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필의 카라얀이 알비노니와 파헬벨, 보케리니, 레스피기 같은 이탈리아‧독일 음악가들의 아다지오 곡들만 골라서 녹음한 음반이다. 독일 그라모폰 초반은 1973년에 나왔고 우리나라에서는 성음에서 발매됐다.
이 레코드에 수록된 작품들이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됨으로써 본래 실내악곡이 지닌 친근감을 상실해 버릴 것이란 비난은 있을 수 없다. 그 옛날 1676년, 이미 토머스 메이스Thomas Mace(바로크 시대의 류트‧비올라 연주자이자 작곡가, 음악이론가)는 그의 책 <음악의 순간Musick's Monument>에서 실내악의 진정한 의미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한탄하였다. Warderful Swiftnez에 대한 평론에서 그는 ‘10대 또는 20대의 바이올린을 넘어 더욱 많아지는 악기 편성’은 음악의 도덕적 힘에 이롭지 못한 것이며, 단지 즐거움의 감각만 충족시키게 되어 ‘인간의 마음을 단련시키거나 침착하게 하고 신에 대한 사랑을 상승시키는 대신에 그의 귀만 만족하게 하고 그의 머리를 혼미케 할 따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출판된 작품의 머리말이나 그 작품의 연주회에서 많은 음악가들이 동원되어 대편성으로 연주한 사실 또한 ‘예술애호가와 감식가’의 친교 클럽 등을 보건대, 진정한 음악적 해석을 위한 연주자의 인원 수를 결정짓기 위한 어떤 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작품이 ‘4중주’라고 명명되어 있다는 것은 단지 쓰인 파트의 수를 설명하는 것이지, 그 작품이 원하는 연주자의 수를 지시하지는 않기 때문에 한 파트에 두 명 이상이 연주하기도 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알비노니 ‘아다지오’
현재 불완전하게 전해지고 있는 소나타의 일부분인 알비노니Tomaso Albinoni(1671~1751)의 호모포닉homophonic(하나의 성부가 주된 선율을 전개하고 다른 성부는 그것을 일정한 법칙에 의해 화음을 연결하여 반주하는 음악 형식)한 아다지오Adagio G단조는 특히 많은 연주자에 알맞은 곡이라 할 수 있다. 이 악장은 20세기 음악가 레모 자초토Remo Giazotto가 오케스트라 곡으로 조심스럽게 편곡했는데, 특히 오르간을 콘티누오로 사용함으로써 교회 소나타의 성격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파헬벨의 ‘캐논과 지그’
이 파헬벨Johann Pachelbel(1653~1706)의 기교적인 캐논Canon과 오스티나토 베이스(같은 음형을 같은 음높이로 끊임없이 반복하는 최저 성부)에 의한 30개 이상의 변주곡, 그리고 기운차며 활발한 무용곡인 지그Gigue 등은 바로크 모방 예술의 전통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파헬벨은 건반 음악의 분야에서 남부 독일 양식과 중부 독일 양식의 독창적인 융합을 이루었는데, 그의 작품은 여기서도 보여주는 바와 같이 성부 진행의 아름다움과 단순한 화음, 음형 변주를 특징으로 한다.
보케리니의 5중주 ‘마드리드의 야간 행군’
이 곡 Aufziehen Der Militärischen Nachtwache In Madrid는 앞의 파헬벨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바로크 모방 예술의 전통으로 분류된다. 작곡법을 엄격하게 사용하는 것보다는 암시하는 듯이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보케리니Luigi Boccherini(1743~1805)의 다음과 같은 말로 명백히 알 수 있다. 즉 “작곡법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은 그 작품에 내재해 있는 진실성 때문에 용서받을 수 있다”라는 것. 그의 곡은 고전적이기도 하지만 이탈리아적 취미와 프랑스적 취미가 융합되어 있다. 또한 보케리니가 모차르트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레스피기 ‘옛 춤곡과 아리아’ 제3모음곡
레스피기Ottorino Respighi(1879~1936)는 로마의 산타 체첼리아 음악원의 교수가 된 후부터 그 곳 도서관에서 옛날 작곡가의 작품을 조사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으며, 그 가운데 마음에 든 것을 자기 관현악법으로 자주 편곡하였다. 그의 옛 춤곡과 아리아Antiche Danze Ed Arie Per Liuto는 세 종류가 있지만 이 제3모음곡은 세 곡 중에서도 가장 작은 편성의 현악 합주로 되어 있고 필요에 따라선 현악 4중주로도 연주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제1악장인 ‘이탈리아나’는 16세기 말의 작곡자 미상의 작품을 바탕으로 했다. 도이칠란트에서 출판된 16세기의 류트 음악집 가운데 포함되었던 것이다.
역시 1603년에 나온 류트 음악집에 포함된 곡에 바탕을 둔 2악장 ‘궁정의 아리아Arie Di Corte’는 리듬의 변화가 재미있다. 비올라의 감미롭고 감상적인 가락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라는 제목을 갖기도 한다. 바이올린의 짧고 경쾌한 가락은 ‘안녕, 양치는 여인이여, 영원히’이며, G장조의 고요하고 불안정한 부분은 ‘뚜렷이 지켜보는 사랑스러운 눈’이다. 표정이 풍부한 느린 가락은 ‘저 건너편에 사랑의 조각배가 있다’이며, 계속되는 G단조의 피치카토는 ‘어떠한 신이 내 혼을 흔들어 놓을 것인가’이다.
제3악장 ‘시칠리아나Siciliana’란 말할 것도 없이 시칠리아섬에서 기원한 춤곡으로 점음표點音標를 즐겨 사용하고 있는데 매우 서정적이다. 변주곡의 형태로 16세기 말의 작곡자 미상의 류트 곡에 바탕을 두었다.
17세기 후반의 작곡가 루도비코 론칼리가 1692년 이탈리아 베르가모Bergamo에서 출판한 스페인 기타 음악집에 수록된 것을 바탕으로 한 제4악장 ‘파사칼리아Passacaglia’는 주제를 여러 번씩 낮은 성부나 그 밖의 것으로 반복하며 변주해 나가는 형태이다.
베를린 필하모니, 카라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의 지휘에 대하여 지금까지 수많은 레코드를 들어본 이들에게 새삼스레 긴 설명은 필요 없다. 유럽에서 비엔나 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표 악단이며 고전부터 현대곡까지 거침없이 연주하는 베를린 필을 이끄는 카라얀의 지휘는 정확하고 엄격하되 현대적인 스타일이다. 그는 음악을 정교하게 분석하여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표현의 주가 되는 선을 살리고 정성 들여 치밀하게 지휘하는 만큼 듣는 이들의 감동을 끌어올린다.
베를린 필은 1955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ängler의 사망 후 독일 낭만주의 사고에서 라틴 쪽 경향으로 온 듯하다. 카라얀은 그러나, 명석하고 이지적으로 음악을 이끌어 나간다.
(성음 한국어판 표지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