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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 찬양대 귀한 은혜로운 찬양 감사합니다.
오늘은 사도 예수님의 제자 빌립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빌립은 베드로와 안드레 두 형제와 같은 고향 사람입니다. 베세다 출신입니다. 갈릴리에서 부름을 받았고 또 초기 제자 그룹에 속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1장 요한복음 1장 43절에 보면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려고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또 빌립은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한 사람입니다.
나다나엘은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바돌로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제자 12 제자 중에 바돌로메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죠. 그때 빌립이 바돌롬의 나다나엘을 전도하면서 한 한마디가 유명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전도 집회를 하거나 전도 훈련을 할 때 그가 썼던 이 한 문장을 사용합니다.
와서 보라. 예수님에 대해서 구구하게 설명할 것 없이 와서 봐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장 46절에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오늘 본문은 또 빌립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 있는 베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를 일으킨 사건입니다. 베세다는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인 빌립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들을 보셨습니다. 그들에게 가르치시고 또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신 후에 보니까 이 사람들이 그냥 이 상태로 가면은 멀리서 온 사람도 있고 하기 때문에 기진해서 도중에 쓰러질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신 거예요. 그래서 이 무리들을 먹이실 계획을 하시고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왜 빌립에게 물으셨을까
아마도 빌립이 이 동네 사람이니까 이 동네 형편을 잘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느냐 조금 살짝 꺾어서 말씀하셨지만 다이렉트로 예수님 말씀을 번역한다면 이 사람들 먹일 떡을 살 방법을 찾아봐라 이런 거예요.
그러자 빌립이 대답했어요.
예수님 여기 있는 사람들한테 조금씩 떡을 나눠줘도 그냥 한 덩어리 정도 나눠줘도 족히 200데나리온은 더 됩니다.
한 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 하루 월급이에요. 1년 내내 한 사람이 벌은 걸 다 쏟아 넣어도 이 사람들이 그저 빵 떡 한 조각 먹고 돌아갈 정도입니다.
예수님도 그 상황을 사실은 알고 계셨습니다. 몰라서 물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빌립을 특정하시고 빌립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또 하나의 목적이 있어요. 빌립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물으신 겁니다.
시험은 두 가지가 있죠. 템프테이션 유혹하는 거예요. 넘어뜨리기 위해서 또 하나는 테스트입니다. 그 시험은 통과하면 진급하는 거예요. 한 단계 올라가는 거예요. 예수님의 목적은 두 번째였습니다. 빌립을 난처하게 만들거나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부끄러움을 주기 위해서 뻔히 아시면서 왜 예수님인 줄 모르셨겠어요?
여기 지금 모인 사람들이 남자만 성인만 5천 명, 어린아이들이 두 살은 옛날에 애를 많이 낳았으니까 서너 명은 따라왔을 거예요. 그러면 한 3명만 따라왔어도 2만 명입니다. 거기다가 남자보다 보통 부인들이 많이 이런 곳에 모입니다. 그러면 2만 5천3만 명이 된다. 3만 명이 시골 동네에 가득하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마어마합니다. 어마어마해 그 사람들을 그 베세다라고 하는 시골 동네에서 그 떡을 사서 먹일 수 없다는 사실을 주님도 사실은 아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물으신 거예요.
왜 빌립에게 이렇게 하셨을까?
빌립은 이제 제자가 됐고 앞으로 훈련을 통해서 12 사도의 반열에서 초대교회를 세우고 초대교회를 이끌어가야 될 지금이 중요한 게 아니고 예수님 부활 승천하신 후에 이들이 감당해야 될 일이 어마어마한 거예요.
근데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지금 그 상태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의 약점을 노출시키시고 아프죠. 빌립 같은 사람은 자기가 잘난 줄 아는 사람 굉장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에요. 아주 머리가 좋은 사람이에요. 나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의 약점을 주님께서 노출시키는 거예요. 그리고 변화시키고 그리고 나중에는 믿음이 큰 제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주님이 지금 이 빌립을 특정하시고 지금은 빌립을 다루실 때예요.
그래서 빌립에게 질문을 하신 겁니다.
빌립은 어떤 사람입니까?
제자들은 주님 앞에 부름 받았을 때 원석과 같은 사람들이에요. 그냥 돌덩어리예요. 그러나 그 안에 가능성은 있어요. 그 돌덩어리가 좋은 작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징을 맞으면서 군더더기를 다 떼내고 나서야 비로소 아름다운 아주 멋진 예술품이 되는데 지금 부름받은 열두 제자 빌립을 포함해서 이 상태로는 안 돼 엄청난 가능성이 있지만 이 상태로는 쓰임 받을 수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금은 빌립을 다르고 계신 거예요.
빌립은 계산이 빠르고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가 대답하기를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00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다.
얼마나 빠르고 논리적인 대답입니까? 아마 이 빌립이 아닌 베드로였다면 아이고 예수님 안 돼요. 이렇게 딱 어림할 수 없는 말씀 하지 마세요. 이러고 말았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빌립은 지금 표현 자체가 다른 거예요. 아주 주님의 질문에 따박따박 대답하는 거예요. 빌립은 아마 헬라인이 헬라적 헬라파 유대인이거나 그 당시에는 히브리파 유대인이 있고 헬라파 유대인이 있었어요. 본토에서만 살던 사람 아니면은 이방 사계에 다니면서 거기서 태어나거나 살아서 헬라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아마 이 사람은 헬라파 유대인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한번 만나려고 찾아온 적이 있어요.
그때 빌립을 통해서 요청을 합니다. 요한복음 12장 21절에 그들이 갈릴리 세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요. 우리가 예수를 배우고자 하나이다 하니 뭔가 헬라의 영향을 다분히 받은 사람이고 그래서 연결고리가 있는 거예요. 이 이방인 헬라인들이 이 빌립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굉장히 수월했던 것이에요. 만약에 이 빌립이 헬라파 유대인이거나 헬라파에서 와서 다시 이스라엘 땅에 정착한 유대인이거나 아니면은 거기에 쭉 살았을지라도 어떤 영향을 받았었다면 그 이름을 통해서 볼 때 그는 아마 헬라 말도 했을 거예요.
또 헬라 문화권과 연결된 일가 친척이 있거나 그리고 그 내면 세계도 그런 영향이 있었을 수 있어요.
여러분 그리스 문화는 굉장히 합리적인 문화입니다. 그래서 철학이 발전하고 건축이 발전하고 조각이 발전하고 르네상스는 그리스 시대로 돌아가는 거예요. 비율과 조화를 중요시 여기고 굉장히 합리적인 어떻게라고 하는 질문을 늘 던지는 그런 문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자마자 빌립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게 작동한 것 같아요.
얼른 계산기를 꺼내들었어요. 그리고 사람의 수, 떡의 양 그리고 주위에서 그것을 구할 수 있을까 등등을 계산해내세요.
결론은 간단합니다. 불가능하다는 거 안 됩니다.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결론을 정하고 그는 예수님께 말씀을 드린 거예요. 사실은 합리적 결론이에요. 그죠?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정상이지 어디서 떡 좀 구해와라 예 알겠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다음에 어떡할 거야 그다음에 어떡할 거냐고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사실은 이 사람이 똑똑한 사람인 거예요. 세상을 잘 살기 위해서는 빌립처럼 계산을 잘하고 합리적인 생각과 판단을 해야 합니다. 무대포로 살면 안 돼요. 꼭 그것이 믿음은 아니에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아마 3분의 2 우리 시간의 4분의 3은 이런 합리적인 빌립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그 사람이 정상이고 그래야 규모 있게 자기 인생을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는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을 안정적으로 살아가요. 우리 우리 교인들은 우리 파리 서안교회는 이제 학력이라든가 어떤 삶의 경력이라든가 이런 것들로 볼 때 아마 90% 이상이 빌립 같은 사람들일 거예요. 그냥 막 살지 않습니다. 다 계산하고 계획하고 그리고 그 계산과 계획 안에서 이게 답이 나와야 움직이는 빌립 같은 사람들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또 그러나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하나의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돼요. 그렇게 인생을 일반적으로 그렇게 살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 몇 번은 빌립을 뛰어넘어야 될 때가 있는 거예요
그런 상황과 맞닥뜨립니다. 결단해야 되고 도전해야 되고 그걸 뛰어넘어야 되는 그런 순간이 와요. 그때도 빌립이 작동하면 그 사람은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가는 거고 그때 그 한계를 뛰어넘으면 한 단계 올라가는 거죠. 더 큰 일을 하는 사람은 그 한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그것을 믿음의 영역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을 믿는 건 아니에요. 할 수 없는 어떤 한계를 뛰어넘어서 신뢰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해요. 믿음은 초현실적입니다. 비합리적이라는 게 아니에요. 초합리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단계를 넘어서서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계산기와 합리적인 판단을 넘어선 것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세상에서도 이것을 알고 도전한 사람이 성공해요. 그래서 신화를 이룬 사람들, 큰 기업을 이룬 사람들, 어떤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의 특징은 바로 그 순간에 그 사람들이 합리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그 순간에 현실을 뛰어넘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현실을 살지만 때로는 우리의 시선은 현실을 넘어선 어느 지점을 바라보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달라요. 그리고 나는 할 수 없지만 어떤 순간에 나는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지만 그 순간에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붙드는 거예요.
그게 믿음 생활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빌립은 결국 믿음의 사람으로 바뀌어 갑니다. 지금 예수님이 시작을 하신 거예요. 그 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이 합리주의 빌립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이런 합리적인 사고를 좋습니다.
훌륭한 제자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예수님 승천 이후에 감당해야 될 일은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그래서 예수님이 물으신 겁니다. 내면을 들여다보시고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빌립이 다른 대답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오비영리를 할 걸 안 하고 안 하실 걸 하시는 건 아니에요. 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어요.
근데 물으신 거예요. 이제 이참에 한번 빌립하고 한번 얘기해보자. 그래서 그 질문을 통해서 일단 오병이어 터지기 전에 빌립의 내면 세계를 뒤집어 놓은 거예요. 한 번 뒤집혀야 됩니다. 인생이 그동안 내가 옳다고 나는 이렇게 사는 게 옳다고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30년 40년 50년 살았을지라도 뭔가 내 인생을 바꿔 놓을 수 있는 그 뒤집힘이 있어야 돼요.
주님은 그 일을 하십니다. 지금 빌립에게 그 일을 하신 거예요. 빌립이 그 안에 갇혀 있으면 앞으로는 더 큰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이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예수님 계획 따로 있어요.
그런데 그 참에 여관에 빌립을 다루고 가자 그러시고 말씀하신 거예요. 경영과 투자의 세계에서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냥 조심조심하면 그만큼만 얻는 거예요. 그런데 과감한 어떤 그 눈이 있어야지 무조건 던지면 안 되겠죠.
그러나 어느 순간에 과감한 투자를 통해서 큰 것을 얻는 사람 그 사람이 이제 그 세계에서 탑을 기록하는 거예요.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를 향한 도전 그것이 요구되는 시간이 와요. 우리가 교회 다닐 때 평범하게 이렇게 다니고 신앙생활하다가 교회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또는 한 개인의 삶의 어느 지점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때가 있어요.
결단해라.
그때는 계산을 때려서는 안 돼. 그러면 그 결단을 절대 못해요. 그때는 믿음으로 믿음으로 나를 던지는 용기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하여튼 분명히 옵니다. 그때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내가 믿음으로 내 인생을 한번 신앙의 영적 모험을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평범하게 갈 것인가를 결단하셔야 돼요.
모험이 크면 둘 중에 하나입니다. 크게 성공하거나 크게 망하거나 그렇다고 제가 여러분 책임질 수 있는 건 아니야. 나중에 목사님이 그때 그래 해가지고 했다가 다 망했어요. 책임지세요. 이렇게 오면 안 되기 때문에 내가 오늘 얘기하는 거예요. 나는 책임 못 져요. 50% 50%예요. 크게 모험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고 50% 크게 망할 수 있어요.
그걸 결정하는 것은 여러분의 신념과 믿음이에요. 대개 그것을 인생에서 그걸 몇 번 잘한 사람들이 크게 성공하는 거예요.
그러나 세상에 이것은 모험입니다. 보장은 없어요. 망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한 번 사는 세상 망하더라도 한번 던져보자. 그렇게 해서 딱 잡는 거죠.
또 몇 번 망하다가 일어나기도 하는 거고 근데 이제 50 60 돼가지고는 안 하는 게 좋아 그때는 기회가 없어요. 그래서 20대 30대 40대까지는 끊임없이 도전하는 게 좋아요.
그러나 신앙은 조금 다릅니다. 신앙도 미래를 향한 모험이에요. 그러나 신앙은 보장이 있어요. 주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주님을 바라보고 자신을 던지는 용기 그게 믿음인데 그렇게 살 때 우리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보다 주님을 보는 훈련을 해야 돼요. 필립이 주님이 옆에 계셔. 주님은 계획을 다 갖고 계셔.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필립은 몰랐겠죠. 그래가지고 말씀하시니까 상황을 본 거야.
현실을 보니까 이건 불가능해. 그 많은 땅을 빵을 어디서 사 다 꼬방일 텐데 뭐 한두 개 있을 텐데 어디 가서 사 와요?
그러니까 불가능한 얘기예요. 그래서 불가능하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만약에 주님의 계획을 알았다면 빌립이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을 거예요. 우리는 알잖아요. 현실은 그럴지라도 그 전능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믿고 주님을 바라봐야 됩니다. 문제보다 주님을 바라봐야 돼요. 문제를 크게 보기보다 주님을 크게 보는 훈련을 해야 돼요.
그러면 문제가 작게 보이고 또 주님이 역사하십니다. 주님은 주님께 이런 표현을 해서 참 죄송하지만 주님은 약간 그 고약한 부분이 있으셔요. 그냥 야 내가 이거 할 테니까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하면 얼마나 마음이 편해 그런데 계획을 다 갖고 계신데 꼭 시험하신다 이거.
근데 그 예수님이 그러신 분인 걸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서 뭘 할 때도 저도 이렇게 교회 개척을 하고 지금까지 쭉 사역을 하면서 주님께서 다 이렇게 계획을 해놓으신 걸 보여주시고 환상으로 환상을 잠에서라도 꿈에서라도 보여주시고 기도하면 막 환상을 보여주셔가지고 다 펼쳐질 벌어질 일들을 다 해 주시고 하라고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래가지고 어떨 때는 막 교회가 어렵고 뭐 이런 거 있을 때 막 눈을 감고 하나님 뭘 좀 보여라도 주세요. 뭐라도 한 말씀해 주세요. 막 안 보이는 거예요. 환상이라도 보여주시면 그래도 안심을 하겠는데 그래가지고 뭐라도 볼까 그래가지고 막 눈에다 힘을 주고 기도하면서 뭐라도 보여라 안 보여 아무 말씀도 안 하셔요. 꼭 주님은 우리를 벼랑 끝에 세우셔 그다음에 징검다리를 뭐 하나라도 보여주시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뛰어내리라고 그래 나를 믿고 뛰어내려라. 그때가 인생의 위기입니다. 모험입니다. 그때 내가 그 낭떠러지를 보면 못 뛰어내려요.
근데 나를 부르시는 나를 부르신 그 주님을 바라보면 발을 내딛을 수 있어요. 근데 놀라운 것은 내딛는 순간 주님이 준비하신 징검다리가 있어요. 그러면 그다음에는 또 또 보여주시냐 안 보여주셔 또 그렇게 하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두 번 세 번 네 번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하면서 용기가 커지고 때로는 통도 커져 여러분 크리스천은 통이 커져야 됩니다. 찌질하면 안 됩니다. 통이 커지려면 이런 경험을 많이 하다 보면 통이 커져요. 주님이 하실 건데 말만이 아니라 그게 믿어져야 돼요. 그리고 두려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빌립은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보통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그 정도 가지고는 주님의 사도가 되기는 어려워요. 앞으로 감당해야 될 일과 그리고 그 앞에 벌어질 일들이 그 정도 가지고는 감당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주님이 흔들어 놓으시고 지금부터 그의 통을 키워나가시는 거예요.
오비영리어를 보여주시고 봐라. 너는 절대 안 된다고 했지만 순식간에 그 일이 해결되지 않냐 우리가 산호라면 우리의 이성과 합리적인 생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반드시 만나요. 그때 우리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때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아 주님이 일하실 시간이 왔구나. 아 믿음의 시간이구나.
그때 이제 우리의 믿음이 발휘되는 거예요. 주님을 믿고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주님이 일하기 시작하죠. 19세기 영국의 최고의 설교자였던 스폴전 찰스 스폴전 한 시대를 이끌어갔던 분이에요. 한 세기를 그가 활동했던 영국은 빅토리아 영광의 시기였고 신앙과 이성이 충돌하는 시기였어요. 복음과 문어가 충돌하는 그런 시기였어 계몽주의의 그런 합리적이고 또는 무신론적 사상이 지배하는 그런 시기였어요.
스폴 전 목사님의 목회가 잘 돼가지고 교회가 더 바나클 교회가 작아가지고 사람이 못 들어와요. 그래서 기록에 의하면 너무 많이 와가지고 그만 막 군중이 끝나고 이렇게 나가면서 한 번 넘어지기 시작해가지고 사람 몇 사람이 죽었어요. 깔려가지고 그럴 정도로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서 하루는 스퍼 전 목사님이 그 교회 임원들에게 영국 런던에서 그 교회를 다니는 그 당시 최고의 지성인들이에요.
그런 이제 장로님들이죠. 그분들에게 교회를 확장해야 되겠다. 건축을 좀 해야 되겠다라고 제안을 했더니 이분들은 대개가 필립입니다. 갑자기 이제 필립이 작동을 해가지고 이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장로님들이죠. 극구 반대를 하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우리가 선교도 하고 전 세계에 이런 일들을 하고 교인들은 많이 오지만 헌금하는 사람도 적고 이 재정 가지고는 도무지 건축을 못합니다.
목사님도 알아요. 그런 상황을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시도합시다 이렇게 한 건데 안 된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때 스펄전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아 그렇군요. 참 감사한 일이네요. 우리 교회 형편에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니 감사하네요.
이제부터 주님이 일하실 시간이 되었네요. 그리고 그 일을 진행하게 되었어요.
여러분 우리가 그런 상황을 만날 때 계산을 때리지 말고 스폴전처럼 생각해야 됩니다. 이제 내가 할 수 없는 시간이라면 믿음의 시간이구나 주님이 일하실 시간이구나.
아멘 그러면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면 그때부터 오병이어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대화가 지나간 다음에 안드레가 어디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를 찾아가지고 왔어요. 안드레가 왜 하필이면 엔드레가 가져왔을까?
빌립은 그냥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하고 그러는 동안 안드레는 가가지고 어쨌든 수소문을 해가지고 가져왔는데 아마 안드레는 베세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느닷없이 가가지고 야 너 먹는 것 좀 내놔 그러면 난리가 났을 거예요.
애들이. 근데 이제 그 동네 아저씨니까 가가지고 애들 보고 이제 낯도 익혀놨던 애들하고 아마 얘기하면서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받아왔지 않았을까 애도 배고프니까 그걸 쉽게 내놨겠어요. 그래서 암드레가 그걸 가져왔더니 성인만 5천 명을 먹이고 12 광주리가 넘는 또 남았어요.
이게 그런 기적을 일으켜 이게 얼마나 놀라웠던지 사복음서가 다 기록을 합니다. 그리고 이게 얼마나 놀라웠던지 거기 모인 사람들이 이 사람이 메시아구나 오리라고 구약에 예언했던 그 예언자구나. 그리고 강제로 잡아가지고 왕을 삼으려고 했다는 거예요. 메시아라는 것은 왕이라는 뜻입니다. 왕 삼으려고 한 거예요. 그만큼 엄청난 일을 일으키셨어요. 여러분 믿음은 논리와 합리성을 포기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야 돼요. 그냥 믿음이 있다고 그래가지고 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저버리고 살면 약간 이상해 보여요. 나는 같은 크리스천이라도 막 그런 사람 만나면 매사가 그런 사람을 만나면 약간 좀 이상해 세상 사람들은 야 저거 좀 좀 이상하다 그런 용어가 있잖아요. 그렇게 생각한다고 크리스천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어야 돼요.
그러나 바로 이런 순간이 있어요. 오병이어의 기적을 앞에 뒀을 때 우리의 힘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데 반드시 어떤 일을 해야 되는 순간이 와요. 그때 그 논리와 합리성을 초월하는 믿음이 내 속에서 작동해야 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일지라도 주님을 믿고 순종하면 주님이 역사를 일으키신다라는 사실을 믿고 그때 믿음으로 나가야 하는 거예요.
빌립은 결국 사도가 되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됐다는 거죠. 그렇다고 빌립이 하루아침에 변한 건 아닐 거예요. 이게 사람 변하기가 어려워 그리고 이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 잘 안 변합니다.
약간 그거 덜한 사람들이 확 변할 때 확 확 뒤집어지는데 이게 많이 배운 사람들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거거든요. 내 얘기가 맞아 탁탁 맞아떨어지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빨리 변하지 않아요.
빌립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기적을 보고 가르침을 받고 수없이 훈련을 받았지만 순간순간 그게 이제 그게 작동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8절 9절에 보면 빌립이 이렇게 주님께 묻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자꾸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다고 하나님과 내가 뭐 하나라고 하고 자꾸 그러니까 그 아버지도 보내달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내가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게 마지막 순간까지도 빌립은 아직 이게 논리가 안 맞춰지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 자기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면 그럼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인가 뭐 이거 관계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막 계산을 하는 거예요. 그중에 어떤 제자는 그냥 믿었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하니까 무조건 믿어야지 아마 베드로가 그랬을지 몰라요.
그런데 빌립은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지금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께 묻습니다. 아버지 좀 보여주세요. 이런 빌립도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성령 강림 후에는 온전히 변화되어 믿음의 사람이 되었어요. 천천히 변하지만 결국은 변하게 돼 있어요. 주님과 계속 동행하면 변합니다.
그는 결국 위대한 사도가 되어 소아시아 히에라폴리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에서 여신을 섬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순교를 당합니다. 역사가 요셉 비오스에 의하면 이 빌립도 내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그냥 죽을 수 없다 해서 거꾸로 매달려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빌립처럼 우리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이지만 때로는 그 한계를 뛰어넘어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시고 그리고 그 믿음의 역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