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 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정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 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쭉 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ㅡㅡㅡ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ㅡㅡㅡ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마량항 분홍 풍선 ㅡ김영남
골목이 시작되고, 골목 옆구리 파도 출렁대는 곳에 환한 창이 있다. 그 창에선 초저녁부터 김칫국 냄새가 번지고 가끔 웃음소리도 들리곤 한다. 그런데 빠져나온 웃음소리 하나가 창을 부풀게 한다. 자꾸만 부푸는 게 커다란 분홍 풍선이다. 쪼그리고 앉아 그 풍선 잡고 있으니 내가 질질 끌려간다. 끌려가 감나무에 걸려 대롱대다 바다에 빠져 죽을 것 같아 안간힘으로 버티어본다. 그러자, 갑자기 내 어머니가 나타나고 쓸쓸한 우리 집 식탁이 보인다. 식탁 너머로 내 이른 귀가를 기도해주던 상도교회 구역장님이 지나가고 복슬 강아지, 검은 고양이, 군고구마 아저씨도 지나가고…… 지나가지 않아야 할 것들도 지나가고 있어 난 잡고 있던 풍선을 그만 놓아버린다.
에구머니나, 분홍 풍선이란 잠자던 것들까지 깨워 띄우는 신기한 기구. 허름한 유리창에선 더욱 높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 찬바람 불면 더욱 슬프게 펄럭이는 어선의 깃발.
난 그 풍선을 잡고 먼 나라로 가고 싶다. 항구란 배만 타는 곳이 아니라 그런 풍선을 잡고 더 따뜻하고 아늑한 나라로 출발하는 곳임을, 풍선에 바람이 빠져버리면 예서부터 흔들리는 귀환이 시작되는 곳임을 배운다. 마량항 부둣가에 고동처럼 붙어서.
ㅡㅡ2006년 〈현대시〉작품상ㅡㅡㅡ
시집ㆍ푸른밤의여로ㆍ문학과지성사ㆍ 2006.04.21
-----------------------
백열등을 위로해 주세요
몇 병의 소주와 안주가 오가고 그의 앞날과 위로가 오가다가 이내 얼굴이 백열등처럼 달아오르면 그는 꼭 던진다, 그의 회사를 박살을 내야 속이 후련해질 컵처럼……
나는 그의 회사를 정중하게 받아놓고 나의 회사로 바꿔서 그에게 던진다
그러면 그는 또 어느새 시골로 내려가 그의 학창 시절, 아버지, 어머니…… 고향까지 마구 찌그러뜨려서 던진다 난 잠시 고민하다가 찌그러진 그의 고향을 반듯하게 펴 응수한다
신통하다 이렇게 치열하게 던져도 절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가끔 포장마차에서 펼치는 그와 나의 투수전 오늘도 새벽 4시가 응원하러 나오고 우린 또 수천 와트의 백열등을 그 허름한 경기장에 매달아놓고 귀가한다 그는 따뜻한 남쪽으로, 난 싸늘한 북쪽으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할미꽃 ㅡ김영남
봄 잔디가 생각났으리라, 고양이 한 마리 할머니도 그리워하다가 고운 입술 내려놓고 저렇게 졸고 있으리라
미워하면 안 되느니라 해코지하느니라, 하는 말씀 흰 수염들은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으리라
깰까, 놀랄까, 야옹하며 발톱 치켜들까 살금살금 다가가 입술 살며시 포개 보는데 좋은 듯 싫은 듯 움찔움찔하여라
새끼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마을에 분양하고 또 한 마리는 산 너머에 분양했는데, 마을 고양이 어미 몰라보고 앙칼지게 대들어 집 나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그 어미 고양이 아닌가 싶어라
바람 부니 고개 떨구고 흐느끼는 듯싶어라
노루귀도 분홍 눈으로 바라보고 있고, 어머니 어머니 부르는 소리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고
난 그 아이들을 달랜다 빨갛게 울고 있는 것들을 아니 노랗게 우는 것들을 그러나 내 노력 효험 없어 꽃밭 더 시끄러워지고
자전거 세우고 소녀 한 명이 내린다 여기저기 기웃기웃하더니 튤립 한 송이 꺾는다 아이들 울음이 뚝 그친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 애증은 저 꽃밭에서부터 출발한 것이고 내 사춘긴 그 소녀 자전거에서 내린 것
소녀가 다시 자전거에 오른다 아이들도 다시 울기 시작한다
----------------------------------------- 제 가진 붉음 다해 핀 튤립, 제 가진 노랑 다해 핀 튤립, '울금화(鬱金花)'라고도 하던가. 감정이 기진하면 울음이 되던가. 가슴이 벅차도 울음이 되던가. 존재 전부가 울음인 아름다운 꽃들, 우리는 한때 그러한 꽃이었던 것이다. 꽃밭 같은 마음, 꽃밭 같은 몸뚱어리, 그것을 달래지 않고서야 세상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달래는 일이 일생의 과제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그 곁으로 한 소녀가 왔다. 그뿐이다. 그러나 존재 전체를 다해 울던 울음도 그칠 만한 순간이다. 딱 하나만 꺾어 들고 소녀는 갔다. 그뿐이다. 수많은 애욕(愛慾)이 다시 울기 시작한다. 우리는 끝내 찬란히 달랠 수밖에는 없다. 도(道)를 닦는다는 말이다.
장석남 (시인, 한양여대 교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커브가 아름다운 여자 ㅡ 김영남
구불구불한 길. 커브가 많은 삶은 슬프다, 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얼굴을 문지르고 있으면 그녀에게선 아름다운 커브가 나온다.
커브가 많은 그녀. 기둥을 자주 수리했던 여자, 어룽무늬의 커튼이 쳐진 여자, 난간이 있는 여자, 일요일이면 혼자 쉬어야 하는 여자, 바이올린 같이 현이 있는 여자, 그래서 한번 더 슬픈 커브를 갖는 그녀.
그러나 그녀의 커브를 몇 굽이 돌다보면 의외로 넓고 푸른 뜰을 만날 수 있다.
그 뜰에서 키우는 비둘기와 양을 만날 수 있고, 날마다 하느님의 들녘으로 나가는 황소 같은 어진 발걸음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뜰을 가득 채워오는 농아들 웃음이 그녀의 어둔 공간을 밝히고 하늘의 별로 반짝여 올 때 그녀의 커브는 커브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벼랑을 슬기롭게 돌아나간 커브, 그 커브가 그녀를 향기롭게 한다.
—시집『정동진역』(민음사,1998) ............................................................................. 점과 점 사이의 가장 빠른 길은 직선이다. 직선에서 조금만 이탈해도 목표지점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거리와 시간을 증가시킨다. 그것은 능률주의자들에겐 낭비이고 참을 수 없는 시간의 무거움이다. 그래서 때로는 사람의 머리통과 등짝도 밟고 지나간다. 그 과정에서 박이 터지고 뼈가 부서지기도 한다. 사람만이 아니다. 산을 깨고 강을 파헤치고 새의 둥지를 허물면서 곧장 나아가고자 한다. 비행기가 새떼들의 비행을 고려하여 우회하겠는가. 하지만 유사한 사례가 있긴 있었다. 독일정부가 독일로 망명한 스트라빈스키의 작곡활동을 위해 마련해준 숲속 별장이 다른 건 다 좋은데 가끔 비행기 소리가 들리는 게 험이라는 말을 그에게서 듣고서 며칠 후 항공기의 항로를 바꾼 일이 있었다. 그렇게 인간의 길은 때로 우회하는 길이어야 한다. 인간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물의 군락지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도로를 우회하고,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철길이 비켜가기도 하는 것이다. 늪의 뭇 생명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늪을 우회하는 국도, 연어가 회귀하는 길을 막지 않으려고 보류되는 발전소 등은 효율성과 경제성으로 따지면 문제가 될지 모르나 바로 그러한 비효율성으로 인하여 그 길은 가장 합리적이고도 인간적인 길이 된다. 커브가 아름다운 인간의 길이다. 구불구불한 오솔길이나 에움길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길이 갖고 있는 이러한 비효율 때문이다. 그 길에서 ‘황소 같은 어진 발걸음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커브가 아름다운 여자’ ‘기둥을 자주 수리했던 여자, 어룽무늬의 커튼이 쳐진 여자, 난간이 있는 여자, 일요일이면 혼자 쉬어야 하는 여자, 바이올린 같이 현이 있는 여자’ 그런 여자가 낸 ‘커브를 몇 굽이 돌다보면 의외로 넓고 푸른 뜰을 만날 수 있다.’ 바로 근원적 자연의 품이다. 자연은 여성성의 다름 아니다. 괴테가 말했듯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커브가 아름다운 여자’만이 향기와 온기를 품고 있기에, 우리들은 모두 그 품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은 것이다. 권순진 (시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앵두가 뒹굴면 ㅡ김영남(1957년∼)
잎 뒤 숨어 있는 사연들
일러바칠 곳 없는 동네
우물가 집 뒤란의 누나 방에
굴러다니는 피임약이여, 그걸
영양제로 주워 먹고 건강한 오늘날이여
—시집 『가을 파로호』, 2011 ............................................................................. 올해는 유난히 봄꽃이 화사하다. 남쪽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오던 꽃 소식이 급행열차라도 탄 듯 빠르게 북상하여 산하에 봄꽃이 지천이다. 동백, 매화,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꽃, 목련 이런 순서로 피던 꽃들이 순서도 없이 한꺼번에 핀다는 느낌이다. 꽃은 봄꽃이 화사하다. 봄에 피는 꽃은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 잎도 없는 나뭇가지에 꽃만 화사하다. 마치 기다림에 지친 여인이 임이 온다는 소식에 옷도 제대로 차려입지 못하고 임 마중 가듯이 흐트러진 매무새다. 봄꽃은 바람난 여인이다. 머지않아 앵두가 열릴 것이다. 앵두는 붉은 자태로 하여 요염한 혹은 도발적인 여인에 비유되기도 한다. 앵두 같은 입술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앵두에서 젊은 여인의 이미지를 느낀다. 지금은 앵두나무가 있는 우물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우리의 옛 마을에는 마을마다 앵두나무가 있는 우물이 있었다. 그 우물가에서 여인들은 그들만의 수다로 표현의 자유를 누렸다. 앵두나무 우물가가 소문의 진원지 구실을 했다. 화자는 어린 시절 앵두나무가 있는 우물가 집 누나 방에 뒹구는 피임약을 영양제로 알고 주워 먹은 에피소드를 통해 앵두의 이미지를 도발적인 수채화로 그리고 있다.ㅡ권서각 (시인)
ㅡㅡㅡㅡㅡㅡㅡㅡㅡ
푸른 밤의 여로 | 김영남 | 2006/04/21
책 소개
서정의 위기를 극복해가는 참다운 화평의 여행길 2006년 현대시작품상 수상자 김영남의 세번째 시집
대상과 주관 혹은 자아가 이처럼 치열하게 대결하는 서정시가 있을까. 김영남의 서정시에 내가 매료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_김주연(문학평론가)
2006년 현대시작품상 수상자인 김영남 시인의 세번째 시집이 문학과지성사에서 발행되었다. 시인은 두 권의 시집 『정동진역』(1998)과 『모슬포 사랑』(2001)을 통해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따뜻하고 애달픈 언어로 주목을 받았으며,
사물과 사람에 대한 깊은 공감대 속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였다. 이번 새 시집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유지하면서도 보다 더 깊숙이 자신의 주관을 주변 환경과 자연 속에 개입시켜 서정의 위기를 극복해가는 진정한 신서정(新抒情)의 길을 개척해나간다.
이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김주연은 시인의 시를 신서정의 한가운데에 놓고 서정의 위기를 치열한 주관으로 돌파하는 데 시인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 주목한다. 서정시는 자연으로부터 감동을 끌어내고 이에 윤리적인 성찰을 곁들여 독자들을 시 속으로 쉽게 끌어들일 수 있는 장르이다. 그러나 서정시가 오늘날 위기에 처한 이유는 그 이상의 주관적인 노력을 기울이기가 어렵거나 혹은 그 노력을 소홀히 하는 때문으로 해설자는 파악하고 있다. 김영남 시인의 시는 대상을 존중하고 그 대상의 아름다움과 힘을 시 안으로 온전히 끌어오는 ‘주관을 거느린 서정시, 혹은 주관과 더불어 더욱 풍성해지는 서정시’로 자리 매김된다.
벚꽃 소리 없이 피어 몸이 몹시 시끄러운 이런 봄날에는 문 닫아걸고 아침도 안 먹고 누워 있겠네.
한 그리움이 더 큰 그리움을 낳게 되고…… 그런 그리움을 누워서 낳아보고 앉아서 낳아보다가 마침내는 울어버리겠네, 소식 끊어진 H를 생각하며 그러다가 오늘의 그리움을 어제의 그리움으로 바꾸어보고 어제의 그리움을 땅이 일어나도록 꺼내겠네, 저 벚꽃처럼.
아름답게 꺼낼 수 없다면 머리를 쥐어뜯어 꽃잎처럼 바람에 흩뿌리겠네. 뿌리다가 창가로 보내겠네.
꽃이 소리 없이 사라질까 봐 세상이 몹시 성가신 이런 봄날에는 냉장고라도 보듬고 난 그녀에게 편지를 쓰겠네. 저 벚꽃의 그리움으로. ─「저 벚꽃의 그리움으로」 전문
이전의 시집들과 마찬가지로 시적인 자의식, 여행과 사랑, 일상생활과 시대에 대한 자각 등이 번갈아 배치되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풍자와 위트, 아이러니를 시의 주요한 기법으로 삼아 곳곳에서 웃음을 띠게 하는 것도 여전하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 발견할 수 있는 김영남 시의 기저는 앞의 시집들보다 한결 깊어지고 완숙해진 감정 표현, 순수와 절정이 통일을 이룬 평화로운 상상력의 세계이다. 대상으로의 몰입이나 맹목적인 추종이 아닌, 주관의 적절한 조정에 의해 성립되는 건강한 긴장은 맑은 풍경을 제공하고 어린이와 어른, 자연과 인간이 구분되지 않는 ‘참다운 화평의 세계’와 만나게 한다.
느티나무 집 부엌 아궁이에서 불 지피던 아낙이 우는 아이 달래러 방에 들어갔군요.
느티나무 지붕 굴뚝에서 긴 손이 포근하게 나오는 걸 보니
그 손 또 높은 곳으로 올라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라 아이들 기저귀까지 갈아주고 있는 걸 보니
이윽고 온 하늘 메우는 저 향기로운 파우더, 파우더……
예쁜 개울 토닥이다가 아낙도 함께 잠들었군요. ─「개울가 눈 오는 풍경」 전문 그리고 일상을 다루는 시들에는 박진감과 생동감이 넘친다. 자칫 넋두리로 끝날 수도 있는 이들 시들은 지루하지 않다. 정직하고 냉혹하게 자신을 객관화하는 시인의 자세는 시의 서사성에 확실한 존재감을 부여하면서 한없이 작아지고 좁아질 수 있는 일상 세계를 우뚝 세우고 있다. 더불어 시인의 유머 감각을 잘 보여주는 제목들도 눈길을 끈다(「눈이 내리면 총체적으로 불행하다」 「진보와 보수 사이에 해오라기가 앉는다」 「나의 실존주의가 없다」 「포장마차는 멍게로 사수하는 거야」 등). 이 일상을 떠난 자리에는 여행과 그 여행에서 마주치는 자연에 대한 시들이 있다. 시인 스스로가 ‘정동진’과 ‘모슬포’를 거쳐 고향인 ‘장흥’에 이르는 시의 행로를 갖게 되었다고 할 만큼 이번 시집에서는 고향의 풍광과 풍물들에 각별한 애정을 기울였다. 현대시작품상(2006) 수상작인 「마량항 분홍 풍선」 그리고 표제작인 「푸른 밤의 여로」에는 시인의 고향을 들여다보게 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이 어두운 나날 속에서 돌이키게 되는 고향의 모습이 있다. 그러나 이 고향은 멀찍이 떨어져 원형으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닌 새로운 출발과 각오의 장소이다. 그리고 이 시집의 모든 여행은 그리움과 회한을 돌이키기보다 바로 그러한 새로운 출발을 암시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치열한 시 정신으로 새로운 서정의 길을 개척해가는 김영남 시인의 여로를 따라가는 것은 늘 같은 일상 속에서 잊혀진 삶의 의욕과 신선한 감동을 만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둥글다는 건 슬픈 거야. 슬퍼서 둥글어지기도 하지만 저 보름달을 한번 품어보아라. 품고서 가을 한가운데 서봐라.
푸른 밤을 푸르게 가야 한다는 건 또 얼마나 슬픈 거고 내가 나를 아름답게 잠재워야 하는 모습이냐. 그동안 난 이런 밤의 옥수수 잎도, 옥수수 잎에 붙어 우는 한 마리의 풀벌레도 되지 못했구나. 여기에서 나는 어머니를 매단 저 둥근 사상과 함께 강진의 밤을 걷는다. 강진을 떠나 칠량을 거쳐 코스모스와 만조의 밤안개를 데리고 걷는다. ‘무진기행’은 칠량의 전망대에 맡겨두고 부질없는 내 시와 담뱃불만 데리고 걷는다. 걷다가 도요지 대구에서 추억의 손을 꺼내 보름달 같은 청자 항아릴 하나 빚어 누구의 뜨락에 놓고, 나는 박처럼 푸른 눈을 욕심껏 떠본다.
구두가 미리 알고 걸음을 멈추는 곳, 여긴 푸른 밤의 끝인 마량이야. 이곳에 이르니 그리움이 죽고 달도 반쪽으로 죽는구나. 포구는 역시 슬픈 반달이야. 그러나 정말 둥근 것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거고 내 고향도 바로 여기 부근이야. ─「푸른 밤의 여로」 전문
저자 및 역자소개
김영남 시인 김영남은 1957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및 같은 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 「정동진역」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정동진역』과 『모슬포 사랑』이 있으며, 소설가 이청준, 화가 김선두와 함께 고향을 소재로 시·소설 화집 『옥색 바다 이불 삼아 진달래꽃 베고 누워』를 냈다.
목차
시인의 말
개울가 눈 오는 풍경 저 벚꽃의 그리움으로 푸른 밤의 여로 가을밤이 되면 ‘아줌마’라는 말은 예쁜 가슴이 장독대에 숨어 있다 입동 무렵 눈이 내리면 총체적으로 불행하다 진보와 보수 사이에 해오라기가 앉는다 까막섬에 만조가 되니 마량항 분홍 풍선 검정 고무줄에는 고년! 하면서 비가 내린다 나의 실존주의가 없다 상강 무렵 보림사 참빗 박, 그 잠든 풍경에 동참하고 싶다 징검다리의 노래 말뚝 위의 거대한 망치 가을 호수는 무엇이든지 보면 유혹한다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길 수선화가 오늘의 부실을 던져온다 청명에 뜬 무지개 저 탱자울이 내 귀를 잡아당긴다 분토리 옛 돌담 영산홍 쓰다듬으며 제암산 호랑이를 잡는다 넓고 깊은 거울 가을 하늘에 해금이 있다 나를 괴롭히는 메타포 무당벌레의 점과 함께 포장마차는 멍게로 사수하는 거야 갈참나무숲 노래방으로 오라 몽대항 폐선 덕유산 칠연계곡에서 눈 여량역에 홀로 서성이니 장재도에선 해안선을 조심하자 아름다운 주름살 백령도 건배 나는 가끔 장미꽃과 충돌한다 칠량 저녁 하늘 기러기 고향 가을 하늘 비행기 저 하얀 소를 몰고 백열등을 위로해주세요 밤마다 그녀는 기선이 된다 윈드서핑 하는 저녁 풍경 12월 동해
해설|서정에 주관이 들어설 때·김주연
보도 자료
■ 시집 소개글
시집 『푸른 밤의 여로』는 자연과 인간이 서로 평화롭게 어울리는 보기 드문 진풍경을 연출한다. 이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낙관적인 여유와 멋들어진 유머가 생산해내는 놀라운 유토피아다. 아름다움은 자연의 풍광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고 형상화해내는 시인의 감각과 상상력이 빚어내는 산물에 있다. 아름다운 것은 시.
■ 시인이 쓰는 산문(뒤표지 글)
고향은 우리가 동구 밖을 뒤로 하고 버스에 오르는 순간 외면하기 시작한다. 이웃 ‘숙’이도 먼 곳으로 떠나게 하고, 그녀의 동생은 물에 빠져 죽게 하고, 그 집은 태풍에 허물어지게 하고, 뒤란의 앵두가 익어 수습하고자 아무리 애써도 이를 알려주지 않는다. 발까지 꽁꽁 묶어놓는다. 어쩌다가 들르게 되면 험한 얼굴의 개들만 따라다니며 우리가 마치 수상한 이방인인 것처럼 사납게 짖어온다. 낯익은 들길의 소나무도 이상한 제스처를 취하며 우릴 몇 번씩이나 쳐다본다.
그렇게 외면당한 사람들일수록 도회지 소줏집에 모여 고향의 변화를 성토하며 잔을 기울인다. 주소록을 만들고, 운동회를 개최하고, 송년회를 연다. 고향의 후손, 사촌들까지 나타나 술을 사고 봉투를 꺼내어 위로해도 그들의 성토는 그칠 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성토해도 소용없는 고향, 고향은 우리들이 버스에 오르는 순간 이미 죽어 무덤에 묻힌 것이다. 그래서 고향이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며, 찾아가 위로받는 곳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극복해서 새롭게 발견해야 할 곳인 것이다…… 그리운 옛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