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말씀일기 본문은 잠언 14장 후반부입니다.
19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한 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리느니라
20 가난한 자는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21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22 악을 도모하는 자는 잘못 가는 것이 아니냐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
23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
24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이시지만
스스로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 오신 예수님은 낮아지신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만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역사 속에서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면
마지막 날에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가난한 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참으로 가난하고 지극히 작은 자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난함이란 절대적으로 가난한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는 상태가 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적이 없으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참으로 가난한 모습입니다.
이렇게 가난해지심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부요하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그의 가난함으로 인하여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심으로 우리는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부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가난한 자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면 우리는 도망갈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항상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런데도 도망가지 않는 자가 나온다면 그 사람이 택함을 받은 자입니다.
바울사도가 겉으로 보기에 어떤 모습으로 고린도에 갔습니까?
환난, 궁핍, 고난, 매 맞음, 갇힘, 난동, 수고로움, 자지 못함, 먹지 못함, 악한 이름, 속이는 자 같음,
무명한 자, 죽은 자, 징계를 받는 자, 근심하는 자, 가난한 자, 아무 것도 없는 자,
이런 모습으로 복음 전하는 바울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와서 ‘보암직한 내용’을 전하자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렇게 가난한 모습으로 증거 되어야 마땅합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로 증거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누가 정말 택함을 받은 자인지’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엇이 부요한 것인지 무엇이 가난한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에 부요하지 못하면 ‘세상의 썩어질 부요’를 찾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에 부요하기를 원합니까?
육체를 따라 세상의 썩어질 것에 부요함을 구하는 자라면
아직 복음이 들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가난한 사람이라면 세상의 경제적인 가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의가 더러운 누더기와 같은 자임을 아는 자’가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에서 아주 부요한 자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 자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세상적인 그 어떤 조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이력이나 가문이나 부함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세상의 윤리 도덕적인 것으로 치장한 것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는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부요함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의 부요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우리가 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적으로 부하려고 하면 여러 가지 시험과 올무에 빠집니다.
결국은 파멸과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릅니다.
이렇게 명백한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을 잘 섬기면 세상의 부자가 된다’고 하는 자들은 미혹하는 자들입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며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참된 생명을 취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부함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벌거벗겨져 죽은 그 십자가의 죽음은
겉으로 보기에 가장 가난하고 가장 저주받아 죽는 죽음인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의 다 이루심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그 영광과
하늘에 신령한 복을 믿고, 받고, 채워지는 자들이 참으로 부요한 자들입니다.
오늘도 가난하게 오셔서
저주받아 죽으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신
그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부요한 자’의 삶을 잘 감당하며 살아가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아멘!!!