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표/김정식
나무꾼과 선녀는 가수 김창남 씨를 보내기 전
뉴욕에서 둘이 청재킷을 샀다고 한다
청재킷을 입고 37년 동안 노래 부르고
이젠 무대에 홀로 서면
청재킷의
추억새가 울컥한다고 한다
선녀는 떠나갔어요
하늘 높이 저 멀리
떠나갔어요
나는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추억으로 남길 증표가 없다
반쪽의 거울 신화 속에 나오는 그 거울
-시집 『먼 산』(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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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식 시인
서울교대 초등수학교육 및 동 대학원 졸업
2020년 월간《우리詩》신인상으로 등단
제 20회 공무원문예대전 은상 외 공모전 4회 수상
시집 『먼 산』이 있음.
비평
김정식의 〈증표〉는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남는가를 묻는 시다. 이 작품은 실재 인물의 일화와 신화적 상징을 교차시키며, 사랑의 지속을 증명하는 ‘물질적·기억적 증표’의 유무를 통해 상실의 깊이를 드러낸다.
시의 도입부에서 제시되는 김창남 씨와 ‘청재킷’의 이야기는 사랑과 예술이 하나의 사물에 응축되어 보존되는 사례다. 청재킷은 단순한 의상이 아니라, 함께한 시간과 감정이 퇴적된 기억의 그릇이다. “37년 동안 노래 부르고”라는 시간의 축적은 사랑이 끝난 뒤에도 예술과 기억 속에서 계속 호흡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대에 홀로 선 순간 “청재킷의 추억새가 울컥”한다는 표현은, 사물이 감정을 호출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섬세하게 형상화한다.
그러나 시는 이 따뜻한 사례에서 곧바로 화자의 고백으로 전환된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다 / 그러나 추억으로 남길 증표가 없다”라는 진술은 앞선 청재킷의 서사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상실의 공허를 부각시킨다. 화자에게 사랑은 있었으되, 그것을 증명하거나 붙들 수 있는 사물도 기억의 장치도 남아 있지 않다. 이 결핍은 단순한 개인적 아쉬움이 아니라, 사랑의 실존마저 흔들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마지막에 제시되는 “반쪽의 거울 신화”는 이 시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마무리한다. 거울은 본래 서로를 확인하고 비추는 매개이지만, 반쪽만 남았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완전한 자기 인식도, 관계의 증명도 불가능하다. 이는 사랑이 떠난 뒤 남은 기억의 불완전성과, 혼자서는 완성될 수 없는 관계의 본질을 드러낸다.
결국 〈증표〉는 사랑의 진정성을 감정의 크기가 아니라 남겨진 흔적의 존재 여부로 질문하는 시다. 누군가는 청재킷 하나로 평생의 사랑을 증명하지만, 누군가는 아무 증표도 남기지 못한 채 사랑을 기억 속에서만 되짚는다. 이 시는 사랑이 끝난 뒤 남는 것이 기억인지, 사물인지, 혹은 공허 그 자체인지를 조용하지만 깊게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