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초, 두만강을 건너 왕청현 덕원리에 들어선 서일은 3월에 재기를 도모하는 반일의병들과 후날의 대종교인들인 친구이며 동지들인 현천묵, 계화 등과 손잡고 항일독립단체인 "중광단"(重光团, 중광이란 대종교의 중광을 환호하고 단군을 숭상하며 민족의 혼이 의연히 살아있다는 뜻)을 조직하고 그 본영을 덕원리에 두었었다.몇해가 흐른 1919년 4월에 서일은 원 "중광단"의 토대에서 대종교 교인들을 핵으로 하고 반일의병들과 공교회(孔教会) 회원들을 더 규합하여 "대한정의단"을 발족하고 단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과정에 나아갈 방향과 정체(政体)로 갈등을 빚으며 의견을 달리하던 공교회의 대표적인물들이 물러서기도 했지만 대한정의단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서일은 정의단 내에 순수 우리 글 신문 《일민보》(一民报)와 《신국보》(新国报)를 꾸리고 무장항쟁을 고취하면서 결사대원을 모집하였는데 응모, 등록한 결사대원이 1037명을 이루었다. 이 비밀결사대가 서일이 1919년에 국자가에서 대종교도 중심의 비밀결사—"자유공단"(自由公团)을 조직했다는것과 같은 비밀결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서일의 이름과 영향은 막강했다.서일은 이해 8월 7일에 대한정의단 산하에 순 무장조직 대한군정회를 조직하게 된다. 상해에서 대한민국 림시정부가 수립(1919년 4월)된후에는 이 림시정부의 지도를 받기로 하고 1919년 12월 "국무원 제205호" 정신에 따라 중광단으로부터 발족된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하여 대한군정부로 개편하였다. 대한군정부는 상해 대한민국 림시정부의 지령에 의해 그 명칭을 "대한군정서"로 즉각 개칭, 서간도의 대한군정서를 "서로군정서"로 명명한데 비추어 서일의 대한군정서는 "북로군정서"별칭을 가지였다. 북로군정서의 탄생이다.
신생한 북로군정서는 중앙조직체계를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누었다. 총재부가 주로 대한정의단의 중심인물들로 구성될 때 사령부는 주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로 구성되였다. 사령부는 총재부의 절대적지도를 받았으며 총재부와 사령부의 거의 모든 인물들이 대종교 교도들이였다.
북로군정서의 주체는 반일무장단체이기에 무장투쟁을 이끌어가자면 강력한 군사자질을 갖춘 사관대오를 키워야 했다. 이 점을 깊이 터득한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은 북로군정서가 직접 지도하는 산하 사관련성소를 꾸리기로 결심하였다. 원 대한정의단을 위시한 지도계층 대부분은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거친 사람들이 아니기에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역할을 잘 발휘시키는것이 중요했다. 서일은 이 점도 잘 알고있었고 새로 모이는 무장단체 모든 장병들은 사관련성소를 거치기로 하였다.필자는 현지답사와 다방면으로 각종 자료를 헤아리며 단서를 더듬고 일면 왕청현에서 다년간 현안의 력사와 교육사 연구에 전력해 온 문호갑 등 로선배님들을 찾아뵙는 가운데서 북로군정서의 본부는 서대파가 아니라 왕청현 십리평향 잣덕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북로군정서는 바로 이곳 잣덕의 저 북쪽 펑퍼짐한 산기슭 밭가운데 자리잡고있었다. 어느 한 자료에 의하면 본부와 병영은 5~6헥타르에 달하는 산허리를 평지로 만들어 건설했는데 나무를 찍어 만든 중국식 6칸집 5개와 5칸 집 2개로 이루어졌다. 사관련성소는 1920년 3월 1일에 정식으로 개학하였다. 정규적인 군사훈련기지로 발돋움하고저 사관련성소 예비훈련반은 북로군정서 본부와 약 300메터 떨어진 남쪽의 조금 경사진 잣덕 평지에 교사 6채를 짓고 운동장을 넓게 닦았다. 사관련성소 본부는 동북쪽 계곡을 따라 약 7.6킬로메터쯤 되는 곳에 두었다.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 사관련성소 소장은 사령관 김좌진이 맡고 교수부(教授部)장에 라중소(罗仲昭), 본부교사에 리범석(李範奭), 학도단장에 박녕희(朴宁熙)가 임명되였다. 학도단내에 제1학도대(学徒队)(150명)와 제2학도대(150명)의 두개 학도대를 두고 각 학도대에 3개의 구대(区队)(각 50명)를 두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여러 구대의 구대장으로 임명되여 사관생도들을 교육, 지휘하였다. 양림이 제2학도대 제1구대장을 맡아나섰다.이 시절의 양림은 양림 아닌 원명 김훈으로 나타난다. 사관생은 300여명이였는데 주로 대종교산하의 청년들과 덕원리 명동중학교의 학생들로 이루어졌다. 나이는 보통 20살—40살 사이였다. 이때를 두고 필자가 일찍 연변대학 조문학부 재학시절에 왕청에 가 방문한 리만섭 등 로인들은 덕원리 중학부의 학생들 거개가 북로군정서 사관련성소의 학생으로 넘어갔다고 말하였다. 한옹의 이름으로 정리되고 연변문사자료 제5집(교육사료전집, 1988년 12월)에 실린 "민국초기 왕청현 조선인 교육개황"도 덕원리 중학생들의 전이를 말하고있다.병력확대, 무기장만, 군사골간 양성이란 세가지 과업을 내세운 서일은 재무 계화와 함께 전문 병력확대와 무기구입에 전력을 기울리였다. 1920년 6월, 총재 서일장군과 계화가 이끄는 무장경비대가 무기운반대 200여명을 무장보호(8)하면서 로씨야 연해주에 가 무기를 많이 운반해옴으로 하여 사관생들은 전부가 무장을 지니게 되였다. 한데서 북로군정서는 시초 병력 500여명에 보총 500자루, 권총 40자루, 기관총 3정으로 나타났으나 일제측의 자료—"간도에 있어서의 불정선인단의 상황"에 의하면 1920년 8월 현재로 북로군정서의 무력은 독립군 약 1600여명, 권총 1300자루, 기관총 7정이라고 밝히였다. [연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