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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셋째 날(10월 29일)
먼동이 트기를 기다려 오른 동망산(東望山)의 완도타워.
전에, 제주행 배의 출항을 기다리느라 2번 오른 적이 있는 타워다.
오르내리는 길을 색색 국화로 단장했고 타워 뒤 정상에는 옛 봉수대가 복원되어 있다.
완도섬민들에 대한 완도군청의 존재의의를 함축한 완도군의 랜드마크..
내가 완도타워를 지나치게 후하게 평가하고 있는가.
"완도군청은 이 타워 하나만으로도 섬민들에 대한 체면은 세웠을 것"이라고 평한다면.
다만, 해발 159m에 불과한 동산에 설치한 모노레일카에는 부정적이다.
해남 땅끝마을의 갈두산 모노레일카도 비판했거니와 여기 완도타워를 오르내리는 그것에도
박한 점수를 메기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장애인과 노약자 등 교통약자를 위한다 하지만 저부(低部)와 상부(上部)의 상당부분을 올라
가야 하는 구조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표방하는 목적과 거리가 있다.
또한 그들에게도 신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건강운동(걷기)의 필요성은 절대적이다.
봉수대에서 내려서다가 해프닝이 벌어졌다.
사면이 탁 트인 정상의 돌풍에 모자가 날아간 것.
멀리 바다로 가거너 절벽 아래 어느 나뭇가지에 걸린다면 내 머리로 돌아올 수 있겠는가.
한데, 모자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봉수대의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몸이 들어갈 수 없는 아궁이 끝에서 꺼내는 것이 문제지만 바다나 절벽에 비할 바 되는가.
아궁이 입구에서 끝이 닿도록 스틱 길이를 최대로 늘려 꺼내느라 시간이 꽤 지체되었다.
눈 아래 북동쪽 신지도와 그 뒤 북쪽의 고금도에서 시계방향으로 약산도, 동 남쪽 멀리 청산
도까지 완도군의 큼직한 섬들이 그림 같이 다가오는 아침.
청산도를 제외한 3개의 섬은 이미 섬이 아니다.
뭍과 섬을 연결한 신지대교와 고금대교, 약산대교 등을 통해 차가 섬 끝까지 달려가니까.
신지도~고금도 간의 장보고대교가 당초의 약속을 이행했다면(2017년8월개통) 우리는 오늘
신지대교와 장보고대교, 고금대교를 달려 강진군과 장흥군의 경계로 가게 되었을 것이다.
1시간 이상의 시간과 그만큼의 기름을 절약하게 되었을 텐데 11월 말에 개통 예정이라나.
실은, 어제 예까지 달려온 이유중 하나도 마량항(강진군의 끝)까지 바다 위를 달릴수 있도록
장보고대교가 개통되었으리라는 기대였는데.
봉수대에서 연육교들을 바라보며 엉뚱한 생각도 했다.
새만금방조제는 길이가 33.9km다.
완도에 가설된 연육교는 총 4km안팎이다.
이 연육교들을 방조제로 대체하면 어떨까.
새만금의 10분의 1 정도의 비용으로 새만금 못지 않은 국토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야 된다는 주장이 아니고 최악의 경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의미다.
어민의 생계와 해양생태계의 문제 등 부작용과 역기능 등 선결문제가 적지 않지만.
어떤 우국지사가 산을 깎아 골프장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농토가 공장과 택지화 되어가는 현실을 걱정하며 식량전쟁이 벌어지면 필드에 밀.보리라도
갈아서 식량을 생산해야 한다는 뜻이었는데 우리의 서남해에는 예비 토지가 무궁무진하다.
망망한 바다에 떠있는 섬들의 아침 정경과 국화길에도 시간을 빼앗겨서 예상보다 많이 지체
되는 동안 숙소에서는 모녀가 작당했는가.
이기적이라고 성토하기로.
2대 1의 열세 형국인데 어쩌겠는가.
어제 완도항까지 깊숙이 들어오게 된 것은 장보고대교가 이미 개통되었다면 큰 단축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작용했는데 실패작이 되고 말았으니.
마량면(강진군)과 고금도(완도군)를 잇는 고금대교 옆 마량항이 성시(?)를 이루고 있다.
초라하기 짝없던 어항이 5년 세월에 전혀 딴 데가 되는 경이로운 발전의 원동력은 무엇인지.
그러나 간밤에 회를 포식했기 때문에 육식을 원한 모녀가 간판은 찾았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호황인 듯 하나 속 사정은 꾸물한 날씨에 견줄 만큼이나 심란한 것 아닌지.
전에, 여수엑스포장까지 가는 동안 남해해변에 뿌려진 인연의 씨앗들도 적잖이 자라고 있다.
들르고 회포를 같이 풀고 나누고 싶은 이들도 있건만 운전자는 내비에 충실할 자세다.
어디가 될지 모르는 하루의 종착지를 대라고 아침부터 다그치며.
내비에게 알리려고 그러겠지만 지름길만 제시할 뿐 내 사정을 고려할 정이 내비에게 있는가.
장흥의 정남진, 옥섬파크와 보성 군학마을(메뉴 '서-남-동 길 (18)' 참조)에 들러보려고 갖은
유혹(?)을 해도 우이독경이고 마이동풍이었다.
해변은 거들떠볼 염도 없이 보성땅 율포해수욕장(보성군 회천면) 입구까지 달렸다.
장흥 경유 보성의 식당에서 육식으로 아침 겸 점심을 했으나 모녀의 불평은 전혀 없다.
스스로 지는 짐은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마량에서 실패하고 율포해수욕장의 '바우네 나주곰탕'을 먹기로 자기네가 결정하였다 해서
(?) 점심때가 되기까지 불평 한마디 없으니.
삼보향(藝鄕, 義鄕, 茶鄕)의 땅을 통과하면서도 다향에 취해보고 싶은 낭만이 왜 없을까.
귀를 홀리는 달콤한 이야기란 오로지 숙박시설일 뿐, 벌교의 삼제산(三帝山/尊帝山, 帝石山,
帝王山)도, 하늘이 내린 공원, 순천만의 자연생태공원(국가지정문화재 명승41호)도, 여자만
(汝自灣/순천만의 옛이름이라고도 하나 틀린말)도 다 헛것이다.
특히 내 자문 요청을 받은 기상청 담당관이 경악하며 희귀한 기상현상이라 단정적인 설명을
하지 못하겠다던 순천만의 특이한 저녁놀마저도 모녀의 관심을 끌지 못하니. . .
일사천리(一瀉千里)로 당도한 여수.
꼬박 20일 이상 걸어서 도착한(여수 엑스포장에) 곳에 3일만에 도착했다면 보고 느낀 것이
7분의 1은 돼야 하는데 100분의 1도 되지 않는 듯 하니 허탈이 극에 달하는 듯 할 수 밖에.
뜻 없이 갔다 왔다 한 돌산대교는 허틸힌 가슴에 난도질을 하여 아프고 쓰리게 할 뿐이었다.
30년, 20년이나 먼저 가버린 외우(畏友)들을 애타도록 부르게 하는 다리라는 것을 운전자가
알 리 없지만 안다 한들 무슨 소용 있는가.
(중)
넷째 날(10월 30일)
여수시 묘도(猫島洞)와 광양시 금호동(金湖洞)을 연결하는 2.26km 현수교인 이순신대교(李
舜臣大橋)를 통해 광양땅으로 갔다.
'2012 여수 세계박람회'에 맞춰 임시 개통하였으나 엑스포의 폐막 이후 잔여 공사를 하느라
막았기 때문에 서-남-동 길 때는 순천으로 우회했는데 이번에 소원을 풀었다.
비록 4발로 달렸을 망정 이번 여정에서 아주 조금이나마 성취감을 느끼는 유일한 구간이다.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에서 인명을 교명(橋名)으로 한 3개의 대교가 모두 전라남도에 있단다.
이순신대교, 장보고대교, 김대중대교 등.
삼국시대에 명성을 날린 그 지역출신의 이름으로 하는데 반대하거나 임진 정유, 양 왜란 때
남해에서 대첩, 전승한 주인공 이름에 이의 달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김대중대교는 과공비례(過恭非禮)인 듯 하여 연유를 알아보았다.
양측 행정구역이 다른 다리와 터널, 합병지역 등의 이름짓기가 얼핏 생각하기 보다 난제다.
복수가 대립하는 첨예한 문제라 지명위원회에서도 섣부른 결정을 하지 못한단다.
대개 양측 지명의 첫자를 취합하지만 선후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는 대립이기 때문이다.
김대중대교도 이에 해당하는 다리였단다
신안과 무안, 두 군간에 놓여 양측의 양보없는 주장 때문에 명명하지 못한채 개통했다니까.
신안과 무안이 분군되기 전인 무안군 때 놓였더라면 분란이 없었을 텐데.
김대중의 출생지인 신안군(하의도)이 분군되기 전에는 무안군이었으니까.
결국 전라남도 지명위원회가 개입하여 김대중대교로 명명했다는데 그의 대통령 재임기간은
1998년2월 25일~2003년 2월 24일이다.
2009년 8월18일 사거(死去)했고 다리는 2013년 12월 27일에 개통되었다.
개통되고 얼마의 세월이 지난 후 김대중대교로 명명되었으므로 그 지역 정서의 영향은 있다
해도 정치 권력의 개연성은 희박할 것이다.
권력이 극보수쪽으로 넘어가 2기(期)가 진행중일 때였으니까.
태풍 볼라벤이 분탕질 치고 간 직후(서-남-동 길 때)의 한심하게 느껴졌던 때와 딴판인 세계
제일의 제철소를 자랑하는 철의 도시 광양.
범람의 위기에서 벗어나기는 했으나 공포에 사로잡혀 건너야 했던 섬진대교를 시원스럽게
달려 하동을 경유하고 남해를 지났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현수교(최초의 현수교인 강원도 등선교는 철거)가 쌍둥이,
형제 다리가 될 날이 머잖은 것 같다.(또 하나의 다리 공사가 한창이니까)
남해는 작은 딸에게도 생생히 기억된다는 곳이다.
1983년 여름, 세 애들과 8박 9일의 캠핑 여행 때 여수의 만성리해변에서 1박한 후 선편으로
남해의 상주해수욕장에 도착하여 1박한 적이 있으니까.
그 때, 해수욕장의 민박집에서 해프닝이 벌어졌다.
애들 셋을 대동하고 온 젊은 남자를 주인이 이상한 시각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눈치 챈 큰 딸이(초등교 6년) 훼방(?)을 놓았지만 나를 홀아비로 착각한 주인이 자기 인척과
결합시키려고 했다나.
8박 9일이 끝나는 날 동해안의 삼척에서 아내와 합류하게 되어 있음을 큰 딸이 폭로(?)했다.
그러나 추억의 해변과 남해의 명물 죽방렴(멸치잡는기구)도 딸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남해대교의 개통으로 섬에서 탈출은 하였으나 출입구가 남해대교 하나뿐이기 때문에 사천
(삼천포)과 고성, 통영 등은 여전히 해로(선편)를 이용했는데 그 쪽에 육로가 개설되었다.
2003년에 동쪽의 관문을 자처하는 창선대교와 삼천포대교의 개통으로 남해군의 육지와의
교통은 양 날개를 단 셈이다.
"섬과 섬, 산과 바다를 잇는 천혜의 자연경관과 조화된 국내 유일의 교량전시장"이라는 창선.
삼천포대교는 단항, 창선, 늑도, 초양, 삼천포 등 총 연장 3.4km로 다리들의 집합명사다.
서-남-동 길때는 이 구간에서 최악은 모면했으나 병원출입을 계속해야 하는 사고도 당했다.
태풍 볼라벤이 물러간 후 숨 돌이킬 겨를도 주지 않고 쳐들어온 덴버에 꼼짝 못했던 삼천포
고성길이었는데 단숨에 고성 공룡박물관(하이면)까지 달렸다.
박물관이 자리한 덕명리는 이름(德明)과 달리 고약한 인심으로 첫째를 다툴 마을이다.
"콩심은 데 콩나고 팥심은 데 팥난다"는데 이 마을청년회 이름의 알림판이 그 증거다.
"이 곳 휴게소(정자)는 덕명마을 주민을 위한 시설물이므로 외지인은 사용을 삼가하여 주시
기 바랍니다"
한국의 관광지 휴무일은 월요일이다(국가 또는 지역 따라 요일을 달리 하는 나라도 있다)
마을은 그렇다 해도 박물관 경내의 야외에서 잠시 휴식하기는 썩 좋은 날이다.
마을의 인심과 달리 걷기 좋은 해안길을 두고 차로 달려야 하는 아쉬움을 달래려고 찾아간
곳은 노변의 맥전포항.(메뉴 '서-남-동 길' (24) '맥전포항의 斷想 :지금 행복한가' 참조)
마을 정자에 천막집을 짓고 1박했던 곳이다.
제주도와 울릉도를 포함하여 한국의 남반도 어항은 단 한 곳도 빠뜨리지 않고 살펴보았는데
이보다 더 정갈하고 미려한 어항은 기억에 없다.
5년 세월에 다소 퇴색은 했어도 여전하다.
시각이 없다면 어항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만큼 어항 특유의 냄새가 없도록 청결하다.
이번 7박8일 여정에서 딸이 감탄사를 발하고 떠나기를 머뭇거린 유일한 곳이며 딸의 화색이
돌게 할 정도로 산뜻한 어항이다.
딸의 경쾌한 기분은 식당으로 이어졌다.
맥전포항과 같은 하일면에 속하며 맥전포에서 멀지 않은 임포항(林浦)의 '임포횟집'.
맥전포에서 여기까지는 차로(1010 지방도) 외에는 걸을 해안길이 없기 때문에 찻길을 걸어
와서 아침식사를 했던 식당이다.
이번 여정에서 전에(서-남-동 길 때) 내가 식사했던 집에서 다시 식사하는 유일한 식당인데
7박8일 통털어 딸이 음식맛에 호감을 나타낸 유일한 식당.
이 분위기는 고성을 거쳐 통영까지 이어졌고 거제까지 연장되었다.
늙은 부부의 금혼여행인지 작은 딸의 기분풀이 여행에 엑스트라 부모인지 헷갈리는 여행의
4일째 날에 모처럼 찾은 활기를 꺾어서 되겠는가.
통영에서도 거제에서도 내게는 당치 않은 일이지만 딸 하고픈 대로 따를 수 밖에.
호불호의 의사표시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의중을 알 수 없는 아내를 아전인수식으로 어느
편을 만들 수도 없으니.
결국, 통영과 거제의 노른자 볼거리들을 모두 생략하고 거제의 최고가 펜션대열에 속한다는
집에 여장을 풀고 그 집의 메뉴(세미 바베큐)로 저녁식사를 하고.
거제시 장목면 시방리 해변의 HOM(House of Mind/생각 속의 집)이다
탁 트여서 낮에는 거가대교와 시계방향으로 부산이 아스라하나 밤에는 바다 위에 떠서 명멸
하는 불빛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방.
방 안에 누운채로 새벽의 뜨는 해를 보겠다고 커튼을 걷어놓고 자기 때문인가.
잠은 되레 비싼 방값에 역비(逆比)한 것 같다.
다섯째 날(10월 31일)
전번에, 두 발이었을 때는 문제의 거가대교 구간이었으나 네 발인 지금은 해저터널 3.7km와
지상터널, 연육교 등 8.2 km 구간이 싱겁게 끝났다.
거제와 부산 사이가 지근처럼 가깝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140km가 60km로 단축되었으니 맞는 느낌일 것이다.
보행자도 괴물 취급을 받기는 해도 걸어갈 수 없는 것을 모두 숙지하고 있기 때문인지 히치-
하이킹이 아주 수월한 구간이다.
그러나, 이처럼 편하고 유익하며 위급 상황에서는 절대적 공헌을 하는 연육교들이 왜 찬반
논란에 시달리고 있을까.
우리나라의 섬 왕국인 전라지방의 일부 섬민들이 주축이 되어 연육교가 놓이는 섬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
섬 방문 때마다 그들의 이유 있는 반대에 직접은 커녕 간접으로도 관련 없는 나도 착잡한데.
반대의 가장 큰 이유는 제1의 수혜자가 섬 토착민이 아니고 뭍의 부자들이라는 것이다.
연육교 개설 정보를 미리 확보한 뭍의 부자들이 이미 대부분의 노른자땅을 소유하였으며 그
과정이 공명 정대하지 못함으로서 인심만 흉악해졌다는 것.
심지어 섬민을 위해 거금을 투자한다는 명분마저도 소위 짜고 치는 고스톱에 다름아니라고
회의할 만큼 사나워졌다.
차량들이 달림으로서 문화생활의 급격한 상승으로 급증하는 생활비 때문에 오순도순하던
이웃사촌 관계가 파괴되고 걸핏하면 송사로 가는 것도 대대손손 살아오는 토착민들에게는
가슴 아픈 이유다.
연육교의 절대적 필요성을 잘 알면서도 반대하는 섬민들의 우향충정(憂鄕衷情)을 소탐대실
이라고 매도해야 하는가.
전에 나는 새만금방조제 신시도리의 일부 반대자들에 대해 내가 하면 로맨스지만 남이 하면
스캔들이냐고 비판적이었는데 내가 사려깊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내비에게서 낭만을 기대하면 연목구어(緣木求魚)다.
가덕도를 지나 뭍에 오른 후 해안을 따라 낙동강 하구, 을숙도를 지나는 낭만의 길을 안내할
리 없으니까.
송정터널을 빠져나감으로서 부산 찍고, 대변으로 탈출하게 한 것이 화근이었는가.
대변항 길이 마땅치 않은 운전자의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한 듯 한데 "개똥도 약에 쓰려 하면
없다"는 속말이 진정인가.
변화무쌍한 여인들의 식성이 짜장면을 찾는데 흔해빠진 중화식당이 없으니.
부산광역시의 끝, 기장군 장안읍에서 소원을 풀고 당도한 곳은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간절곶.
소위 '공론화위'라는 엉뚱생뚱한 대의기관(?)을 만든 신고리원전의 소재지 서생면이다.
국민의 대의기관이라는 국회는 자폭하고 그 안의 의원이라는 자들은 모두 자진하라.
오죽 못났으면 직접민주주의를 외쳐대며 건건사사 공론화위원회라는 희한한 기관을 만들어
처리하겠다는건가.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라는 자부터 모든 권력자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았음에도 오죽이나
자신이 없으면 면피용 둘러리로 책임을 피해가겠다는 잔꾀를 부릴까.
참으로 가소롭기 짝이 없다.
한반도에서 일출이 가장 이른 곳은 포항(경북)의 호미곶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보다 1분이
빠르다 해서 새로이 각광을 받고 있다는 곳이 바로 여기 간절곶이다.
일대에는 왜구에 볼모로 잡혀있는 박제상(신라시대의)의 귀환을 고대하며 서있는 처자식의
애절한 석상을 비롯해 여러 기념물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거대한 우체통이다.
이름은 소망우체통이며 이 우체통을 통하여 엽서를 띄우면 원하는 곳에 무료로 배달되므로
고맙기 그지없는 메신저(messenger)였다.
까미노에서 나는 간절곶의 소망우체통과 그 역할을 실컷 자랑했다.
우리의 소망우체통을 벤치마킹하여 뻬레그리노스에게 서비스하라고 권하기도 했다.
뻬레그리노스가 안겨주는 막대한 수입에 비해서 무료 엽서의 비용은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함을 확인하는 대비수치를 제시하며.
한데, 어찌 이런 일이.. . .
까미노에서 기고만장했던 내 꼴이 머쓱하게 되었으니.
유료로 바뀌었단다.
배가 고팠는가?
명품 만들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약간의 수입에 연연하여 그 명품을 스스로 파기하다니.
금혼여행 신을 알리려던 생각을 접고 떠났다.
석양과 더불어 간절곶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신(scene)도 포기하고.
수출품을 산더미처럼 싣고 울산항을 떠나 서서히 다가오는 듯 하다가 쏜살같이 사라져가는
거대 선박들로 석양노을에 물들어가는 간절곶 앞바다가 장관을 이루는데.
단절없이(endlessly) 계속되고 있는 이 광경을 바라다보고 있노라면 온 가슴이 뭉클해지고
먹은 것이 없어도 절로 포만 상태가 되는데 아직 이른지 잠잠한 시간에.
온산공단(울산광역시 울주군)과 울산광역시의 도심을 바이패스하려면, 이 때야말로 내비의
역할이 필요하건만 시원한 안내를 못하는 듯 답답한 통과였다.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벌여놓은 소위 지방분산정책으로 사위의 근무처가 이 곳으로 왔지만
울산에 대해서는 나 만큼도 알지 못한다.
토박이 K(낙동정맥의 인연/메뉴'백두대간과아홉정맥' 72번글참조)가 있으나 그에게 알리면
폐를 많이 끼치게 되므로 조용히 통과하려는 것이었는데.
울산의 공단 해안을 벗어나면 매혹적인 주상절리(柱狀節理)의 해안길이다.
그러나 운전자의 관심은 바야흐로 잠자리인 시간.
경북 경주시에 들어섰고 양남면의 해안에서 무인텔인데도 관리자가 있는 모텔로 정했다.
보다 상급 숙소를 원한다면 울산으로 백하거나 포항까지 달려야 하는 위치인데 밤길 운전이
부담스러운지 운전자가 쉬이 동의함으로서 무인텔의 체험도 반으로 줄었다.
계절에 민감한 지역은 후한 점수를 받을만한 숙식업소가 없는 것이 정상이다.
제철에는 절로 포화상태를 이루므로 애쓸 필요 없고 비철에는 야써도 소용 없기 때문이다.
저녁식사도 그렇고 그런 정도였다는 뜻도 된다.
7박중 2박이 남았을 뿐이며 2박중 마지막 밤은 이미 예약(콘도)되어 있는 상태라 해결해야
하는 밤은 단지 1박이 남았다.
홀가분한 기분임을 의미하는 밤.
우리가 달리고 있는 이 길은 내가 걸었던 서-남-동 길과는 방향은 같으나 반비의 길이다.
그 길의 추억이 생동적일수록 이 길은 팍팍하고 힘겨워지니까.
그 때는 도시에 거주중인 사람들이 조상묘를 벌초하러 오는 추석 직전이었다.
이 곳(양남)과 이웃 관계인 양북온천에서 늙은 나그네에게 흐뭇한 추억이 쌓여가고 있던 그
밤이 고개를 들면 이 밤은 비록 한 가족이라 해도 탁하고 지루한 밤일 수 밖에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