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426. 묵상글 들 ( 부활 4주 월요일-국경없는 사랑. 등 )
----------------------------------------------------
210426.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4주 월요일-국경없는 사랑
오늘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반일 종족주의>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생각이 났습니다.
이 말은 한 극우 인사가 쓴 책 제목이기도 한데
지금 우리나라의 일부 좌파 민족주의의 주장은 건전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반일 감정에 바탕을 둔 종족주의에 불과하다는 주장입니다.
저는 이 인사가 얘기하는 식민지 근대화론 그러니까 일본의 식민지 덕분에
우리나라와 아시아 나라들이 근대화되었다고 하는 주장이나
위안부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저지른 범죄가 아닐뿐더러 스스로 위안부가
된 사람도 있다는 주장 등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인사의 비판대로 반일이 나쁘다면 친일은 더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이 지적하는 반일 감정적 민족주의는 문제점이 있다고
인정치 않을 수 없고 저도 그런 비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임을 인정합니다.
지금은 그래도 전보다 나아졌다고 할 수 있는데
과거의 저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수주의자였고,
당연히 비 복음적이고 비 프란치스칸적이었지요.
자기 민족을 진정 사랑하는 올바른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도 존중하는데
저는 기본적으로 다른 민족에 대한 존중이 부족했고 일본이나 미국처럼
우리나라 우리 민족을 불행케 한 나라들은 증오까지 했습니다.
올바른 민족주의가 아닌 민족주의 그러니까 앞의 인사가 표현한 종족주의는
이렇게 다른 민족 특히 우리를 불행케 한 민족에 대한 혐오가 있고,
그런 나라는 망하거나 안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지요.
그래서 요즘 제가 매우 걱정하는 것이 한, 중, 일 삼국 간에 혐오주의가
커져 가고 있다는 것인데 특히 제가 조선족 동포를 포함한 이주님들을 위해
일하는 관점에서 반중 감정 때문에 우리 조선족 동포에 대해 적대감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특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우리 초기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이런 모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스라엘주의랄까 율법주의적인 선민의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부 신자가 할례받지 않은 사람과 율법에 금한 음식을 같이
먹은 것 때문에 베드로를 비난하고 나선 것인데 이들이 비록
일부 신자일지라도 이 문제를 잘 해결하지 않으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방향성에서 결코, 작지 않은 큰 문제가 될 그런 거였지요.
앞으로 그리스도교가 이스라엘의 유대교에 갇힐 것이냐,
이스라엘의 유대교를 넘어 이방인들과 모든 민족에게로
확장될 것이냐, 그 미래를 좌우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베드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이 문제를 잘 해결하고,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교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그 방향도 잘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령께서는 나에게 주저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이르셨습니다."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초기 일부 신자들은 성령을 자기들만 독점하려고 했던 것이고,
그럼으로써 감히 성령을 자기들 안에 가두려고 했던 것인데,
그런데 하늘의 비와 햇빛이 민족과 국경을 가르지 않고 내리듯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선물도 국경과 민족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고,
이 하느님의 사랑을 지니고 있다면 국경 없는 사랑을 실천해야 함을
다시 한번 명심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210426.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나는 양들의 문이다: 정체성, 개방성 그리고 보편성
오늘 미사의 들려오는 말씀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기준이 되는 정체성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개방성 그리고 모두가 해방되는 목표가 되는 보편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묵상거리를 줍니다.
오늘 복음이 들어 있는 요한복음 10장은 이스라엘의 유목 관행과
양의 습성에 빗대어 예수님의 삶을 소개하는 대목입니다.
보통 목자는 양들을 따라가기보다 인도하며, 양들이 헤매게 두지 않고
그들을 모아들이는데, 예수님께서도 목자 잃은 양떼와 같은
군중을 찾아다니시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느님의 계시를 정확하게 알려주심으로서
양떼인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 나라에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양들이 들어가야 할 문은 성경이요 그 성경에 담긴 계시였으며
또한 그 계시가 지목한 예수 그리스도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전에 출현했던 여러 예언자들과는 달리,
양들의 문으로 자처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분 이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나 그분 이후 교회의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으로 인도해야 하는 목자들이었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으로 들어가게 하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게 하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였습니다.
양떼를 문으로 인도하는 목자를 양들이 따라갈 수 있는 이유는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낯선 목소리를
알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낯선 사람은 따라가지 않습니다(요한 10,4-5).
예수님의 공생활에서 바리사이 유다인들이 그분의 복음선포 활동에 대해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방해를 하다가 기어코 죽인 이유는 그들이
그분을 목자로 여기지도 않고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들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으로 인하여, 조상대대로 하느님을 섬겨 왔으면서도
정작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
배척한 유다인들과 그 지도자들은 단죄를 받은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발을 씻어주시며
섬김이야말로 양들을 부르고 이끄는 목자의 목소리임을 당부하셨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프란치스코 현 교황은 교황직에 오른
그 해 바티칸 베드로 대성전에서 성유축성미사를 봉헌하며
‘양 냄새나는 목자’가 되라고 부탁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는 그 미사를 공동으로 집전한 로마 교구 사제들에게만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가톨릭 사제들에게 다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 가톨릭 신앙의 기준이 되는 정체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되,
서로 섬기는 삶의 양식이 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섬김 대신 권위주의로 평신도들을 대하는 목자는
참목자의 반열에서 탈락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거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톨릭교회가 아닌 다른 문으로 들어가려는 이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독서의 베드로 사도의 체험과 고백이 적중합니다.
그것은 개방성입니다. 순혈 유다인으로서 예수님의 수제자가 된 베드로는
사도가 되어서도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율법이 금한 대로
이방인들을 전혀 만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성령께서 나타나시어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깨우쳐 주셨습니다(사도 11,9). 즉, 예수님께서 가르치셨고 몸소 보여주신 바대로
섬김으로 나타나는 사랑이 모든 것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들 것이므로,
개방적인 태도로 이방인들을 끌어안으라는 말씀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신념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신념의 결을 무시하고 개방성만 앞세우면
자칫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무신론자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은 깨끗한 양심을 존중하며
의롭게 살고자 하지만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종교인들 가운데
불자(佛子)들은 성현이시지만 어디까지나 사람인 부처님을
하느님처럼 섬기고 있으며, 민족 종교의 여러 종교인들은
우리 민족 역사에 아로새겨진 신앙으로 하느님은 믿어도
예수님은 믿지 않고, 개신교 성도들은 예수님을 알지만
성사 없이 말씀으로만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다양한 종교 형편에서, 베드로를 이끌어 주신
성령의 말씀은 다양성 안의 일치 원칙으로 나타났습니다.
“필요한 일에 있어서 일치하고, 불확실한 일에 있어서 자유를 존중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사랑을 보존해야 한다.”(사목헌장, 92항)는 것입니다.
가톨릭 그리스도인들로서는 하나이요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가 가톨릭교회임을 고백하면서(교회헌장, 8항),
우리가 물려받은 정통성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정체성을 바탕으로 개방성과 함께 보편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섬김에 바탕하되 더욱 열린 사랑이 필요합니다.
즉, 무신론자들로부터는 의로움을 배우고, 민족 종교인들로부터는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이 하느님을 섬겨온 그 역사적 전통을 배우며,
불자들로부터는 부처를 닮으려는 치열한 수행 기풍과 진지한 구도정신을 배우고,
개신교 성도들로부터는 성경과 말씀에 대한 열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대한민국 안에서도 모든 사회적 갈등들이
민주적으로 해소되어 궁극적으로는 일치의 길로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
210426.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글을 써야 하는데 도무지 써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노트북과 책 몇 권을 들고서 카페를 찾아갑니다. 익숙한 제 방을 벗어나 새로운 공간에 가면 써지지 않던 글의 실마리를 찾게 됩니다.
그날도 글이 써지지 않아서 카페를 찾아갔습니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가지고 간 노트북과 책을 펼쳐놓는데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친한 신부의 문자였습니다. 다음은 그 신부와의 대화 내용입니다.
“뭐 해?”
“일해.”
“어딘데?”
“카페.”
“일하는 것 아니네. 쉬는 거네.”
글 쓰는 것은 제게 일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카페에 앉아 있다는 것을 친한 신부는 노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어디에 있느냐보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를 봐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저 역시도 이런 식으로 섣부르게 바라보고 판단할 때가 많았음을 반성합니다.
사람에게도 또 하느님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면서도 이러쿵저러쿵 많은 말을 하는 우리였습니다. 그 판단이 맞을 때도 있겠지만, 틀릴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좀 더 상대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바라볼 수 있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따라가기보다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양들이 헤매게 두지 않고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모읍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이런 모습으로 양들인 우리를 인도하고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착한 목자의 역할을 가장 성실하게 이행하십니다. 그렇다면 양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실하게 착한 목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목자를 따라서 우리 역시 성실히 주님을 따르는 착한 양이 되어야 합니다. 양들은 자기들 목자의 소리만 들을 뿐 낯선 이의 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목자이신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이 겸손입니다. 판단하고 단죄하는 역할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주님의 뜻을 따라는 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이런 역할에 충실한 이에게만 주님께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
진정한 사랑은 우리에게 우리의 생활 방식, 판단 기준, 우리 선택의 가치들을 되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
관계의 열쇠.
정치인 벤저민 프랭클린에게는 자신을 적대하는 경쟁자가 있었습니다. 프랭클린은 이 경쟁자와의 관계를 늘 풀고 싶었지만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편지를 써서 정중하게 부탁을 하나 했습니다.
“당신이 소장한 책 한 권을 빌려주십시오.”
그는 곧바로 책 한 권을 받았고, 며칠 뒤에 고맙다는 메모와 함께 돌려주었습니다. 그 뒤 경쟁자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백악관에서 만나면 그 경쟁자가 먼저 예의를 갖춰 인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평생 진한 우정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경쟁자가 마음을 연 것은 프랭클린이 먼저 도움을 청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도움을 청하면, 상대방이 내게 ‘친화적 동기’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때 자연스럽게 친밀감이 느낄 수 있게 되고 기쁜 마음으로 도와준다는 것이지요.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낮춰서 무엇인가를 먼저 부탁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겸손과 용기가 관계의 열쇠가 됩니다.
----------------------------------------------------
210426.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나는 양들의 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도둑의 비유”를 들려주신 다음에 이를 알아듣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문’은 드나드는 통로입니다. 곧 ‘문’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이 “문”은 “드나드는 문”으로 하나의 문이지만 두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한 방향은 밖에서 “양 우리”로, 다른 한 방향은 우리 안에서 밖으로 향합니다.
한편, 이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수평적 이동의 통로로서의 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늘과 땅이라는 수직적 이동의 통로서의 문이기도 합니다. 곧 이 “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내려오고, 인류의 사랑이 하느님께 올라갑니다. 그러니 생명과 구원의 문을 말합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한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가는 문으로서 그 문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로 들어간다.”
또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성경이 문’이라고 해석하며, ‘말씀의 문’을 통해 생명이 드나듦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그 드나듦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동행하는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우리가 “드나드는 문”이라 하십니다. 당신을 통해 들어가고, 또한 당신을 통해 나가는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드나들고 있는가?
혹은 들어가는 문으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들어가면, 나갈 필요가 없는 문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문’은 오히려, 다시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그렇습니다. 예수님이란 이 “문”은 ‘들어오는 문’이요, 동시에 ‘나가는 문’입니다. 그러기에, 만약 우리가 ‘양 우리’ 안에 머물러 편안이 자기만의 안식을 누리고자 한다면, 목자를 따르지 않는 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4)
그렇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밖으로 이끌어 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주와 편리로부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생명과 구원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요, 먹이는 일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도 그처럼 ‘성문 밖’으로 나가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는 이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 “(문을)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양’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교회의 사명을 이런 말씀으로 일깨우셨습니다.
“안락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길거리로 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손에 흙을 묻힌 더러워진 교회가 되기를 나는 꿈꾼다.”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9)
주님!
저를 받아 주소서! 당신 풀밭에서 생명의 풀을 뜯게 하소서.
당신 기쁨이 차오르고 당신 사랑에 깃들게 하소서.
제 생명이 당신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게 하시고,
당신의 집에 저의 거처를 마련해주소서. 아멘.
----------------------------------------------------
210426.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경청하고 식별한 다음 행동하라
한 신부님이 많은 돈과 귀한 보석을 선물로 받았답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재물이 생겨서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우선 보관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러다 ‘성체를 모시는 감실에 두면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리라’는 기발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불안하여 감실 앞에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시느니라.”하고 써 붙였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아침에 나와 보니 누군가 감실 문을 열고 보석을 몽땅 가져간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쪽지에다가“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이곳에 안 계시는 도다”하고 써 놓았더랍니다.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고,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놓으면 주님께서 더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담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그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공것이라면 비상도 먹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공것이라면 매우 좋아하여 가리지 않고 덤빈다는 말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으로 은총을 주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 달아 들지 않는지 안타깝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최고는 아닌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풀밭을 얻으려 한다면 먼저 예수님을 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며, 충만한 생명을 체험하는 지름길입니다. 따라서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 곧 미사 안에서 성체를 자주 모셔야 합니다. 자주 성체가 모셔져 있는 감실 앞에 머물러야 합니다. 사실 “성체 조배는 예수님과 살기 위한, 예수님 안에서 참된 인격을 형성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알베리오네 신부)이 됩니다. 성체 조배를 통하여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신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들음은 행동, 곧 실천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기존의 삶에 안주하고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목소리를 알아듣고 익숙해지려면 그만큼 함께한 시간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행동은 경청과 식별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식별을 거치면 근심, 걱정, 슬픔과 좌절, 실망, 불안을 조장하는 목소리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스승은 항상 당당하고 참된 제자는 그를 따릅니다. 스승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저 따를 뿐입니다. 따름으로써 스승을 완전하게 알게 됩니다. 세상 속의 헛된 목소리를 경계하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구원의 길로 가는 이정표이며 등대입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님, 밥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충실히 닮고 따르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10426.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0,1-10: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1절) 목자가 드나드는 ‘문’은 바로 ‘성경’을 의미한다. 성경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데려다주고 우리에게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를 그분의 양 떼로 만들어 주며 우리를 이리떼로부터 막아준다.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시니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문이시고, 우리를 보살피는 목자이시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2절) 목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그리스도의 겸손을 잘 아는 사람이다. 양들의 목자는 가르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며, 문을 이용한다. 온 마음으로 삶으로써 우리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는 다른 모든 이에게 그들이 배불리 먹고 이후로도 계속 먹어야 할 말씀의 양식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을 양들처럼 풀밭으로 인도한다. 그 목자는 말씀, 곧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멀리해야 하는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가르치며 인도한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준다.”(3절) 문지기는 주님이시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문’으로 또는 ‘목자’로 표현하신다. 문지기는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그러니 당신을 열어주는 이는 당신 자신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 보여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문이시며 진리이시다. 문을 열어주시는 분이 우리 모두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목자는 이들을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고 그들은 목자를 따른다. 양들은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목소리를 지닌 목자를 따른다. 이 목자는 양들을 앞에서 이끄신다. 양들 앞에서 양들이 따라가야 할 곳으로 앞장서서 간 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 다시는 죽지 않는 주님이시다. 이 양들은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도망친다. 우리는 목자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 주님께서 목자로서 문을 통해 우리를 부르실 때, 그분을 따라야 할 것이다.
“나는 문이다.”(9절)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문이시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백성이 그 문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들어가게 된다. 곧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하여 모두가 하느님과 일치하게 된다. 그분은 길이시다. 당신 자신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는 문이시며, 우리를 물가에서 쉬게 하시고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여 그곳에 머무르게 하는 목자이시다(시편 23,2 참조).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10절) 이것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을 말한다. 이러한 살아있는 믿음으로 그들은 우리로 들어가고 생명을 얻는다.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로마 1,17 참조).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이 문을 통하여 들어감으로써, 즉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된다. 진리를 통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
210426. 부활 제4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 7)
예수님께서는
양들의
문(門)이시다.
양들을
돌보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예수님이라는
문(門)을 통하여
나와 너는
우리로
연결되며
우리의 진짜
모습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을 통하여
건강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자아중심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조화와 균형의
삶이었다.
빛과 어둠
강점과 약함까지
아우르는
삶이셨다.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건강한 삶을
다시금
배워나가게 된다.
마음의
안과 밖을
보게 된다.
신뢰해야
할 것과
내려놓아야
할 것을 또한
구분하게 된다.
문(門)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다.
상호적인
관계이다.
양과 주님의
관계처럼
존중과 사랑의
관계이다.
존중과 사랑은
양들의 문처럼
분리가 아닌
풍요로운
나눔이다.
양들의 문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양들의 마음을
헤아려주시며
양들의 길을
걸어가게 하신다.
양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며
양들과 함께
지내시는
예수님이 계신다.
양들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일치를
이루게 된다.
좋은 관계가
된다.
건강한 관계가
된다.
----------------------------------------------------
210426.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0,1-5).”
이 말씀은, 거짓 메시아, 거짓 사도, 거짓 목자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그래서 “양들은 그의(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너희는 목자의 말을 알아들어야 한다.”로,
“양들은 그를 따른다.”는 “너희는 목자의 뒤만 따라가야 한다.”로,
“낯선 사람은 피해 달아난다.”는 “너희는 목자의 뒤를 따르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낯선 사람’이라는 말은, ‘주님의 말씀’과 동떨어진 개인의 주장들,
사이비종교의 이론들, 이단 사상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이런 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누구에게도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이를 속일 것이다(마태 24,4-5).”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또는 ‘아니, 여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큰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해 둔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광야에 계시다.’ 하더라도 나가지 마라.
‘보라, 골방에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마태 24,23-26).”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것처럼 거짓 그리스도, 거짓 예언자, 자칭 재림 예수가
사람들을 속이는 일은 끊임없이 일어났고, 오늘날에도 많이 있습니다.
‘속이는 자들’이 많다는 것도 문제이고, 속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7-10).”
“나는 양들의 문이다.” 라는 말씀과 “나는 문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구세주이신 분이며, 목자이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다른 구세주도 없고, 다른 목자도 없습니다.
즉 다른 문은 없습니다.
<이 말씀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라는 말씀과 뜻이 같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도둑이며 강도인 자들의 말을 듣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가짜 메시아들을 가리킵니다.
가짜 메시아, 또는 거짓 예언자들이 도둑이며 강도인 이유는,
1) 목자 행세를 하면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은 하지 않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만 하기 때문입니다.
2)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 않고 ‘멸망의 길’로 데리고 감으로써,
‘구원의 길’로 간다면 얻게 될 생명을 얻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단자, 가짜 메시아, 거짓 예언자는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생겨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여러분 가운데에도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끌어들이고,
심지어 자기들을 속량해 주신 주님을 부인하면서 파멸을 재촉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들의 방탕한 행실을 본받아, 그들 때문에 진리의 길이
모욕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또 탐욕에 빠져, 지어낸 말로 여러분을 속여
착취할 것입니다(2베드 2,1-3).”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경고합니다.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이들은 사람을 속이는 영들과
마귀들의 가르침에 정신이 팔려 믿음을 저버릴 것입니다.
양심이 마비된 거짓말쟁이들의 위선 때문입니다(1티모 4,1-2).”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2티모 4,3-4).”
세속의 물질주의 풍조에 물들어서 영혼 구원보다는 몸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더 찾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하고, 듣기 싫은 말은 안 들으려고 하다가
이단 사상에 빠지거나, 거짓 교사들의 말에 현혹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듣기 싫어하고, 어떻게 하면 복을 많이 받을 수 있는가에
관한 말만 듣고 싶어 하고, 그래서 그런 주제로만 강의를 하거나
강연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모습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런 문제(상황)에 대해서 ‘성경공부’를 해법으로 제시하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 성경공부에도 위험성이 숨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 그 가운데에는 더러 알아듣기 어려운 것들이 있는데,
무식하고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자들은 다른 성경 구절들을 곡해하듯이
그것들도 곡해하여 스스로 멸망을 불러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2베드 3,16-17).”
(이 말은 원래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대해서 한 말인데,
성경공부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왜곡하고, 변조하는 것은,
‘주님 말씀’을 모독하는 죄, 즉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가 될 뿐만 아니라,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로 빠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단자들이 항상 성경 해석을 앞세운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탄도 예수님을 유혹할 때에 성경 구절을 인용했습니다(마태 4,1-10).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부터 먼저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하고,
그 가르침 안에서, 그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
210426.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미국의 대통령이 대학의 졸업식에서 하는 연설을 들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이 있었습니다. “미국은 백인, 흑인, 아시안, 히스패닉이 함께 만들었습니다. 비록 피부의 색은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의 피는 붉은 색입니다.” 우리 모두의 피는 같은 붉은 색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역설적으로 미국이 가지고 있는 인종에 대한 차별을 생각하게 됩니다. 작년에는 “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를 많이 들었습니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경찰의 과도한 폭력으로 흑인인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올해는 "Stop Asian Hate"라는 구호가 등장했습니다.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폭행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21세기에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한다면 이는 미성숙한 행위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입니다. 봄이 오면 여기저기에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꽃들은 아무런 차별 없이 꽃밭을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도 함께 어우러져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아름답고 푸른 지구는 태양계에 속해 있습니다. 태양계는 우리은하에 속해있습니다. 이런 은하가 우주에는 참 많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구는 우주에서 보면 너무나 작은 먼지와 같습니다. 이렇게 작은 지구에서 피부의 색으로, 이념으로, 세대로, 계층으로, 성별로 차별을 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부질없는 행동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야기를 하십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뒤를 이어 조선의 두 번째 사제가 되었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두 가지를 주장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양반과 천민이 없는 평등한 세상입니다. 서양의 학문을 배웠던 최양업 신부님은 바로 그런 세상이 발전하는 것이고, 그런 나라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이 되셨고, 사람들의 생각과 사람들의 언어를 배우셨듯이, 선교사들은 먼저 선교해야 하는 나라의 문화와 전통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충돌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도 이런 문제들이 자주 발생하였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도들은 서로 생각이 많이 달랐습니다. 같은 유대인이었고, 같은 전통과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사도들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체험한 ‘예수님’을 전하려고 하였고, 유대인들은 사도들의 말을 알아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전통과 자신들의 신념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대화를 하지만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거의 모든 일에 합의를 보지 못하는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사목적인 결정을 하였습니다. 사람을 해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면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결정을 통해서 교회는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을 지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바닷물에 녹아 있는 소금처럼 우리가 희생과 사랑으로 녹아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
210426.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의 목자이자 문이신 예수님
- 벽壁이 변하여 문門으로 -
어제는 부활 축제 시기에 걸 맞는 참 아름다운 날이었고 여러 장면도 사진에 담았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독점하거나 파괴하거나 오염시키는 것이 정말 큰 죄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듯 자연도 사랑해야 하는 사람의 삼중 계명이 절실합니다. 참 많은 이들이 하느님 집이자 하느님의 놀이터인 아름다움 가득한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수도원의 자랑은 수도자들의 숙소만 빼고 모두를 개방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두 형제와 나눈 맛좋은 덕담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저의 책 주문을 도맡아 해결해 주는 문 도미니코 수사가 주문할 책이 없는가 물었습니다. “문 도미니코 성인전 주문하고 싶네요.” 딱히 주문할 책이 없어 얼른 수사님의 이름을 댔더니 어이 없어 하면서도 행복해 하는 표정이 담박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성인이 될 것이니 내심 좋은 자극이 됐을 것입니다.
낮기도후 눈부시게 아름답고 찬란한 날씨와 주변 경관에 감동한 김 안토니오 수사가 저에게 시 한수 쓸 것을 권했습니다. 순간 내 성이 ‘감’씨라면 이름을 ‘동한’, 하여 ‘감동한’이라 하고 싶었습니다. “안토니오 수사님 자체가 참 좋은 시인데 새삼 무슨 시가 필요하겠습니까.” 화답의 덕담에 굉장한 말씀이라 하면서 안토니오 수사는 행복해 했고 저 또한 뒷맛이 참 좋았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 최고의 시이자 살아있는 복음서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갈수록 참 좋은 시같은 인생에, 살아있는 복음서같은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오늘같은 자연 역시 하느님 최고의 시이자 그림이요 자연성서自然聖書임을 깨닫습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자기 계시 일곱가지를 아시는지요?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나는 생명의 빵이다
2.나는 세상의 빛이다
3.나는 양들의 문이다
4.나는 착한 목자다
5.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6.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7.나는 참 포도나무다
우리의 모두인 파스카 예수님 얼마나 좋습니까! 이런 예수님을 몰라 무관심으로 떠나 살기에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요 심판인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극진히 한결같이 사랑하여 알고 닮아갈 때 참 행복의 구원이자 참 나의 실현입니다. 이렇게 살라고 세상에 보내신 우리들입니다. 세상살이 끝내고 예수님 앞에 갔을 때 예수님은 우선 우리 영혼의 얼굴이 당신을 닮았나 검사하실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구원의 기회요 문입니다.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만 열리면 바로 여기가 착한 목자 예수님 계신 구원의 하늘길이요 하늘문이요 하늘집입니다. 어제 하느님의 집 수도원의 입구를, 또 수도원길을 사진 찍으며 하늘문이자 하늘길이신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당신의 일곱가지 자기 계시중 둘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이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며 우리를 하나하나 기억하시고 부르십니다. 과연 주님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고 주님을 잘 따르는 삶인지 성찰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하는데 과연 여러분들은 잘 깨닫는지요. 이어지는 문이신 예수님의 말씀도 참 은혜롭습니다. ‘누구든지’라는 말마디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결코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구원의 하늘문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얼마나 좋습니까! 바로 이런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매일 구원의 문을 드나들며 예수님 생명으로 가득 채우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벽이 없는 온통 사면팔방 열려 있는 구원의 문, 생명의 문, 진리의 문입니다. 늘 옆에 계신 이런 주님을 무지에 눈멀어 보지 못하고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하는 어리석은 중생들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갈 때 우리의 벽은 사라져 우리는 점점 주님의 문이 되고, 착한 목자 예수님처럼 마음도 점점 너그러워지고 자비로워질 것이니 이것이 정녕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바로 여기에 많이 근접한 사도행전의 베드로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중에 있었던 일을 소상히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분명 무아경속의 환시 체험을 통해 그의 마음은 활짝 열린 문이 되었을 것이고 착한 목자의 너그러운 마음으로의 변화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하느님께는 모두가 깨끗한 구원의 대상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무지한 중생들에게 성속의 차별이 있고 본토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있을 뿐 하느님께는 이런 차별이 없고 모두가 거룩한 땅의 거룩한 백성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고백과 이를 깨달아 화답하는 이들의 고백도 참 은혜롭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에게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잠잠해진 이들의 고백 또한 참 좋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 바로 늘 우리에게 열려 있는 하늘길이자 생명길인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 예닮의 여정을 통해 날로 우리의 벽은 점점 주님의 문이 되고 너그럽고 자비로운 착한 목자 주님을 닮아가게 되니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당신의 거룩한 산,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게 하소서.”(시편43,3). 아멘.
----------------------------------------------------
210426.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팔레스티나 지역의 목동들에게는 두 종류의 큰 위협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리나 늑대 같은 야생 짐승의 출몰이고, 다른 하나는 순식간에 나타나 양을 둘러메고 사라지는 강도들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양 떼를 이끄는 목동들은, 어두워지면 임시 울타리를 세워 만든 우리에 양들을 불러들여 보금자리를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양 떼가 우리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취약한 부분은 문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 불을 피우거나, 개를 풀어 두거나, 목동이 문지기가 되어 양들을 지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나는 양들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이신 당신을 통하여 양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가면 들짐승이나 강도들로부터 보호받아 생명을 얻고, 또 문으로 드나들며 풀을 찾아 먹게 됨으로써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문은 양들에게 생명과 풍성함을 주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에게, 특히 다른 이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새로운 기준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는 기준을 통하여 양들에게 가고자 한다면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나의 기준에만 맞추어 양들을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의 욕심과 수준에 맞추어 양들을 대하고 사랑한다면, 그 양들을 풀밭으로 보내 양식을 얻게 하거나 울타리가 되어 보호해 주기는커녕 그 양들에게 상처만 줄 것입니다. 마치 강도처럼 양들을 훔치고 죽이고 씨를 말리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의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준으로, 곧 아픈 이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고 애끊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장 낮은 이를 찾아 나서시는 예수님의 눈으로, 목숨까지 내어 주시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착한 목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나의 기준에서 사랑한다고 말하는지, 예수님의 기준으로 말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
210426.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목자의 목소리를 들려 주십니다.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3)
목자도 자기 양들을 잘 알지만, 양들도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목자가 양들을 이끌 때 그 목소리에 귀를 쫑끗 세우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 목소리를 잘 듣고 순히 따르면 풀밭도 나오고 샘터도 나왔지요. 맹수나 절벽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양들에게 목자의 목소리는 생명과 직결됩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게다가 목자는 아무리 양들의 수효가 많아도 하나하나를 구별할 만큼 애정이 깊습니다. 각자의 이름도 기억해, 하나하나에게 알맞게 붙여주고 각자의 필요에 맞게 돌보지요. 목자에게 양떼는 그저 한 무리의 집단이 아니라 개별적 관계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입니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알고,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압니다. 서로에 대한 이 앎은 사랑과 존중, 신뢰와 순종으로 탄탄히 엮여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그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사도 11,9)
베드로가 기도 중에 주님의 환시와 목소리를 체험합니다. 이방인과의 접촉이나 식사를 부정한 일이라 배워왔고 지켜온 독실한 유다인으로서 베드로는 적이 당황하고 저항도 해보지만 결국 이 말씀에 순종하지요. 이 목소리가 주님의 목소리임을 알아들었기 때문입니다.
"야포로 사람들을 보내어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데려오게 하여라."(사도 11,13)
이탈리아 부대의 백인대장인 코르넬리우스도 천사를 통해 주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의 순종으로 베드로와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이방인들도 성령을 체험하여 신앙의 지평이 열리게 됩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사도 11,17)
베드로의 이 물음은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요한 10,16) 하신 예수님의 의지와 연결됩니다. 이미 예수님은 당신 양 우리 밖의 양들에 대해서도 일찌감치 그 이름까지 알고 계셨습니다.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여러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안에는 착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의 목소리도 있지만, 빛의 천사를 가장한 악의 목소리도 끼어 있지요. 악은 목자와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고 선과 진리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데 온갖 수단을 강구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이것이 착한 목자의 목소리가 지닌 특징입니다. 목자가 양을 부르는 이유는 탐욕이나 자기 만족이 아니라 오로지 양들을 위해서지요. 늘 듣기에 좋기만 한 감언이설이 아니기에 듣는 편에서 두려움이나 저항도 생길 수 있지만, 얕은 감정과 자기애를 넘어서 경청해 보면 압니다. 목자는 양들이 행복에 넘치고 넘쳐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사실을요.
아기가 좋아한다고 부모가 늘 단것만 주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서 안의 "잡아먹어라." 하는 말씀도 율법을 어기라는 뜻처럼 들렸으니까요.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믿음의 채로 걸러서 들으면 목소리에 깃든 그분의 사랑과 염려, 신뢰가 들립니다. 우리의 편협한 지식이나 아집, 욕망이 걸러지기 때문이지요. 그 목소리에 순종할 때 우리는 생명을 얻고 또 얻어 풍요로워지고 충만해집니다. 이것이 곧 성령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그분이 주시는 것은 모두 좋은 것이라고 믿기만 하면 고통과 시련의 껍질 너머에 은총이 감추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되는 날이 머지 않아 반드시 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벗님! 오늘도 힘 내어 목자를 따라나섭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 생명의 샘으로 이끄시는 목자의 사랑을 믿고 순종하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
210426.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10,9)
'양들의 문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양과 목자의 비유를 통해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해 주십니다.
소나 개를 키워본 경험과 양치기들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 말씀처럼 양들은 목자의 소리를 잘 알아듣고, 그를 잘 따릅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피해 달아납니다.
예수님께서 '목자의 비유'를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 바리사이들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요,
그 안에 있는 나는 아닌지?
오늘 복음은 목자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고, 목자를 따라가는 양들처럼, 우리도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잘 따라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10,7.9.10)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
양들의 문이신 예수님!
구원과 생명의 문이신 예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참 좋으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매일 말씀을 통해 들려오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뒤를 잘 따라가는 착한 양들이 됩시다!
할례와 같은 율법 규정에만 얽매이지 말고,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율법의 본질인 사랑에 초점을 두고, 이를 살아내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많은 어려움과 고통과 시련과 그리고 유혹자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지만, 말씀과 성령의 힘으로 이 모든 것들을 이겨내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뒤를 기쁘게 그리고 충실하게 따라가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오늘도 함께 기도 안에서 파이팅 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
210426.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4주간 월요일]
한 사람의 착한 목자에게서 또 다른 착한 목자가 탄생합니다!
형제들과 나눈 대화 중에 일본인 사제 시리에다 마사유끼 신부님(1932~)에 대한 에피소드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이후 모든 것이 파괴된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1945년 6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던 시절,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했던 소년 시리에다 마사유끼는 건축중이던 살레시오 수도원에 대못을 훔치러 들어갔습니다.
당시 반짝 반짝 빛나는 멋진 대못은 꽤 고가로 팔수 있었습니다.
몰래 창고로 들어간 시리에다 마사유끼가 황급히 보따리에 대못을 집어넣고 있는데, 갑자기 검은 수단을 입은 외국인이 나타났습니다.
나중에 알게된 그 신부님의 이름은 이탈리아 출신 보비오 신부님이었습니다.
‘이제 난 죽었구나. 난 이제 소년 교도소 직행이로구나.’ 하고 벌벌 떨고 있었는데, 보비오 신부님은 화를 내지도, 때리지도 않으셨습니다.
그가 어정쩡한 자세로 들고 있던 보따리를 달라고 하시더니, 허리를 굽혀 못을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꽤나 묵직한 보따리를 소년의 손에 들려준 신부님께서는 수도원 대문까지 배웅을 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못이 부족하면 또 오너라!”
그날 밤 시리에다 마사유끼는 단 한 순간도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보비오 신부님께서 자신에게 한 행동을 복기하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반문에 반문을 거듭했습니다.
하얗게 밤을 지새운 그는 새벽녘 닭울음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나 10리가 넘는 수도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보비오 신부님을 발견한 시리에다 마사유끼는 그분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사실 제 장래 희망은 육군 대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그 희망을 포기했습니다.
저는 선생님처럼 되고 싶습니다.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어제 성소 주일에 이어 오늘 복음 역시 착한 목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 얼마나 많은 착한 목자들이 자신의 양떼를 어루만지고 위로해주었는지 모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로 인해 다들 힘겨워하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는 보비오 신부님 같은 착한 목자들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큰 부족함이나 나약함 앞에서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껄껄 웃으며 용서해줄 수 있는 착한 목자, 양들의 방황과 일탈 앞에서도 언제나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강조하는 착한 목자를 필요로 합니다.
착한 목자 보비오 신부님의 사랑과 배려에 힘입어 시리에다 마사유끼는 또 다른 착한 목자로 거듭났습니다.
그의 한 평생은 보비오 신부님의 판박이였습니다.
보십시오! 한 사람의 착한 목자에게서 또 다른 착한 목자가 탄생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국 교회에 보다 많은 착한 목자들을 보내주시길 간절히 기도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시리에다 마사유끼 신부님의 고백은 오늘 우리 모든 사목자들에게 너무나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사제가 독신이라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사제가 철저히 고독하기를 바라셨지요.
철저히 고독한 후에 비로소 다른 사람의 고독을 찾아내는 눈과 그것을 부드럽게 감싸 안을 수 있는 마음이 길러지는 것이니까요.”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210426.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자녀를 세례명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 이름 안에 방향이 있기 때문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목자가 아니라 ‘문’이라고 하십니다.
양들이 드나드는 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안전한 풀밭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양들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앞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이름을 아시는 이유는 당신께서 우리 이름을 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이름이 바로 세례명입니다.
세례명은 다른 목소리에 휩쓸리지 않고 그 이름을 지어준 분께로 나아가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아는 사람은 죄의 유혹에 흔들리더라도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지만,
이름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유혹에 쉽게 흔들립니다.
나침반이 없는 배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밖에서 노는 아이들은 어머니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는 어디로 나아갈지 명확하게 압니다.
그러나 이름이 없다면 아무에게나 끌려갑니다.
요즘 연예 뉴스 중 ‘서예지, 김정현 노예처럼 조종’이란 기사 제목이 있습니다.
읽어보니 서예지와 김정현이 사귈 때 서예지는 김정현을 노예처럼 조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출연하는 드라마에서 스킨십을 다 빼고 여배우 앞에서는 나무토막처럼 행동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김정현도 상대역 여배우를 민망할 정도로 눈도 마주치지 않으며 대했고 드라마 감독에게는 멜로 로멘스를 싹 지워달라고 청했다고 합니다.
결국, 드라마는 산으로 갔고 김정현은 건강상 이유로 중도하차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기사는 거의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사람들은 드라마의 주인공이 사적인 관계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준 일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견해입니다.
김정현은 극 중에서의 자신의 역할보다 애인과의 관계 때문에 더 휘둘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혹에 많이 휘둘리고 죄에 떨어짐으로써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무엇을 잊었기 때문일까요?
자신의 이름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이름을 하나하나 부릅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머니가 부르는 이름을 듣는다면 놀다가도 바로 집으로 달려갑니다.
이름 안에는 이렇듯 ‘방향’이 들어있습니다.
그 이름을 지어준 부모를 가리키는 나침반이 나의 이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김정현은 극 중에서 받은 이름보다는 애인이 불러주는 이름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렇듯 사람은 자신이 가진 이름이 무엇이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정해집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정해준 부모의 목소리를 듣고는 바로 그 방향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도 세례 때 우리 이름을 정해주시고 우리가 유혹에 휩쓸리지 않도록 쉬지 않고 당신 쪽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따라서 내가 세례명만 제대로 인식하고 있어도 세상 유혹에 휩쓸리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혹은 유혹에 빠져 죄를 짓더라도 다시 그분을 향해 고개를 들고 바른길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2016)은 이름이 곧 삶의 방향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일본 시골에 사는 한 여학생과 도쿄에 사는 한 남학생은 마치 꿈을 꾸듯 서로 몸이 뒤바뀜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이 현상은 어느 순간 이후 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쿄에 사는 남학생은 자신과 몸이 뒤바뀌었던 그 여학생을 찾아 꿈에 본 시골 마을을 찾아 나섭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 마을에 도착해보니 마을은 3년 전에 유성이 떨어져 폐허가 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죽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도쿄에 사는 남자는 여자보다 3년 이후의 시간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유성이 떨어지는 정확히 3년째 되는 날 한 번 더 꿈을 꾸게 됩니다.
둘은 꿈속에서 서로 만납니다.
남학생은 여학생에게 바로 오늘 그 마을에 유성이 떨어질 테니 빨리 사람들을 피신시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꿈을 깹니다.
여자아이는 가족과 마을 사람들도 구하기 위해 마을로 뛰어 내려갑니다.
그런데 마치 아침에 꿈의 기억이 사라지듯이 정말 빠르게 자신이 왜 뛰고 있는지 잊어버립니다.
누군가를 만났다는 것은 기억나는데 그 누군가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때 비탈길에서 넘어져 떼굴떼굴 구릅니다.
옷은 찢어지고 무릎과 머리에서는 피가 흐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내가 왜 뛰고 있지…? 아! 그 아이…. 그런데 그 아이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행히도 남자아이는 여자아이 손바닥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두었습니다.
여자아이는 이것을 기억하고 손을 펴 손바닥을 쳐다봅니다.
“나 너 좋아해!”
이름을 써 준 것은 아니지만 왜 자신이 그렇게 피멍이 들어가면서까지 마을에 가서 모두 피신해야 산다고 소리쳐야 함을 기억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삶의 의미이고 이유입니다.
소녀는 다시 일어나 아버지와 사람들에게 목숨을 걸고 피신하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믿지 않던 모든 사람이 그 소녀의 확신에 기가 눌려 피신을 하게 되고 다행히 그날 밤 그 마을에서는
사망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여자아이는 도쿄에서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남학생과 마주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부모가 사랑해서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처럼 우리에게 당신 이름을 주셨습니다.
저는 세례명이 ‘요셉’입니다.
누군가 그 이름을 불러줄 때 죄를 짓고 있었다면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지어준 분의 뜻으로 다시 돌아오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자녀에게 세례명을 불러주는 것은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자녀가 아닌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그래서 세상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께로 나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진정 자녀를 주님께 나아가게 하고 싶다면 세례명을 불러주십시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마리아야!” 하실 때,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알아본 것처럼 자녀들도 자신의 세례명을 들으며 주님이 이끄시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210426.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복음.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감각이 있습니다. 어떤 감각기관이 문제가 생기면 문제가 생기기 전에 다른 감각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보완해준다고 합니다. 예전에 적십자 활동을 할 때 매년 장애인의 날에는 장애우들을 위한 행사를 합니다. 그때 봉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시각 장애를 가진 분들은 평소보다는 청각에 더 애민해지는 경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양들을 생각해봤습니다. 양은 시각이 좋지 않은 동물입니다. 그래서 목자를 잘 놓칠 경우가 있습니다. 부실한 시각 때문인지 양은 청각은 상대적으로 좋은 것 같습니다. 자기의 주인의 목소리는 잘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고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외국에서 양을 키워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애완견을 좋아하지 않지만 애완견도 이름을 지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양도 자기 이름을 지어 주고 자기 이름을 불러주면 많은 양들이 있어도 자기 이름을 부를 때 그 양이 반응을 한다고 합니다.
영국인인데 대학 때 호주 농장에서 일한 경험을 들려줘서 알고 있습니다. 개신교 신자라서 그땐 저도 개신교에 다닐 때라 우연히 성경 이야기를 하다가 양 이야기가 나와 듣게 된 것입니다. 실제 양은 온순하지 않는데 왜 양을 온순하다고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온순한 건 아니더라도 온순한 양도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양이 목자의 소리를 잘 알아들어야 심리적으로 안정을 느낀다고 합니다. 재미난 에피소드를 하나 들었습니다. 양 무리들 중에 있을 때 아무리 그 속에서 딴짓을 해도 어떤 신호를 주면 잘 반응을 한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어디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으면 잘 모르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양은 자기가 딴짓을 해도 소리에는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직장 동료였는데 잘은 모르지만 자기 말로는, 양이 항상 주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마치 귀에 안테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고 합니다. 항상 주인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그때 이 말이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중요한 묵상거리를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지만 세상 속에서 살기 때문에 세속과 완전히 등을 지고 살 수는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빛과 같은 역할을 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귀를 양처럼 항상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데에 귀를 쫑긋 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소리는 진짜 하느님의 목소리 실제 육성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목소리도 있지만, 하느님의 목소리는 주변 사람들이나 주변 자연의 소리에도 하느님의 목소리를 느낄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예전에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라는 제임스 마틴 신부님의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그걸 느낄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살면 좋은 것은 알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짧게라도 일정한 시간 하느님 말씀을 보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입니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해서 세속에 살면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을 자신이 노력해서 확보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좀처럼 갖는 게 힘든 현실입니다.
그다음 차선책으로 말씀은 아니지만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묵주 1단씩이라도 하면은, 처음엔 별로라는 느낌이 들 수 있겠지만 이것도 생각보다는 좋은 효과가 있습니다. 오히려 한번에 집중하는 것 같은 효과는 없을지는 모르지만, 자주 예수님을 생각하는 효과는 있는 것 같습니다. 말씀으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런 방법으로라도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말씀의 여운을 먹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힌트를 제가 지속적인 성체조배 지도신부님의 강연을 통해서 응용한 생각입니다.
성체조배는 성체성사의 연장선상이라고 강의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세속에 살아도 귀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항상 귀의 안테나를 하느님을 향하도록 의식적인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할 겁니다. 그렇게 하는 길이 하느님 당신께서 늘 하시는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저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합당한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210426. 부활 제4주간 월요일. 김로마노 형제님.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사도11,1~18)
"그가 너에게 말씀을 일러 줄 터인데, 그 말씀으로 너와 너의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14~15)
사도행전 11장 1절부터 18절까지는, 할례받은 신자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 코르넬리우스 가문과 함께 식사했다는데 대한, 할례받은 신자들의 비판 및 베드로의 변론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할례받은 신자들의 비판의 계기가 된 사도행전 10장의 내용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로마까지 복음이 증거되며 교회가 확장되는 역동적인 역사가 기록된 사도행전 안에서도, 이방인 선교의 하나의 큰 전환점을 이루는 이방인 코르넬리우스의 회심 사건과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에게 세례를 준 사건이다.
사실 이 사건은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선민이라고 생각하는 폐쇄적인 유대적인 전통을 깨뜨릴 뿐 아니라 이방안의 선교의 물꼬를 터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사도행전 저자는 사도행전 10장 전체를 코르넬리우스의 회심의 사건을 기록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사도행전 11장 전반부의 지면을 할애하면서까지 다시 한번 베드로의 변론을 통해 이 사건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교회에 의해서도 이방인의 선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됨으로써, 이방인의 선교의 길이 더 환하게 열렸음을 보여 주려는, 역사가인 동시에 그 자신이 선교사이기도 한 사도행전 저자의 의도적인 기술이다.
'그가 너에게 말씀을 일러 줄 터인데, 그 말씀으로 너와 너의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14)
본절은 병행 구절인 사도행전 10장 30~33절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이 코르넬리우스가 베드로에게 전한 말이었음은 분명하다. 코르넬리우스가 천사로부터 받은 말을 베드로에게 그대로 전한 말인 것이다.
여기서 '너의 온 집안이'에 해당하는 ('파스 호 오이코스 수'; pas ho oikos su)는 '집의 거주자들', '한 집안 식구'라는 뜻이다.
즉 구원의 범위가 코르넬리우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집에 살고 있는 가족 모두에게 미칠 것이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처럼, 베드로와 코르넬리우스를 만나게 하신 하느님의 목적은, 베드로로 하여금 이방인인 코르넬리우스의 가정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함으로써, 그 온 집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본절의 코르넬리우스의 이 진술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은, 이방인이라면 누구나 할례를 받은 후에야 구원에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방인 코르넬리우스는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러한 절차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따라서, 본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떠한 차별도 없이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듣고 믿는 자라면, 누구나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15)
본문을 직역하면, '성령이 떨어졌다'(epepesen to pneuma to hagion; 에페페센 토 프뉴마 토 하기온; the Holy Spirit fell)이다.
이것은 마치 어떤 무거운 물체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거나 덮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사도행전 10장 45절에서는 이것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본문의 '에페페센'(epepesen)은 성령의 주도적 역사를 더 강하고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본문에서 베드로는 성령께서 임하신 시기를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라고 언급했는데, 사도행전 10장 44절을 보면, 성령께서는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 임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다르게 언급하고 있을까?
성령께서는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사도10,34) 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 강림의 결과는 신령한 언어(방언)와 하느님을 찬송하는 행위로 나타났는데, 이 표징은 베드로가 설교를 다 마치는 때에 맞추어 일어났을 것이다(사도10,46).
그러니까 본절인 사도행전 11장 15절은, 성령께서 베드로의 설교가 시작될 때부터
각 사람에게 임하여 그들의 심령과 영혼을 감동시켰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으며, 사도행전 10장 44절은 베드로의 설교 말미에 신령한 언어와 하느님을 찬송하는 행위로써 성령받은 사실이 외적 표징으로 나타났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가리킨다.
이것은 코르넬리우스의 가정에 성령이 임한 것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유대인들 중의 믿는 자들에게 부어진 것처럼, 이제 이방인들 중의 믿는 자들에게도 부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즉 예루살렘에 있었던 오순절 성령 강림이 유대인을 위한 것이었다면, 카이사리아에서 있었던(사도10,1) 코르넬리우스 가정의 성령 강림은 이방인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이란 표현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성령께서 동등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예루살렘의 믿는 자들에게 말함으로써,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행위가 전혀 비난받을 것이 아님을 힘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복음(요한10,1~10)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7ㄷ~8ㄱ)
요한 복음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예수님의 '나는~이다'에 해당하는 '에고 에이미'(ego eimi) 양식의 독특한 진술이 여기에서도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양들의 문'으로 나타내신다. 양들이 안심하고 출입할 수 있는 양들을 위한 유일한 문이라는 것이다.
'문'으로 번역된 '튀라'(thyra; door)는 '문'(door), 혹은 '입구'(entrance)라는 뜻인데, 비유적으로 '하늘 나라의 문'(루카13,24)이나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는 뜻을 나타내어 쓰이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서 '양들의 문'이라고 하신 것은 하느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요한14,6).
모든 사람은 이 문을 통해서만 거룩하신 아버지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 문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영원히 하느님의 약속들에서 제외되고 만다.
이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만이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 아래 있게 되며, 이 문을 통과하는 유일한 방법은 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 것이다(요한1,12.13).
한편, 여기에 나오는 '문'에 해당하는 '헤 튀라'(he thyra; the door)가 어떤 사본에서는 '목자'에 해당하는 '호 포이멘'(ho poimen)으로 나온다.
이것은 번역가들이 '양들의 문'과 '양들의 목자'를 동일하게 생각했음을 암시한다.
실제 고대 근동의 규모가 작은 양들의 우리에 있어서는 목자가 문 입구에 누워 밤을 지새웠으므로, 양의 문과 목자를 동일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요한10,7.9.11.14).
요한 복음 10장 1절에서 문을 통하지 않고 우리로 들어가는 자들은 도둑이며 강도로 규정하신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을 도둑이며 강도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나보다 먼저'에 해당하는 '프로 에무'(pro emou; before me)는 '내 앞에'라는 뜻이다.
이것은 당시 진리를 거부하였던 유대 종교 지도자 무리들을 지칭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 사람들은 백성들 앞에서 하늘 문을 닫아 걸고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훼방하였고(마태23,13), 유대교 신자 하나를 얻기 위해 육지와 바다를 다니지만, 한 신자가 생기면 자신들보다 배나 더 나쁜 지옥의 자식이 되게 만들었다(마태23,15).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악마에게서 난 자라고 까지 하셨다(요한8,41).
이들은 하느님의 뜻이나 백성들의 영적 상태 등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으며, 그들이 중시한 것은 조상들이 물려준 전통과 본질없이 형식만 남은 율법의 자구적 해석뿐이었다.
이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도외시하고, 자신들 스스로 굴레를 씌운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잃고 멸망으로 가도록 만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가리켜 도둑이며 강도라고 질책하셨던 것이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양들의 목자”(10,2)요 “양들의 문”(10,7)이라고 밝히십니다. 이 말씀은 왜 오셨으며 하느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하실 것인지 알려주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양우리 안과 밖, 양우리의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와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는 도둑의 대조를 보여줍니다. 이 대조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당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되는’(10,10) 참 행복에 이를 수 없음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는 양우리 안과 바깥, 곧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환경과 다른 이들, 공동체 안과 바깥, 교회 안과 세상으로 나뉩니다. 사실 이런 구분은 살아가는 방식과 영역의 차이 때문에 드러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양우리 안팎을 오가며 양들을 돌보고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따라서 양우리 안에서든 밖에서든 주님의 영과 생명이 넘쳐야 할 것입니다.
나는, 우리는, 또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하느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시는 착한 목자를 잊고 살 때가 많지요.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이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디에서든 인간이기에 행복하고 살아갈 의미가 있는 세상이 바로 그분이 원하시는 양우리이겠지요.
우리가 착한 목자를 따르는 양으로 살고 있는지는 세상 밖으로 눈을 돌려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 자신 안에, 나 가정에, 우리 공동체과 사회에 예수님의 기쁜 소식이 퍼지고 있습니까?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과 사회에 만연한 인간 차별, 경제논리에 물든 혼탁한 가치관, 집단적 이기주의를 따르는 정치가들의 행태 속에 하느님의 혼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 원인의 하나가 나의 무관심이나 이기심과 탐욕 때문은 아닐까요? 늘 목자와 함께 있다는 현존의식이 또렷하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자세가 미지근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양우리 안을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감옥으로 바꿔버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또한 ”양들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지 살펴야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문이시라면 나의 말도, 생각도, 판단이나 행동도 그 문을 통과한 다음에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내 삶의 기준을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삼는다면, 나 자신이 곧 ‘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넘어 들어가는 강도나 도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 삶의 근거와 방향은 문이신 예수님을 통과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문이신 그분을 통과한다는 것은 그분의 진리의 말씀과 목숨마저 내놓는 사랑,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며 생명의 호흡을 되살리며 그분 안에 머무는 것이겠지요.
오늘도 사랑으로 함께해주시는 예수님의 이끄심을 따라 양우리 안팎을 그분의 마음과 눈길로 바라보며 참 행복을 갈망하는 복된 날이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