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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보헤미아의 순교자 허스
복음이 보헤미아에 전파되기는 이미 9세기의 일이었다. 그 때 영국의 위대한 개척자요 성서 번역자인 위클립으로 인해 성경이 번역되었고 보헤미아인들은 자국어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도 법왕권의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은 가리워졌다. 평소에 왕들의 권세를 꺾어 버릴 뿐 아니라 백성들을 노예의 상태로 만들고자 꾀해 오던 법왕 그레고리우스 7세는 예외 없이 보헤미아어로 공중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교서를 내렸다. 그와 같이 로마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꺼버리고 백성들을 암흑 가운데 가두어 두도록 명령하였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박해를 만나 쫓겨난 많은 왈덴스와 알비젠스(Albigenses)인들이 보헤미아로 피난하였다. 비록 그들은 그 곳에서 공공연하게 전도하지 못하였으나 은밀한 가운데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참된 신앙이 여러 세기를 통하여 보존되어 왔다.
허스가 태어나기 전에 보헤미아에는 이미 교회의 부패와 백성들의 비행을 공공연하게 규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활동은 많은 사람들의 주의와 관심을 끌었다. 그러므로 승려 계급은 두려움을 느끼고 복음 사도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그들은 숲 속과 산으로 쫓겨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군사들은 그들을 찾아내어 많은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얼마 후에 로마교의 예배에서 벗어나는 자는 화형에 처한다는 명령이 내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순교를 당하면서도 그들의 사업의 승리를 확신하고 눈을 감았다.
쟌 허스는 1369년에 훗세닛츠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허스는 농부 계급의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에 그의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러나 그의 경건한 어머니는 교육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귀중한 재산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러한 유업을 그 자식에게 남겨 주고자 애를 썼다. 허스는 처음에 시골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하였으나 그 후에 프라그 대학의 자선 장학금으로 공부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프라하를 향한 여로에 올랐다. 과부로서 가난에 시달리던 그의 어머니는 그 아들에게 줄 만한 세상 재물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 큰 도시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아버지 없는 자기의 아들을 위하여 무릎을 꿇고 하늘 아버지께 복을 빌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자기의 기도가 어떻게 응답될 것인지에 대하여 거의 깨닫지 못하였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허스는 부지런한 공부와 신속한 학업의 향상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의 깨끗한 생애와 온유하고 쾌활한 성격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는 또한 로마교를 열렬히 신봉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교회가 수여한다고 공언하는 영적 축복을 매우 갈망하였다. 그는 어떤 큰 성회에 참석하였을 때 참회하러 나아가 호주머니 속에 남아 있는 돈을 다 털어 바치고 사면(赦免)을 얻기 위하여 행렬 가운데 참례한 일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자 그는 신부의 직분을 얻었으며, 그 후 신속히 승진하여 왕실 전속의 승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모교의 교수가 되고, 그 후에 그 대학의 총장까지 되었다.
그리하여 불과 수년 만에 구호금의 장학금을 받던 비천한 일개 학생이 보헤미아의 자랑이 되고, 그 명성을 온 유럽에 떨치게 되었다. 성직에 나간 지 수년 후에 그는 베들레헴 회당의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에 성경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무지는 실로 컸으며, 모든 계급의 사람들은 가장 악한 일들을 서슴없이 행하던 때였다. 허스는 이러한 죄악들을 기탄없이 견책하고, 자기가 설명한 진리의 원칙과 순결을 역설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곡히 호소하였다.
개혁주의로 전향(轉向)함
그 때, 후에 허스의 절친한 친우가 된 프라하 출신의 제롬(Jerome)이 영국으로부터 귀국하면서 영국의 위대한 개혁자요, 성서 번역자인 위클리프의 저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허스는 그러한 저서들을 흥미있게 읽었다. 그는 그 저자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었으며 위클리프가 주장하는 개혁주의에 찬동하게 되었다. 허스는 성경과 위클리프의 저서를 더욱 세밀히 연구하게 되자 큰 감동을 받게 되었다. 그는 아직 위클리프의 개혁설을 모두 받아들일 단계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마는 법왕교의 진상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으므로 타는 듯한 열성으로 교권의 부패와 교만과 야심을 규탄하였다.
개혁자가 된 허스
위클립의 문서들이 프라그에서 특히 허스와 제롬의 인정을 받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연구하게 되자, 로마교회의 대감독은 새로운 교리가 퍼져나가는 것을 보고 놀라서 그것의 배포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그 일은 그 문서의 인기를 더하게 하였으며, 그 대학에 있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그 문서와 접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위클립의 견해를 찬성 지지하게 되었다. 진리의 빛은 보헤미아에서 독일로 전파되었다. 왜냐하면 프라그 대학의 소동으로 수백명의 독일 학생들이 고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의 많은 학생들이 허스에게서 처음으로 성경의 지식을 배웠는데, 그들은 돌아가서 각자 자기 나라의 여러 곳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프라그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허스는 곧 법왕의 소환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그 명령에 응하는 것은 자기의 몸을 죽음에 내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보헤미아의 윈체스라우스 왕과 왕후와 대학과 귀족과 정부의 고관들이 연합하여 허스는 프라그에 머물러 있게 하고, 대리자를 로마에 파견시켜 대답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법왕에게 애소하였다. 그러나 법왕은 그 요구를 수락하는 대신에 도리어 허스에게 대하여는 심문 선고를 내리고 프라그 시를 파문(破門)에 처한다고 선포하였다. 그 당시에 있어서 이와 같은 선고는 언제나 큰 공포를 일으켰다. 그 당시 모든 의식들은 법왕을 하나님의 대표자로 존경하고, 그를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영적 심판은 물론이요, 세속적 심판까지 행할 권능을 가진 자로 알고 있는 백성들을 공포에 질리게 할 수 있도록 잘 꾸며져 있었다. 파문의 선고를 받은 지방에는 하늘의 문이 닫혀지므로 법왕이 그것을 열기까지는 죽은 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처럼 두려운 재난의 증거로서 온갖 종교적 의식은 정지되고, 교회는 폐쇄되고, 결혼식은 교회당의 뜰 앞에서 거행되고, 죽은 자는 성별된 묘지에 매장되지 못하고 장례식 없이 도랑이나 벌판에 매장되었다. 로마는 사람의 상상력에 자극을 주는 이런 종류의 처사를 통하여 사람의 양심을 지배하고자 하였다. 프라그 시에서 허스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났다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서 소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허스는 깨달음을 통하여 전달된 성경의 교훈들이 양심을 지배해야지 인간이 만든 유전이 양심을 지배하면 안된다고 믿고 계속 굽히지 않고 그렇게 가르쳤다. 즉 그릇됨이 없는 지도자는 신부를 통하여 말하는 교회가 아니고,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고 가르친 것이었다. 얼마 후에 프라그의 소동이 진정되자, 허스는 자기가 맡은 베들레헴의 회당으로 돌아가서 더욱 큰 열심과 용기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전하였다. 그의 원수들은 활발하고 강력하였지만, 왕후와 많은 귀족들이 그의 친구가 되었고, 많은 백성들이 그를 지지하였다. 그의 순결하고 고상한 교훈과 경건한 생애를 로마 교도들이 전하는 타락한 교리와 그들의 탐욕적이고도 방탕한 행동과 비교할 때에 많은 사람들은 허스의 편에 가담하는 것을 명예로운 일로 여겼다.
콘스탄스에서 개최된 큰 회의
그런데 그 당시 로마교회 내에서는 분열이 심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세 사람의 법왕이 제각기 최상권을 장악코자 다투고 있었으므로 그리스도교국은 범죄와 소동으로 들끓게 되었다. 그들은 피차에 저주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세속적 무력에 호소하여 각각 무기를 구입하고 군대를 모집하기 위하여 애썼다. 물론 돈이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소위 교회에 속한 은사, 지위, 축복 등이 돈으로 매매되었다. 신부들도 역시 그들의 위에 있는 성직자들의 본을 받아 성직을 매매하고 자기의 상대자를 넘어뜨리고 자기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싸웠다. 이러한 철면피한 행동들이 날마다 증가되어감으로 허스는 소위 종교라는 이름으로 용인되는 가증한 행위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또한 백성들도 로마교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교국을 비참하게 만드는 자들이라고 공공연하게 비난하였다. 그러자 온 유럽을 혼란에 빠지게 한 화근을 제거하기 위하여 콘스탄스에서 총회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는 시기스문트(sigismund) 황제의 희망에 따라 세 경쟁자 중의 하나인 요한 23세가 소집한 것이었다. 회의에서 달성되어야 할 주요한 목표는 교회의 내분을 화해시키고, 이단을 뿌리 뽑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주장을 퍼뜨리는 주동자로 지목된 쟌 허스가 그 회의에 소환되었다.
허스는 자기를 위협하고 있는 위험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그 길을 마치 영원한 이별의 길인 것처럼 느끼고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그리고 그는 차츰 화형주에 가까이 가고 있는 것처럼 느끼면서 여행을 계속하였다. 그는 보헤미아의 왕으로부터 그의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는 통행권을 받았고, 또한 시기스문트 황제가 보증해주는 여행 도중의 안전을 위한 통행권까지도 받았지마는 도저히 사망을 피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고 모든 일을 다 처리하고 갔다.
회의에 임석하려는 허스 프라그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형제들이여 … 나는 왕의 통행권을 가지고 나의 많은 대적들을 만나고자 떠나가고 있다. … 나는 나의 구주가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내가 능히 저들을 대항할 수 있도록 나의 입에 하나님의 지혜와 그분의 신중하신 정신을 넣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그대들의 열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줄로 나는 믿는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진리로 강하게 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주시고, 시련이나 감옥이나 필요하면 잔인한 죽음까지라도 용기있게 당하게 하실 줄로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일에 참을 수 있도록 본을 보여 주셨으니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분께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비천한 인간들이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는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들 또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정결해 지는데 어찌 우리가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즉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만일 나의 죽음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된다면, 그날이 하루 속히 이르도록, 그리고 내가 당하게 될 모든 고난에 그분께서 항상 나를 붙들어 주시도록 기도하라. 만일 내가 그대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더욱 좋은 일이라면 나로 하여금 오점(汚點)없이 돌아가게 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 곧 나의 형제들에게 훌륭한 본을 남겨 나를 따라오게 하도록 복음의 진리의 일점 일획이라도 숨기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라. 아마도 프라그에서 그대들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이 나로 하여금 돌아가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그 때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의 지식과 사랑으로 마음을 더욱 굳게 하여 전진하여야 할 것이다.” 허스는 그 여행 중에서 자기의 교리가 도처에 전파된 것과 자기의 전도 사업이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의 곁으로 몰려왔으며, 어떤 고을에서는 지방 장관이 그를 따라 거리를 같이 걷기도 하였다.
신앙의 포기냐, 죽음이냐
허스에게는 완전한 자유가 약속되었었다. 황제의 통행권에는 다시 법왕의 개인적인 보증이 첨부되었다. 그러나 이 엄숙하게 반복된 보증도 무시되고, 그 개혁자는 법왕과 추기경들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곧 불결하고 음침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후에 그는 라인 강 건너편에 있는 튼튼한 성안으로 이송되어 죄수로 수감되었다. 그들은 먼저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정죄하기로 결정하였고, 벌써 죽은 이 영국의 개혁자의 시체를 다시 파서 불에 태워야 한다고 결정하고 지시하였으며, 이 가르침을 지지한 허스를 투옥하여 심문하기로 하였다.
감방의 습기와 불결한 공기 때문에 열병에 걸려서 거의 죽음 직전에 놓여 있었던 허스는 마침내 대회의에 끌려나왔다. 그는 무거운 쇠사슬에 매인 채로 황제 앞에 섰다. 긴 심문을 통하여 허스는 확고 부동하게 진리를 주장하였다. 그는 이제 그 곳에 열석한 교회와 정부의 고관들 앞에서 거리낌없이 교권의 부패를 규탄하였다. 자기의 교리를 취소하든지 죽음을 택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그는 순교자의 운명을 수락하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붙들므로 그가 최후의 선고를 받기 전 지낸 고난의 몇 주일 동안에 그에게는 하늘의 평화가 마음에 충만하여졌다. 그는 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나는 옥중에서 내일 사형 선고가 내릴 것을 기다리면서 쇠사슬에 매인 손으로 이 편지를 쓴다. …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내세의 귀한 화평 중에서 다시 만나게 될 때, 그대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어느 정도의 자비를 베푸신 것과 내가 당한 시험과 시련 중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나를 도우셨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허스의 장렬한 최후
허스는 마지막으로 큰 회의에 소환되었다. 그것은 실로 규모가 크고도 엄숙한 집회였다. 황제와 왕공과 사신과 추기경들과 감독과 신부들이 열석하고, 밖에는 허다한 방청자가 모여 있었다. 그들은 양심의 자유를 얻기 위한 긴 투쟁에서 최초의 큰 희생자를 목격하고자 그리스도교국의 각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허스는 최후의 결심을 표명하도록 요구받았을 때, 자기의 견해를 철회하기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러자 로디의 감독은 “죄의 몸은 파멸되게 하라”는 성경 구절로 설교하고 형을 언도하였다. 협의회에 의하여 허스에게 “완고하여 고치기 힘든 자”라는 선고가 언도되고, 지위를 박탈하는 의식을 하였다. 감독들은 “그는 성직에서 강등되며 그의 책은 공적으로 불태워질 것이고 집행을 위해 시민법정에 넘어갈 것이다”라고 언도 하였다. 허스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언도를 받았다.
그의 제복(祭服)이 하나씩 차례로 벗기워질 때마다 의식을 행하고, 열석한 감독들은 차례대로 저주를 선언하였다. 드디어 그의 머리 위에는 피라밋 모양으로 만든 종이 고깔이 씌워졌는데, 거기에는 악마의 무서운 형상이 그려져 있고 “이단의 주모자”라는 글자가 그 앞면에 뚜렷하게 씌여 있었다. 그는 다시 그의 주장을 취소하라는 권고를 받자 군중을 향하여 돌아서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하늘을 쳐다볼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까지 순결한 복음을 전한 저 사람들을 무슨 면목으로 쳐다볼 수 있겠는가? 나는 그들의 구원을 이제 죽기로 작정된 불쌍한 나의 몸 이상으로 귀중하게 여긴다.” 그리고 허스는 “주 예수여! 이 종은 더할 수 없는 기쁨으로 당신을 위하여 치욕의 관을 쓰나이다. 나를 위하여 가시관을 쓰신 주 예수여!”하고 부르짖었다.” 모든 의식을 행한 후에 주교는 “네 영혼을 마귀에게 주노라”고 말하였다. 그 때에 쟌 허스는 하늘을 우러러, “오, 주 예수여! 당신이 나를 구원하셨으니, 나는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고 말하였다.
그 후에 그는 처형장으로 끌려나갔다. 그의 뒤에는 많은 군중, 몇 백 명의 무장한 사람들, 아름다운 의복을 입은 신부와 주교들, 콘스탄스 성의 주민들이 따랐다. 그가 화형주에 결박되고 불을 붙일 수 있는 준비가 다 갖추어졌을 때에 그 순교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그의 오류를 취소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무슨 오류를 취소하라고 하는가? 나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저술한 것과 전파한 것은 모두 사람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증거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저술하고 전파한 진리를 나의 피로써 확인하기를 매우 기뻐한다.”
이윽고 불이 붙여지자 그는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찬미를 그의 목소리가 영원히 그쳐질 때까지 불렀다. 심지어 그의 원수들까지도 그의 영웅적인 태도에 감동을 받았다. 열광적인 법왕당의 한 사람은 허스와 그 후에 있은 제롬의 순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두 사람은 다같이 최후의 순간까지 변함없이 확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화형을 받기 위하여 나아가기를 마치 혼인 잔치에 나아가는 것과 같이 하였다. 그들은 아무런 고통의 부르짖음도 발하지 않았다. 불길이 일어날 때에 그들은 찬미를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그 불길의 기세도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그치게 할 수 없는 듯하였다.”
허스의 몸이 다 타버린 다음에 그들은 그 재와 흙을 모아서 라인 강에 던져 대해로 흘러가게 하였다. 그의 핍박자들은 그가 전한 진리를 근절한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날에 던져진 재가 대해로 흘러가서 각 나라에 씨를 뿌리고,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서까지 진리를 증거하는 열매가 풍성하게 맺혀질 것을 그들은 거의 생각지 못하였다. 콘스탄스의 회의장에서 부르짖은 그의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그 후 각 시대를 통하여 쉬임없이 울려 퍼질 것이었다. 허스는 이미 가고 없으나 그가 생명을 바쳐서까지 옹호한 그 진리는 결코 멸절될 수 없었다. 그의 신앙과 충성의 모본은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문과 사망을 당하면서도 진리를 위하여 굳게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렇게 잔인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주님을 위해 한결같이 기쁘고 즐거운 얼굴로 찬송을 부르면서 죽었던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우리의 손에 들려진 성경이, 또한 우리가 믿고 있는 이 진리가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우리에게 전수해 내려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거나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순교자들의 피 때문에 보존되어 온 이 진리와 성경에 대해 이제 우리는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은 머지않은 미래에 마지막을 통과할 성도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들의 신앙을 위해 순교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만일 당신에게 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특권이 온다면 당신도 웃으며 그 길을 갈 신앙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앞서간 순교자들의 신앙을 따라서 우리도 주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신앙의 소유자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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