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교부들의 신앙 - 죄 고백] 죄의 고백과 하느님 찬미
“주님, 당신이 지으신 한 줌 피조물, 이 인간이 당신을 찬미하고자 합니다”(아우구스티노, 「고백록」, 1,1,1.).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많이 짓는 죄가 무엇일까요? 우스갯소리이지만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일 듯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상처들과 죄악들, 그것들을 직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기억들을 다시 꺼내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숨기고 묻어 두려 합니다. 때로는 그런 죄들을 하느님께 고백하기가 망설여 집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것 같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죄를 감추다 보면 더 악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고해하고 나와도 여전히 어두운 얼굴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잠언 1,7)입니다. 주님을 옳게 두려워한다는 것은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는”(마태 10,28)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솔직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8) 하고 약속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죄를 기억하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3대 저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고백록」은 말 그대로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는 책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죄의 고백이 아니라, ‘죄의 고백은 하느님 찬미’라는 깊은 의미를 담은 책입니다. 그래서 「고백록」은첫 시작에서부터 “주님, 당신이 지으신 한 줌 피조물, 이 인간이 당신을 찬미하고자 합니다.”라는 찬미의 노래로 시작합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라는 가면 뒤로 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느님 앞에 숨김없이 자신을 드러냅니다. “일자(一者)이신 당신을 등지고 다자(多者)를 향해 스러지면서 제가 산산조각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청소년 시절 저는 저 밑바닥 것들로 허기를 채우는데 몸을 불살랐으며, 다채롭고 그늘진 애정 행각에 우거지게 뒤얽혔으며, 그러는 사이에 제 용모는 시들고, 저 스스로 만족하게 즐기고 사람들의 눈에 들기를 꾀하다 보니 당신 눈앞엔 썩어 문드러지고 말았습니다”(2,1,1.).
그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지르고 넘어간 제 패악과 육체적 부패를 저의 영혼에서 기억해 내려고 합니다. 그것들이 좋아서가 아니라, 저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서입니다. 당신 사랑에 대한 사랑으로 그 일을 합니다. 돌이켜 생각하는 그 쓰라림 속에 제가 걸은 사사스러운 길들을 되새김으로써 당신께서 제게 감미로움을 주시게 하려는 뜻입니다. 속임수 없는 감미로움, 행복하고 안전한 감미로움, 분산되지 않게 저를 가다듬는 감미로움 말입니다”(2,1,1.).
성인의 이 고백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그 기억들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분의 사랑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속 깊이 감추어 두었던 우리의 죄를 끄집어내는 일은 쓰라린 일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감미로움으로 바꿔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믿음입니다.
주님께로 향한 올바른 두려움
루카 복음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작은아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는 죄를 지었고 아버지의 심판을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아버지를 피해 더 멀리 도망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뿐임을 깨달았습니다. 두려웠지만 아버지께로 향했습니다. ‘올바른 두려움’이 그를 다시 살린 것입니다. 곧 죄의 고백이 하느님 찬미였던 것입니다.
한때 잘나가던 시절에는 떵떵거리며 허세를 부렸던 작은아들이 낯선 땅에서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돼지죽조차도 맘껏 먹지 못하는 신세가 된 자신을 한탄하면서 죽음을 결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작은아들을 다시 살게 했던 것은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과 자신을 기다리는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정말 나를 기다리실까?’ 하는 의심과 불안 때문에 돌아가는 발걸음을 머뭇거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15,21)라고 고백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저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15,22-24)며 꼭 안아줄 따름이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라고 대답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선택하시고 교회의 반석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어떤 면을 보시고 우리를 당신 자녀로 선택하셨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셨고, 우리에게 당신 자비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될 이유가,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셔야 할 이유가 더 많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을 구석입니다. 이는 곧 올바른 두려움을 가지고 용기를 내어 고백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진실한 고백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찬미의 기도로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이 지으신 한 줌 피조물, 이 인간이 당신을 찬미하고자 합니다.” “저지르고 넘어간 제 패악과 육체적 부패를 저의 영혼에서 기억해 내려고 합니다. 그것들이 좋아서가 아니라, 저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서입니다. 당신 사랑에 대한 사랑으로 그 일을 합니다.”
[교부들의 신앙 - 말씀 듣기]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 …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첫 번째 말씀은 ‘들어라.’입니다”(암브로시오, 「성직자의 의무」).
사랑으로 충만해지려면
‘근주자적 근묵자흑’(近朱者赤 近墨者黑)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붉은색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붉게 물들고, 검은색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검게 물든다.’는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4-15).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첫 번째 목적은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써 당신의 사랑에 흠뻑 젖어 들고, 말씀으로 충만해져야만 복음을 합당하게 선포할 수 있으며, 놀라운 기적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 13,1-2 참조).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길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순서를 지키셨습니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첫 번째 장소로 광야를 선택하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시기에 앞서 가장먼저 광야로 향하셨습니다. 광야, 그 고독과 침묵의 땅에서 성부의 품 안에 온전히 머무셨습니다. 외적인 활동에 앞서 내적인 충만을 이루신 것입니다.
말씀 읽기에 열중했던 암브로시오
가톨릭과 아리우스주의의 대립이 극심하던 4세기 후반 밀라노. 암브로시오 성인은 밀라노의 집정관으로 임명됩니다. 374년, 밀라노의 주교 아욱센시오가 세상을 떠나자 새로운 주교 선출을 두고 가톨릭파와 아리우스파가 대립각을 세우게 됩니다.
당시 밀라노의 집정관이었던 암브로시오는 밀라노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이 문제에 개입하게 되었고, 양측의 동의를 얻어 주교 선거 과정의 중재자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암브로시오가 평화로운 해결책을 추구하자고 연설할 때 한 아이가 성인을 가리키며 “암브로시오를 주교로!”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에 가톨릭파와 아리우스파 모두가 찬성하였고, 암브로시오 성인을 주교로 선출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암브로시오는 세례받지 않아 주교가 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주교직을 거듭 사양하였지만 끝내는 이를 수락하게 됩니다. 주교가 되기에 앞서 먼저 세례를 받은 성인은 8일 뒤인 373년 12월 7일 주교품을 받습니다. 주교가 된 성인은 자신의 부족함을 겸손히 인정합니다.
훗날 밀라노의 성직자들을 위한 규정을 담은 책에서 당시의 처지를 성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갑작스레 성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배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여러분을 가르쳐야 했습니다”(「성직자의 의무」, 1,1,4).
그리하여 암브로시오 성인은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르치려면 먼저 배워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말씀을 듣는 일(읽는 일)에 몰두했는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증언을 통해 짐작해 봅니다.
“‘그(암브로시오)는 대체 무슨 희망을 품고 살고 있을까? 유혹에 맞서 무슨 씨름을 벌이고 있을까?’ … 제가 원하는 바를 원하는 대로 그에게 물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을 때는 꼭 필요한 요기로 몸을 돌보거나 독서로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 그가 소리 없이 책을 묵독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럴 때면 저희도 하릴없이 소리 내지 않고 한참 동안 말없이 그냥 앉아 있다가 가만히 자리를 뜨곤 하였습니다. 그처럼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사람에게 누가 번거로움을 끼칠 엄두가 나겠습니까?”(「고백록」, 6.3.3.)
사제들에게 전하는 성인의 충고
이토록 말씀을 듣는 일에 열중하였던 암브로시오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진심을 다하여 사제들에게 충고하였습니다. 바로 사제들이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사제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성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가르치려는 사람은 먼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이 바로 ‘침묵’입니다. 그래야만 다른 이들의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지혜로운 사람은 침묵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지혜가 이렇게 가르칩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 내 귀를 일깨워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이사 50,4). 그러므로 말을 함에 있어서 자제할 수 있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 ‘말하여라.’가 아니라 ‘들어라.’입니다. 하느님의 첫 말씀이 바로 ‘들어라.’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여러분의 길을 평탄케 할 수 있고, 혹시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젊은이가 무엇으로 제 길을 깨끗이 보존하겠습니까?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시편 119,9)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들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혀로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성직자의 의무」, 1,1,4-1,3,10).
유스티노 성인은 “말씀의 씨앗”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이미 하느님의 말씀의 씨앗이 심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얻기까지 땀을 흘리는 것처럼,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으려면 영적인 땀을 흘리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 수고의 첫걸음이 바로 침묵 가운데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지기”(로마 10,17) 때문입니다.
한 해 농사를 시작하면서, 농부들은 겨우내 딱딱하게 굳어 버린 땅을 날카로운 쟁기로 갈아엎습니다. 마찬가지로 단단하게 굳어 버린 우리의 마음 밭을 ‘말씀’(성경)이라는 ‘영적인 쟁기’로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씨앗이 숨을 쉬게 해야 합니다.
[교부들의 신앙 – 기도] 기도에 대한 교부들의 가르침
안녕하세요? 오늘은 기도에 대해 알아봅시다. 교부들은 기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초대 교회 때부터 신자들은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마쳤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간경’(시간 기도)을 바침으로써, 하루의 시간과 수고와 일을 기도로 성화시켰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아침 기도는 하루를 시작하면서 바치는 기도이고, 저녁 기도는 하루의 일과를 무사히 마치고 드리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기도에 대한 교부들의 설명을 들어봅시다.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동이 트는 순간이 바로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그 이유는 새벽이 그날의 탄생을 알리기 때문이며, ‘빛은 어둠 속에서 먼저 비추기’(2코린 4,6 참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빛은 태양과 같이 진리를 앎에 있어서 앞길을 비춥니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양탄자」, Ⅶ,43,6).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아침에 기도를 바칩니다. 영혼과 마음의 첫 움직임을 하느님께 바치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전에는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하느님 생각할 제 기쁨으로 가득 차나이다.’(시편 76,4 참조)라는 말씀대로 하느님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즐거워지기 전에는 다른 아무 일도 시작하려 하지 말 것이며, 또 ‘주님이시여, 이른 아침 내 소리를 들으시오니, 이른 아침부터서 채비 차리고, 애틋이 기다리는 이 몸이오이다.’(시편 5,4-5 참조)라는 시편 말씀을 채우기 전에는 우리 몸이일하도록 움직이지 맙시다”(카이사리아의 대 바실리오, 「긴 규칙서」, 37,3).
“아침 기도로써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기 위하여 아침에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치프리아노, 「주님의 기도」, 35).
삼시경, 육시경, 구시경 기도
「사도 전승」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외에도 삼시(오전 아홉 시)와 육시(낮 열두 시), 그리고 구시(오후 세 시)에 기도를 바쳤습니다.
주님께서는 삼시에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육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구시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그 시간에 기도하면서 주님의 수난을 되새기며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려고 했습니다.
“삼시에 기도하십시오. 빌라도가 우리 주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한 시각이기 때문입니다. … 육시에도 기도하십시오.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각이기 때문입니다. … 구시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이 참혹한 모습을 차마 바라볼 수 없어, 해가 어두워지고 땅이 무서워 떨던 바로 그 시각이기 때문입니다”(「사도 헌장」, 8,34).
기도의 힘과 참된 기도
신자 여러분, 기도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교부들이 말하는 기도의 힘과 참된 기도에 대해 들어봅시다.
“기도는 만능 갑옷이고, 줄어들지 않는 보화이며, 무궁무진한 광맥이고, 구름에도 가로 막히지 않는 하늘이며, 폭풍에도 안전한 항구입니다. 기도는 헤아릴 수 없는 선의 뿌리요, 샘이며 무수한 축복의 어머니입니다.
기도의 힘은 국가 권력보다 더 셉니다. …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싸늘하게 식어 버린, 힘도 열정도 없는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열린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 부서진 마음의 열매이며 뉘우치는 마음의 결실인 기도를 말합니다.
이것이 하늘로 올라가는 기도입니다. … 제가 말씀드리는 기도는 입술로만 읊어 대는 기도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하느님의 이해할 수 없는 본성」, 607).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내려 주실 마음이 드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가르쳐 드려야 할 분이 아니라 마음을 얻어야 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은 긴 기도가 아니라 참된 마음입니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강해」, 13).
믿으려고 기도하고 기도하려고 믿는다
고대 교회의 신자들은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믿으려고 기도하고, 기도하려고 믿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기도의 힘으로, 자신들의 신앙과 삶을 계속해서 일치시켜 나갔습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도 고대 교회의 신자들처럼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신앙과 삶을 일치시켜 나갑시다.
“믿음이 없다면 기도는 사라집니다. 믿지 않는 것을 청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 기도하기 위해서 믿읍시다. 또 우리가 기도하게 하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믿음은 기도를 샘솟게 하고, 샘솟는 기도는 믿음을 튼튼하게 해 줍니다”(아우구스티노, 「설교집」, 115,1).
“성도들은 맹수 앞에서도, 감옥에서도, 불길에 휩싸여서도, 바다 속 깊은 곳과 짐승의 배 속에서도 기도합니다. 그래서 집 깊숙한 곳이 아니라 마음의 침실로 들어가라는 훈계를 듣습니다. 많은 말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을 바쳐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행동이 어떤 말보다 낫기 때문입니다”(푸아티에의 힐라리오, 「마태오 복음 주해」, 5,1).
“그대가 신학자라면, 그대는 정녕 기도할 것입니다. 그대가 정녕 기도하고 있다면, 그대는 신학자입니다”(폰투스의 에바그리오, 「기도론」, 61).
혀는 기도하는 이의 손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과 자세로 기도해야 할까요? 교부들의 주옥같은 가르침을 들어 봅시다.
“어떤 사람이 똥을 가득 쥔 손으로 당신의 발을 붙잡고 무엇을 청한다면, 당신은 그 청을 들어주기보다는 그를 발로 차 버립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손에 똥을 쥔 그러한 상태로 하느님께 다가가려고 합니까?
혀는 기도하는 이의 손이며, 그 손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발을 붙잡고 있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해」, 51,5).
“왜 여러분은 얼마 전 나쁜 말을 한 여러분의 입으로 하느님께 청을 드립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을 역겨워하십니다”(아우구스티노, 「그리스도인의 삶」, 11).
[교부들의 신앙 – 자선] 자선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안녕하세요? 2019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번 달은 성 대 레오 교황을 만나러 이탈리아로 떠납시다.
레오 대교황(440-461년 재임)은 야만족의 침입을 두 번씩이나 물리쳤습니다. 452년 훈족이 이탈리아를 침입하자, 교황은 황제의 사절단과 함께 만투아로 가서 훈족의 왕, 아틸라를 만나 즉시 철수하라고 설득시켰습니다. 455년에는 반달족이 오스티아를 쳐들어오자, 혼자서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를 만나 담판을 지었습니다. 비록 로마의 약탈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살인과 방화 행위는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레오 대교황은 야만족의 침략으로 멸망의 위험에 처한 로마를 구해냈을 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 제국의 소중한 문화유산과 그리스도교를 게르만족과 켈트족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레오 대교황이 말하는 ‘자선’의 참된 의미를 살펴봅시다.
레오 대교황은 자선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라는 사실을 가장 잘 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자선 행위입니다. 자선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도 선행에 낯선 사람이 되지 맙시다. 나는 가난해서 겨우 먹고 살 뿐 남 도울 겨를이 없다고 말하지 맙시다. 적은 가운데 바치는 예물이 크고, 하늘의 저울은 예물의 양이 아니라 영혼의 확고한 뜻을 잽니다. 복음서에서 과부는 헌금함에 렙톤 두 닢을 넣었고, 그것은 부자의 예물 전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예물이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자선이 값집니다. … 그분은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재산을 주시지만, 똑같은 사랑을 요구하십니다”(「설교집」, 20,3,1).
보잘것없는 동전 두 닢이지만,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친 과부의 행동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십니다. 자신이 가진 부의 일부를 가난한 이들에게 적선하는 것이 자선의 전부는 아닙니다.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자신의 생명까지도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자선입니다.
자선은 주님에 대한 사랑의 행위
자선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실천해야만 하는 의무이자 권리이지, 선택이 아닙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자선을 실천하는 의무를 면제받을 수는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냉수 한 잔은 대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레오 대교황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목말라하는 가난한 이에게 냉수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사람은 자기 행위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 흔한 물을 남에게 준 것도 보상을 받게 된다고 하셨으니, 주님께서는 당신 나라를 얻기 위한 간편한 방법들을 당신 종들에게 얼마나 많이 마련해 주신 것입니까! … 이 일을 하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습니다”(「사순 시기 강론집」, 10,5).
그리스도인이 실천하는 자선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자비하신 당신 사랑의 손길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십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입니다. 가난한 이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은 신자들로 하여금 주님에 대한 자신들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여 줄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자선 행위는 자선을 실천하는 사람만의 행위가 아닙니다. 자선 행위에는 제자들의 손을 통해 오천 명을 먹이신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사랑의 손길이 항상 관여하고 있습니다. 자선을 실천할 마음과 재산을 주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자선 행위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로운 사랑을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자비의 모상’(Imago pietatis)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자비로운 보살핌이 있는 곳에서 당신 자비의 모상을 알아보시기 때문입니다”(「사순 시기 강론집」, 10,5).
자선은 영혼의 치료제
레오 대교황은, ‘예수님께서 굶주린 이들, 목마른 이들, 나그네 된 이들, 헐벗은 이들, 병든 이들, 갇힌 이들에게 실천하는 사랑과 자선이 최후 심판의 재판관이신 주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씀하셨다.’(마태 25,40 참조)라고 설명하면서, 우리가 실천하는 자선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잘못과 죄를 용서해주신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나약함을 고칠 치료제를 주셨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잘못을 저지른다면, 자선이 그것을 말끔히 지워 버립니다. 자선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준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설교집」, 7,1).
“‘물이 불을 끄는 것처럼 자선은 죄를 없앤다.’(집회 3,30)라는 말씀을 근거로 하여, 세례의 물(baptismi aquis)과 참회의 눈물(paenitentiae lacrymis)이 죄를 씻어 주지만 자선(eleemosyna)도 죄를 없애 줍니다”(「사순 시기 강론집」, 11,6).
자선은 하느님 나라에 쌓는 천상의 부
레오 대교황은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 자선과 돈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 잃어버릴 수 없는 천상의 부가 되며 반드시 하느님의 보상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쓰다 남은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가장 작은 몫”(「사순 시기 강론집」, 10,5)을 남겨 두고 남을 위해서는 큰 몫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큰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후하게 대접받으신 그리스도께서 후하게 보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남아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하여 나누어주면 결국 잃어버릴 수 없는 부를 얻는 것입니다. … 이렇게 재산을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복된 일입니다”(「설교집」, 92,3).
자선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본받는 행위
레오 대교황은 자선을 실천할 때의 마음가짐과 태도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자선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본받는 것이며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 자선은 주님께 드린 것이기 때문에, 겸손한 마음과 관대한 마음으로 자선해야 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이의 관대함이 큰 부가되기 때문입니다.
“관대함 자체는 하나의 큰 부이며, 관대함의 기회는 없을 수 없으니, 거기에는 우리를 먹여 주시면서 동시에 친히 대접을 받으시는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사순 시기 강론집」, 10,5).
신자 여러분,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알아보게 하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자선입니다. 따라서 자선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증언하는 행위입니다. 우리 모두 자선의 강물에 몸을 담가 주님의 자비를 입읍시다.
[교부들의 신앙 – 참회] 참회의 길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앞두고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사순 시기를 단식하고 기도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이 경건한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참회’입니다.
참회의 첫 번째 길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걸어온 길을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럽게 여겨라”(에제 36,32).
하느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이 참회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참회의 구체적인 길이 무엇인지 전하며 그 첫 번째 길은 ‘죄를 고백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대는 죄인입니까? 낙담하지 말고 참회를 앞당기기 위해 교회로 오십시오. 죄를 지었습니까? 그러면 하느님께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십시오. … 죄를 없애기 위해 죄를 인정하십시오. … 죄를 곰곰이 생각하고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참회에 관한 설교」, ‘둘째 설교’, 2,1).
참회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첫 사람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뒤에도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자녀였던 카인도 죄를 짓고 나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반면 다윗은 죄를 지은 이후 하느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참회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크나큰 죄악에도 그의 후손 가운데에서 메시아가 탄생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성인이 전하는 참회의 두 번째 길은 ‘죄를 슬퍼하는 것’입니다.
“참회에 이르는 또 다른 길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죄를 슬퍼하는 길입니다. 죄를 지었습니까? 슬퍼하십시오. 그러면 죄가 지워집니다”(‘둘째 설교’, 3,10).
지은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 또한 참회입니다. 죄를 짓고서도 슬퍼하지 않을 때 우리는 같은 죄를 쉽게 반복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는 곧바로 죄를 지은 자신의 나약함에 슬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를 찾고 온 마음을 다해 주님께 용서와 자비를 청하게 됩니다.
겸손, 자선 그리고 기도
참회의 세 번째 길은 ‘겸손’입니다. 성인은 성경의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이야기를 들어 이렇게 말합니다.
“바리사이는 의로움을 송두리째 잃고 성전에서 내려왔지만, 세리는 의로움을 얻어 내려왔습니다. … 바리사이는 자신의 의로운 행동을 온전히 망가뜨렸고, 세리는 겸손한 말로 의로움을 얻었습니다. 사실, 바리사이의 말은 겸손이 아니었습니다. 겸손은 훌륭한 사람이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리의 말도 겸손은 아니었으나, 진실이었습니다. 그는 죄인이었습니다”(‘둘째 설교’, 4,25).
참회를 통하여 자신이 비천한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참회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가 하느님께 바친 기도를 보면 온통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자랑밖에 없습니다. 그와 반대로 세리는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죄인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하느님의 자비만을 간절히 청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회하는 세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성인이 권고하는 참회의 네 번째 길은 ‘자선’입니다.
“자선은 위대한 것입니다. … 성경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너의 기도와 너의 자선이 하느님 앞으로 올라가 좋게 기억되고 있다’(사도 10,4). 여기서 ‘하느님 앞’이란, 여러분이 온갖 죄를 지었다 해도 자선을 변호인으로 두고 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 자선은 죄로 지은 빚을 갚습니다. …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주님께서 몸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니고 있든지 간에, 여러분이 행하는 자선은 그 죄를 모두 없애 줍니다”(‘셋째 설교’, 1,6).
자신의 비천함을 참으로 깨달은 사람은 자신보다 더 비천한 사람에게 눈길을 돌리기 마련입니다. 성인은 자선이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를 없애 준다고 말합니다. 자선을 행하는 대상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도와 드림으로써 우리가 주님께 지은 죄를 갚아 드리는 것입니다.
성인은 자선의 또 다른 길로 ‘기도’가 있음을 알립니다.
“하루의 모든 순간에 기도하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청하는 일에서 용기를 잃거나 게을러지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굳건히 버티면,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서 돌아서지 않으시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며 여러분의 청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시면 계속 기도하며 감사를 드리십시오.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응답받을 수 있도록 계속 기도하십시오”(‘셋째 설교’, 4,15).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뉘우치며 자신의 비천함을 깊이 깨달은 사람은 하느님께 끊임없이 기도드리게 됩니다. 기도가 아니면 또다시 죄의 구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영혼 안에는 참회가 없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야말로 참회의 외적인 표지가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
지상에서만 힘을 지니는 참회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사순 시기를 보내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태하고 거만한 사람은 자기 영혼을 위해서 대단한 일을 하지도 않고, 참회를 위한 분명한 기간이 길게 주어져도 게을러서 하느님과 화해하지도 않습니다. 반면에 활동적이고 열성적인 사람은 큰 열정으로 자신의 참회를 드러내며 오랜 기간에 걸친 잘못들을 한 번의 결정적인 순간에 지워버릴 수 있습니다”(‘다섯째 설교’, 2,5).
성인의 말대로 지금 우리에게는 참회를 위한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과 화해하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나태하고 거만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사순 시기에 큰 열정으로 자신의 참회를 드러내어 오랜 기간에 걸친 자신의 잘못을 한 번의 결정적인 순간에 지워버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참으로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인은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죽음이 갑자기 닥치면 참회라는 치료법은 아무런 효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참회는 지상에서만 힘을 지닙니다. 저승에서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주님을 찾읍시다. 훗날 지옥의 끝없는 벌에서 구원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하늘 나라에 합당할 수 있도록 선한 일을 합시다”(‘아홉째 설교’, 7).
[교부들의 신앙 – 신앙] 신앙과 교회의 성사
교부들은 무엇보다도 신앙을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교부들에게 신앙이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의 실현에 대한 확실함’이고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핵심 조건’이며 ‘보이지 않는 실재(實在)들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치릴로 성인은 신앙의 핵심 두 가지를 우리에게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믿어야 할 교리와 관련하여 우리 정신의 동의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은총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 그러므로 신앙은 믿어야 할 교리에만 국한되지 않고 성령께로부터 무상으로 선물로 주어진 것이며, 초월적인 것들을 작동시키는 힘을 줍니다”(「예비 신자 교리 교육」, V,10-11).하느님을 믿고 그분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따르는 일이 인간의 자유나 지성의 동의 없이 그냥 이루어질 수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저 맹목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입니다. 또 신앙은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덕이기도 합니다. 테오도로 성인은 신앙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영혼으로 하여금 보이지 않고 형언할 수 없는 실재(實在)를 보고 알도록 해 줍니다. … 보이지 않고 형언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우리의 믿음이 건강하다면 그것들을 보겠지만, 믿음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 사실 바오로 사도가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라고 했던, 하느님의 교회만이 신앙에 건강하고 믿을 교리에 굳건합니다”(「교리 교육에 관한 강해」, I,8-10).
공기를 볼 수 없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은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성인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계획, 성령의 현존하심 등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직 신앙, 그것도 올바른 신앙으로만 보고 알 수 있는 초월적인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 올바른 신앙은 하느님의 교회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습니다.
교회와 신앙 고백
우리가 세례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과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세례 예식 때 사제는 이렇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교회에 무엇을 청합니까?” 그러면 세례 후보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신앙을 청합니다.” 다시 사제가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하고 물으면 세례 후보자는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단 한 번 전해진 믿음”(유다 1,3)을 충실히 지킵니다. 또 언제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고, 사도들의 신앙 고백을 대대로 신자들에게 전해 줍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말을 가르쳐 자녀들이 그 말을 통해서 만물의 이치를 깨닫고 나누도록 하는 것처럼, 교회 또한 우리를 신앙의 이해와 삶으로 이끌고자 신앙의 언어를 가르쳐 줍니다.
사도 시대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수많은 언어와 문화, 민족, 나라를 거치면서도 한결같이 한 분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유일한 신앙을 고백해 왔습니다. 이 신앙은 하나의 세례를 통하여 전달되며 모든 사람이 오로지 한 분이신 아버지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확신에 기초한 신앙입니다. 이레네오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온 세상에 전파된 교회가 사도들과 그 제자들로부터 이어받은 가르침과 신앙을 … 교회는 충실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온 세상 곳곳에 퍼져 있지만 같은 한 집안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온 교회는 마치 한 영혼과 한마음만을 지니고 있듯이 이것을 믿고, 또한 흡사 하나의 입만을 가진 듯이 일치된 목소리로 그것을 선포하고 가르치며 또 전해 줍니다”(「이단 반박」, I,10,1-2).
이를 통해 우리는 신앙이 개인의 행위이기에 앞서 ‘교회의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신앙은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있으며 우리의 신앙을 낳고 지탱하며 길러 줍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모든 신자의 어머니인 것입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교회가 거룩한 계시로 제시하는 바를 우리가 믿어야 한다고 전합니다.
“우리는 문서와 구전으로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에 포함된 모든 것과 교회가 거룩한 계시로 제시하는 모든 것을 믿습니다”(「하느님 백성의 신앙 고백」, 20항).
이것은 우리가 바치는 ‘신덕송’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진리의 근원이시며 그르침이 없으시므로 계시하신 진리를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굳게 믿나이다.”
교회 전례 안에서 거행되는 성사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라 할지라도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며, 이단 혹은 사이비 종교로 빠질 위험이 대단히 큽니다. 오늘날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이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에 빠져드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어머니인 교회를 벗어난 믿음은 테오도로 성인의 표현대로 ‘건강하지 못한’ 믿음이기에 신앙의 대상을 제대로 보고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분명히 전합니다.
“사실 신앙은 그것을 증언하고 전달하기 위한 어떤 틀을 필요로 하며, 그 틀은 전달될 것에 알맞은 것이어야 합니다. 순수하게 교리적인 내용을 전달하고자 한다면 어떤 개념이나 아마도 책 한 권, 또는 구두 메시지를 반복하는 것이면 충분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전달되어야 할 것, 교회의 살아 있는 전통에서 전해져야 할 것은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나오는 새로운 빛,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 그의 정신과 의지, 정서를 모두 건드려 하느님과, 그리고 다른 이들과 맺는 친교의 살아 있는 관계에 열리게 하는 빛입니다. 이런 충만함을 전달하는 데에는인간의 몸과 정신, 그의 내면성과 관계성, 곧 전인격을 참여시킬 수 있는 특별한 수단이 있습니다. 이 수단은 교회의 전례 안에서 거행되는 성사들입니다”(「신앙의 빛」, 40항).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앙이 그저 교회의 가르침을 담은 책이나 메시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교회의 성사들을 통하여 전해진다고 가르칩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담은 책이나 메시지도 분명히 신앙을 배우는 데에 유익하고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앙을 전해 받는 확실한 방법은 교회 안의 성사들입니다.
성사들 없이 그저 책만으로 신앙을 물려받기란 불가능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최후의 만찬 이야기만 가지고 성체성사가 주는 신앙을 물려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체성사에 참여해야만 그 신앙이 참으로 무엇인지를 알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