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여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단검』, 『설산 국경』을 펴냈던 우대식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베두인의 물방울』이 [시인수첩 시인선] 50번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21년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으로 출간 전부터 문단과 독자의 많은 주목을 받아 왔다. 『베두인의 물방울』은 크게 두 갈래의 지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낭만적 태도를 가장한 허무에 대한 탐구가 여전히 이 시집의 주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이 허무는 더러 신(神)의 자리를 대치하며 존재의 심연을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실적 의미에서 시란 패배의 운명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전혀 교환될 수 없는 자리로 이동해가는 것이 시 쓰기의 방법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이런 낭만성으로부터 벗어나 현장의 도구로서 시의 쓰임에 관한 인식으로 몇 편의 시에 배어 있다. 이것은 앞으로 시인의 시적 과제이기도 하다.
목차
1부
시(詩) 15
꽃의 북쪽 16
정선을 떠나며 18
정선 아라리, 당신 20
유배(流配) 22
백 년 만의 사랑 24
일생 26
내 안의 겨울 삼동(三冬)을 찾아서 27
뿔을 잃다 28
발광의 주파수 29
윤리학 30
장진주(將進酒) 31
이순(耳順) 32
도망 33
묘비명에 대한 답신 34
2부
묘족 마을에서 39
허무의 주루(酒樓) 40
태백행 42
가을 소리 내력 44
잃어버린 날개를 찾아서 46
어린 순례자 47
아나키스트의 고백 48
며칠 50
마지막 명 52
봄날은 간다 54
아내와 맨발 56
봄 편지에 대한 답신 58
누씨(樓氏)여자고보 생각 60
목숨 61
소풍 62
3부
가을비 65
가을비의 그대들 66
잔상(殘像) 67
산역(山役) 4 68
생각의 생각 69
탁(託), 제이월당기(第二月堂記) 70
신[靴]에게 고함 71
꿈의 잔도(棧道) 72
타악(打樂)의 슬픔 74
해안가 당구 클럽 76
가을날의 빨래 78
1등을 하다 80
이방인 82
얌전한 사람 84
안개는 힘이 세다 85
4부
헐렁한 사랑 89
바빌론 강가의 아침 92
천국의 나날 94
마리아를 위한 변명-시론 96
원주 성당 98
안빈낙도를 폐하며 100
자연(自然)은 그렇다 102
남자의 일생 103
불면의 쾌락 104
소름 106
닻 108
잔(盞) 110
당신과의 거리 111
겨울날의 모든 저녁은 슬프다 112
해설 - 이숭원(문학평론가)
“동결凍結의 북쪽에서 유여有餘한 봄빛으로”
책 속으로
내 안에도 삼동三冬이 있어 펑펑 눈이 쏟아지는 진부 골짜기에서 다시 나를 만났을 때 붉게 언 손도 못 내민 채 쓸쓸히 쳐다보기만 하였다. 겨울을 찾아 헤매던 어느 여름날 나는 임계 장터의 각다귀이거나 봉평 냇가 여울목 쏘가리이기도 하였다. 차디찬 겨울은 눈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고 아무르 강까지 찾아간 발걸음은 허탕이었다. 하루 종일 멱에 지친 등짝 까만 아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나의 무지는 병이 되었다. 모든 것을 잊어버렸을 즈음 허파 속에서 강력한 눈보라가 일어나 허름한 방에 나를 눕혔다. 가물거리는 백열등 아래 차디찬 방바닥에 몸을 묻으면 하나의 환영幻影이 다가오다 사라지곤 하였다. 내 안의 겨울, 삼동三冬은 반갑지도 슬프지도 않은 사내의 형상으로 진부 골짜기 허름한 방에 불쑥 들어와 한참을 바라보다 눈보라와 함께 사라졌다. 이미 멀리 겨울까지 도달한 내 몸을 느낄 수 있었다. 봄으로 가는 모든 회로를 끊은 채 하늘 높이 눈이 쌓여가는 삼동三冬 아래 잠들 것이다.
--- 「내 안의 겨울 삼동(三冬)을 찾아서」 증에서
개구리도 겨울잠에 들고
싸락눈이 내리는 밤
마쓰오 바쇼,
이런 날은 늘 바람이 창호 문을 두드렸지
화로에 술을 데우도록 하지
낡은 신발은 방안 머리맡에 놓아두도록 하지
왜 마음이란
천리만리 달아나는 것인지
조금은 뜨거운 술을 천천히 내장에 붓고
매화나 동백 같은 꽃을 기다리기로 하지
아니면
꽃의 북쪽으로 달아날까
신음처럼 그대가 내게 물을 때
절망의 심줄을 활시위처럼 당겨
심장 가장 먼 뒤쪽으로 모든 생각을 모으곤 하지
마쓰오 바쇼,
조금 추워도 되겠지
유여한 봄빛이 마루 구석 쌀통에 넘칠 즈음이면
안개와 연기는 강줄기를 따라 무진무진 흐르겠지
그대와 나도
이쯤에서 안녕이지
연기를 좋아하는 나와 안개를 좋아하는 당신
바람이 올 때까지만 지상에 기대기로 하지
이쯤에서 안녕이지
--- 「꽃의 북쪽」 증에서
오늘날에도 유배라는 것이 있어
어느 먼 섬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형벌을 받았으면 좋겠네
컴퓨터도 없고 핸드폰도 빼앗겨
누구에겐가 온 편지를 읽고 또 읽고
지난 신문 한 쪼가리도 아껴 읽으며
탱자나무 울타리 속에 웅크리고 앉아 먼바다의 불빛을 오래 바라보고 싶네
마른반찬을 보내 달라고 집에 편지를 쓰고
살뜰한 마음으로 아이들의 교육을 걱정하며
기약 없는 사랑에 대해 논論을 쓰겠네
서슬 위에 발을 대고 살면서
이 먼 위리와 안치에 대해 슬픈 변명을 쓰겠네
마음을 주저앉히고
서로 다른 신념을 지켜보는 갸륵함을 염원하다 보면
염전의 새벽에 어둑한 불이 들어오겠네
바닷가의 수척한 노동과 버려진 자의 곤고함을 배우다
문득 얼굴에 새겨진 주홍글씨를 물속에서 발견하면
삼박 사일을 목 놓아 울겠네
며칠 말미를 낸 그대가 온다면
밥을 끓이고 대나무 낚시를 하며 서로의 글을 핥고 빨겠네
글이란 무섭고도 간절하여 가시나무를 뚫고
천둥처럼 울릴 것이라 믿고
그대의 글을 읽다가
온통 피로 멍울진 내 혓바닥을 보겠네
유배의 길에 떨어져 흩어진 몸을 살뜰히 아껴보겠네
--- 「유배流配」 중에서
출판사 리뷰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자본주의와 이 시대에 당신과 나의 당파성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 한다. 또한 한없는 이기주의의 출처에 대해서 또 사라진 신의 비겁함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 한다. 형상화되지 않는 것은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 우대식 시인의 개인적 예술론이기도 하다. 시적 형상화가 되지 않는 작품은 대개 버리고 만다. 따라서 독자가 읽으며 의미망을 구성하거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불가능한 작품은 거의 없는 편이다. 시집의 많은 시편들은 의식의 불안에 관한 내용들이다. 불안의 힘으로 이 세계와 싸울 수는 없나 고민한 결과물들이다. 불안의 힘줄이 올곧게 박힌 시, 정서가 아니라 관념의 시편들이 시집의 주요 내용이다. 시를 이렇게 뒤집고 나면 다시 불안해진다. 불안이 시를 낳지만 시는 다시 불안으로 나를 몰아간다.
여기 천지간을 떠도는 외로운 영혼이 있다. 매서운 바람에 살을 맞대고 서슬 옆에 발을 모은 채 그나마 수렁에 빠지는 춘사椿事는 피하기 위해 잠시 개울가에 몸을 앉힌 쓰라린 유랑자가 있다. 지나온 삶의 내력은 양의 내장처럼 굽이치는데, 나아갈 길은 안개에 싸여 한 발 앞도 보이지 않는다. 오라는 곳은 없으나 먹이를 찾는 표범처럼 어디론가 가야 할 슬픈 운명을 짊어진 존재다.
시인이 여러 편의 시에 고백했듯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가 혼자 아들을 돌봤으며, 몸에 병이 나면 보건소 신세를 졌고 속이 비어 머리가 어지러우면 맹물로 배를 채웠다. 시는 그런 아픔의 틈을 뚫고 솟아나 그에게 다가왔다. 가난과 슬픔에서 벗어나려면 장쾌한 그 무엇에 매달려야 옳을 터인데 어찌하여 세상에 쓰이지 못할 시라는 물건을 택하게 되었는가. 마당에 날리는 재와 같고 바람에 떠도는 밀짚모자 같은 무용지물의 존재, 폭풍이 다가오는데 풀이나 뜯어먹는 비루먹은 개의 형상이 시가 아니던가? 도대체 시가 무엇이기에 그는 시에 매달리게 된 것인가? 시는 빈혈의 어지러움 속에 그를 지탱하던 파란 정맥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현기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먹을 힘껏 모았다 펴면” 가늘게 살아나던 파란 정맥이 그를 일으킨 힘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그렇게 그가 붙잡을 수 있고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안간힘의 단서가 시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이번 시집의 한 작품에도 유사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묘족 마을에서」에 나오는 소녀의 여린 손에 비친 “파아란 힘줄”의 이미지다. 중국 요령성 지역을 여행하다가 묘족 어린아이가 국수를 먹는 모습을 보았다. 조그마한 왼손으로 국수 그릇을 받치고 그릇에 입을 대고 오른손으로 국수를 떠 넣을 때 그릇을 받친 왼손에 가늘고 파란 힘줄이 돋아난 것을 본 것이다. 이 장면을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고 잠재되어 있다가 예기치 않게 드러난 생명의 양태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잠재된 생명의 저력이 시라고 생각한다. 표면적으로는 바람에 날리는 재 같고 밀짚모자 같지만, 어느 순간 현기증으로 쓰러지는 그를 지탱케 했던 가는 정맥의 힘, 그것이 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그러나 한 번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어머니의 모습이자 왜소한 몸으로 밥을 지어 도시락을 싸 주던 아버지의 형상에 연결된다. 평생 적수공권으로 비루하게 천지를 떠돌아도 결코 잊을 수 없고 놓칠 수 없는 생명의 끈이요 저력이 시인 것이다.
자못 처절 비감했던 세 번째 시집 『설산 국경』의 어조는 8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적지 않게 가라앉아 안정을 찾았다. 시의 문맥을 빌려 말하면 귀가 순해지는 이순耳順의 날에 가까워 오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번 시집 첫머리에도 「시詩」가 놓였는데, 그 시를 보면 앞의 「시詩」와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음악 아닌 것으로 음악하기
나인 것을 나 아닌 척하기
가을날 듣는 만가輓歌
겨울날 곁불을 옆에 두고 옹송거리며 마시는 낮술
사람은 거리를 두고 그림자 사랑하기
집 떠난 모든 이들의 이름을 불러보기
그리워하다가 다시는 생각하지 않기
집 떠난 모든 이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기
악다구니로 떼쓰며 울다가 아무 보는 이 없을 때는
슬그머니 일어나 옷 털기
꾀죄죄한 민낯으로 설산雪山에 대적하기
눈이 멀어도 먼 것을 모르고 형형색색 달콤하게 이야기하기
신을 실컷 조롱하다가 그 발아래 한없이 통곡하기
영원한 것이 있나요
이런 물음으로 모든 것을 탕진한 나그네처럼
우물가에 오래 앉아 있기
아주 오래도록 허공을 응시하다가 저 푸른 한 점으로
쑥 들어가기
「시詩」 전문
일독만 해도 앞의 처절하던 기운이 처연한 수준으로 정리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마음의 평정에 도달하려는 긍정의 시선이 여러 곳에 모습을 드러낸다. 만가輓歌에 몸을 떨지 않고 그냥 들을 뿐이고 그래도 곁불을 피워 놓고 낮술을 마신다고 했다. 처절한 유랑과 스산한 고립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람과 거리를 두지만 그의 그림자를 사랑한다고 했다. 사람과 거리를 두는 고립의 자세를 취하기는 하지만 그의 그림자를 사랑한다고 했으니 소통의 가능성은 열어 놓은 것이다.
이 변화의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죽어도 잊지는 않으리”라는 심경, 그의 심정적 뿌리에 대한 확인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우리는 ‘땅 위의 진창’(「시인의 말」)에서 삶의 체험이 누적된 잔상, 자취, 흔적의 힘으로 살아간다. 그 잔상, 자취, 흔적이 시 창조의 동력이 되고 폭풍을 이기는 저력이 된다. 김수영은 「사랑의 변주곡」에서 말했다.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인간의 신념이나 거대한 도시 같은 것들은 ‘개미’에 불과하다고. 우리의 삶은 잔상의 누적이요 족적의 어울림이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이 밑바닥의 힘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 천 리 만 리를 걸어간다. 글과 소리의 울림인 시가 그 잔상들을 계속 불러낼 것이다. 시인 우대식도 이 잔상의 힘에 기대어 아프고 처연한 시 59편을 썼다. 그 족적이 힘이 되어 우리가 또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숭원 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시인의 말
오랫동안 신(神)에 대해 생각했다
당신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 육신으로 빚을 갚았으니
남은 생은
땅 위에서 살겠다
진창에서 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