 약속을 뒤집었다. 자리를 내놓을 수 없다고 했다. 이사회를 통해 ‘임원 40세 정년제’를 일시적으로 도입했다. 40세가 넘은 임원은 재임용이 안 될 경우 퇴사 절차를 밟게 했다. 나는 정이 많은 편이다. 한번 준 맘은 쉬 거두지 않는다. 재능과 인품이 뛰어난 이를 보면 폭 빠진다. 그러다 보니 간혹 이렇게 뒤통수를 맞는다. 아픈 기억들이다.
▲ 될성부른 벤처에 공을 들여라
조직 문제만큼 골치 아픈 게 빚이었다. 무려 10억 엔. 다시 발명에 매달리기로 했다. 나는 미국 유학 시절 다중어번역기 개발로 사업 밑천을 마련한 경험이 있다.
발명의 요체는 ‘불편과 불합리를 해결하는 것’이다. 마침 당시 막 자유화된 전화 서비스에 주목했다. 고객이 새로 설립된 전기통신회사를 이용하려면 추가 번호를 눌러야 했다. 지역과 회사마다 요금이 다 다른데, 그중 싼 회선을 찾는 것도 일이었다. ‘이전과 같은 번호를 쓰면서 자동으로 가장 싼 회선을 찾아주는 시스템을 개발하자.’ 그렇게 결심했다.
함께할 사람을 찾았다. IT기업 포벌(Forval)의 오쿠보 히데오(57) 창업자와 뜻이 맞았다. 포벌은 현재 일본의 대표적 IT기업이다. 최근에는 한류 스타 원빈씨를 광고모델로 내세워 화제가 됐다. 우승자에게 명품 바이올린인 스트라디바리우스를 2년간 무상 대여하는 ‘포벌 스칼러십 콩쿠르’로도 유명하다. 무엇보다 오쿠보는 지금 내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한 명이다. 함께 제품을 개발한 게 87년이니 벌써 25년을 쌓아온 우정이다.
우리가 개발한 NCC BOX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에서 먼저 나온 유사품보다 훨씬 싸고 작은 데다 성능도 우수했다. 이 기기 덕분에 당시 일본의 통신 비용이 크게 줄었다. 회사엔 20억 엔의 로열티 수입이 생겼다. 빚을 갚고도 10억 엔이 남았다. 나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그때까지 우리 회사의 정확한 이름은 ‘일본 소프트뱅크’였다. 나는 거기서 ‘일본’이란 단어를 떼어냈다. 이어 미국 IT업체들과 적극적 교류에 나섰다. 당시 내가 열심히 부르짖은 게 ‘타임머신 매니지먼트’다. 거창한 명칭이지만 내용은 단순하다. 당시 미국의 IT산업과 시장 환경은 일본을 한참 앞서가고 있었다. 제대로 된 미국의 제품·기술·서비스를 들여오면 몇 년 뒤 일본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으리라 봤다. 열심히 태평양을 넘나들었다. 미국의 잘나가는 기업, 될성부른 벤처에 공을 들였다. 그렇게 만난 것이 마이크로소프트(MS)와 노벨, 시스코시스템스다.
▲ MS 업고 일본 컴퓨터 업계 평정
| | 일본 IT기업 ‘포벌’의 오쿠보 히데오 창업자. [현문미디어 제공] | | | 80년대 후반 일본산(産) 컴퓨터들은 회사마다 운영체제(OS)가 다 달랐다. 나는 언젠가 대부분의 컴퓨터가 같은 OS를 탑재하리라 봤다. MS 윈도가 그중 가장 강력한 후보자였다. 90년을 전후해 나는 MS의 빌 게이츠 창업자를 여러 차례 만났다. 일본 내에서 MS 소프트웨어(SW)의 독점 판매권을 달라고 했다. 빌은 쾌히 응했다. 이는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다.
92년 MS가 내놓은 윈도3.1이 정말 일본 컴퓨터업계를 평정했다. 윈도상에서 구동하는 엑셀 · 파워포인트 같은 SW 또한 덩달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일본 SW 시장 규모는 대략 한국의 스무 배다. 인구는 두 배가 좀 넘을 뿐이지만 저작권 의식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MS의 독점 판매권을 가진 우리 회사 매출도 쑥쑥 올랐다. 92년 1000억 엔이 넘었고, 93년엔 더 많이 벌었다. 95년에는 MS와 합작회사인 ‘게임뱅크’를 설립했다. 빌과 나는 1~3개월에 한 번씩은 꼭 만나는 사이가 됐다. 95년 말 그에게서 소포 하나가 왔다. 빌의 첫 저서 『미래로 가는 길(The road ahead)』이었다. 표지 안쪽엔 그의 사인과 함께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마사, 당신은 나와 같은 승부사다(Masa, You are as much risktaker as I am).”
그렇다고 소프트뱅크가 MS만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니다. 90년 MS의 경쟁사인 노벨과 일본 합작법인을 설립했다. 2001년 파산한 노벨은 당시만 해도 MS와 어깨를 견주는 SW기업이었다. 이 회사의 마지막 최고경영자(CEO)가 바로 현재 구글 회장인 에릭 슈미트다. 94년에는 시스코시스템스 일본법인에 투자했다. 지금은 굴지의 글로벌 기업이 됐지만 20년 전엔 벤처 티를 막 벗은 수준이었다.
이렇게 동분서주하던 중 사업에 일대 전기가 찾아왔다. 94년 7월 주식 공개에 성공한 것이다. 주당 1만8900엔. 당시 최고가였다. 소프트뱅크는 단번에 2000억 엔의 거금을 쥐게 됐다. 쓸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인수합병(M&A)이었다.
▲ 인터넷 세상 안내할 ‘보물지도’를 찾다
당시 일본에서 M&A는 생소함을 넘어 부정적인 무엇이었다. 대물림이 전통이요 가업을 생명처럼 여기는 문화다. M&A란 망한 기업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거나, 다른 이가 애써 일군 기업을 ‘빼앗아가는’ 행위일 뿐이었다. 내 생각은 달랐다. 디지털 정보혁명의 원대한 꿈을 이루려면 통상의 방식으론 안 된다. 주류 분야, 주류 시장으로 단번에 치고 나갈 기회를 잡아야 한다. 병법의 최고봉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아닌가. 이 모두를 충족시키는 게 바로 M&A다. 적대적 M&A란 것도 있지만 난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다.
요즘도 이런 방식의 사업 확장을 일종의 도박이나 ‘손 안 대고 코 푸는 일’로 여기는 이들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M&A야말로 가장 치열한 숫자 싸움이다. 무엇보다 어떤 기업에 얼마를 투자할지 적정선을 찾아야 한다. 나는 향후 시장을 60% 이상 점유할 가능성이 없는 회사, 이미 너무 많은 투자자가 침을 흘리는 회사, 현금 흐름(cash flow)이 위태로운 회사는 거들떠도 안 봤다. 비용 대비 효과를 가늠하기 위해 1만, 2만 페이지 분량의 시뮬레이션도 마다하지 않았다.
분야로 치자면 미래 금맥인 IT서비스, 그중에서도 ‘정보의 길목’을 장악하는 데 진력했다. 95년 초 내가 세계 최대 IT미디어그룹 지프 데이비스를 1800억 엔에 사자 다들 “돌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딜이 없었다면 야후 투자도, 야후재팬 설립도, 오늘날의 소프트뱅크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내겐 막 열린 인터넷 세상을 안내해줄 ‘보물지도’가 절실했고, 최신 IT정보의 집산지인 지프 데이비스보다 더 나은 선택은 없었다. 남들에겐 미친 짓이 내게는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이었던 것이다.
◆ 손정의의 일본 귀화 = 손정의 회장은 1990년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손’ 이라는 성(姓)를 그대로 쓰려 하자 정부가 막았다. ‘한 사람만 쓰는 성을 허용할 순 없으니 일본 성을 쓰라’고 했다. 손 회장 부인이 나섰다. 본인이 먼저 성을 ‘손’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덕분에 한국식 성을 지킬 수 있었다. 손 회장은 귀화와 관련해 “두 딸이 생활하는 데 이런저런 불편이 없어졌고, 내 입출국 수속도 간편해졌다”는 식으로 심상하게 대응하는 편이다.
- 중앙일보 [창간기획 - 志高く ‘뜻을 높게 !’] 정리=이나리 기자 | 2011.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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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프트뱅크 창업 초기의 손정의 회장. 그는 투병 중이던 20대 후반 특유의 경영전략을 완성했다. 손자병법에 자신의 생각을 곱했다는 뜻에서 ‘제곱병법’ 이라 이름 지었다. 손 회장은 기업 인수합병이나 중장기 사업 전략을 고민할 때 반드시 이 25자의 뜻과 일치하는지 자문한다고 한다. [소프트뱅크] | |
스물여섯에 5년 시한부 절망 … 책 4000권에서 평생 먹고살 25자를 건지다
초기 소프트뱅크의 성장세는 눈부셨다. 창업 8개월 뒤인 1982년 5월에는 출판사업도 시작했다. 기존 소프트웨어(SW) 유통업에 이어 또 하나의 인프라 비즈니스에 발을 들인 것이다. 이 사업을 시작한 데엔 사연이 있다. 당시 한 유명 PC잡지에 소프트 뱅크 광고를 내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잡지는 SW 유통사업도 하는 ‘아스키’라는 기업 소유였다. 한마디로 ‘경쟁사 광고를 내줄 순 없다’는 거였다.
나는 직접 잡지를 만들기로 했다. ‘오! PC’와 ‘오! MZ’라는 정보기술(IT) 전문지를 창간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창간호의 80%가량이 반품됐다. 한 잡지에 매달 1000만 엔씩 적자가 났다. 주력 사업에서 이 정도의 대적자라니, 결단이 필요했다. 나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출판부장이다. 1억 엔 정도를 과감히 투자해 잡지를 일신해 보자. 3개월 뒤에도 흑자가 안 나면 손 떼는 거다. 1억 엔을 투자했다 날리는 거나, 매달 2000만 엔씩 적자를 보며 질질 끌다 반 년 뒤 물러나는 거나 손해보긴 매한가지 아닌가.”
우선 독자의 요구를 정확히 알아야 했다. 수만 장의 독자 카드를 일일이 분석해 지면에 반영했다. 매주 편집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정가를 680엔에서 580엔으로 내렸다. TV 광고까지 했다. 효과가 곧 나타났다. 5만 부에서 10만 부로 증쇄를 했음에도 판매 3일 만에 매진이 됐다. 이후 출판사업은 계속 성장해 3년 뒤에는 9종의 잡지를 매달 60만 부씩 발행하게 됐다.
▲ “료마도 나도 5년이다”
그렇게 한시름 놨을 즈음 뜻밖의 재앙과 맞닥뜨렸다. 83년 봄. 회사 건강검진에서 만성 간염 판정을 받은 것이다. 상태가 위중했다. 의료진은 “길게 잡아도 5년이다. 그 이상은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졌다.
미친 듯 공부했다. 펄펄 끓는 열의로 회사를 세운 지 이제 1년 반이다. 딸은 겨우 갓난쟁이다. 해야 할 일이 산처럼 많다. 빚도 잔뜩 있다. 무엇보다 나를 믿는 고객은? 동료는? 직원들은?
진단받은 다음 날 바로 입원했다. 병상에서 울었다. 그저 살고 싶었다. 가족과 함께할 수 있다면, 딸아이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볼 수 있다면. 사실이 알려지면 은행에서 당장 융자금을 회수할까 봐 병원에서 몰래 빠져나가 회의에 참석했다. 그 와중에도 회사 걱정을 하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그때 료마를 다시 만났다. 시바 료타로 소설 『료마가 간다』를 정독했다. 열여섯 시절 내가 큰 뜻을 품게 해준 바로 그 책이다. 부끄러웠다. 료마는 33세에 죽었다. 마지막 5년 동안 엄청난 일을 했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 나도 5년이다. 그동안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그것을 하자, 목숨 바쳐서’.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스스로를 불태웠는가가 중요하다. 내가 왜 사업을 시작하는지, 무엇을 하려 했는지도 되새겼다. 결국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였다. 딸의 미소, 가족의 미소, 직원들의 미소. 그런데 누구보다 고객들이 웃어주면 좋겠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오지, 얼굴에 흙 묻힌 꼬마가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 본다. 누구한테인지 모르지만 그저 “고맙습니다”라고 중얼거리며….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결론은 역시 ‘자기만족’이었다. 멋진 말, 어려운 말 다 필요 없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 그것은 역시 디지털 정보 혁명을 일으켜 수많은 이가 지혜와 지식을 공유하게 하는 것. 오늘날 트위터처럼 말이다.
▲ 자금 압박 · 직원 배신, 독서로 이겼다
강렬한 삶의 의지가 되살아났다.
첫째, 병을 이긴다. 둘째, 사업을 지킨다.
말처럼 쉽진 않았다. 나는 이후 3년 반가량 입·퇴원을 반복했다. 일상적 최고경영자(CEO) 역할을 할 수 없어 새 사장을 영입했다. 일본경비보장(지금의 세콤) 부사장이던 오모리 야스히코였다. 나는 회장으로 물러앉았다. 그렇더라도 회사 일에서 손 뗄 생각은 없었다. 병실에 PC와 팩시밀리·전화기를 설치했다. 의사에게 혼나가며 원격 경영을 시작했다. 새 사업도 열심히 구상했다.
위기가 이어졌다. 84년 자회사를 통해 시작한 상품 가격 데이터베이스화 사업이 실패했다. 타격이 컸다. 은행 융자로 급한 불을 끄는 나날이었다. 86년엔 이른바 ‘소프트뱅크 사건’이 터졌다. 신뢰해 온 유능한 임직원 스무 명이 한꺼번에 사표를 냈다. 독립해 회사를 차린다고 했다. 배신이었다. 나는 굴욕감을 누르며 끝까지 매달렸다. 그러나 잡지 못했다. 그들이 만든 회사는 결국 얼마 못 가 사라졌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듯 배신한 사람은 절대 성공 못한다. 그들 외에도 여러 명이 경쟁사로 빠져나갔다. 고객들의 불만도 컸다. “그 사람 요즘 안 보이네. 의리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반응이었다.
▲ 쇼크 요법으로 병 이기고 복귀
수렁에 빠진 느낌이 들 때마다 책을 폈다. 그렇게 읽은 책이 4000여 권. 평생 먹고살 지식을 얻은 셈이다. 소프트뱅크 특유의 경영 전략인 ‘제곱병법’ 도 이때 창안했다. 손자병법을 깊이 읽고 내 식대로 소화한 결과다. 핵심은 간단하다. ‘지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이길 싸움에서 이기는 거다. 전투는 도박이 아니다. 과학이며 이론이다. 또 하나. ‘싸우지 않고 이긴다’. 인수합병(M&A)이 바로 그렇다. 일본의 경영자나 언론 관계자들은 대부분 그런 내 전략을 이해 못하는 것 같다. 종종 ‘모험’이니 ‘차익’이니 하는 용어를 쓰는 걸로 봐서 말이다. 각각의 딜이 얼마나 큰 비전에 따라, 과학적 분석하에, 긴 미래를 보고 이루어진 것인지는 차차 얘기하게 될 터이다.
그 와중에도 내 병세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84년 새 치료법을 만났다. 도라노몬병원의 구마다 히로미쓰 박사가 창안한 ‘스테로이드 이탈요법’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만성간염을 급성간염으로 변화시켜 인체 내부의 저항력을 일거에 끌어냄으로써 치료를 도모하는 일종의 쇼크 요법이다. 지금은 훨씬 나은 치료법이 많겠지만 당시로선 길이 별로 없었다. 결과는 다행히 성공. 바이러스 수치가 크게 떨어지면서 나는 86년 5월 일선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사에서 날 기다리는 건 10억 엔의 빚, 그리고 핵심 임원과의 고통스러운 갈등이었다.
- 중앙일보 [창간기획 - 志高く ‘뜻을 높게 !’] 정리=이나리 기자 | 2011.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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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오를 산을 정하라, 인생의 반이 결정된다 |
| 소프트뱅크 창업 초기, 손정의 회장이 임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 직원 두 명으로 시작한 소프트뱅크는 한때 부도위기까지 몰렸다가 손 회장의 도박과 같은 마케팅에 힘입어 기사회생했다. 첫 고객을 잡은 지 한 달 만에 직원수가 15명으로 늘었고, 또 한 달 뒤에는 100명 규모의 회사가 됐다. 1년 뒤 소프트뱅크는 매출 35억 엔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일본 매스컴은 손 회장에게 ‘괴물 실업가’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소프트뱅크] | |
직원 2명 앞에서 “30년 뒤 1조엔 매출” 연설했더니 … 두달 뒤 “미친 놈”하며 떠나
1980년 3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현지에서 운영하던 소프트웨어(SW) 업체 ‘유니슨 월드’ 는 친구이자 동업자인 홍 루에게 넘겼다. 그는 훗날 중국의 대표적 통신기기 제조업체인 UT스타컴을 창업했다. 귀국 뒤 1년6개월 동안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 으리라. 친척들은 수군거렸다. “마사요시가 미국에서 뭘 배워왔다는 거야?” 정작 내 머리와 가슴속엔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한 번뿐인 인생이다. 부모가 시켜서, 갑작스러운 인연으로, 돈이나 벌겠다는 욕심에 뭔가를 시작하고 싶진 않았다. 길을 한번 정하면 바꾸기 힘들다. 우왕좌왕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오르고 싶은 산을 정하라. 그러면 인생의 반은 결정된다’. 이 한 생각을 돛대 삼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내 꿈은 사업가다. 일생을 걸 만한 사업이 뭘까. 남이 안 하는 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 최고가 될 수 있는 일. 또한 절로 열의가 샘솟으며, 호기심을 유지할 수 있고, 기술 혁신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야여야 했다. 결론은 ‘디지털 정보혁명’. 그것으로 세상의 지혜와 지식을 공유케 해 인류에 공헌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태어난 이유, 스물세 살 청년이 마침내 찾은 큰 뜻이었다.
▲ 디지털혁명의 도구, 소프트웨어 유통
누군가는 허황되다고 비웃을지 모른다. 물론 작은 목표부터 차근차근 이뤄가는 것도 좋다. 세상 99%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그리고 작은 성공을 거둔다. 하나 정말 큰 꿈,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다면 접근방식부터 달라야 한다. 먼저 큰 비전을 세운 뒤 그 실현을 위한 시간표를 미래에서부터 현재를 향해 거꾸로 돌린다. 오늘 아닌 내일의 트렌드를 파악하고, 대기업 못지않은 배포로 승부하며, 그에 걸맞은 투명성과 경영 시스템을 추구해야 한다. 어쨌거나 난 자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혁명의 도구’로 택한 건 SW 유통. 치밀한 분석의 결과였다.
창업 전 나는 40여 개의 아이템을 검토했다. 80년대 초 일본은 PC 대중화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PC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려면 우수한 SW가 있어야 한다. 미래는 SW 세상이 될 게 분명했다. 직접 SW 개발에 뛰어들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승률이 너무 낮았다. 운영체제(OS) 분야는 세계 표준을 주도하는 미국 기업이 선점해 버렸다. 남은 건 응용 SW 분야인데, 이건 마치 모든 신곡이 히트칠 수 없듯 톱10 안에 들어가는 것만 대박을 치는 구조였다. 그래서 난 개별 상품 대신 인프라를 택하기로 했다. 이익은 적을지 모르나 생명력은 확실히 길다. 또한 압도적 지위를 획득할 경우 업계 성장에 정비례해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 승률 70%. 나는 100여 개의 경영 포인트를 검토한 뒤 그렇게 결론 내렸다.
▲ 선풍기는 도는데, 직원은 둘뿐인데
81년 9월, 고향 가까운 후쿠오카현 오도시로시에서 소프트뱅크를 창업했다. 에어컨도 없는 허름한 건물 2층. 직원 두 명을 구했다. 첫날 그들을 앞에 놓고 귤 상자에 올라 한 시간가량 열변을 토했다. 곁에선 낡은 선풍기가 윙윙 돌았다.
“우리 회사는 세계 디지털 혁명을 이끌 거다. 30년 후엔 두부가게에서 두부를 세듯 매출을 1조(엔), 2조(엔) 단위로 세게 될 거다. 사업을 하겠다는 자가 1000억이니 5000억이니 하는 걸 숫자라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두부가게 운운한 건 일본에서는 두부 한 모를 ‘1조’라 발음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둘 다 완전히 기가 질린 듯했다. 그들은 결국 두 달을 못 채우고 나가버렸다. “저 인간 제정신이야?” “미친 놈!” 하면서.
그렇게 파리만 날리고 있을 때 샤프사의 사사키 다다시 전무가 소중한 조언을 해주었다. “SW 사업은 정보 밀도가 높은 곳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3년 전 내가 미국에서 발명한 다국어 번역기 기술을 거액에 선뜻 구매해 준 이였다. 나는 충고를 받아들였다. 도쿄 고지마치 4번가에 있는 ㈜경영종합연구소의 방 한 칸을 빌렸다. 이어 연구소의 노다 가즈오 회장을 찾았다. 명함을 건네며 “손 마사요시입니다. 재일 한국인입니다”하고 인사했다. 나는 미국 유학 이후 ‘야스모토’란 일본식 가짜 성(姓) 대신 진짜 성을 쓰기 시작한 터였다. 노다 회장은 내 구상을 듣더니 “장래성이 있다” 고 칭찬했다. 그는 세계적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이론을 일본에 소개한 장본인이다. 그런 인물이 격려해 주다니, 뛸 듯이 기뻤다. 이후 그는 사사키 전무와 함께 경험 없고 인맥 부족한 나의 귀한 멘토가 돼주었다.
▲ ‘괴물 실업가’ 태어나다
도쿄로 옮긴 얼마 뒤 나는 도박에 가까운 승부수를 던졌다. 창업자금 1000만 엔 중 800만 엔을 털어 전자전시회인 ‘일렉트로닉쇼’에 참가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뜯어말렸다. 회사라곤 달랑 이름뿐, 제품도 실적도 없었다. 난 못 들은 척 행사장에서 가장 큰 부스를 빌렸다. 거길 화려하게 꾸민 뒤 부스 없는 SW업체들에 무료로 대여했다. 대중의 눈길을 끌면 광고 효과가 크리라 봤다. ‘PC 시대엔 SW가 중요하다, 그 SW를 나 손정의가 판매한다’는 사실을 열심히 알렸다. 흔한 카탈로그 대신 아예 잡지를 만들어 돌렸다. 전시회가 끝나자 회사는 파산 지경이 됐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조신전기입니다. 일렉트로닉쇼에서 귀사의 부스를 인상 깊게 봤습니다. 오사카에 일본 최대 컴퓨터 매장을 내는데 거기에서 쓸 SW를 납품해 주시겠습니까.”
일면식도 없는 회사였다. 유통업은 신뢰가 중요한데, 거래 실적 하나 없는 우리를 믿고 연락해 준 것이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었다. 물건을 떼 오려면 큰돈이 필요하다. 소프트뱅크는 당시 무일푼이었다. 나는 조신전기 사장을 찾아갔다. 내 비전과 아이디어를 설명하며 선수금을 청했다. 그 의지, 열정이 통한 걸까. 상대는 쾌히 지원을 약속했다. 사사키 전무의 도움도 컸다. 그가 집까지 담보로 넣어가며 보증을 선 덕분에 다이이치칸교은행으로부터 무려 1억 엔을 빌릴 수 있었다.
나는 한발 더 나아갔다. 5000만 엔을 들여 일본 최대 SW업체이던 허드슨과 독점 판매 계약을 맺은 것이다. 유통의 힘은 제품 수급력에서 나온다. 당장은 5000만 엔이 큰돈이지만 그 투자로 인해 더 큰 기회가 올 것을 확신했다. 계산은 맞아떨어졌다. 첫 매출을 올린 지 1년 만에 소프트뱅크는 매출 35억 엔의 중견 기업이 됐다. 83년 ‘주간 아사히’는 나를 ‘괴물 실업가’로 소개했다. ‘컴퓨터로 거부를 쌓은 신데렐라 보이’. 난 신이 났다. 곧 닥쳐올 불행은 꿈에도 모른 채.
◆ 100번의 노크(100 Knocks) = 손정의 회장이 창업 전부터 구상한 경영 진단 시스템. 특정 사업에 대한 100가지 지표를 그래프화해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도록 했다. 검토 항목을 1만 개까지 늘릴 수 있다. “무엇이든 골이 빠개지게 생각한다”는 손 회장의 치밀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 중앙일보 [창간기획 - 志高く ‘뜻을 높게 !’] 정리=이나리 기자 | 2011.09.22 |
4 · 매일 5분 발명 ... 1억 엔짜리 아이디어 짜내 |
| 지난해 4월 손정의 회장이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탑재한 일본 샤프사의 새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손 회장은 UC 버클리대 재학 시절 개발한 다중어 번역기 기술을 샤프에 판매함으로써 사업 밑천을 마련할 수 있었다. [블룸버그] | |
열아홉 살 대학생 사업가, 교수 · 기업을 설득하다
열아홉 살, 어렵게 들어간 미국 UC버클리대에서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다. 한편으로 발명에 몰두했다. 잡지에서 우연히 본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사진과 기사에 완전히 매료됐기 때문이다. 사진을 오려 매일 들고 다녔다. 잘 때는 베개 밑에 넣어두기까지 했다.
‘이 작은 칩 하나가 인류의 미래를 바꿀 것이다. 나도 여기, 컴퓨터에 걸겠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당시 집에선 내 유학자금으로 학비를 포함해 매달 평균 20만 엔가량의 돈을 보내주었다. 아버지가 쓰러진 상황에서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매일 5분을 발명에 할애하기로 했다. 5분.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걷고 밥 먹을 때조차 책을 볼 만큼 목숨 걸고 공부하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하루 한 가지씩을 고안한 뒤 그중 가장 가능성 높은 것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한 1000만 엔 정도는 벌 수 있지 않을까, 대범한 계획을 세웠다.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쏟아졌다. “비현실적이다” “차라리 학교 앞 카페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라” 는 얘기들이 나왔다. 난 흔들리지 않았다.
‘마쓰시타전기의 마쓰시타 고노스케 창업자도 작은 발명을 토대로 회사를 일으켰다. 나라고 못할 리 없어. 반드시 할 수 있다.’
▲ 공대 교수에게 “당신을 고용하겠다”
정말 매일 하나씩 뭔가를 생각해내기 시작했다.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세 가지 접근법을 택했다. 첫째, 주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찾는다. 둘째, 큰 것을 작은 것으로, 둥근 것을 네모난 것으로 바꿔보는 식의 변환을 시도한다. 셋째, 기존의 것들을 새롭게 조합해본다. 그러기를 100일, 150일…. 대부분 시시한 것들이었지만 그중 하나, 말이 될 법한 것이 있었다. 음성발신기와 사전, 액정화면을 결합한 제품. 다중어 번역기였다.
나는 경제학도다. 엔지니어링 지식이 부족하다. 시간도 없다. 나는 아이디어를 면밀히 다듬은 뒤 다짜고짜 공대의 포레스터 모더 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음성 발신 기술의 권위자였다.
“선생님, 절 좀 도와주십시오. 근사한 아이디어가 있는데 돈도 시간도, 기술도 부족합니다. 절 위해 팀을 꾸려 이 제품을 만들어주세요. 당신을 고용하겠습니다.”
모더 교수는 ‘뭐 이런 미친 놈이 다 있나’ 하는 얼굴로 나를 봤다. 난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협상 같은 건 싫어하니까 일당은 선생님께서 정하세요. 특허가 팔리면 바로 정산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제품 개발에 실패하면 선생님 몫도 없습니다. 공짜로 일한 게 되는 거죠. 이런 조건, 어떠십니까?”
교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황당한 얘기지만 어디 한번 해 보자” 고 했다. 곧 내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한 팀이 꾸려졌다. 이들은 내게 매일 “헤이, 보스. 오늘은 뭘 하지?” 하고 묻곤 했다. 나도 가능한 모든 시간을 짜내 개발에 매달렸다. 내가 유독 관심을 쏟은 건 ‘사용자 시각’이었다. 나 자신 영어실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사전만 찾아선 정확한 영어 발음을 알 수 없었다. 그런 아쉬움을 발명과 연결시킨 게 바로 번역기 아이디어였다. 그런 만큼 ‘기술적으로 얼마나 뛰어나냐’가 아닌 ‘사용하기에 얼마나 편리하냐’ 에 초점을 맞췄다. 1977년 특허를 땄고, 이듬해 시제품을 완성했다. 가장 친한 친구인 홍루(중국 이름 루훙량)와 ‘유니손 월드’ 라는 벤처기업도 차렸다. 78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일본으로 갔다. 특허를 팔기 위해서였다.
▲ 모두가 비웃던 발명, 대박을 치다
먼저 오사카에 있는 마쓰시타전기를 찾았다. 마쓰시타 측은 “이미 제품을 개발 중이다. 관련 특허도 있다” 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산요전기도 방문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식으로 수십 개 회사를 전전했다. 샤프 본사를 찾았을 때 우연히 미국에서 안면을 튼 사사키 다다시 중앙연구소장을 만났다. 사사키 소장은 내 열정을 높이 샀다. 시제품에도 큰 흥미를 보였다. 마침 일본 · 미국 · 영국의 여러 회사가 다국어 번역기 개발에 착수한 상황이었다. 사사키 소장은 선뜻 2000만 엔을 내놨다.
“이건 일·영 번역기 기술에 대한 개발비입니다. 프랑스어·독일어·이탈리아어…, 그렇게 주요 언어에 대한 기술을 개발할 때마다 이만큼씩 더 내놓겠습니다. 희망을 갖고 열심히 해 주십시오.”
그렇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샤프에 넘긴 특허는 79년 이 회사가 출시한 전자사전 ‘IQ3000’ 의 기반 기술이 됐다.
이를 포함해 나는 모더 교수 팀과 한 프로젝트를 통해 최종적으로 1억 엔(현재 환율로 약 15억원) 이상을 벌었다. 애초 목표였던 1000만 엔의 10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에 말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일본의 중고 게임기를 수입했다.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카페 등지에 이 기기를 설치한 뒤 위탁 운영을 했다. 이 사업과 기타 소프트웨어 개발을 통해 다시 1억5000만 엔 이상의 수익을 거뒀다. 모두가 비웃던 발명을 통해 학비, 생활비는 물론 사업 밑천까지 마련한 것이다.
▲ 결혼식 지각, 증인도 급조
스물한 살, 나는 번역기 개발 이상으로 크고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결혼이다. 상대는 미국에서 만난 두 살 연상의 일본인 유학생 유미. 너무 바빠 도서관에서 짬짬이 얼굴을 보는 게 다였지만,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는 그녀가 내 아내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열아홉 살 때 ‘인생 50년 계획’을 세운 뒤 흥분한 나머지 일장연설을 한 것도 그녀 앞에서였다.
나는 유미와 미국에서 약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주례와 증인만 입회한 가운데 간단한 절차만 밟았다.
처음 잡은 날 번역기 개발에 몰두하느라 그만 약속 시간에 늦고 말았다. 주례가 화를 내며 가버려 새로 날을 택해야 했다. 두 번째로 잡은 날에도 결국 지각을 했지만 다행히 주례가 기다려줘 식을 마칠 수 있었다. 증인 섭외를 깜빡하는 바람에 교회 문지기에게 통사정을 하기도 했다.
80년. 마침내 학교를 마친 나는 일본으로 돌아왔다. 요즘도 그렇지만 미국에서 성적이 우수한 대학생들은 대부분 대학원에 진학한다. 나 역시 모교인 UC버클리는 물론 하버드·스탠퍼드·MIT 같은 학교들로부터 전액 장학생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미련 없이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대학만 졸업하면 돌아가겠다고 했던,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켰다.
◆ 마이크로프로세서(microprocessor) = 컴퓨터 시스템의 중앙처리장치(CPU) 기능을 대규모 집적회로 칩에 탑재한 것. 인텔이 1971년 개발한 i4004가 효시다. 이로부터 컴퓨터의 대중화 · 소형화 시대가 열렸다.
▲ 손정의 발명법
① 주변 문제를 해결하는 답 찾아라 ② 큰 것은 작게, 네모는 둥글게 변환 ③ 기존의 것을 새롭게 조합하라
- 중앙일보 [창간기획 - 志高く ‘뜻을 높게 !’] 정리=이나리 기자 | 2011.09.20 |
3 · '변명 따위 않겠어 ... 목숨 걸고 공부한다' |
“어떻게 온 미국인데” … 2주 만에 고교 3년 뗐다
| | 외환 위기 당시인 1998년 6월 나란히 방한한 손정의 회장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한국이 경제 위기를 타개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는 김대중 대통령의 물음에 손 회장은 “첫째도, 둘째, 셋째도 브로드밴드(초고속인터넷)”라고 답했다. 게이츠 창업자 역시 “정답”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2000년대 한국이 인터넷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배경엔 이들의 만남이 있었다. | | | 1974년 초 드디어 미국 유학을 떠났다. 57년 8월생인 나는 아직 만 16세였다. 홈스테이를 하며 6개월간 어학 연수를 받았다. 그해 여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세라몬테고등학교 10학년으로 편입했다. 10학년은 한국 학제로 치면 고교 1학년에 해당한다.
내 마음은 급했다. 정말 어렵게, 무리해서 추진한 유학이다. 어떻게든 빨리 대학에 가 치열하게 공부하고 싶었다. 일주일간 거의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10학년 교과서를 모조리 읽었다. 물론 다 이해한 건 아니다. 그럴 만한 영어 실력이 없었다. 하지만 핵심과 맥락은 파악할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을 찾아갔다.
“10학년 교과서를 다 봤습니다. 11학년 수업을 듣게 해주세요.”
무리한 요구였다. 한데 선생님은 의외로 선선히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 줬다. 11학년 교과서를 모두 구했다. 이어 사흘간 전체를 섭렵했다. 또 교장실 문을 두드렸다.
“11학년도 됐어요. 12학년으로 가겠습니다.”
다시 3일 뒤, 교장선생님께 선언했다.
“고등학교 졸업 검정시험을 치겠습니다.”
이번엔 선생님도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말리지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그리고 할 수 있다면 해 봐라” 고 했다. 속으론 아마 합격할 리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어쨌거나 나는 얼마 뒤 검정시험을 치러 갔다. 눈앞이 캄캄했다. 문제의 양, 해독해야 할 문장이 너무 많았다. 손을 번쩍 들고 감독관에게 말했다.
“전 일본에서 왔습니다. 아직 영어가 서툴러요. 이 시험은 영어가 아닌 학업 수준을 테스트하려는 것 아닙니까. 일영사전을 쓸 수 있게 해주세요. 그게 공정합니다.”
감독관은 한마디로 딱 잘라 “안 된다”고 했다.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더듬거리는 영어로, 내겐 그런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끈질기게 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시험장 밖으로 나갔던 감독관이 돌아와 말했다.
“교육청 허락을 받았으니 사전을 써도 좋다.”
원래 시험은 오후 5시에 끝나도록 돼 있었다. 하지만 내겐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다시 손을 들었다.
“사전을 찾아야 해 시간이 배로 필요합니다. 종료 시간을 늦춰주십시오.”
이번에도 감독관이 졌다. 나는 자정까지 시험을 쳤다. 그리고 합격했다. 미국에 온 지 1년도 안 돼 고교과정을 마친 것이다.
▲ 19세, 인생 50년 계획을 세우다
하지만 바로 명문대에 진학하는 건 불가능했다. 고교 졸업 때까지도 나는 미국에 대학입학자격시험(SAT)이란 게 있다는 걸 몰랐다. SAT 성적 없이도 갈 수 있는 학교를 찾아야 했다. 한국의 2년제 대학에 해당하는 홀리네임스칼리지에 들어갔다. 2년 동안 전 과목 A학점을 받았다. 덕분에 77년 여름 드디어 UC버클리대 경제학과 2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19세. 나는 웅대한 그림을 그렸다. 이름하여 ‘손정의 인생 50년 계획’이다. 20대부터 60대까지, 앞으로 50년 동안 내가 도전할 것들, 이뤄내야 할 것들에 대한 비전을 완성한 것이다. 이후 내 삶은 온전히 그 비전을 현실화하는 데 바쳐졌다. 계획을 바꾼 적도, 목표치를 낮춘 적도, 이를 달성하지 못한 적도 없다. ‘신중히 계획하되, 반드시 실행한다’. 이것은 내가 평생을 두고 지켜온 원칙이다.
▲ 우연히 본 사진 … 감격해 울었다
| | 인텔의 1974년 작 마이크로프로세서 8080. | | | 대학에 입학한 뒤엔 정말 죽기살기로 공부했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당시 나보다 더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없다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수업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항상 맨 앞줄에 앉아 교수 얼굴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화장실에 갈 때도 교과서를 손에 들고, 걸으면서도 책을 읽었다. 밥을 먹을 때도 손에서 교과서를 놓지 않았다. 왼손엔 책을 들고 오른손으로 포크를 움직이며 눈은 교과서에 못 밖은 채 아무 것이나 짚이는 대로 입에 넣었다.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두 눈으로 음식을 내려다보며 여유 있게 식사하는 사치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다. 폐렴에 걸린 줄도 몰랐다. 기침이 계속 터져 나오고 목에선 쌕쌕 소리가 났지만 참고 공부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도 그저 책만 봤다. 쉬는 시간은 오직 잠 잘 때뿐. 그마저도 최소화했다.
변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영어가 잘 안 된다, 돈이 없다, 그런 자기 위안 따위 허락할 수 없었다. 피 토하는 아버지, 오열하는 어머니를 뿌리치고 온 유학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왜 우는 소리를 낸단 말인가. 물론 일본에 있을 땐 나도 불평 많은 학생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선 그럴 수 없었다. ‘학생의 본업은 공부다. 본업 중의 본업에 목숨을 걸자. 죽어라 공부하지 않으면 벌 받을 거야!’ 그런 각오로 나 자신을 몰아쳤다.
그 무렵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꾼 충격적 사건을 접했다. ‘일렉트로닉스’라는 과학잡지에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무슨 미래도시의 설계도 같은 컬러 사진이었다. ‘이게 뭐지? 희한하게 생겼네?’ 다음 페이지를 보고서야 알았다. 인텔이 개발한 마이크로프로세서였다.
기사를 읽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손가락 발가락까지 온몸이 마구 저렸다. ‘인류가 드디어 이런 엄청난 일까지 해냈구나.’ 굉장한 감격을 느꼈다. 이 작은 부품 하나가 인류의 삶을 어떻게 바꿔갈지 상상하니 소름이 끼쳤다. 나는 결심했다. ‘그래, 발명이다. 컴퓨터다. 그 길을 가겠다.’ 소프트뱅크 창업의 씨앗이 뿌려진 순간이었다.
◆ ‘손정의 회장의 삶과 경영’은 다음 주 부터 경제섹션에 주 2회 게재합니다.
- 중앙일보 [창간기획 - 志高く ‘뜻을 높게 !’] 정리=이나리 기자 | 2011.09.17 |
2 · '인간은 같다는 걸 증명해낼 것' ... 가족 · 친척 · 선생님 결국 설득 |
| 2010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애플 개발자회의에서 자리를 함께한 스티브 잡스 창업자와 손정의 회장. 잡스는 유명인사들로 북적대는 행사장에서 기어코 손 회장을 찾아내 줄곧 동행했다. 소프트뱅크는 2008년 최대 이동통신사인 NTT도코모를 누르고 일본 내 아이폰의 판매권을 따낸 바 있다.[블룸버그] | |
“미국 큰 땅서 큰 사업가 되겠다” … 고교 자퇴, 퇴로 끊어
아버지가 쓰러지기 직전 여름, 나는 한 달간 미국으로 영어 연수를 다녀왔다. 눈이 트였다고 할까. 당시 미국은 정말 크고, 힘이 넘치고, 세계에서 문명이 가장 발달한, 한마디로 빛이 나는 나라였다. 료마는 말했었다. “바다 건너 외국에 가 보고 싶다. 미국에 가 보고 싶다. 유럽을 보고 싶다.” 하지만 갈 수 없었다. 그런 대단한 인물이 어떻게든 가보고 싶어 한 곳에 내가 간 거다. 실제로 보니 얼마나 놀랍던지,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엄청나서 나는 한동안 흥분해 어쩔 줄 몰랐다. 큰 사업가가 되기로 한 이상 난 그 땅에 가야 했다. 사업을 일으킬 뭔가를 찾아와야 했다.
▲ “10년 뒤를 위해 … 이 맘은 안 바뀝니다”
예상대로 주변의 반대가 이어졌다. 아버지는 여전히 입원 중이었다. 가정 경제는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었다. 친척들은 나를 나쁜 놈으로 몰아붙였다.
“인정머리 없는 녀석! 아비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마당에 유학이라고? 네 한 놈 잘되자고 가족을 내팽개치냐? 피도 눈물도 없는 놈!”
나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그런 게 아니에요. 국적이니 인종이니, 세상엔 고민만 하는 이들이 널렸지만 난 실제 일본 제일의 사업가가 돼 보이겠어요. 손 마사요시(손정의)의 이름으로 인간은 누구나 같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어요!”
어머니는 매일 눈물바람이었다. 할머니도 울며 불며 매달리셨다.
“가지 마라, 마사요시. 거기가 어디라고…. 한 번 가면 못 돌아온다, 가지 마라!” 어머니에게도 말했다.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니 아버지는 안 죽는대요. 피를 토하기는 했지만 살 수 있단 말입니다. 앞으로 몇 년, 집안을 생각하면 여기서 착실히 공부해야겠지요. 하지만 몇십 년을 생각하면 가족을 위해서도, 또 제 자신이 뭔가 이루기 위해서라도 인생을 바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전 떠날 거예요. 이 맘은 절대 안 바뀝니다.”
학교에도 직접 자퇴서를 냈다. 마침 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참이라 선생님들의 반대가 컸다. 정 갈 거면 휴학을 해라, 자퇴까지 할 게 뭐냐는 설득을 거듭했다. 나는 교장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전 유약한 남잡니다. 미국에 간다지만 영어를 못 해요.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 곤란이 닥치면 좌절하고 마음이 흔들릴 텐데, 그때 돌아올 곳이 있으면 바로 포기할지도 몰라요. 퇴로를 끊지 않으면 어찌 고난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결국 모두 내게 졌다. 가족과 친지들은 십시일반, 최소한의 학비와 생활비를 모아줬다.
▲ 할머니 손 잡고 헐벗은 모국으로
| | 신간 『손정의 미래를 말하다』 (소프트뱅크커머스)에 수록된 손 회장의 할머니 사진. | | | 미국행이 결정된 뒤 나는 할머니와 마주앉았다.
“할머니, 절 끔찍이 아끼시는 줄 잘 알면서 꼴도 보기 싫다고 한 걸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한국에 데려가 주세요. 미국으로 가기 전 제가 그토록 싫어했던 조상의 나라, 고향 땅을 밟아보고 싶습니다.”
할머니는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을 되물었다. 어찌 그런 생각을 다 했느냐며 더없이 기뻐했다. 할머니 손을 잡고 한국에 갔다. 2주 정도의 짧은 여행이었다. 조부모님의 고향은 전기도 안 들어오는 대구 인근의 시골 마을이었다. 내놓을 것이라곤 사과밖에 없는 동네. 그마저도 땅이 척박해서인지 알이 조그마했다. 저녁이면 우리는 촛불 침침한 친척집 안방에서 상을 받았다. 소박하지만 정성 가득한 차림이었다. 할머니는 일본에서 가져온 헌 옷가지들을 내놨다. 팔꿈치가 닳은 스웨터, 기운 자국이 있는 바지. 그런 것들을 마을 사람들은 한껏 기뻐하며 받아주었다. 그 모습을 보는 할머니 얼굴에도 함박 웃음이 피어났다. 이전부터 할머니는 늘 말했었다.
“우리가 이만치나 사는 건 다 다른 사람들 덕분이데이. 아무리 괴롭고 힘들 때에도 도와 주는 분들이 꼭 있었으이까네. 그라이, 절대 남을 원망하믄 안 된데이. 모두 남들 덕분인 기라.”
그런 말씀들, 또 평생 처음 찾은 모국에서 할머니가 보여준 미소와 행동은 내게 큰 영감을 줬다. 뭔가 큰일, 다른 이들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이 더욱 확고해졌다. 내가 누구인지 도움 받은 상대가 몰라도 좋다. 그저 누군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느끼고 행복할 수 있다면. 당시 깨달음은 내가 몇 년 뒤 ‘정보기술(IT)로 인간을 행복하게!’ 라는 소프트뱅크의 창립 이념을 정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 "일본 땅에 산다고 왜 성을 바꿔야 하나”
잠시 딴 얘기지만, 한국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종종 “모국 생각을 자주 하느냐”고 묻는다. 1999년 한국에서 첫 기자간담회를 열었을 때도 한 기자가 비슷한 질문을 했다. “마음의 고향이 어디냐”는 거였다. 나는 짧게 답했다.
“제 마음의 고향은 인터넷입니다.”
상대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비록 일본에 귀화했지만 내가 ‘손(孫)’이라는 한국 성을 고수하기 위해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음을 아는 듯했다. 당연히 “한국”이라거나 “모국”이라는 답이 나올 줄 알았으리라. 한데 내가 ‘손씨’를 고집한 건 꼭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건 내 ‘자존의 문제’였던 것이다. 20년 넘게 ‘손정의’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단지 내 신체가 속한 국가가 일본이라는 이유만으로 왜 그걸 바꿔야 하는가.
난 어디서 태어나고, 교육받고, 살고, 묻히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은 할아버지의 고향, 내 존재의 뿌리.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이런 생각은 다양성의 나라 미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더욱 굳어졌다.
◆ 손정의 부친의 교육열 = 손정의 회장의 부친인 손삼헌씨는 교육열이 높았다. 손 회장이 중학교에 입학하자 대도시인 후쿠오카로 이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손 회장은 그곳에서 명문고 진학률이 높은 조난중학교에 다녔다. 이어 지역 명문인 구루메대학 부설고에 합격해 가족을 기쁘게 했다.
- 중앙일보 [창간기획 - 志高く ‘뜻을 높게 !’] 정리=이나리 기자 | 2011.09.16 |
1 · 번지수도 없는 판잣집 ... 열여섯에 뜻을 품다 |
| 손정의 회장은 일본 정보통신기술(ICT)계의 료마로 불린다. 19세기 료마가 신사상 신문물의 물꼬를 텄듯, 20세기 손 회장은 일본에 디지털 혁명의 불을 지폈다. | |
“한 번뿐인 인생, 뭔가 큰 일을 하자” … 쓰러진 아버지를 뒤로 하고 미국 유학길 올랐다
| |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직접 써 보내온 좌우명 “뜻을 높게 (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 | | 석 달 전, 정말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다. 청와대를 방문했고 기자 간담회도 열었다. 나로서는 한국에서 10년 만에 치른 공식 행사였다. 자리가 끝날 무렵 한 기자가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물었다.
“좌우명이 ‘뜻을 높게!’라고 들었습니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 고민이 참 많습니다. 이들이 뜻을 바로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꾸물대지 않고 답했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라면 마음속에 늘 답을 품고 살아온 때문이다.
“젊음은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어떤 꿈이든 펼칠 수 있지요. 차나 집이 아닌,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꿈을 꾸세요.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고민할 때 세상을 바꾸고 본인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참 재미없고 고리타분한 말이다. 한데 난 정말 그런 생각으로 힘껏 살아 왔다. 방향을 확정한 건 열아홉 살 때이지만 씨가 싹튼 건 열여섯 살 적이었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엔 한 여성이 있다. 내 할머니다.
▲ 돼지 치는 집 아이
할머니는 열네 살 때 일본으로 왔다. 그 나이에 결혼도 했다. 상대는 무려 37세, 내 할아버지다. 대구 태생인 할아버지 역시 열여덟 적에 현해탄을 건넜다. 할머니는 일본 땅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진흙물로 아이들과 허기를 달래는 처절한 나날이었다. 열네 살이라니, 아직 어린애 아닌가. 그 나이에 친척 하나 없는 타향으로 홀로 시집 온 것이다. 할머니는 조선 국적에 일본말도 서툴렀다. 얼마나 막막했을까. 우리 아버지도 중학생 때부터 생업에 나섰다. 7형제 중 하나로 태어나 참 열심히 일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쳤다. 그 와중에 내가 태어났다. 1957년 8월이다.
당시는 그나마 형편이 좀 나아진 때였단다. 비록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지만 집도 있었다. 규슈 사가현의 한인 집성촌에 살았다. 내 호적의 본적지 칸에는 ‘사가현 도수시 고켄도로 무번지(無番地)’라고 써 있다. 번지가 없으면 적지를 말지 굳이 무번지라고 할 건 또 뭔가. 제 땅이 아니라 국철 선로 옆 공터에다 양철지붕을 올리고 판자를 둘러쳐 살았으니 정식으로 호적을 인정해 줄 수 없었던 거다.
부모님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사형제 중 둘째인 나는 온전히 할머니 손에 컸다. 할머니가 날 예뻐해 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할머니가 “마사요시, 나갈 시간이데이-” 하면 겨우 서너 살인 나는 얼른 리어카에 올라타 떨어지지 않으려 꽉 매달렸다. 리어카는 까만색이었고 몹시 미끈거렸다. 반으로 자른 드럼통 서너 개가 실려 있었다. 음식 찌꺼기를 담는 통이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역전 식당에서 먹고 남은 음식을 얻어 와 돼지를 쳤다. 어린 내가 뭘 알겠는가. 난 그저 리어카 타고 나다니는 게 즐겁기만 했다. ‘아, 수레가 미끈둥대고 시큼한 내가 좀 나는구나. 바퀴가 웅덩이에라도 빠지면 꼼짝없이 미끄러지겠구나. 떨어지면 죽겠다’. 그런 생각으로 할머니가 “꼭 잡으래이-” 하실 때마다 리어카에 몸을 찰싹 붙이곤 했다.
그렇게 좋아한 할머니를 철이 들면서 죽도록 싫어하게 됐다. 할머니는 곧 ‘김치’였기 때문이다. 김치는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이다. 그 사실과 관련된 온갖, 내 삶을 고통으로 채웠던 것들. 숨을 죽여 가며, ‘야스모토 마사요시(安本正義·어린 시절 손 회장의 일본식 성명)’란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나날. 재일동포임을 감춰야 한다는 사실이 내겐 더더욱 콤플렉스 였다. 할머니가 너무 싫었다. 일부러 피해 다녔다.
‘차별’에 대해 보다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 건 어린 시절 한때 품은 꿈 때문이었다. 난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다. 미카미 다카시라는 정말 훌륭한 선생님을 만난 영향이 컸다. 꿈을 밝히자마자 아버지는 재일교포로선 교육공무원도 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대뜸 “그럼 귀화시켜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부랴부랴 “초등학교 교사도 훌륭한 직업이지만 넌 그보다 더 크게 될 수 있다. 다른 쪽으로 소질을 키워 보자”며 나를 달랬다. 그날 이후 며칠간 나는 아버지와 말을 끊었다. 고민 끝에 그 꿈은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 유의 일, 그보다 좀 가볍거나 혹은 심각한 아픔과 딜레마가 도처에서 출몰했다.
▲ 아버지 가게 살린 열두 살 고집
꿈 많은 소년이던 나는 그 외에도 화가 · 시인 · 정치가 · 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그림으로 말하자면 지금도 가끔 회의 중 화이트보드에 톰과 제리, 스누피 같은 만화 캐릭터들을 그리곤 한다. 남들이 제법 그럴듯하다고들 한다. 정치가가 되고 싶은 건 차별받는 재일교포 3세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져 봤음직한 생각이다. 시인이란 직업도 아주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그래도 그중 가장 현실적인 꿈은 역시 사업가가 되는 거였다. 나름대로 자질을 보이기도 했다. 열두 살 때 일이다. 그 무렵 우리 집은 제법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부모님이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한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이런 저런 장사에 손을 댔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작은 카페를 열었다. 한데 어린 내 눈에도 도무지 승산이 없어 보였다. 전철역에서 먼 데다 번화가도 아니었다. 커피 원료를 공급하는 회사마저 물건을 대길 꺼렸다. 장사를 시작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내가 꾀를 냈다. 아버지에게 “공짜 쿠폰을 잔뜩 찍어 역 앞에 뿌리자” 고 했다. 아버지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 꺼내지도 마라”고 했다. 하지만 내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1000장을 찍어 나눠줬다. 커피공급업자를 초대한 날, 덕분에 카페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놀란 공급업자들은 아주 싼값에, 좋은 결재 조건으로 물건을 대주기 시작했다. 초기 비용은 많이 들었으나 얼마 안 가 투자금을 모두 회수할 수 있었다. 가게는 갈수록 번창해 몇 년 뒤 상당히 높은 값에 매각했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이다. 가족의 위기였다. 한 살 위 형은 장남의 책임을 다하려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어머니와 함께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아버지 병원비를 댔다. 집안의 쇠락을 목도하며 내 마음도 급해졌다. 무슨 수를 쓰든 여기서 빠져나가리라 마음먹었다. 바로 그때 사카모토 료마를 만난 것이다.
▲ 사카모토 료마, 가슴에 불을 지피다
마음을 먹었으면 실천해야 한다. 한 번뿐인 인생, 뭔가 큰 일을 하자. 일본 제1의 사업가가 되자. 나는 단단히 결심했다. 가족의 어려움을 중장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더불어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한다. 이어 미국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이건 말하자면 료마의 ‘탈번(脫藩)’ 같은 행동이었다. 지난해 일본에서 경이적 시청률을 기록한 NHK 드라마 ‘료마전’에도 이를 묘사한 장면이 나온다. 료마는 탈번을 고민한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실행하지 못한다. 이때 료마의 누이가 말한다.
“료마, 가라! 너는 초야에 묻히고 말 재목이 아니다. 나가서 더 큰 일을 하거라. 그걸 위해서라면 우리는 괜찮다. 떠나라!”
그 장면을 보며 펑펑 울었다. 눈물이 쏟아져 애를 먹었다. 내가 그토록 하염없이 운 건 그 스토리에 내 지난날이 겹쳐 떠오른 때문이다.
▲ 내 꿈은 료마가 키웠다
내 나이 열여섯 살 때 한 남자를 만났다. 내 인생의 좌표가 된 인물, 사카모토 료마다. 어느 날, 과외 선생님이 생소한 작품 한 편을 권해 줬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쓴 역사소설 『료마가 간다』였다.
정신이 번쩍 났다. 소설의 주인공 사카모토 료마는 최하급 무사로 태어났으나 강력한 의지와 비전으로 일본 근대화를 이끈 개혁가이자 탁월한 비즈니스맨이다. 그 삶에 비춰 보니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차별이니 인종이니,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자체가 얼마나 시시한지 깨달았다. 한 번뿐인 인생을 이렇게 대충 흘려보내도 되는 건가!
난 다르게 살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때까지는 내가 이루고 싶은 게 뭔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뭔가 큰일을 하고, 수많은 사람을 돕고 싶다. 인생을 불사를 만한 일에 이 한 몸 부서져라 빠져들고 싶다 ’ 는 결심만큼은 가슴 깊이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나나 내 가족의 사리사욕이 아닌, 수천만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뭔가 큰일. 금전욕 따위가 아니다. 많은 이가 “그 사람이 있어 다행” 이라 말할 수 있을 만한 값진 일을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바로 열여섯 소년이 품은 삶의 포부였다. 좌우명 ‘뜻을 높게!’ 는 그렇게 내 인생의 중심이 됐다.
◆ 손정의와 소프트뱅크 =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디지털 시대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 꼽힌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도 막역한 사이인, 세계 정보기술(IT)업계의 리더 중 한 명이다. 미국 UC 버클리대 경제학과 졸업 뒤 1981년 일본에서 소프트뱅크를 설립했다. 95년엔 세계 최대 컴퓨터 전시회인 컴덱스를 8억 달러에 인수한다. 이를 인연으로 야후에 투자한 뒤 96년엔 일본에 야후재팬을 설립해 인터넷 열풍을 주도했다. 2001년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했다. 2004년엔 재팬텔레콤(현 소프트뱅크텔레콤), 2006년에는 일본 3위 이동통신업체 보다폰KK(현 소프트뱅크 모바일)를 1조7500억 엔(18조원)에 인수해 산업 판도를 뒤집었다.
◆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 시코쿠의 최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나 서구식 해군 양성과 무역, 근대정부 수립에 앞장섰다. 31세에 암살당했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를 통해 일본의 국민 영웅으로 자리매김했다.
◆ 탈번(脫藩) = 에도 시대 일본의 무사가 소속된 지역인 번을 떠나는 행위를 말한다. 번주(주군)를 배신한 것으로 간주돼 본인이 중벌을 받음은 물론 가족에까지 해가 끼쳤다.
- 중앙일보 [창간기획 - 志高く ‘뜻을 높게 !’] 정리=이나리 기자 | 2011.09.15 |
| 손정의 회장은 미 UC 버클리대 경제학과 재학 당시 학비 마련을 위해 발명에 몰두했다. 왼쪽 사진은 손 회장(가운데)과 그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데 발벗고 나선 공대 연구원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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