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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그리스도인 ] 34. 교부편 (15) 암브로시오 주교성인
◈ 이단으로 갈라진 이들 화해시켜 ◈ 학덕·성덕 갖췄지만 늘 겸손 ◈ 주교로 추대된 후 세례받기도
374년 밀라노, 거친 표정으로 성당에 모여 있던 군중들은 두 패로 갈려 서로를 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밀라노의 주교 아욱센시우스(Auxentius, ?~374)의 후임을 선출하기 위한 이 자리는 이미 커다란 소동과 어려움을 예고하고 있었다.
완고한 아리우스주의자였던 전임 주교를 따르던 이들에 반대해 정통 신앙을 따르는 신자들은 일전을 결사할 태세였다. 바로 이 자리에 당시 밀라노에 관저를 둔 에밀리아 지방 총독 암브로시오가 공정한 주교 선출을 감독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군중들에게 평화적인 방법과 대화로 화해를 추구하자고 권고하던 그의 목소리 사이로 한 아이가 『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뽑자』고 소리쳤다. 순간 성당안은 정통파나 아리우스파를 막론하고 『암브로시오 주교』를 외치는 군중들의 함성으로 가득해졌다.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암브로시오는 당혹감 속에서 주교직을 사양했지만, 결국 세례를 받고 여드레 후인 374년 12월 7일 주교품을 받았다.
성인이자 밀라노의 주교로서, 신학자이자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인 암브로시오 (339~397)는 이로써 가장 완벽한 사목자의 전형으로서 자신의 주교 직무를 시작했던 것이다.
암브로시오의 생애는 자신이 남긴 저서들, 특히 서간들을 통해서 알 수 있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밀라노의 파울리노가 쓴 전기 「성 암브로시오의 생애」(Vita S. Ambrosii)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독일 서쪽 지역인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난 그는 대대로 신앙을 지켜온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갈리아 지방의 행정관이었던 부친의 사후, 가족들은 로마로 돌아왔고 거기서 암브로시오는 고등 겸비한 그의 출세는 탄탄대로였다. 처음에는 변호사로 있다가 밀라노의 총독이 됐다.
암브로시오는 주교가 된 후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에 나눠 주었다. 빼어난 학덕과 성덕을 함께 갖추고 있던 그는 주교가 된 후 겸손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했다. 『학생도 되기 전에 스승이 되었구나, 배워야 할 내가 가르치게 되었구나』하며 주교로서 자신의 모자람을 고백한 그는 이후 사제 심플리치아노로부터 지도를 받아 성서공부에 몰두했다.
선배인 치프리아노, 자신이 교회의 사람으로 이끈 저 위대한 후배 아우구스티노와 마찬가지로 암브로시오 역시 주교 직무를 수행하기에 앞서서 성서를 통해 양성된 사람이다. 특히 암브로시오의 수많은 주석 작품들은 책으로 쓰여지기 전에 이미 설교를 통해 태어난 것들이다.
그는 탁월한 강론가였다.성서에 관한 해박한 지식,여기에 깊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자신의 지식을 심화시키
아우구스티노 역시 그의 강론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개종하는 은혜를 입은 사실은 이미 잘
암브로시오가 세상을 떠난지 100년이 지난 후에 만들어진 밀라노의 한 모자이크는 그의 모습을 이렇게 절제된 열정. 그는 활동적이면서도 지적이고 명상적이면서도 타고난 연설가였다. 완벽에 가까운 사람으로, 마찬가지로 거의 완벽한 사목자, 주교로서 알려진 인물이 바로 암브로시오 주교이다. 범상한 인물이었지만 고고한 귀족에 머물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의 변호자가 바로 그였다.
주교가 된 당시, 밀라노는 당시의 다른 여러 지역들이 그러했듯이 가난한 민중들은 세금과 부자들의 들을 섬겼다. 그처럼 모든 사람에게 속하는 재화의 공정한 분배와 사유 재산의 권리와 한계에 대해 강하게
『그대는 그대의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것을 그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주교로서 그는 또한 성직자들의 자질에 늘 관심을 기울였고, 이를 위해 성직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
[가톨릭신문, 2004년 10월 17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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