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모 토요칼럼 2026.7.25)
(양해말씀)
오늘의 토요칼럼은 단편 시나리오급의 장문의 글이 되었습니다.
주말 이틀에 천천히 보시기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박정희의 중화학 담당의 8년간의 실무자가 밝히는 중화학 정비사 공개 >
1. 박정희의 60년대의 공적
<박정희 대통령의 NICS 건설>
박정희 대통령은 61년 516 군사혁명에 성공하여 한국의 영도자로 등장하여 재임기간 초기 60년대의 10년간에 고속도로를 비롯 철도, 도로, 항만, 산림녹화등 인프라를 구축하였다.
자손 대대로 내려받은 쇄국 봉건주의에 따른 농본지 국가에서 탈피하고 기간산업 공장건설을 비롯한 공업입국과 수출제일주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국가와 국민을 빈곤과 기근에서 해방시켰다.
이리하여 박정희는 조국을 세계 최하 빈곤국가에서 신생 개도국(NICS)으로 격상시켜 70년대를 향한 중진국으로의 발전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2. 박정희 대통령의 70년대를 향한 비전
가. EPB의 신10개년 장기 경제
개발 계획)
박정희의 70년대를 항한 정부는 60년대의 과속 과대 투자로 70 년대초 격심한 인플레를 겪어
내야 했다.
박정희의 경제기획원(EPB)은 희망찬 70년대를 향하여 72년도를 기점으로 발효하여 81년 목표로 수출 53억 불 달성의 10개년 경제 개발계획을 성안 발표하였다.
EPB( 김학렬 부총리, 황병태 기획 차곤보)는 이 10개년 장기계회획을 장미빛 경개발 계획이라고 자화자찬하며 시행에 들어갔다.
나. 박정희의 70년대를 향한 강력한 비전
70년대초 박정희 대통령은 방위산업 육성을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상공부 광공 전 차관보를 방산담당 경제 2 수석 비서관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TF팀 팀장으로
임명하였다.
박정회 대통령은 오수석을 상공부때와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명쾌한 답변에 오국보라고 부르며 공학도로서 방산과 경제발전에 가장 많은 대면 상담을 하셨다.
오수석과의 대담에 의하면 각하는 EPB 의 10개년 계획에 의한 81년도의 60년대의 8%대 성장 기준에 의한 수출 53억 불 달성에 늘 불만이 셨다고 한다.
각하는 드디어 한날 " 오국보, 100억불을 할 수 없나"! 하고. 물으셔서 " 예 알았습니다" 했다 한다.
3. 박정희 대통령께 중화학 보고와 대통령의 추진결심
가. 오원철 수석의 중화학 보고의 비사
73년 1월초 오원철 수석이 중화학에 대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승인을 받기 위하여 병풍식 미니 차트로 설명드렸다. 김정렴 비서실장이 배석하였다
오수석은 중화학의 목표는 각하의 비전에 의거 81년에 10개년 계획에 의한 53억 불의 2배인 100억 불을 달성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중화학 공장을 건설하여 수출목표표를 달성하며 이것이 결국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구축한다고 첨언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때 질문한 것이 두 가지였다. <첫째가> 막대한 투자가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떡할 건가?
<둘째가 후진국에서 중화학을 한 선례가 있느냐?였다.
오수석은 <첫째> 질문에 대한 투자소요에 대하여는 일본이 전후 20여 년간에 업체별로 철강, 조선, 기계를 중심으로 한 5,6개의 중공업단지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유공장을 중심으로 석유화학 공업의 콤비나트가 있습니다.
이들을 건설하는데 얼마를 투자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주먹구구식으로 추정해 본다면 1천억 불 정도라는 것이지 선진국의 전유물이 되어 후진국은 절대 감당할 수 없는 공룡 같은 금액이 되어 식자들이 반대하는 것입니다.
돈 없는 우리나라 능력을 감안해서 투자할 수 있는 100억 불대로 해서 생산 규모를 일본의 약 1/5로 축소하는 한국식으로 만들겠습니다.
중화학 건설기간 10년을 잡으면 연간 소요액은 연간 10억 불이 됩니다. 경제 1에서 이 정도의 금액은 부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둘째>의 질문인 중화학 건설의 전례에 대하여는 오수석은 "사실대로 전연 없습니다"하고 보고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참고로
"일본이 일본열도 개조론에 의한 10개년 계획으로 100억 불 수출계획 실적은 있습니다"하고 보고 들었다.
나.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 추진결심과 결의
박정희 대통령은 "좋아! 일본이 했는데 우리가 못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야 말로 내가 할 일이다"라고 말씀하시고 벌떡 일어서셔서 악수릍 하셨다.
이로서 박정희 대통령께서 중화학의 진가를 인정하시고 추진을 위한 강한 집념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시고는 "내가 무얼 해주면 되나?"하고 물으셨다.
오원철 수석이 "각하께서 중화학 선언을 해주십시오" "선언문 초안을 만들어 보고 드리겠습니다." 이것으로 중화학선언이 확정된 것이다.
여기에는 청와대 최고 권위 3인방 대통령 비서실장 수석비서관이 한자리에 모여서 결정된 것이다.
4. 자유민주의 경제강국 건설
여기서 특별히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중화학은 글로벌 민주주의 국가로서 자유무역 시대에 수출에서 국제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목표였다
수출지향성 중화학이 글로벌 시장에서 국제경쟁력으로 이기지 못하면 중화학은 패망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규모와 공정과 건설 그리고 운전등 모든 면에서 국제경쟁력 있는 계획과 추진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주주의 건설 인사로서 국가의 안보를 위하여 미국과의 군사동맹 국가 관계를 굳건히 지켰다.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수출 제일주의 성장을 모또로 민간이 경제주체로서 글로벌 시장에서 활약할 수 있는 경쟁 체제를 구축하였다는 것이다.
중화학을 국가 최고 정책으로 격상시키기 위하여는 절대적 목표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대통령의 비전이기도 한 81년에 수출 100억 불과 1인당 국민 소득 1,000불 달성을 목표로하여 발표한 것이다.
100억불 수출 목표는 중화학으로 공업구조를 개편하여 정부의 53억 불의 수출목 목표의 약 2배인 100억 불을 달성하는 정정당당하고 대의명분이 있는 것이었다.
수출목표의 금액추정은 전문기구로서 상공부 상역국과 상역 차관보( 심의환, 추후 총무처 장관이 됨) 추후에 2급 비밀작업으로 수출 25억불,50억불,100억 불이란 책자로 된 보고서로 중화학 100억불 수출목표는 달성이 가능하다고 했다.
청와대 T/F 팀은 공식적 정부계획을 뒤엎고 새롭게 중화학을 하는 이상 어느 누가 보든지 치밀하고 자신감 있는 계획을 만들어 추진하여야 했다.
오원철 수석은 추후 발간한 영문대작 The Korea Story에서 중화학의 근간은 김광모 비서관이 프리페어 한 공업구조개편론 (Reorgazation of Korea's Industrial Sructure )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고 했다.
청렴결백이 몸에 베이고 실천우선 주의이신 박정희 대통령의 전 국민의 슬로건이 된 "100억 불 수출의 중화학 선언에 전 국민이 총
동참 궐기 봉기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즐거히 써 주시는 휘호대로 "내 일생 조국과 민죽을 위하여 " 바치신 것이다
5.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 성공의 찬란히 빛나는 결과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의 선진국 건설목표로서의 수출은 81년 100억 불 달성은 4년이나 빨리 77년에 달하였다.
77년 12월 22일 상공부 주관으로 장충 체육관에서 박정희 대통령 참석하에 역사적인 수출 100억불 달성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81년도 수출 100억불 달성 목표는 하늘이 내려주신 신명으로 국민 모두가 뛰어 200억 불을 달성하여 정부의 당초 계획상의 53억 불의 4배를 댤성한 것이다.
참고로 2천 년도에는 수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