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6,1-2ㄱ.3-8; 1코린 15,1-11; 루카 5,1-11
+ 오소서 성령님
지난 한 주간 안녕하셨어요? 너무 추우셨지요? 추위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노은동 농수산시장 앞 네거리와 은구비 네거리에 “우리 동네 천주교회 노은동 성당”을 알리는 친환경 현수막이 설치되었는데, 혹시 보셨어요? 애써 주신 선교분과에 감사드립니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올해 본당 사목 지표에 대한 말씀을 본당 주보 4면에 실어드렸는데요, 오늘은 선교와 복음화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선교’는 라틴어 ‘missio’를 번역한 말인데요, 우리가 지금 봉헌하고 있는 ‘미사’도 같은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파견’이라는 뜻입니다. 미사 끝에 사제는 교우들에게 라틴어로 “이떼 미사 에스트”(Ite, missa est)라고 말했는데요, 이 중 가운데 단어를 따서 ‘미사’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끝났습니다.” 또는 “여러분을 파견합니다.”라는 의미이고, 그 뜻을 풀어 쓴 말이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입니다.
요즈음, 임무나 사명을 ‘미션’이라는 영어로 표현하는 경우도 많은데요, 이 ‘미션’ 역시 ‘missio’에서 파생된 말로, 본래 ‘파견’, ‘선교’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선교’는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다는 좋은 의미이지만, 16세기에 유럽의 제국들이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정복하고 식민 지배하면서 그것을 선교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상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하여 1960년대부터는 ‘복음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본당에서 신부님이 ‘새로운 복음화’에 대해 얘기했는데, 미사 끝나고 어떤 분이 여성분과 찾아가서 ‘새로 온 고구마 어디서 사느냐’고 물으셨다는데요, ‘고구마’가 아니라 ‘복음화’입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은 1975년에 반포하신 교서 「현대의 복음 선교」에서 복음화의 내용을 세 가지로 말씀하셨는데요, 첫째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느님 말씀과 구원 계획에 반대되는 인간 사회의 판단 기준, 가치, 관심사, 사상의 흐름, 영감의 원천, 삶의 양식에 복음의 힘으로 다가가 이들을 되돌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사회 복음화’라 부르고 있습니다. 셋째는 ‘끊임없는 회개와 쇄신으로 교회 자체가 복음화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을 개종시키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은 교회 자체도 복음화의 대상이라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한편,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취임하신 해에 반포하신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새로운 복음화’에 대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논의를 인용하십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세 가지 분야에서 이루어지는데요, 첫째는 일반 사목 분야로서, 성령의 불로 활력을 얻어 신자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에 더 잘, 그리고 온 삶으로 응답하도록 성장하게 하는데 초점을 둡니다.
둘째, ‘세례를 받았으나 세례 성사가 요구하는 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 즉 쉬는 교우들이 신앙의 기쁨을 되찾고 복음과 함께 살아가려는 열망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거나 거부해 온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들 중 많은 분들은 하느님의 얼굴을 그리워하며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할 의무가 있지만, 이는 새로운 의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나누고 아름다운 지평을 보여 주며, 풍성한 잔치에 초대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개종을 강요함으로써가 아니라 ‘매력을 보여줌으로써’ 성장한다”고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비신자들은 물론, 냉담 중인 우리 가족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중요한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신앙의 매력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성당에 안 나오면 안 된다’고 강요할 것이 아니라, 미사에 참례하신 다음에 더 기쁘게 생활하고, 더 웃고, 더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신다면 가족과 이웃들은 궁금해할 것입니다. “뭐가 그렇게 기쁘시냐?”고요. 그때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이 기쁘다”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이 ‘매력을 통한 선교’가 되지 않을까요?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이사야 예언자와 사도들의 부르심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부르심 받을 때의 공통점은 먼저 자신이 얼마나 하느님 앞에서 부당한 존재인지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천사들이 ‘거룩하시다’를 세 번 외치는 소리를 듣고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 속한 것은 깨끗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더럽습니다. 마음과 의지가 하느님께 속해 있지 않은 백성은, 그것을 표현하는 입술도 더럽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이사야의 입술을 정화하여 주자, 이사야는 자원하여 소명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도 미사 때에 ‘거룩하시도다’를 세 번 외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 기도 후 무릎을 꿇으면서, 성체와 성혈을 통해 우리 앞에 현존하시게 될 주님 앞에 경외심을 표현합니다. 우리 또한 부당한 존재이지만, 우리는 미사를 시작하면서 참회 예절을 통해 이미 거룩해졌기에 감히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하며, 맨 마지막으로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다’고 고백합니다. 자신만만하게 그리스도교를 없애버리려 하던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자신이 ‘정상적으로 태어나지 못한 아기’(에크트로마티) 라고 고백할 만큼 겸손한 바오로 사도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어 군중을 가르치신 다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됩니다.
놀란 베드로는 이사야와 같은 행동을 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호칭도 ‘스승님’에서 어느새 ‘주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네가 복음을 전하는데, 너의 약함이 문제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말씀도, 우리가 마주하기 두려워하는 우리 내면 깊은 곳으로 함께 가자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말씀은 아닐까요?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 예수님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낚아 당신께서 함께 계신 교회라는 배에서 생명을 얻게 하라고 베드로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오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와 예수님과의 첫 번째 만남은 어떠했는지 묵상해 봅니다. 어떤 분들에게 예수님과의 첫 만남은 오늘의 말씀들처럼 매우 극적이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에게는 그처럼 드라마틱하지 않고 무덤덤한, 어쩌면 유아세례를 통하거나 다른 기회에 우연히 이루어진 밋밋해 보이는 만남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편에서는 모든 만남이 다 극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부모님이나 가족을 통하여 나를 만나시기도 했고, 나의 이웃과 친지들, 때론 내가 무심히 흘려버린 수많은 사건을 통하여 나를 만나기를 바라오셨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어느 순간, 밤새 허탕만 치고 그물을 정리하려던 때에 나의 삶 속으로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신 것은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예수님은 그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호숫가로 오셔서 그의 배를 타십니다.
예수님은 실망하고 좌절해 있는 나를 직접 찾아오셔서, 나의 어둠 깊은 곳에 나와 함께 가셔서 당신이 누구신지, 또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은총으로 내가 되었습니다.” 내가 만일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가 신학생 때부터 좋아하던 ‘마음을 드높이’라는 성가가 있는데요, 수원교구 김태진 신부님이 만든 노래입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을 몰랐더라면 더욱 편했을지도 모르는 그런 세상이지만
당신을 알게 됨으로 얻은 자유 평화 어떤 것과도 바꿀 순 없네
당신만이 곁에 계신다면 아무것도 부럽지 않아
세상 유혹 시련들이 닥쳐와도 마음 낮은 곳에 두지 않으리라
마음을 드높이 주를 향하여 영원히 그분을 향하여
또 사랑하리라 세상 모든 것들을. 낮은 우릴 사랑한 그분처럼”
오늘 말씀에서, 이사야와 사도들이 부르심을 받은 뒤에 어떻게 했는지에 주목하여 봅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대답한 이사야 예언자,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한 바오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베드로, 야고보, 요한 모두,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시는 주님께 나는 어떤 도구가 되어드릴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노력했지만 큰 소득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때에, 베드로 사도의 말씀으로 기도를 드리면 어떨까요?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https://youtu.be/jEjhaqwcrzo?si=_Az4RluNJ7XTkknI
마음을 드높이, 갓등 중창단
노은동 성당 제대 꽃꽂이
제게는 '물고기로 가득 찬 베드로의 배'로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